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3화 (23/925)

7. 개천신화의 신성한 범 (2)

“학생회? 거기 일 개 많잖아. 왜 조의신을 넣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의신이는 농구에 관심 없어 보이는데, 장래에 도움이 되는 학생회가 낫지 않을까.”

“뭐래. 조의신이 농구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끼어들기 어렵다.

“오, 치유광풍 유상희 선배다!”

“TV에 몇 번 나오지 않았나? 상위 존재 아케아의 가호를 받았다고.”

“실물이 더 예쁘다.”

“유상훈 누나였나······ 소개해 달라고 할까······.”

“치유광풍, 치유하는 빛(光)의 바람. 진짜 잘 어울리네.”

아닌데.

유상희의 플레이어 이명은 치유광풍(治癒狂風)이다.

거기에 들어가는 광은 빛 광(光)이 아니라 미칠 광(狂)이다, 이 철없는 1학년 놈들아.

유상희가 1학년들의 철없는 소리를 들었나 보다.

그녀는 잘 정돈된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살짝 돌아보며 청초하게 웃어 줬다.

“와······!”

“오오오.”

“예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 광경을 본 유상훈은 초거수종 에너미가 습격해 오는 악몽이라도 본 양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좀. 그냥 가라.”

유상훈은 소름이 돋은 듯 팔을 문질렀다.

유상희는 반응하지 않고, 생긋 웃을 뿐이었지만 집에 가면 유상훈의 등짝에 스킬 레벨 3짜리 수도를 날릴 거다.

이 상황을 끝낸 건 수업종이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오늘 수업종 담당은 성악부였나 보다.

아침부터 Amazing Grace라니.

곡 선택 센스가 미묘하다.

무반주로 퍼지는 감미로운 소프라노가 교실의 공기를 바꿨다.

“그럼 생각해 봐. 언제든지 연락해. 의신아.”

“조의신, 다음에 보자.”

“네, 들어가세요. 유상희 선배님. 유상훈, 잘 가라.”

두 사람을 보내고, 조례가 끝났을 때였다.

함근형이 나를 불러냈다.

“선도부에 들어올 생각 있나.”

아직 아침인데 권유를 여러 개 받았다.

학생회의 추천 혹은 지원 후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학생회, 유상훈이 추천한 농구부에 이어 선도부까지 총 세 번째 권유다.

‘선도부에 들어가려면 교사의 추천이 필요했었지.’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함근형에게 좋은 인상을 줬나 보다.

‘입학시험 때 살아남아서? 이레나를 구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방윤섭 건?’

아니면 셋 다일까?

현재 1학년 중에 학생회와 선도부의 권유를 모두 받은 학생은 나와 주수혁, 안다인뿐일 거다.

“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생각해 봐도 될까요?”

예상치 못한 전개에는 시간을 버는 게 최고다.

“그래. 생각해 봐라.”

부활동 정식 가입 기간은 이번 주가 끝날 때까지다.

이후 추가 가입도 가능하지만, 절차가 복잡하다.

일주일 내로 내 거취를 정해야 할 거다.

*    *    *

오늘도 수업을 마치자마자 달려온 천익산 산책로.

솜뭉치는 찾지 못했지만 의외의 인물과 만나게 되었다.

무려 그 인물은 이 세계의 타이틀 히로인 안다인이었다.

‘안다인이다······!’

산책로를 질주하던 중,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소나무 가지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안다인은 옷에 묻은 솔잎을 툭툭 털어 내며 먼저 인사해 왔다.

“안녕······ 1학년 0반 조의신 맞지?”

솜뭉치 수색이 늦어지면 언젠가는 마주칠 거라고 예상했지만, 3월이 끝나기 전에 만날 줄은 몰랐다.

접점이 전혀 없는 안다인이 내게 말을 건 이유는 김유리 때문일 거다.

“김유리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둘이 소꿉친구라면서?”

“응!”

안다인은 그녀 뒤에 조금 이르게 핀 진달래꽃이 무색해질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안다인을 봤으면 주수혁은 또 크게 굴렀을 거다.

“나도 유리한테 네 얘기 들었어. 무명의 초신성이 0반에 있다고. 유리가 반장이고 네가 부반장이지?”

안다인은 정말로 김유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였다.

집안은 평범 이하였고 주변에는 플레이어라곤 한 명도 없었다.

대신 있는 인간이라곤 두 종류였다.

안다인의 미모와 재능을 시기해서 미쳐 날뛰는 이들.

그녀를 인간이 아니라 신처럼 숭배하는 이들.

두 집단은 안다인을 외롭게 만들었다.

‘김유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친구라고 부를 사람도 없었어.’

그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전학 온 김유리를 만나며 그녀의 세상은 달라졌다.

둘은 곧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두 사람의 우정은 중학생이 되고 함께 은광고를 올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혹시 유리한테 뭐 들은 거 없어?”

안다인은 김유리가 왜 0반으로 가겠다고 자청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김유리는 광림에 대한 공포와 그 이유를 죽을 때까지 숨겼으니까.

특히 안다인에게는.

“0반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왜 유리가 0반에 갔는지 몰라서······.”

게이머의 입장에선 그 이유를 알고 있지만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교실이 넓어서 좋다던데.”

“응?”

“우리 반은 스무 명도 안 되고, 등교하는 애들도 별로 없고.”

안다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원하는 답변을 해 주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챈 거다.

“1반 같은 게 무슨 상관이야. 너랑 김유리는 친구잖아.”

이 말에는 안다인의 어두웠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안다인이 진정한 걸 보고 나는 줄곧 궁금했던 걸 묻기로 했다.

“이 근처에서 강아지 본 적 있어?”

“강아지?”

“흰색 털을 가진 강아지인데······.”

“아, 전에 누가 강아지 산책시키는 거 봤어. 다리는 좀 불편해 보이던데 솜뭉치 같이 귀엽더라.”

뭐라고.

안다인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니, 어딘가에 다리를 저는 솜뭉치가 하나 더 있는 걸지도 모른다.

행복 회로가 타올랐다.

“내가 아는 강아지 같은데.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어?”

“훈련 중에 스치면서 본 거라 기억이 잘······ 남자였다는 거밖에.”

행복 회로의 가동이 종료되었다.

저 미소를 보니 확실했다.

안다인의 혼을 빼 놓을 만한 발을 저는 흰 강아지가 흔히 있을 리 없다.

솜뭉치는 벌써 누군가의 애완동물이 되었나 보다.

대체 왜? 왜 게임과 달라진 거지.

‘남자 주인······ 짐작도 안 가네.’

안다인은 견주에겐 조금도 관심도 주지 않았을 테니 주인의 정보를 캐내는 것도 어렵겠지.

안다인이 솜뭉치를 키우지 않는다면 위험에 처할 일은 없으니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솜뭉치 수색기는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천익산 등반에 재미가 붙어 가끔 달릴 것 같긴 하다.

*    *    *

거주 구역 1학년 기숙사 건물.

17층 공용 공간인 휴게실을 지나쳐 내 방으로 향할 때였다.

휴게실을 가득 채운 거대 스크린에 리얼 버라이어티 쇼를 켜 놓고 담소를 나누던 이들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의신아!”

지익회장인 성시완이었다.

“지금 바빠? 네 방에 잠깐 들렀다 가도 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기숙사 회장을 쫓아낼 만큼 급한 일은 없었다.

“네, 들어오세요.”

성시완은 테이블 위에 쌓여 있던 상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게 포장된 상자를 집어 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 가 볼게. 너희들도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라.”

“넵. 간식 잘 먹겠습니다!”

“시완이 형, 들어가세요.”

“선생님, 가죠.”

뭐, 선생님?

잘 보니 휴게실 한구석에 1학년 1반 담임 김신록이 있었다.

그는 코르크로 된 구식 게시판에 압정으로 종이 프린트를 고정하고 있었다.

아직도 홀로그램보다 종이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꽤 있으니 그걸 배려해 줬나 보다.

남은 압정들을 갈무리한 김신록은 성시완과 함께 내 기숙사방으로 따라왔다.

‘김신록도 나에게 용건이 있나 보네.’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성시완이 상자를 내밀었다.

“지익회 졸업생 형 누나들이 간식을 너무 많이 보내 주셔서 1학년 애들에게 나눠 주러 왔어. 특별히 의신이 너 주려고 챙겨 놓은 거야.”

한지로 곱게 포장된 상자에 붓글씨 같은 폰트로 ‘달토끼떡’이라는 상표가 인쇄되어 있었다.

진족 중 토족(兎族)이 운영하는 고급 떡 전문점에서 파는 종합 떡 선물 세트였다.

‘예약하는 데에만 한 달은 걸리고 한 상자에 몇십만 원은 할 텐데!’

상자를 열어 보니 온갖 종류의 떡이 작은 크기로 하나하나 포장되어 있었다.

백설기, 팥시루떡, 인절미, 무지개떡, 개피떡, 수수경단, 오색송편······ 몇 개는 이름도 모르는 떡들이었다.

“기숙사 오리엔테이션에서 이사 떡을 먹는 게 지익관 전통인데 그날 못 왔잖아. 입소 첫날에 있던 사건에서 나 때문에 장난 취급당한 게 계속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이레나 투신자살 미수 사건이 소문이 안 나고 조용히 수습된 건 성시완 덕이었는데도 그걸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김신록은 왜 온 거지?

“아, 간식 들고 오다가 우연히 뵈었는데 네 얘기를 꺼냈더니 오시겠다고 하셔서. 김신록 선생님은 지익회 고문이셔.”

“거의 명목상 고문이야. 결재 서류에 도장 찍는 거밖에 안 해.”

‘지익회에 고문도 있었나?’

사실 난 지익회에 대해선 잘 몰랐다.

게임에서 수백 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하지만 은광고에 재학, 재직 중인 학생들과 교직원만 합쳐도 약 2천 명이다.

잘 다루어지지 않는 이도 당연히 있었다.

‘성시완도 그런 인물이었지. 이름도 나오지 않는 캐릭터.’

‘플마고 콘크리트층 붕괴 사건’

그 계기가 된 캐릭터들이 대거 몰살당한,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시나리오 속에 지익회의 결말이 나온다.

지익회의 최후는 직접 묘사되지 않았지만 대화를 통해서 이렇게 언급되었다.

[지익회 애들은 어떻게 됐어?]

[······전멸했어.]

그 이후로는 아무도 지익회에 대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김신록이 나를 보며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목숨 빚을 졌는데 인사가 늦었네. 미안해.”

“김신록 선생님······?”

“입학시험 때 네가 나와 마수를 최대한 떨어뜨리도록 유도했잖니.”

그날 나는 감독관이 사망했다고 가정하고 작전을 짰었다.

죽었더라도 시체가 제 형태를 유지하길 바랐으니까 멀리 떨어뜨린 것뿐이다.

내가 감사의 말을 들을 자격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랬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는 걸 너도 잘 알 거야.”

손민기 건을 말하는 건가.

그건 그놈이 유난한 개자식이라서 그런 거 같은데.

민망해하는 나를 두고 김신록은 선량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의신아, 정말 고마워.”

그 후 우리는 시시한 잡담을 나눴다.

성시완은 쑥스러워하는 내 옆에서 적당히 추임새를 넣었고, 김신록은 인자한 얼굴로 계속 덕담을 해 줬다.

캡슐 커피는 달고, 달토끼떡은 혀 위에서 녹는 듯했다.

교사와 선배가 있는 자리였지만 감사의 말에 낯이 간지러운 걸 빼면 편안한 자리였다.

“그만 갈게. 푹 쉬어.”

“네, 안녕히 가세요.”

밤이 깊어져 우리는 해산하기로 했다.

김신록은 필요한 일이 있다면 부르라는 말과 함께 웨어러블 디바이스 코드를 알려 줬다.

헤어지기 전 성시완이 한마디 남겼다.

“혹시 지익회에 들어올 생각 없어?”

“생각해 볼게요.”

오늘 몇 번이나 한 그 말을 하며 성시완을 배웅했다.

빈 종이컵과 떡 상자를 정리하고 침실에 있던 로봇 청소기를 가져와 전원을 넣으려 했을 때였다.

거실이 싸늘했다.

발코니 쪽을 보니 이중 창문도 방충망도 전부 열려 있었다.

내 방 17층 발코니 난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뭐야······!’

반사적으로 광림을 전개하려다 멈췄다.

지금의 나는 플레이어다.

기척 감지 스킬은 없어도 다소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내 전용 메뉴 스킬은 에너미가 접근할 때 시스템 알림음으로 알려 준다.

‘혹시 지금 여기에 있는 건······.’

그렇다면 상대는 에너미가 아니며 광림하지 않은 나로선 도저히 감지할 수 없는 상대다.

그것도 은광고의 방어 결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올 만한 존재일 것이다.

금방 누구인지 추려낼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조의신 학생.”

저 정중한 말투를 들으니 내 추측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적호’의 인물 정보를 열람합니다.〉

[이름] 적호

[칭호] 전설계 호족(虎族)

[가호] 없음

[광림] (비활성화 중)

[상태] 천신의 진노 ― 스킬과 광림 일부 봉인, 전 능력치와 스킬 레벨 대폭 하락, 예견된 지옥 ― (일부 로드에 실패했습니다.)

[종합 능력치] Lv.45

[스킬]

적뢰(赤雷) Lv.8

적연(赤煙) Lv.8

도약 Lv.8

안광 Lv.8

포효 Lv.8

······.

······.

······.

“처음 뵙겠습니다, 적호(赤虎).”

그는 개천신화에서 이름이 지워진 신성한 범, 전설계 호족 적호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