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3화 (33/925)

10. 만우절 (1)

“백호, 적호. 잘 왔다. 내가 쓰는 5층을 제외하고 마음대로 쓰도록.”

황명호 이사장의 사택.

황지호의 모습을 한 황호가 두 신성한 범을 맞이했다.

적호는 미소 짓고 있는 황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황호, 왜 저와 백호를 여기에 부른 겁니까. 당신에게 모든 걸 떠맡기고 떠난 저희를 원망하지 않습니까?”

적호의 말에 황호는 아주 아득한 과거를 회상했다.

‘원망이라.’

한반도에 온화한 은총을 내리던 천신.

그 위대한 천신과 몹시 닮았던 신인.

신인의 발치에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던 청호.

척박한 대지 위를 함께 달렸던 백호와 적호.

그리고 누구보다 존경했던 호족의 우두머리 은호(銀虎).

소중한 존재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다 사라졌다.

사라진 과거는 너무나도 찬란하여 현세의 모든 것이 빛이 바래 보였다.

‘······나의 친우들은 이미 벌을 받았다.’

천신에게 어디에도 갈 수 있는 자유를 청했던 백호는 신역에 묶였다.

천신에게 웅족을 용서해 달라고 자비를 청했던 적호는 웅족에게 배신당해 모든 것을 잃었다.

황호는 두 친우가 짊어진 벌을 봐도 조금도 후련해지지 않았다.

“이미 벌을 받고 있는 두 친우를 원망하라고?”

두 친우가 죄책감 어린 눈, 죽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삶의 의욕이 사라질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 눈이 바뀌었으니 함께 지낼 마음이 든 거다.

“은호도 너희를 용서할 거다.”

황호는 응접실 벽에 걸린 은휘관 조감도에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조의신에게는 고마워해야겠어. 너희들에게 새 목표를 주고, 정신을 차리게 도와줬으니까.”

은휘관 조감도를 등지고 백호와 적호를 바라보는 황호의 눈에 삶의 권태감 따위는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평소 조의신이 무척 불길하게 여기는 반짝거리는 눈이었다.

*    *    *

3월의 마지막 날, 아침.

나는 1학년 1반 교실을 찾았다.

예상대로 농구부 아침 훈련을 마친 유상훈이 일찍 등교해 있었다.

“조의신, 뭐냐.”

“야, 유상훈. 좀 나와 봐.”

나는 사람이 없는 복도로 유상훈을 불러냈다.

그는 군말 없이 바로 따라왔다.

그의 얼굴을 보면서 묻고 싶었던 게 있었다.

“너 얘네 알아?”

1학년 1반에 소속되어 있는 학생 이름 두 개를 말하자 유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의신, 아는 사이냐?”

“아니. 모르는 사인데.”

“그럼 계속 모르는 사이로 있어라.”

유상훈의 단호한 태도에 조금 놀랐다.

“손민기 새끼랑 느낌이 비슷해.”

유상훈이 뒤통수를 맞고 죽다 살아났더니 촉이 좋아졌나 보다.

내가 말한 두 놈은 최편득이 입학시킨 부정 입학자였다.

김신록을 죽이고 1학년 1반의 담임이 될 예정이던 최편득이 1반에 들여온 놈들이다.

‘원래 김신록을 죽이고 최편득이 담임으로서 뒤를 봐줄 예정이었겠지만 그게 틀어져서 생각보다 사고를 많이 치지는 못했을 거야.’

아직은 저지른 악행이 그리 많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유상훈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 근본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결심이 섰다.

‘은광고를 다니게 내버려 둘 수 없어.’

앞으로 저지를 자잘한 악행들도 그렇지만 그들이 변한 미래 속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집안도 최편득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촌지를 줄 만큼 잘 사는 데다 겉보기엔 멀쩡한 놈들이다.

게임 속에서도 뱀 같은 악의가 가득한 만행을 친구끼리 할 법한 사소한 장난으로 포장하는 재주가 환상적이었다.

‘자기 합리화, 책임 회피, 정보 조작 능력이 만렙인 놈들이야. 은광고는 물론이고 가능하다면 플레이어계에서 영원히 퇴장시켜야 한다.’

그 두 놈은 천운이 따르는 데다 사악한 잔머리는 기가 막히게 돌아갔다.

그들은 학생들이 대거 살해당하는 이벤트에서 살아남는다.

서너 개 존재하던 비상구를 모두 폐쇄한 후 SSR급 아이템으로 봉인까지 하고 도망쳐 버리니까.

다른 학생이 있으면 도망갈 때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너 또 뭐 할 거냐?”

“왜.”

“조의신 네 표정이 좀.”

“뭐가.”

그냥 앞으로 그 은광고 악의 축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손민기 개박살 내기 전에 지었던 표정인데.”

유상훈은 내 어깨를 툭 치고 씨익 웃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되냐? 기숙사 구경 시켜 주라.”

“그래. 점심 때 보자. 밥은 밖에서 먹고.”

“영상 통화로 장남욱 약 올리자.”

유상훈과 낄낄거리며 주말 계획을 세웠다.

장남욱은 은광고 소속이 아니라 기숙사에 들어오지 못하니 유상훈은 어떤 형식으로든 같이 놀고 싶나 보다.

약 올린다는 말로 포장되어 있긴 하지만.

이번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면 포상으로 유상훈, 장남욱과 놀아야겠다.

*    *    *

오후 수업을 알리는 수업종은 무려 국악부가 직접 연주한 무령지곡(武寧之曲), 대취타라고도 하는 전통 행진곡이었다.

[명금일하대취타(鳴金一下大吹打) 하랍신다!]

지잉―.

국악부 부장이 호령하자 징소리가 들리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취악기인 나발, 나각, 태평소와 타악기인 용고, 장구, 징, 자바라의 장쾌한 소리가 울렸다.

의외의 선곡 덕에 점심을 먹은 후 몰려왔던 졸음기가 싹 가셨다.

‘아침 수업종이었던 ‘광야의 숨결’도 좋았지만 무령지곡도 나쁘지 않네.’

수업종을 들으며 디바이스에 저장된 전자 교과서, 에너미학 개론서를 오픈했다.

오후 수업은 최편득의 담당 교과였던 에너미학 개론이었다.

즉, 한이의 은사인 공청훤의 첫 수업이다.

“현상 수배 중인 최편득 씨를 대신해 에너미학 개론을 강의하게 된 공청훤입니다. 잘 부탁해요.”

교탁 뒤에 선량함이라는 개념이 인간이 된 듯한 미남이 서 있었다.

‘게임에서도 엄청 선량해 보였는데 실제로 보이니까 더 그렇다.’

최편득의 수업에서 1학년들이 다 도망친 탓에 남은 건 열 명도 안 됐다.

하지만 오늘, 담당 교사가 최편득에서 공청훤으로 바뀌며 학생이 하나 늘었다.

‘수업 변경 가능 기간을 넘기지 않아서 다행이야.’

수업 변경 가능 기간은 3월 동안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한이가 이 수업에 합류했다.

한이는 내 옆에 앉아 기뻐하는 얼굴로 공청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도가 이것밖에 안 나갔나요? 처음 하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학생들에게 수업 진도를 확인하던 공청훤이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다.

최편득은 수업을 안 했다.

하루 종일 같잖은 인맥 자랑, 사회에 대한 불만,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한 안물안궁 정치관, 다른 교사의 중상모략 및 근거 없는 비방 등등의 헛소리로 수업 시간을 날려 먹었으니까.

‘하마터면 그 주문을 외울 뻔했었어.’

교실에서 사용하면 대다수 학생의 증오와 분노를 부르는 저주의 주문, ‘선생님 진도 나가요’를 몇 번이나 외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최편득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으니 참을 수 있었다.

“공부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왜?’라는 질문입니다. 왜 우리가 에너미를 연구해야 할까요.”

공청훤은 낭랑한 목소리로 수업을 이어 갔다.

한이는 비록 귀는 들리지 않았지만, 독화술로 공청훤의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에너미 검색을 하거나 분석계 아이템을 사용하거나 통찰계 같은 스킬을 쓰면 될 텐데.”

열 명 남짓한 학생들도 공청훤의 말에 집중했다.

공청훤은 나긋나긋한 말투로도 시선을 모으는 힘이 있었다.

“답은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가변적인 상황이 이어지는 이계 공략에서는 초 단위로 대응이 요구되니까요.”

공청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디바이스의 가동, 아이템과 스킬의 사용에는 시간이 듭니다. 그 시간을 줄이는 건, 유리한 입지에 서도록 도움을 주게 되겠죠.”

공청훤은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에너미학 개론서의 목차를 전자 칠판에 띄웠다.

“에너미학은 유용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에너미학 개론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공청훤은 가끔 전자 칠판에 판서하기도 하며 수업을 시작했다.

예상대로 알차고 훌륭한 내용의 수업이었다.

최편득이 나가떨어질 때까지 버틴 가치가 있었다.

‘공청훤이 교편을 잡자마자 이 수업을 신청하는 건 눈에 띄었을 테니까.’

내 옆에 앉아서 열심히 수업을 듣는 한이처럼 말이다.

*    *    *

4월 1일, 만우절이 되었다.

이전에 있던 세계에도 만우절은 학교에서 일종의 축제 취급을 받았다.

교탁을 교실 뒤에 설치하거나 그 밑에 숨어 있거나.

체육복 안을 채워 넣어 허수아비처럼 만들어 교실 뒤에 세워 두거나.

교복을 앞뒤 바꿔 입고 뒤돌아 앉아 있거나.

케첩을 바르고 학교 곳곳에서 시체 놀이를 하거나.

졸업생이 교복을 입고 숨어들어오거나.

이전 세계의 만우절 장난질도 충분히 유쾌했다.

하지만 은광고의 만우절 장난질은 차원이 달랐다.

“으아아악!”

“꺄아아아!”

아침 일찍 기숙사를 나설 때, 2,3학년 기숙사 건물에서 비명이 들렸다.

멀리서 보니 유령종 에너미와 비슷하게 생긴 가스덩어리가 2,3학년 기숙사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1학년은 아직 에너미 실습을 거친 적이 없으니 봐줬나 보네.’

교직원 사택에도 가스덩어리들이 있었으나 순식간에 격퇴되고 있었다.

은광고의 베테랑 교사들다운 신속하고 민첩한 대처였다.

‘벌써 장난질 시작이구나.’

만우절은 은광고의 작은 축제였다.

우수한 이능과 좋은 머리를 가진 고교생들의 장난질 레벨은 상상을 초월했다.

‘게임에서 잠깐 소개된 내용만 해도 엄청났지.’

2, 3학년 0반들에 의해 중앙 구역 곳곳에 트랩과 포털이 설치되고 교실 몇 개는 이계처럼 보이게 개조될 예정이다.

학교 부지 안에 있는 호수, 청랑호는 얼거나 증발하거나 괴생물이 강림할 거고.

‘학업과 이계 공략으로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겠지······ 부상자만 나오지 않는다면 장난질 정도는 괜찮을 거야.’

그리고 오늘 최고의 장난질 중 하나는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은광고 정문 앞 시계탑일 거다.

‘대체 어떻게 저걸 설치한 거지?’

새하얀 정문 시계탑이 네온사인 타워로 바뀌어 있었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은광고 교표 모양의 네온사인이 시계탑을 뒤덮고 있었다.

이른 시간 등교하던 학생들이 정문 시계탑을 보고 입을 떡 벌리고 서 있었다.

오늘 종일 은광고 교사들은 골머리가 썩겠지만 학생들 대다수는 즐거운 만우절을 보낼 거다.

그래서 게임 속 은광고 사람들은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도 믿지 않았다.

만우절에 은광고 교문 근처에서 교통사고로 택시 운전자와 승객 둘이 죽었다는 걸.

‘누가 한 악질적인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어.’

택시 운전자는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승객은 고작 중학생 꼬마였다.

뒤늦게 기사가 뜨고 은광고는 큰 충격에 빠졌었다.

사고가 정확히 언제, 어디서 터질지는 몰랐다.

그저 만우절 오전에 은광고 근처에서 사고가 난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대응할 수는 생각해 놨다.’

은광구의 유일한 마천루, 황명 그룹의 황명타워 옥상에서라면 은광구 전체가 훤히 보인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구름도 없었다.

55층 건물의 옥상에서 맞는 바람은 상쾌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사용하는 건 천리안 스킬을 가진 캐릭터였다.

‘안중지계(眼中之界) 천동하’

현재 은광고 2학년 선도부인 그의 광림을 빌리면 은광구 전체를 감시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움직이는 택시를 하나하나 체크해서 중학생이 타고 있는 경우 타깃으로 잡고······.

“조의신.”

즉각 플레이어의 궤적을 해제하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황지호였다.

“학교에 안 보여서. 혹시나 ‘비상시’인가 해서 추적해 봤어. 이사장으로서 학생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망할 놈.

이사장 권한을 이용해 학교에서 지급한 디바이스 위치 추적을 했나 보다.

“물론 이건 헛소리고. 만우절은 바쁘다기에 왜 바쁜가 궁금해서 쫓아왔다. 뭐 해, 여기 내 건물인 건 알지?”

황지호는 눈을 반짝이며 금방 자백했다.

처음부터 숨길 생각도 없던 것 같지만.

오늘 1학년 0반 출석률은 망했구나.

황지호가 멋대로 행동하는 건 내가 막을 수 없다.

함근형 선생님, 미안합니다.

“교통사고 하나 막으려고.”

“그래? 그럼 도와줄까.”

교통사고가 일어나는 걸 왜 내가 아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나 보다.

“대신 끝나면 학교에서 장난질 하나 크게 치자.”

그렇게도 만우절에 장난질을 치고 싶었나······.

황호가 도와준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사고를 막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커진다면 장난질 정도야 얼마든지 쳐 줄 수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지호가 눈을 빛내며 웃었다.

“그럼 거래 성립이다.”

황지호는 황명타워 옥상 난간으로 풀쩍 올라섰다.

첫 등장할 때 내 기숙사 발코니 난간에 서 있던 적호도 그렇고, 호족은 높은 곳이 좋나 보다.

황지호는 완벽하게 밸런스를 유지하며 양팔을 크게 벌렸다.

“이 몸은 신역의 수호자. 내가 마음먹는 한 은광구 안에 비밀은 없다.”

최편득의 퇴폐 업소는 방치한 주제에.

여태까지 관심이 없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겠지만.

파아아―.

황호의 힘이 개방되자 대기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황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황금의 원과 압력이 그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통찰계 스킬이 없더라도 인간이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신성한 범의 힘인가.’

작중 황호는 거의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힘을 본격적으로 쓰는 건 처음 봤다.

황호가 손을 뻗자 공기 중으로 황금의 입자가 점점 퍼져 은광구 전체를 감쌌다.

파란 하늘 아래의 은광구 시내에 황금 입자의 비가 내렸다.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파아아아―!

황지호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맹수의 눈 같은 동공이 황금색으로 번뜩였다.

“조의신, 너와 함께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구나.”

그 반짝이는 눈은 평소와 달리 희미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지금 은광구 주변에 웅족들이 있어. 그들의 타깃은 속도위반을 하며 달리고 있는 저 택시다.”

은광고 교문 앞 만우절 교통사고.

우연히 발생한 불행한 사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