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5화 (35/925)

10. 만우절 (3)

택시 기사는 황지호가 부른 황명호 직속 비서팀이 재단 병원으로 데려갔다.

개학 전 방문한 이사장실에서 가면을 쓴 것처럼 미소 짓던 비서도 오랜만에 봤다.

나를 기억하는지 작게 목례까지 했다.

‘비서도 황지호의 정체를 알고 있나 보다······ 황명호의 직속 비서팀이 정말 단순한 비서 노릇만 하고 있진 않겠지만.’

웅족은 전부 살려는 뒀다고 한다.

아직은.

‘김신록의 ‘창의적인 고문 방법’의 실험대가 더 늘어났네.’

나와 호족 셋 그리고 은호의 후예는 지금 황명호 이사장의 사택에 왔다.

지하는 몇 층까지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상 5층짜리 대저택이다.

‘황금 담장도 미로 정원도 실제로 보니 어마어마하구나. 게임 속에서는 멀리서 잠깐 배경으로 비추기만 했지.’

시큐리티 체크를 거쳐 저택에 들어왔을 때였다.

현관을 통과하기 무섭게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왕왕―!

하얀 천연 대리석 위.

대리석 못지않게 새하얀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강아지는 조금 부자연스럽긴 했지만 있는 힘껏 뛰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꼬리를 격하게 흔들어대고 있어서 저러다 떨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한쪽 다리에 서포터를 달고 있네······ 다리에 문제가 있나?’

엄청난 기시감이 머리를 강타했다.

솜털 같은 강아지.

한쪽 다리를 절고 있는 강아지.

게임 속의 그 존재가 떠올라 반사적으로 외쳤다.

“솜뭉치잖아!”

솜뭉치는 백호군과 가장 친한지 왕왕거리며 백호군의 발치에서 몸을 비볐다.

“솜뭉치?”

백호군이 온기 없는 목소리로 답하며 솜뭉치를 안아 들었다.

안다인이 본 솜뭉치의 남자 주인이 백호군이었나 보다.

백호군은 천익산에서도 싸돌아다녔지.

그때 솜뭉치를 주운 건가.

“이 녀석은 올무다.”

백호군이 솜뭉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평소대로 싸늘한 표정으로 저러고 있으니 위화감이 엄청나다.

그래도 솜뭉치는 좋다고 꼬리를 모터처럼 돌리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다.

그 범도 강아지를 아끼고 있는 것 같으니 괜찮겠지만.

“올무?”

솜뭉치가 한 목걸이에 한글 정자체로 올무라고 쓰여 있었다.

올무는 올가미의 다른 말이다.

이 솜털 같은 솜뭉치한테 사냥할 때 쓰는 덫의 이름을 붙였다고?

“그래.”

내가 올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백호군이 올무를 내게 내밀었다.

올무는 혀를 내밀고 내게도 애교를 부렸다.

빨리 안아 달라고 재촉하고 있는 거다.

‘그래, 그럼 빨리 안아 줘야지.’

곧바로 올무를 안아 들고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꼬리가 파닥파닥 내 팔을 쳐댔다.

‘괜히 타이틀 히로인 안다인의 넋을 빼놓은 게 아니구나.’

이렇게 귀여운데 솜뭉치면 어떻고 올무면 어떻겠냐.

“올무야, 잘 부탁해.”

왕왕!

내가 올무와 놀아 주자 셋이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봤다.

백호군은 무덤덤했지만, 황지호, 적호, 은호의 후예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조의신······.”

“신수(神獸) 올무가 사람을 따르다니, 조의신은 대체······!”

“분명 저건 신수인데. 저분은 인간이죠······?”

신수? 솜뭉치가······ 올무가 신수라고?

게임 속에서 농약을 먹고 죽은 그 강아지가 신수라고?

신수는 신역을 지킨다는 환상의 동물 아니었나.

왜 신수가 농약을 먹고 죽는데?

이곳엔 황호가 수호자로 있어서 신수는 없는 줄 알았다.

“신수는 홀로 천익산에 있는 걸 좋아했습니다. 방치해뒀더니 최근 갑자기 약해진 걸 백호가 발견했습니다만······ 신기(神氣)를 완전히 잃고 인간에게도 죽을 만큼 약해져 있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게 신기할 정도로요.”

적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은광구의 신수는 인간을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현재 신기가 사라져 자각을 잃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요······.”

인간 중에서 내가 처음은 아닐 거다.

게임 속에서 안다인의 얼음 같은 이성을 녹일 만큼 애교를 부려대니까.

“왜 이렇게 약해졌는지 짐작은 갑니다. 천익산 곳곳의 지맥이 무언가에 의해 끊겨 있더군요. 지금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이 상황에서 신수가 죽기라도 하면 천익산의 지력이 쇠하고 지맥이 완전히 죽겠죠. 그래서 우리가 보호하는 중입니다.”

뭐라고.

게임이 진행되면 천익산의 수목은 말라 죽고 땅은 썩어 간다.

그저 이 게임의 암울함을 강조하기 위한 배경 장치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무언가에 의해 지맥이 끊기고, 부정 입학자 그 개자식들이 약해진 신수를 죽여서 벌어진 일이었나 보다.

“이름을 붙여 주고 잘 돌봐주면 신기도 신수로서의 자각도 돌아올 거다.”

백호군의 말을 들으며 올무를 쓰다듬었다.

‘천익산의 끊어진 지맥······ 천익산도 은광고의 학교 부지. 은광고의 결계가 적용되고 있을 텐데. 그걸 뚫고 지맥을 끊어?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망겜의 고인물로서 짐작이 가는 건 있었다.

왕왕!

“그래, 올무야. 같이 가자!”

“······신수가 조의신을 정말 잘 따르는군요.”

올무가 내 품을 떠나려 하지 않아서 그대로 안고 이동했다.

현관을 지나 도착한 곳은 1층 응접실이었다.

황금색을 기조로 하되 눈이 피로하지 않도록 가구 전체의 톤은 다소 어둡게 낮춘 기품 있는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은휘관의 이사장실도 그렇고 황지호의 미적 감각이 굉장히 좋은 것 같다.

감탄하며 브론즈 미러 마감 처리가 된 스틸 다리를 가진 천연 면피 가죽 소파에 앉았다.

위이잉―.

앉기에 황송한 소파에 앉자 최신식 오토메틱 메이드가 손님 수를 파악해 자동으로 홍차와 다과를 내왔다.

‘이걸 아무렇지 않게 내놓다니.’

홍차는 영국 왕실 납품 업체의 스모키 얼 그레이, 다과는 오렌지 잼을 토핑한 수제 당근 케이크였다.

도자기 티 세트는 둘레가 22k 금으로 핸드페인팅 되어 있었고 케이크 스탠드마저 금으로 세공된 예술품이었다.

‘이사장실보다 화려하네. 황명호의 응접실답다.’

하지만 아무도 손을 뻗지 않았다.

‘나라도 먹어야지.’

침묵만 흐르고 있는 가운데, 나는 소리 없이 홍차를 음미했다.

올무는 계속 쓰다듬어 달라며 머리를 기대 왔다.

한 손으로 올무를 쓰다듬고 다른 한 손으로 찻잔을 들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진족과 그 진족의 후예는 서로를 알아본다. 은호의 후예는 이 세 호족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거야.’

어째서 이 호족들은 은호의 후예의 존재를 몰랐던 것인가.

웅족은 어떻게 알고 은호의 후예를 노렸는가.

의문스러운 점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조의신, 너는 사고를 예견했지만 웅족도 은호의 후예의 존재도 몰랐었지.”

황지호가 갑자기 내 쪽으로 훅 치고 들어왔다.

“그래.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호족에게 도움을 청했을 거야.”

웅족이 다섯이나 붙어 있었다.

나 혼자 해결하려 했으면 총력을 기울여 처절한 시가전을 치러야 했을 거다.

덤으로 지각한 사월세음도 말려들었겠지.

“너는 우리에 대해서도 미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완벽하게 파악한 건 아니구나. 그게 광림인지, 스킬인지 내가 모르는 다른 요소로 인한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황지호는 나를 관찰하며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구나.

직접 알아내는 게 더 재미있을 거라고 황호를 부추긴 건 나지만.

“고맙다. 조의신. 네가 없었으면 은호의 후예는 죽었을 거야.”

더 추궁해 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내 시선을 느낀 황지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표정은 장난스러운데 평소보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게 이상하다.

“이 땅에서 5천 년을 넘게 살았다. 어디까지 선을 긋고 행동해야 하는지는 알아.”

아는 놈이 그렇게 막 사냐.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분위기를 보고 닥치기로 했다.

황지호는 은호의 후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중학생을 대하는 황지호의 말투는 좀 쌀쌀맞았다.

“나를 만나러 왔지? 용건을 말해.”

“이분 앞에서 말씀드려도 괜찮나요?”

은호의 후예가 나를 흘끗 바라봤다.

이들 중 유일하게 나만 인간이다.

내가 있으면 사정을 말하기 곤란할지도 모른다.

일단 자리를 비웠다가 나중에 적당히 얘기를 들어 볼까.

“그럼 난 간다. 나중에 연락할······.”

소파에서 일어서려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눌러 다시 자리에 앉혔다.

풀썩―.

어깨를 잡은 손을 따라 눈을 돌리니 백호군이 있었다.

“조의신, 네가 구한 아이의 이야기다. 너에게는 들을 권리가 있다.”

설마 백호군이 만류하다니.

황지호와 적호를 쳐다보니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호족 셋은 내가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나 보다.

은호의 후예가 호족의 반응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황호 님이 알아보신 대로 5천 년 전 개천 당시 황호 님, 백호 님, 적호 님과 함께하셨던 호족의 우두머리이신 은호 님의 피를 이었습니다.”

한반도를 다스린 건 신인이었지만 그 호족을 이끈 건 ‘은호’라는 호족이었나 보다.

굳이 비유하자면 신인은 왕. 은호는 기사단장 같은 건가.

“저는 은호 님의 직계 후예이신 어머님의 피를 이었습니다. 나이는 올해 16세가 됩니다. 제 밑으로 둘이 더 있습니다.”

은호의 후예는 셋? 넷이 있는 건가.

지금 이 후예의 어머니와 삼 형제까지 넷이다.

진족의 후예는 자손을 갖기 어렵다 들었는데 저 삼 형제는 어마어마하게 운이 좋았나 보다.

“저희는 12지 동맹의 일각인 토족(兎族)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건지 웅족 그리고 정체불명의 진족과 에너미들이 쳐들어왔지만요.”

토족이 은호의 후예를 보호했었나.

고급 떡 브랜드, 달토끼떡을 운영하는 그 토족이.

‘웅족 말고도 다른 진족이 쳐들어왔다고? 12지의 배신자 놈들인 건가.’

한편 후예의 말을 들은 황지호와 적호는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망할 달토끼 놈들이 여태까지 잘도 입을 다물고······.”

“매년 명절마다 토족의 특산물 달토끼떡도 꼬박꼬박 보내왔었죠. 기특한 짓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죄책감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지호와 적호가 깊은 빡침을 느끼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오랜 시간 이런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면 빡칠만도 하겠다.

은호의 후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현재 상위 존재가 개입하시어 결계를 쳤지만 결계는 내일까지 버티지 못할 거예요. 저희 후예 셋은 다른 비밀 장소에 숨어 있었는데······ 저 혼자 토족 분들 몰래 나왔어요.”

“······왜 여태까지 우리를 찾지 않은 거냐.”

황지호가 이를 갈며 말하자 은호의 후예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막내를 낳고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신성한 범들은 저희를 지키려 할 테니, 저희는 약점이 될 거라고. 곁에 있으면 약해질 테니 몸을 숨겨야 한다고.”

콰콰쾅―!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황지호 주변의 가구들과 바닥이 박살 나 가루가 되었다.

‘황지호가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건 처음 봤다.’

은호의 직계 후예라는 그 어머님은 돌아가신 건가.

그럼 현재 남은 은호의 후예는 셋일 거다.

“은호의 직계 후예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보내다니.”

존경하는 우두머리의 후예라면 제 자식이나 다름없을 거다.

용족이 후예인 염준열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디바이스로 은광고로 연락을 드리려 했지만 제 신분으로는 이사장님과 연결이 되지 않았어요. 직접 뵈어 도움을 청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일개 중학생이 이사장과 연락하기는 어려웠겠지.

나도 제갈재걸의 중개가 없었다면 황명호와 이야기할 수 없었을 테니까.

토족은 후예를 숨겨 두고 결계 안에서 간신히 버티는 중인 듯하니 토족이 직접 연락하는 것도 불가능할 거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 구조 요청을 하러 왔구나. 게임 속에서는 웅족에게 암살당해 실패한 거야.’

게임 속에서 토족은 매우 쇠퇴하였다고 묘사된다.

토족의 우두머리인 달토끼떡 CEO는 살아남았던 것 같지만.

대부분이 이번 이벤트로 죽어서 그렇게 됐나 보다.

‘······황지호가 움직이지 않으면 나라도 가야 할 것 같은데.’

고민하던 사이 황지호가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토족의 위치를 말해. 나와 내 분신들, 적호 그리고 황명 그룹에서 근무 중인 호족들을 보낸다.”

“황호 님······!”

“너와 백호, 조의신은 여기에 남아. 후예를 노리고 올 잔당이 있을지도 모른다.”

황지호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적호와 함께 응접실 밖으로 이동했다.

나도 직접 가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호족들의 팀플레이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여기선 황지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응접실에 남은 건 나, 백호군, 은호의 후예 그리고 올무였다.

‘어색하다.’

과묵한 백호군이 분위기를 띄우는 사교성 넘치는 행동을 해 줄 리도 없다.

은호의 후예는 잔뜩 기가 죽어 있었다.

‘인간은 아니지만 아직 열여섯밖에 안 된 꼬마인데.’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오면서 많이 무서웠을 거다.

정신적으로 지쳐 있겠지.

끄응―.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나 보다.

올무가 작게 버둥거렸다.

은호의 후예가 내 품 안의 신수를 흘끗 바라봤다.

“야.”

은호의 후예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들어 볼래?”

올무를 양팔로 들어 올려 은호의 후예에게 내밀었다.

허공에 떠 있는 감각이 마음에 드는지 올무가 혀를 내밀며 꼬리를 파닥였다.

이 솜뭉치 같은 신수에게서 눈을 못 떼던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가 허락한다면······.”

가까이 가져가자 코를 킁킁거리던 올무가 은호의 후예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나나 백호군에게 보인 것 같은 적극적인 태도는 아니지만 ‘만져도 된다’ 정도의 신호인 것 같다.

은호의 후예가 올무를 안아 들었다.

“와······ 따뜻해······.”

은호의 후예는 유리 조각이라도 만지는 것 같은 손길로 올무를 쓰다듬었다.

올무는 눈을 감고 은호의 후예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평범한 중학생 꼬마로밖에 안 보여.’

인간이 진족, 후예를 구분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그러니 게임 속에서도 그저 중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기사가 뜨고 끝났겠지만.

‘은호의 생각대로 지켜야 할 게 생기면 리스크가 생겨. 위험해지는 건 맞지만······ 그래도 약해진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어.’

이 위험한 세계에 와서 지킬 게 많이 생겼다.

그 덕에 아무것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던 나는 변했다.

“너, 토족하고 네 동생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잖아. 그게 약한 거냐.”

은호의 후예는 혼란스러워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잘했어. 네가 용기를 안 냈으면 토족도 남은 네 동생도 위험에 처했을 거야.”

은호의 후예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 이후로는 나도 은호의 후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올무는 얌전히 은호의 후예의 품에 계속 안겨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황지호가 메시지를 보냈다.

[황지호] 상황 종료, 전원 무사하다.

*    *    *

어느새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수업을 조금 일찍 마치고 온 김신록에게 은호의 후예를 맡기고 대저택을 뒤로했다.

백호군은 웅족을 잡아 둔 은영관으로 갈 예정이라 함께 은광고로 향하게 되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나에게는 들을 권리가 있다고 말해 준 백호군이다.

‘백호군이라면 내 추측을 듣고 가부를 판단해 줄 거야.’

이 세계의 서울은 이전의 세계의 서울과 그리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 세계에는 ‘은광구’라는 지명이 존재하는가.

“은광구도 은광고도 은휘관도 은영관도 전부 우두머리였던 은호를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야?”

특히 황호는 은호를 각별하게 생각한 것 같다.

은휘관은 황호가 직접 디자인한 건물이기도 했으니까.

‘은호는 사라졌고, 은호는 후예의 존재를 모든 호족에게 숨겼어. 이후 황호는 신역의 수호자가 되고 은휘관을 지어 은호를 기렸다.’

이게 내 추측이었다.

“그렇다.”

내 예상이 맞았나 보다.

“은호는 죽었어?”

“아니. 단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식물인간 같은 상태인가.

깊은 잠에 든 진웅팔선의 웅족처럼.

그래서 게임에서 나오지 못했구나.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은호의 후예가 옆에 있으면 약해질 것 같아?”

“······황호도 적호도 나도 은호를 지키다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왜 은호가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이해한다.”

백호군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서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하나 나는 네가 후예에게 한 말에 동의한다. 조의신.”

노을 속에서 새하얀 범이 아주 작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백호군은 이 세계와 인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게임과 다른 행보를 보여서 좀 걱정도 하고 신경도 쓰였는데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그대로다.

‘백호군은 변하지 않았어.’

백호군의 기분은 매우 좋아 보였다.

이 기회를 틈타 아주 중요한 걸 부탁해야겠다.

“가끔 솜뭉······ 아니, 올무 보러 와도 돼?”

“마음대로 해라.”

좋다. 마음대로 해야겠다.

올무의 애교가 그리워지면 황지호의 집으로 쳐들어가야겠다.

*    *    *

은광고 폐쇄 구역.

철거 예정인 구교사 건물이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지반의 상태, 건물 조사 등을 원인으로 철거가 지연되고 있는 건물들과 낡은 소각로가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은호의 후예 건으로 시간을 많이 빼앗겼지만 내 만우절 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어. 괜찮을 거야.’

4월 1일의 일몰 시간은 약 7시.

현재 시각은 6시 40분.

‘녀석들은 해가 지고 일을 쳤다는 묘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건물 밖을 빠져나가는 1학년 1반 학생 두 명이 있었다.

내가 유상훈에게 이름을 물었던 그놈들이다.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게임 속보다 빨리 움직였어!’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반사적으로 택한 것은 포획계 성능을 가진 캐릭터 카드였다.

현재 은광고 3학년, 학생회장 ‘강철의 쐐기 도원우’였다.

〈대상 캐릭터의 광림, ‘철쇄연쇄(鐵鎖連鎖)’를 사용합니다.〉

촤아아악―.

내 몸에서 수십, 수백 개의 이능의 사슬이 뻗어나가 두 사람을 단단히 포획했다.

“뭐, 뭐야! 어? 무, 무명의 초신성?”

“잠깐, 왜?”

외양은 바꾸지 않았다.

폐쇄 구역에는 기록 기기가 없다.

이 쓰레기들에게는 내 얼굴을 보여도 상관없었다.

‘이 녀석들은 앞으로 모든 걸 잊게 될 거니까.’

나는 그 두 명을 바닥에 질질 끌며 구교사 안을 뛰어다녔다.

그들은 벗어나려고 발악했지만 부정 입학자 따위가 은광고 학생회장의 광림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두 놈은 계단이나 문턱에 머리를 박을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야,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대상 캐릭터의 스킬, ‘부분 방전’을 사용합니다.〉

파지직―!

“끄아아악!”

“아아악, 왜! 으아아아!”

도원우는 전기술의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광림 철쇄연쇄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피나는 수행을 거쳐 스킬을 습득했다.

전기술의 파생 스킬까지.

그게 부분 방전, 원하는 지점에만 방전 현상을 일으키는 스킬이었다.

“흐으으······ 뭐야······.”

“왜······ 왜애······.”

짖을 때마다 전기를 먹여 줬더니 닥치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무리 울부짖어도 도와주는 사람은 오지 않겠지만.

이 녀석들이 이곳에서 괴롭힌 학생이 당한 것처럼.

‘왜지, 왜 게임보다 빨리 움직인 거지?’

문득 1학년 1반 담임인 김신록이 떠올랐다.

그는 은호의 후예와 만나기 위해 황명호의 대저택으로 일찍 수업을 마치고 와 버렸다.

‘그렇다면 1반은 담임의 부재로 종례 시간이 생략되었을 거다. 그러니 녀석들은 생각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게 된 셈이다.’

은광고 앞에서 벌어진 웅족의 암살 미수 사건.

사월세음의 첫 등교.

신수의 존재.

은호, 은호의 후예.

오늘 하루 많은 정보가 한 번에 밀려들어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최대한 빨리 달리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구교사 4층, 교직원 화장실에 도착했다.

‘가장 안쪽 칸막이 하나만 닫혀 있어······!’

쾅―!

잠겨 있는 화장실 문을 힘으로 열어젖혔다.

학생회장 도원우의 근력으로 문은 쉽게 박살 났다.

그리고 문 안, 변기 위에는 한 학생이 있었다.

입은 청 테이프로 막혀 있고 온몸은 SR급 결박 아이템으로 구속된 상태로.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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