5. 1학년 0반 (1)
게임에는 흔히 그 게임의 간판과 같은 존재, 타이틀 히어로와 타이틀 히로인이 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만 세 자리 수인 군상극 게임 플마고에도 타이틀 캐릭터가 존재했다.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
타이틀 히로인 안다인.
각각 쌍검과 장총을 든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구도의 포스터가 플마고 포스터 중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졌었다.
그 둘은 전형적인 먼치킨 주인공들이었다.
두 천재는 대한민국의 최고 입결,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은광고 입시전형에서 서류, 필기, 실기 세 파트 모두 만점을 맞은 괴물이었다.
그들은 입학식에서 신입생 대표를 공동으로 맡게 되며 처음으로 만난 그들은 상호 간 절차탁마하며 선의의 성적 경쟁을 이어 갔다.
첫눈에 반한 둘은 상대방을 호적수로 여기면서도 서로 공감하며 점점 더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절망적인 시나리오 속에서 마음을 키울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최종장의 후반부.
모든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죽고 남은 건 주수혁, 안다인, 백호군 셋뿐이었다.
최후의 결전을 앞둔 전날.
주수혁은 안다인에게 고백하려 한다.
[죽으러 가는 거니? 이상한 클리셰 만들려고 하지 마!]
안다인은 철벽을 친다.
그리고 덧붙인다.
[내가 고백할 때까지 절대 먼저 말하지 마.]
둘은 더 이상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결의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자고.
그러나 주수혁은 안다인을 보호하다 죽고, 살아남은 그녀도 적을 쓰러뜨리지만 치명상을 입는다.
광림이 해제된 안다인은 저 멀리 에너미의 사체들에 섞여 쓰러져 있는 주수혁에게 고한다.
[수혁아······ 좋아해. 처음 입학식에서······ 옆에 섰을 때부터 계속······ 좋아했어, 좋아해······.]
안다인은 최후의 기력을 짜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고백을 이어 갔다.
당연히 주수혁의 답변은 없었고, 안다인은 죽는다.
뒤늦게 합류한 백호군이 이미 숨을 거둔 둘을 바라보는 게 두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
두 명의 주인공 주수혁과 안다인은 입학식에서 1학년 대표로 서 있다.
“선서. 은광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등학교의 입학을 허가받은 저희 신입생 일동은 재학 중 학업과 역량 발달에 힘쓰고 학교의 교풍과 교칙을 존중하며 생활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신입생 대표 주수혁.”
“신입생 대표 안다인.”
두 천재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박력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낭독한 신입생 입학 선서문은 아름다운 울림을 남기며 스피커로 퍼져 나갔다.
고작 신입생 선서였을 뿐인데 아주 짧은 오페라를 본 기분이었다.
‘둘은 첫눈에 반했다고 하는데, 겉으로 봐선 전혀 모르겠다.’
선서를 마치고 서로를 잠시 바라본 두 사람의 눈빛에는 숙적을 눈앞에 둔 경계심, 긴장감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험악한 분위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성전을 앞둔 기사가 두를 법한 고고한 공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학교 강당이라기보단 거대 연회 홀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법한 은광고 중앙대강당인 상인관(上寅館).
이곳을 메운 은광고 소속 고교생과 교원들 2천여 명.
2층 좌석의 방문객 수백 명.
모두가 이 두 사람이 감고 있는 매력과 기백에 술렁였다.
“주수혁하고 안다인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 같다.”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
“그거 안 좋은 의미 아니냐? 천재의 대결은 맞는 듯.”
“나도 중학생 땐 공부 잘한다는 소리 들었는데······ 쟤들은 진짜다.”
“은광고에서 중학교 시절 공부 못했던 애들 없어. 쪽팔리니까 중학교 시절 얘기는 하지 마.”
“신입생 중엔 ‘무명의 초신성’도 있지 않나? 올해 1학년 쩐다.”
대한민국 200만 고등학생의 정점.
전국의 천재와 수재가 모인 은광고.
그 은광고에서도 가장 위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한 관심은 굉장했다.
‘내 얘기가 나오긴 하네.’
은광고 내에선 입학시험 당시 13조였던 네 명의 이름이 다 퍼져서 내 이름과 이명은 전교생이 아는 듯했다.
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들에게 존재감이 묻혀 버렸지만.
‘그래도 안 분하다.’
오히려 그 게임 속 주인공들을 눈앞에서 봤다는 사실에 설렌 나는 답이 없는 게임 폐인인 것 같다.
선서를 마치고 주수혁과 안다인은 각각 다른 쪽 방향의 계단을 이용해 강단 아래로 내려갔다.
둘은 한 번도 서로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이동해 버렸다.
그 이후로는 교원 소개가 이어졌지만 입학식장에 있는 사람들은 방금 두 천재가 남긴 여운에 젖어 있는 탓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 반 애들이나 찾아봐야지.’
나도 교원 소개는 대충 흘려듣고 0반 애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게임에서 봤던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입학식은 자율 참가인 데다 1학년 신입생은 반 구분 없이 선착순으로 앞자리부터 줄을 섰기 때문에 누가 몇 반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지금 주변에 있는 1학년들은 전부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있어도 못 알아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게임은 주수혁과 안다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교사나 학교 외부 세력으로 시점이 바뀌어 진행되기도 했지만 보통 메인 스토리를 이끌고 가는 건 두 주인공이었다.
게임 속에서 제로 클래스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이 둘이 접촉하면서부터였다.
‘미리 예습은 해 뒀는데 ‘게임 라이브러리’에 제로 클래스 소속 전원이 실려 있지는 않았다······ 반 전체 인원수만큼은 나와 있지 않았어.’
작년 12월, 초상우주와 교신한 후 내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는 레벨 1에서 2로 올랐다.
그 결과 해방된 메뉴가 ‘게임 라이브러리’였다.
3일을 기절한 대가는 게임 설정집이었다.
‘종이책으로 팔아먹고 게임에서 또 팔아먹는다고 욕했었는데.’
게임 라이브러리는 과금으로 해방된다.
물론 나는 플마고 호구에 폐인이었기 때문에 과금 했었다.
지르고 후회는 하지 않았지만 내 호구력에 자책도 했었다.
‘이 정도의 폐인이었으니까 초상우주도 나를 여기에 부른 거겠지만.’
결국 1학년 0반 소속 학생은 한 명도 발견하지 못한 채 입학식이 끝났다.
‘어차피 교실에서 만나겠지.’
나는 입학식장을 뒤로했다.
* * *
은광고등학교의 학교 부지는 약 50만 평이다.
오전은 소속한 반에서 수업을 듣지만 오후에는 자율적으로 수업을 선택하는 은광고의 학생들에겐 교내 이동 수단은 필수였다.
은광고는 자전거와 에어보드를 학생에게 무상 제공하고 에어셔틀과 지상버스도 주기적으로 운영했다.
에어보드는 원하는 건물을 지정하면 자동으로 이동하는 교통수단으로 대다수의 학생들이 애용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공중 추돌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공중 교통법에 의거해 에어보드의 수동 운전은 불가능했다.
수동 조작이 가능한 자가용 공중 이동 수단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획득 가능한 면허를 필요로 했다.
거기에 면허가 있더라도 사유지 내에서 정해진 고도 이하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이 가능했다.
‘이거 실제로 타 보고 싶었는데.’
나는 에어보드의 손잡이를 잡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홀로그램으로 뜬 지도에 1학년 0반 교실이 위치한 건물을 택하자 자동 주행 시스템이 삣, 하고 다른 에어보드나 에어셔틀과 엇갈리도록 고도와 항로를 조정했다.
‘진짜 게임CG같다.’
새파란 하늘.
하늘을 가로지르는 에어보드와 에어셔틀.
그 아래에 펼쳐진 건물들.
전부 게임CG같이 멋지고 아름다웠다.
‘게임CG같다’는 게이머가 멋진 풍경에 날리는 최고의 찬사다.
‘위에서 보니까 건물들이 더 멋있어 보인다.’
입학식을 치른 중앙 대강당 상인관을 중심으로 학생회관, 선도부 회관, 총동아리 회관, 동창회관 등의 전교생과 교원들의 공동 시설이 몰려 있는 중앙 구역이 점점 작아졌다.
그 대신 정문 앞에 서 있는 새하얀 시계탑도, 정문부터 시작해 학교 부지 전체를 감싸는 은광고 보호 결계도 전부 한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디자인들의 건물들과 조형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마치 거대한 보석함 안에 여러 종류의 보석을 장식해 둔 것처럼 반짝였다.
‘은휘관(銀輝館)······!’
중앙 구역을 벗어나 1학년 구역으로 이동하던 중에 저 멀리서 은광고의 심장인 본관 은휘관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황명호 이사장과 면담하기 위해 한번 방문했었으니, 감회가 떨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은휘관은 은광고 건물 중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황호는 어째서 은휘관이 피에 더럽혀지게 내버려 둔 걸까.
‘은휘관은 황호가 직접 디자인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공들여 지은 건물도 질리면 부서지든 더럽혀지든 상관없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에어보드는 점점 은휘관에서 멀어졌다.
* * *
은광고는 에어보드 외에도 웨어러블 디바이스 이어링 타입을 제공했다.
스마트 기기가 없거나 구형인 기기를 가진 학생들에게 통지문을 날리거나 디바이스를 이용한 수업을 진행할 때 여러 애로 사항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어링을 지급받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사전에 구입했다.
‘GPS기록이나 메시지 착신이력이 학교 측에 의해 열람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조심해야 돼.’
정보 보호법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디바이스 이력 열람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학교가 제공하는 이어링을 받을 때 사인한 약관에는 ‘비상 시’에는 여러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 비상시라는 건 사월세음을 환몽 경매에 팔아먹은 교사 같은 놈에겐 ‘내가 원하는 때’로 해석되기도 한다.
‘내 기준의 비상 시가 오면 학교에서 준 이어링부터 버린다.’
한쪽 귀에는 내가 산 이어링을, 반대쪽 귀에는 학교에서 지급한 이어링을 착용했다.
살구색의 커널형 이어링을 귓속에 밀어 넣자 외견상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어링 착용을 마친 나는 에어보드를 소형화해서 아이템창에 넣고 1학년 0반 교실로 향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의 반은 1학년 2반이고, 타이틀 히로인 안다인의 반은 1학년 1반이었다.
성적이 높은 학생을 분리해서 특별반을 구성하는 2학년, 3학년과 달리 신입생은 1반부터 10반까지 반평균이 비슷하도록 구성한다.
성적이 동일한 주수혁, 안다인 중 누가 1반에 들어갈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여 결국 양자의 협의 결과 가나다순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 결과 안다인이 1반, 주수혁이 2반이 되었다.
‘저기 사람들이 몰려 있는 걸 보니 한 덩어리는 1반, 한 덩어리는 2반이겠네.’
두 명의 주인공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1학년생들이 몰려 있을 테니까.
0반 교실은 1반 바로 옆이니 저 무리를 뚫고 가면 0반이 보일 거다.
인파를 헤치고 나가자 예상대로 0반 교실이 보였다.
* * *
1학년 0반 교실.
내가 좀 늦은 편인지 앉자마자 1학년 0반의 담임을 맡은 교사가 들어왔다.
교사는 교실을 둘러보다 전자 칠판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전자 분필로 썼다.
‘함근형’
그는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인 학생부장 함근형이었다.
자율적인 교풍의 은광고에서는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예의를 따지는 교사에게는 학생부, 생활지도부를 총괄하는 학생부장직이 돌아오지 않았다.
함근형은 융통성이 있었고 고교생의 생리를 잘 이해하며 돌발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숙지하고 있었다.
게임 내에서도 곰의 탈을 쓴 여우같은 타입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1년간 이 반의 담임을 맡게 된 함근형이다. 올해 학생부장을 맡는 바람에 자리를 비울 때도 있을 것 같다.”
과거에는 학생주임, 학주라고 불리었던 학생부장.
일반적으로 고등학교에서 바쁜 부장직이 담임을 맡는 건 드문 일이다.
그러나 은광고에서는 ‘제로 클래스’의 특수성을 고려해 어느 정도 높은 권한이 있는 보직 교사가 맡는 것이 관례였다.
참고로 2학년 0반의 담임은 교무부장 제갈재걸이었고, 3학년의 0반의 담임은 연구부장이었다.
“부담임을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부담임은 아직 공석이다. 정해지는 대로 공지한다. 그런데······.”
함근형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너희 같은 애들은 처음 본다.”
함근형의 말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은광고에 매년 신입생이 500명 정도가 들어오는데 전부 구면일 리가 없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그건 나도 동감했다.
내가 경험한 초, 중, 고, 대 통틀어서 이런 경우는 처음 봤다.
“출석률이 반 토막을 넘어서 반의 반 토막이라니. 출석이 내신 반영 0%라지만.”
4명.
나를 포함한 1학년 0반의 등교생의 수였다.
1학년 0반의 총 인원수는 16명이다.
입학 첫날 출석률이 25%인 반은 이 반밖에 없을 거다.
“오늘은 반장, 부반장 정하고 해산한다. 급훈은 내가 정한다.”
1학년 0반의 급훈.
‘정시 등교’
굵은 궁서체의 글씨가 인쇄된 4절지 크기의 홀로그램 패널이 전자 칠판 위에 올라갔다.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지은 것 같은 급훈이었지만 함근형은 매우 진지했다.
“반장 할 사람 손 들어라.”
나 말고 학교에 온 사람은 세 명이었다.
둘은 여자, 하나는 남자였다.
‘일단 눈치를 볼까······.’
여학생 중 한 명은 플레이어블 캐릭터 김유리.
다른 한 명은 논 플레이어블 캐릭터 한이.
둘 다 게임 속에서 본 기억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남학생.
상대의 얼굴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사장?”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남학생이 휙, 하고 이쪽을 노려봤다.
‘아, 망했다.’
입학식 분위기에 휘말려 나도 모르게 들떠 긴장이 풀려 있었나 보다.
지금 내가 한 헛소리는 이 세계에 와서 둔 수 중 최악의 수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 자충수를 수습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안 났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답 없는 순환 논법과 혼란과 혼돈과 카오스가 몰아쳤다.
그때, 교실 스피커에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딩동댕동―.
―1학년 0반 조의신, 황지호 두 학생은 즉시 은휘관 이사장실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반복해서 알립니다. 1학년 0반 조의신, 황지호 두 학생은 즉시 은휘관 이사장실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이사장실 가 볼게요, 함근형 선생님.”
이사장 황명호······ 아니, 학생 황지호가 내 팔을 턱 붙잡더니 신속하게 교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내가 성인일 때보다 키도 몸무게도 줄었다고 하지만 마치 풍선이라도 쥐고 가는 듯한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교실 문이 닫히기 전.
함근형의 탄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첫날 출석률이 반의반의 반 토막.”
문이 닫히고 1학년 0반의 출석률은 25%에서 12 .5%로 내려갔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