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5화 (25/925)

8. 생일빵과 덤 (1)

한 집단의 긍지를 모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예부터 자주 사용되던 수단은 그 집단의 토지, 상징을 더럽히는 것이다.

국기를 찢거나 종묘를 뒤엎고 그 위에 혐오 시설 따위를 세우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서울특별시 은광구는 호족의 신역이다.

은광구에서도 은광고가 그 신역의 중심이었다.

천신과 신인, 호족을 증오하는 웅족은 같은 생각에 착안하여 신역인 은광고와 은광구를 모욕하고자 했다.

“조의신 학생은 알고 있었습니까? 우리 호족의 신역, 은광고 바로 앞에서 그런 더러운 짓이 자행되고 있었다는 걸.”

정보 수집의 전문가, 적호가 최편득을 타깃으로 잡는다면 전부 알아냈을 거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적호의 주변에 붉은 스파크가 작게 파직거렸다.

“은광고의 교사라는 작자가 그런 짓을······!”

최편득은 은광고 코앞에서 여러 개의 퇴폐 업소를 세우고 비밀리에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은광고의 교사라 신뢰도가 높았고 연줄도 많아 은광구청과 서울특별시 교육청의 눈을 속이기 쉬웠다.

“확증은 없었어요.”

게임 대로 진행된다면 주인공 일행이 내년쯤에 은광구 정화에 성공하게 된다.

게이머의 입장에선 최편득이 범인이란 걸 확실히 알 수 있었지만, 주인공 일행은 그도 그 흑막도 증거도 모두 놓쳐 버리게 된다.

그래서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편득은 웅족 외에도 다른 진족과 손을 잡고 있을 가능성이 커요.”

콰르르―!

발코니 창문 너머로 붉은 번개가 내리치는 게 보였다.

저번처럼 기숙사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진웅팔선이 힘을 모으면 은광고의 결계를 뚫고 짧은 시간에 교사 하나를 빈사로 만든 후 에너미를 잠입시킬 수 있겠죠. 하지만 진웅팔선이 연관된 건 사월세음 실종 사건뿐이에요.”

그리고 지금, 천신과 신인을 소멸시키려다 실패한 진웅팔선 중 둘은 실성했고 셋은 깊은 잠에 들어 있다.

은광고 결계 공략에 나설 여유가 없다.

사월세음 실종 사건도 마찬가지다.

비탄의 웅녀가 침묵 맹세의 순은 동전을 제작해 환몽 경매 측에 판 걸 제외하면 웅족의 최대 전력, 진웅팔선은 사실상 무관계다.

“12지 동맹에 소속된 진족 중 하나가 호족을 배신한 거겠죠.”

이 세계에는 12지 동맹이라는 게 존재했다.

약 100년 전, 한반도에서 이계 충돌이 가장 먼저 일어난 후.

진족이 현세에 실존하게 되고 개입의 여지가 커지자 한반도에서 12지로 숭상받는 동물의 화신인 진족은 각각 한반도에 터를 잡고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동맹에 소속된 진족들이 결계를 만들기로 했었지.’

12지 동맹은 소속 진족의 터를 지킬 방어 결계 제작에 힘을 보탰다.

호족의 신역, 천신이 강림한 이 은광구의 방어 결계도 12지 동맹의 합작품이다.

즉, 은광고 입시 실기 시험 마수 난입 사건은 12지 동맹에 소속한 진족 중 누군가가 호족을 배신하고 웅족과 손을 잡은 결과물이었다.

“······12지 동맹까지 알고 있습니까.”

적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그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비탄의 웅녀를 잠시 연상시켰다.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부부였던 두 진족다웠다.

생각을 마친 적호가 답했다.

“알겠습니다, 조의신. 함께 가죠.”

호칭이 ‘조의신 학생’에서 ‘조의신’으로 바뀌었다.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마음을 정했나 보다.

적호는 앞으로 이번 사건을 같이 해결할 플레이어로서 날 대해 줄 거다.

나는 기꺼이 웃으며 답했다.

“잘 부탁드려요. 적호.”

*    *    *

교육 환경 보호에 관한 법률, 약칭 교육환경법.

이 법의 시행령에는 ‘교육 환경 보호 구역’, ‘학교 정화 구역’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학교 출입문에서 직선거리로 50미터까지인 지역이 절대 보호 구역, 학교 경계선으로부터 직선거리로 200미터까지인 지역 중 절대 보호 구역을 제외한 지역이 상대 보호 구역이다.

즉, 50만 평 학교 부지의 은광고 주변 200미터가 교육 환경 보호 구역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 구역에는 학생의 보건, 위생, 안전, 학습과 교육 환경 보호를 위해 일부 시설물과 업체의 진입이 금지된다.

‘예상보다 더 학교에 가까워.’

그 교육 환경 보호 구역에 해당하는 땅 위.

간판도 없는 어느 평범한 건물 건너편의 맨션의 옥상에 나와 적호가 서 있었다.

‘디바이스에 내장된 지도로 확인해 봐도, 저 건물은 학교 정화 구역에 들어가 있는데.’

학교 코앞, 교육 환경 보호 구역.

여기에 교사가 세운 퇴폐 업소가 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골이 아파지는 일이다.

‘교육 환경 보호 구역이 아니더라도 불법인데. 간도 크지.’

간이 크다 못해 미쳐서 날뛰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웅족이 뒤를 봐준다 한들 신화계 호족이 자리 잡고 있는 신역에서 무슨 짓거리인가.

게임에서 2학년이 된 주수혁이 맹효돈을 빼내려고 쳐들어갔을 땐 그저 은광고 가까이에 있었다는 묘사밖에 없어서 이 정도로 가까운 줄 몰랐다.

“조의신,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당연히 안으로 들어가야죠.”

“적연을 사용해서 들어가실 겁니까?”

적호는 여기까지 나를 적연으로 보호해 데리고 왔다.

‘덕분에 폭풍 속에서도 비 한 방울 튀지 않았지.’

이대로 적연을 사용해 잠입하면 내 모습은 보이지 않을 거다.

하지만 내 ‘덤’을 위해선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네. 안에 들어갈 때까지요. 그 이후엔 제 광림으로 눈을 속일게요. 그럼 미리 써 두겠습니다.”

처음으로 다른 이 앞에서 광림을 사용하는 꼴이 되겠지만 적호라면 믿을 수 있었다.

사전에 준비해 둔 가면과 음성의 톤을 바꾸는 변조기를 착용하고, 광림을 사용했다.

오늘 사용할 캐릭터는 유명 인사였기 때문에 얼굴과 목소리를 감출 필요가 있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캐릭터 카드 한 장이 손끝에서 흘러나왔다가 빛으로 변해 내 몸을 감쌌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내 체격, 종합 능력치 레벨이 확연히 달라진 걸 깨달은 적호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가죠.”

나와 적호는 적연을 둘러 모습과 기척을 완전히 지우고 건물 내부로 쉽게 들어갔다.

역시 진족의 힘은 굉장했다.

적호가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아닌 게 아쉬워졌다.

그를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면 잠입과 정보 수집은 날로 먹을 텐데.

*    *    *

외관상 평범한 건물이었던 이 최편득 소유의 빌딩 안은 인외마도였다.

4층까지는 위장용 사무실이었지만, 5층부터는 특수한 조작을 가한 엘리베이터에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나 공을 들여놨다니.’

5층은 도박장.

6층은 윤락업소.

7층은 파이트 클럽.

8층은 VIP룸.

완전 회원제로 운영되는 이곳은 건물 전체가 풍기문란 그 자체였다.

풍속과 기강이 엉망인 상태를 의미하는 그 단어를 그대로 빼다 박아 둔 개판이었다.

곳곳에 담배 찌든 내가 진동했고, 약을 탄 양주와 샴페인을 들이켜며 타락과 유흥을 즐기는 이들이 넘쳐났다.

‘한국 최고 명문고 앞에서 이 짓을 하면 우월감과 배덕감이 끝내주겠지.’

이곳에 있는 회원들은 대부분 플레이어.

하나 은광고 학생 1학년보다 약한 이들뿐이었다.

전 국민의 15%가 플레이어라 하나 은광고에 들어올 수 있는 건 그 플레이어 중에서도 매년 500명밖에 되지 않으니까.

즉, 이 건물은 욕망과 열등감이 왜곡되어 표출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으득.

적연을 내 눈에만 보이도록 조정한 적호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바로 눈앞에서 외설 행위를 하는 두 명을 본 적호의 손끝에서 일순 스파크가 뻗어 나오려 했다.

“그만.”

적호의 손끝을 잡아 세우며 작게 속삭였다.

지금 내가 변신한 인물의 체격은 적호와 비슷하여 쉽게 저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폭주하면 최편득은 잡더라도 웅족과 손님들은 놓칠 거예요.”

그는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적호가 후우, 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가 눈을 아주 느리게 깜빡인 후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서두르죠.”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상태의 적호의 등을 밀며 한 층, 한 층 위로 올라갔다.

다행히 적호는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 그저 그 광경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여기군.’

7층, 파이트 클럽에 도착했다.

플로어 가운데에는 커다란 링과 홀로그램 창들이 보였다.

홀로그램의 시계가 오늘 자정까지 남은 시간을 카운트하고 있었다.

‘최편득의 생일이 되는 자정에 맞춰서 경기를 시작할 생각이겠지.’

사전에 적호와 상의한 대로 일단 흩어지기로 했다.

내가 적호를 향해 시선을 보내자 적호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응한 후 모습을 감췄다.

‘적호도 진정한 것 같으니 잘해 줄 거야.’

나는 내가 찾는 ‘덤’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이트 클럽이 위치한 7층 플로어를 헤맬 때 문득 유리창에 비춰진 나의 낯선 모습이 보였다.

외부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전면 선팅 처리된 유리창에 성인의 모습을 빌려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몹시 수상해 보였지만 이 퇴폐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가면을 쓰고 있어 눈에 띄지는 않았다.

‘머리 아파······.’

온갖 추잡한 광경을 눈에 담으니 어질어질했지만 12시가 되기 전에 그 녀석을 찾아야 했다.

칸막이들 탓에 미로 같은 플로어에서 몇 분을 헤매고 헤맸다.

그러다 플로어 가장 구석 방이 눈에 들어왔다.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내가 찾던 인물을 발견했다.

‘찾았다······!’

17세치곤 키가 작은 소년이었다.

‘사월세음보다도 키가 작은 것 같네. 근육 때문에 몸무게는 더 나갈 것 같지만.’

소년은 비가 오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주먹 위를 테이핑하고 있었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매서운 눈매를 보니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틀림없어, 맹효돈이다.’

하나 남은 가족인 아버지가 술, 도박, 여자로 만든 모든 빚을 혼자 짊어진 소년, 맹효돈이었다.

맹효돈은 현재 교사인 최편득의 계략으로 뒷골목에서 싸움 노예로 전락한 상태였다.

‘최편득 개자식······.’

파이트 클럽은 노예가 된 플레이어끼리, 혹은 에너미와 플레이어끼리 목숨을 건 맨손 대결 악취미 쇼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교복을 입고 싸우게 했나!’

그리고 지금 싸움 노예가 된 그가 입고 있는 건 교복이었다.

맹효돈은 검은 셔츠, 진회색 재킷의 은광고 교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다 그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아크릴 명찰까지 달고 있었다.

이곳에서 은광고 브랜드를 팔아먹기 위해서일 거다.

입학식에도 수업에도 단 한 번도 참여하지 못한 맹효돈이 아버지의 유흥 빚을 갚기 위해 교복을 입고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뭐야.”

맹효돈이 앉아 있는 한 평도 안 되는 대기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내 기척을 느낀 맹효돈이 나를 돌아보며 한마디 하였다.

“미친, 왜 그딴 눈으로 봐. 뒈지고 싶냐? 동정할 거면 돈으로 줘라.”

소년가장 맹효돈은 입이 좀 거칠었다.

욕쟁이 소년 가장 맹효돈을 위해 나는 오지랖꾼이 되기로 했다.

“너, 왜 이런 데서 싸우고 있냐.”

“알 바 아니니까 꺼져.”

“빚은 원하지 않으면 상속되지 않는데. 알고 있어? 자식이 부모 빚 갚을 필요 없다는 거.”

“뭐라는 거야, 이 꼰대 새끼가!”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 기세였다.

“정말 지금 네가 하는 게 효도라고 생각해? 아버지에게 돈을 줘서 술을 사게 하고, 도박을 하게 하고, 쾌락을 사게 하는 게?”

“······죽여 버리기 전에 닥치고 꺼져!”

맹효돈은 씩씩거리면서도 망설이고 있는 기색이었다.

이 지옥에서 싸우면서 그도 느꼈을 거다.

아버지가 자신을 돈줄로밖에 안 보고 있다는 것.

자신을 자식으로서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

“왜 여기에 계속 있는 거야.”

맹효돈이 이 지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다.

아무도 자신을 돕거나 구해 줄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싸움 천재 맹효돈은 부모에게서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학교에 적응도 못하고 싸움터를 전전하며 자란 17세의 소년이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 하나를 붙들고 돈을 쏟아붓고 있었던 거다.

‘다른 곳도 봤으면 좋겠는데.’

맹효돈의 교복은 청결했고 빳빳하게 잘 다려져 있었다.

싸움을 하느라 더럽혀지고 찢겨졌을 텐데 서툰 솜씨로 바느질을 하고 꼬박꼬박 세탁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지저분한 싸움판에서 관중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은광고 교복을 소중히 여긴 건 아닐 거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

내 말에 맹효돈이 대답 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참을 숨을 몰아쉬다 고개를 팍 들고 외쳤다.

“너, 너 누구야, 이 새끼야······!”

여기서는 맹효돈에게 신뢰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수상한 놈이 도와준답시고 들이대 봤자 덥석 좋다고 응할 그가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솔직하게 대답해야 해.’

정체를 드러내는 리스크를 지게 된다.

하지만 나는 맹효돈을 믿었다.

맹효돈은 게임 속에서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구한 친구인 주수혁에게 의리를 다했으니까.

“은광고 1학년 0반 조의신, 너희 반 부반장.”

나는 은광고 전자 학생증을 보여 줬다.

학생증 밑 비고란에는 ‘1학년 0반 부반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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