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만우절 (4)
중학생 시절 괴롭힘에 시달리던 피해자 학생이 있었다.
피해자는 플레이어 이능을 갖추고 있었지만, 전투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집안, 성격, 외모는 딱히 모난 곳은 없었지만 굳이 따지면 평균 이하에 해당했다.
‘공부는 주수혁과 안다인에 버금갈 만큼 잘하긴 했지만.’
반면 가해자 두 명은 플레이어 이능을 타고났고 외모도 출중했으며 집안도 잘 살고 친구도 많고 교사들과도 잘 지냈다.
그들은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지만, 그 피해자 학생에 비하면 몹시 처졌다.
전교 1등과 2, 3등 사이의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다.
그게 가해자들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다.
괴롭힘은 교묘하고 알기 어렵게, 피해자의 공부 페이스를 흔들기 위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유일한 희망이 은광고였었지······.’
피해자 학생은 괴롭고 고독한 중학교 생활을 보내면서도 처절하게 공부했다.
가해자들이 은광고만큼은 절대 합격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투계 이능이 약했던 피해자 학생이 은광고에 합격을 하기 위해서는 필기시험 점수를 높게 받아야 했다.
피해자는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은광고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 가해자 두 놈이 최편득의 힘을 빌려 특별 전형 결과를 조작해 은광고에 와 버렸어.’
피해자는 가해자의 합격 소식을 몰랐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은광고 합격이 확정되자 중학교 등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식을 전해 줄 만한 친구도 없었고.’
피해자는 한동안 평화롭고 행복한 은광고 생활을 보냈다.
그 거짓말 같던 행복은 만우절에 끝난다.
부정 입학으로 은광고를 들어오긴 했지만, 너무나도 우수한 은광고 학생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인 가해자에 의해서.
이날 이후로도 피해자는 가해자의 스트레스 해소 도구로 이용된다.
‘피해자의 부모가 가해자 부모가 경영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바람에 이 녀석은 차마 저항하지 못했어.’
이 모든 내용은 플레이어블 캐릭터, 박승현의 사망 전 회상에서 나온 내용이다.
“괜찮아?”
일단 박승현의 입가에 붙은 청 테이프부터 떼어 주었다.
그가 나를 보고 중얼거렸다.
“무명의 초신성······.”
박승현은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이 자식들한테 당한 거 맞지?”
나는 학생회장 도원우의 광림, 철쇄연쇄로 구속되어 있는 두 놈에게 턱짓했다.
박승현이 그 둘을 보자 얼굴을 일그러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박승현이 이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미리 잠복해서 둘이 범행을 저지르는 순간 개박살을 내 주려 했었지만 늦어 버렸다.
‘이름을 확보한 순간 바로 은광고에서 퇴출시켜야 했어.’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콰직―!
철쇄연쇄로 박승현을 묶은 SR급 결박 아이템을 박살 냈다.
“개새······ 저게 얼마짜리 아이템인데······!”
그 비싼 아이템을 이 개지랄에 썼단 말이냐.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
자기보다 만만한 대상, 자존감을 살려 주는 박승현이 눈앞에 있으니 기운이 나나 보다.
〈대상 캐릭터의 스킬, ‘부분 방전’을 사용합니다.〉
파지직―!
“끄읍, 으아아악!”
“그아악! 난, 아무 말도 안 했······ 아아악!”
아무 말 안 한 놈은 덤으로 지져 놨다.
“박승현, 난 이 개자식들을 퇴학시키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
“퇴······학······.”
박승현이 어눌한 어조로 말했다.
눈에 살짝 행복감이 어렸다.
그간 괴롭힘 없는 은광고에서 행복하게 지냈던 시간이 떠오르나 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일로 학생은 퇴학당하지 않아. 살인, 강간, 교직원 폭행 정도는 해야 퇴학 처분을 받지. 만우절에 10분 정도 구교사에 학생 하나 가둔 것만으로는 퇴학이 안 될 거야.”
박승현은 다치지도 않았다.
그저 잠깐 구교사에 갇혀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여기에 있어야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의로운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도 이놈들은 기껏해야 며칠 정도 정학 처분을 받고 끝날 거다.
‘게다가 이 일이 수면으로 떠오르면 박승현의 부모는 확실하게 가해자의 부모에 의해 불이익을 받겠지.’
박승현은 내 말을 이해하고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아마 알고 있을 거다.
공부 잘하고 머리 좋은 박승현이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청소년 법, 학교 교칙을 안 찾아봤을 리가 없다.
“그래도 은광고에서 퇴학시키는 방법은 있어.”
“하, 네가 뭔데! 우리 부모님이 누군 줄 알고······.”
〈대상 캐릭터의 스킬, ‘부분 방전’을 사용합니다.〉
〈대상 캐릭터의 스킬, ‘부분 방전’을 사용합니다.〉
〈대상 캐릭터의 스킬, ‘부분 방전’을 사용합니다.〉
파지직―!
파직―!
파지지직―!
“으아아아아악, 끄아악!”
“아아아악, 살려 줘어억! 난 아무 말도 안 했······!”
아무 말 안 한 놈도 연대 책임을 물어 지졌다.
스킬을 연달아 쓰고 나니 조용해졌다.
‘이들은 손민기처럼 허술한 행적을 보이지도 않았어. 손민기처럼 파산시켜 불구로 살게 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건 어려워.’
이놈들은 예전의 손민기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다.
파산시키려면 황호의 황명 그룹이나 주수혁의 주오 그룹 수준의 힘을 빌려 압력을 가해야 할 거다.
그들을 움직이는 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리스크도 크다.
‘그리고 이런 녀석들이 이능을 갖고 있으면 피해자가 나올 거야. 어디를 가더라도.’
나는 개학 전부터 이 둘을 은광고에서도 플레이어계에서도 영원히 추방하는 방법을 죽 고민했다.
‘스킬, 광림 봉인술을 걸 수도 있지만, 그건 해제가 가능하니까 안 돼. 이 자식들은 돈이 많으니까 해제법을 찾는 건 일도 아닐 거야.’
그래서 이능을 봉인하는 게 아니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17세 이후에도 플레이어 이능이 사라지는 케이스도 있어. 드물긴 하지만.”
위험한 거래를 하면서 그 수단을 확보했었다.
“플레이어 이능의 상실은 은광고 퇴학 사유다.”
환몽 경매를 박살 낸 그날, 비탄의 웅녀에게 받은 아이템, ‘부(富)와 생명의 무게’를 꺼냈다.
〈아이템 정보를 열람합니다.〉
[아이템명] 부(富)와 생명의 무게
[형식] 소모품
[희귀도] UR-
[효과] 부(富)와 생명을 대가로 인간의 가능성을 지운다.
[설명]
아이템 카드 그 자체에도 막대한 부(富)의 가치가 있다.
아이템 카드와 자신이 소유한 부(富)를 대가로 인간의 가능성을 지운다.
단 지우고자 하는 가능성 대비 소유한 부(富)가 부족할 경우, 아이템 사용자의 수명을 받아간다.
진웅팔선이 천신과 신인의 존재 가능성을 지우기 위한 의도로 제작하였다.
그 실패작.
비탄의 웅녀에게 받은 ‘부(富)와 생명의 무게’ 는 총 세 개였다.
그중 하나를 사용하여 이 두 쓰레기의 이능을 지울 것이다.
내가 꺼낸 아이템 카드를 본 세 명이 경악했다.
“UR-급 아이템 카드······!”
“너, 정말 혹시······!”
“싫어, 싫어. 놔줘!”
아이템창에서 수십 개의 사과 박스를 꺼냈다.
그 사과 박스에는 5만 원권 지폐가 가득 차 있었다.
그 외에도 카드화된 이계 보석들을 꺼내 박스 위에 뿌렸다.
“은광고에 너희 같은 쓰레기가 없었으면 좋겠어.”
대가를 얼마나 치러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설정집에 나온 바에 의하면 진웅팔선이 세 명의 프로 팀 소속 플레이어들의 이능을 동시에 지웠을 때도 얼마 들지 않았었어. 괜찮을 거야.’
예상외의 변수가 있더라도 그동안 모아 온 돈, 변순회와 최편득을 털어 모은 수십억을 다 쏟아부으면 내 수명은 지켜질 거다.
이 쓰레기들의 이능 수준은 하찮으니까.
하찮지 않았으면 부정 입학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
“이 아이템은 돈이나 생명을 대가로 인간의 가능성을 지우지. 너희들의 이능은 완전히 사라지고, 왜 그게 사라졌는지조차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하게 될 거야.”
이 아이템의 무서운 점은 ‘왜 그 가능성이 사라졌는가’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UR-급 아이템답게 완전 범죄에 최적화된 극악의 아이템이었다.
그만큼 리스크도 크고 입수 난이도도 컸지만.
“다음 전투 연습 시간. 이능이 완전히 사라진 게 발각된 너희들은 정밀 검사를 받고 플레이어 자격이 박탈된 후 일반인이 될 거야.”
은광고에 입학한 플레이어가 17세가 넘은 후 이능을 상실한 건 첫 케이스다.
철저하게 원인 조사를 하다 부정 입학도 덤으로 걸리겠지.
내가 카드를 사용하려 했을 때였다.
“자, 잠깐. 하지 마!”
박승현이 허우적거리며 나와 가해자 놈들 사이를 막아섰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겠지.’
골이 띵해졌다.
‘이 녀석들을 용서해 줄 생각인가?’
가끔 픽션에서 지나친 인류애를 발휘하는 바람에 모두에게 발암 요소와 고구마를 안겨 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거짓말이라고 해 줬으면 좋겠다.
아직 만우절이다.
그래, 거짓말일지도 몰라!
거짓말일 거임.
안 들렸던 척, 모르는 척하고 그냥 아이템을 써 버리자······!
내가 정신 승리 회로를 돌리고 있을 때 박승현이 크게 외쳤다.
“······내가!”
그는 손을 내밀며 무릎을 꿇었다.
“내가, 내 손으로 복수하게 해 줘. 부탁이야, 제발!”
박승현의 높은 도수의 안경은 습기로 흐려져 있었고, 얼굴엔 눈물 자국과 붓기가 가득해 볼품없어 보였다.
외양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놈들이 얕잡아 볼 만한 모습이다.
“매일매일······ 왜, 왜 나는, 왜 해야 할 말을 못 하는지 후회했어······.”
하지만 지금 박승현의 눈은 전투태세에 들어간 진족에게 지지 않을 만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발 이번엔······ 후회하지 않게 해 줘!”
내게 무릎을 꿇은 박승현이 카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 아이템을 쓰면 수명이 줄어들 수도 있어.”
“이 새끼들 때문에 매일 죽고 싶은데, 부모님 때문에 참고 있었던 것뿐이야! 수명이 줄어드는 게 문제야? 이 새끼들 죽이고 지옥에 갈 수 있으면 간다!”
그는 목이 멘 건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박승현의 의지는 꺾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게임 속에서 주수혁도 박승현이 한번 마음먹은 일은 꺾지 못했었지.
어쩔 수 없다.
그에게 아이템 카드를 내밀었다.
“바······ 박승현, 우리가, 우리가 잘못했어! 중학교 동창이잖아. 우린 친구잖아. 친구끼리 장난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잖아!”
“그래. 좀 장난을 심하게 친 건데, 너도 너무한다! 장난 갖고 이렇게까지 하는 게 어디 있어!”
부정 입학자들이 기겁을 하며 헛소리를 했다.
박승현이 카드를 쥐며 그들을 향해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너희들은 이 지경이 되어도 반성하지 않는구나.”
이런 놈들은 똑같은 입장에 놓여도 그저 억울해할 거다.
교도소에 처박힌 흉악범들 중에서도 반성하는 놈 하나 찾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니 어쩔 수 없다.
“박승현, 돈은 이걸 써.”
오늘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도 보호하지 못했다.
이 정도의 보상은 해 줄 생각이 있었다.
내가 사과 박스들을 가리키자 박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걸로 돈의 소유권은 박승현이 가진 걸로 처리될 거다.
“청소년 학교 폭력 통계 중에 따돌림을 가장 많이 당하는 타입이 뭔 줄 알아? ‘이능이 있다가 사라진 학생’이야. 거만한 데다 자격지심도 넘쳐서 성격도 이상하고, 배경도 배경이니까 일반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기 딱 좋거든.”
박승현이 카드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넘쳐났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은광고에서 쫓겨난 너희들이 갈 학교에서, 꼭 네놈들 같은 놈이 있길 바란다.”
박승현이 ‘부(富)와 생명의 무게’를 사용했다.
아이템 카드가 불길한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파아아아―!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한 빛이 멎었을 때.
나와 박승현, 가해자 둘, 이 넷은 전혀 다른 공간에 있었다.
눈앞에는 거대한 천칭이 있었다.
‘이게 UR급 아이템의 효과······!’
거대 천칭으로부터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천칭에는 지금의 나로선 해독하는 게 불가능한 고대어에 이능이 실려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천칭 한쪽에는 두 가해자가, 다른 한쪽에는 ‘부(富)와 생명의 무게’ 아이템 카드에 그려져 있던 이계 보석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어떤 가능성을 지울 것인가.]
UR-급 아이템으로 만들어진 아공간.
천칭 위로 순백의 곰 가죽을 덮어쓴 자가 등장했다.
눈가가 곰 가죽으로 덮인 탓에 얼굴은 전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호선을 그린 입술에는 기품이, 귀를 울리는 목소리에서는 위엄이 넘쳤다.
“이, 이 개자식들의 이능을 지워 주세요!”
박승현이 외치자 천칭 위에 선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끼이익―.
지금까지는 외부의 힘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천칭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천칭 위에 선 자는 기우는 모양새를 가늠하고 있었다.
부정 입학자 두 놈도 UR-급 아이템의 힘이 실감 난 건지 꽥꽥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시, 싫어. 안 돼, 박승현 개같은 새끼야. 멈추라고! 너 같은 새끼한테 내가 왜!”
“아, 싫어, 싫어! 이능 없어지면 저 새끼 부모랑, 가족이랑 다 죽일 거야. 다 죽인다. 거지새끼로 만든다!”
역시나 반성한 척한 거였구나.
가해자의 본심이 생중계되는 중이다.
천칭 접시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두 녀석이 발광해댔지만 UR-급 아이템의 위력에 둘이 저항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저 녀석들이 접시 밖으로 몸을 날리려 할 때마다 접시 주변에 스파크가 튈 뿐이었다.
다시 그들은 접시 안으로 되돌아왔다.
[이들의 가능성은 너무나도 하찮아서 더 받아 갈 게 없구나.]
천칭 위에 선 자는 아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어느 사이엔가 천칭 접시는 멈췄다.
그것은 거의 90도에 가깝게 기울어져 있었다.
물론 가해자 놈들 쪽이 아공간 위를 뚫고 갈 정도로 솟아 있었다.
‘돈 박스 괜히 꺼냈네.’
돈 굳었다.
[그러면 가능성을 거두어 가마.]
천칭 위에 선 자가 둘을 향해 손을 뻗자 천칭 접시의 형태가 상자처럼 바뀌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 상자는 작아져 갔다.
“안 돼, 안 돼. 아아아악, 아파. 악!”
“아아아악. 아파, 아파아파아파. 아악!”
와득, 와드득!
무언가가 조각나고 박살 나는 불길한 소리가 커지는 것과는 역으로 비명 소리는 잦아들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능을 제거하는 과정이 더럽게 아프다는 건 알겠다.
[비탄의 웅녀, 그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아이가 너로구나. 무엇을 지우러 올지 기다리고 있었단다.]
갑자기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귀를 울리는 감각은 느끼지 못했다.
이 녀석, 머릿속으로 직접······!
놀라서 고개를 드니 천칭 위에 선 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자는 누구지,’
이 아이템의 성질.
비탄의 웅녀를 가볍게 칭하는 발언.
진족보다 더 강렬한 힘과 기품.
생각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니 짐작이 갔다.
천칭 위에 선 자는 상위 존재인 것 같다.
‘인간의 가능성을 지우는 건 상위 존재 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테니까.’
내 옆에 선 박승현은 들리지 않는지 작아지는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富)와 생명의 무게’는 너의 것이었지. 이건 거스름돈이란다. 유용하게 쓰길 바란다.]
천칭 위에 선 자가 눈짓을 하자 쥐고 있던 주먹 안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주먹 안에는 검지만 한 작은 유리병이 있었다.
[다음에는 무엇을 지우러 올지 기다리고 있겠다.]
천칭 위에 선 자는 후후, 하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멎었을 즈음에는 나와 박승현, 가해자 두 놈은 교직원 화장실에 돌아와 있었다.
‘백일몽이라도 꾼 기분이다······!’
하지만 손에 남은 유리병은 실재했다.
“이 새끼들, 기절했네.”
박승현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우리는 먼지투성이의 구교사 교직원 화장실 안에 있었다.
내가 꺼낸 현금으로 가득 찬 사과 박스들과 아이템 카드들, 지저분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두 개자식로 이곳은 난장판이었다.
‘저놈들은 내버려 두고 가자.’
일단 사과 박스와 아이템 카드들을 전부 회수했다.
부(富)와 생명의 무게를 하나 쓴 걸 제외하면 아무 손해도 보지 않았다.
“야, 슬슬 정리하고 튀자. 박승현.”
“응. 진짜, 진짜로 고마워.”
그는 아주 밝게 웃고 있었다.
이미 해는 완전히 저물어 버렸다.
우리 둘은 적당히 남아 있는 흔적을 처리한 후 두 개자식을 내버려 둔 채 폐쇄 구역을 떠났다.
“너도 기숙사생이었어? 몇 층이야? 난 17층.”
“난 20층이야.”
“꼭대기네. 20층은 어때?”
“엘리베이터가 늦게 와서 불편해.”
박승현도 기숙사생이라 함께 이동하게 되었다.
내가 왜 그 자리에서 튀어나온 건지, 왜 UR-급의 아이템을 소모하면서까지 이 난리를 친 건지.
궁금한 게 많을 텐데도 박승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고맙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시기심을 살 만큼 머리도 좋고 총명한 박승현이다. 현명하게 대처해 줄 거야.’
나와 박승현이 1학년 기숙사 건물 로비 1층에 도착했다.
그러자 학교 체육복을 입고 1층 로비 소파에 누워 있던 1학년생이 벌떡 일어나 이쪽으로 뛰어왔다.
“박승현, 디바이스 꺼 놓고 뭐 했냐. 왜 말도 없이 혼자 하교해, 의리 없는 새끼.”
“어, 어. 그냥.”
“뭐야, 너 울었어?”
체육복을 입은 1학년생이 박승현의 얼굴을 살펴보다 나와 그를 번갈아 봤다.
“무명의 초신성이잖아. 혹시 둘이 무슨 일 있었냐.”
박승현의 친구인 듯한 1학년생은 팔짱을 끼고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박승현은 허둥지둥 말했다.
“아니, 그냥······ 쟤가 내 고민 들어주느라.”
“······그래? 야, 디바이스는 배터리가 다 된 거야? 태양열 받으면 자동 충전되잖아. 내일부턴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가서 놀자. 배터리 충전도 할 겸.”
“배터리는 남았는데······ 어쩌다 보니 꺼져서.”
“뭘 어쩌다 보니야. 실없는 놈. 빨리 켜라.”
분명 그 개자식들이 묶어 버린 후 디바이스 전원도 꺼 버렸겠지.
박승현이 디바이스 전원을 넣는 것까지 확인한 체육복 입은 놈은 그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 가해자 두 놈은 곧 퇴학될 거다.
이제 박승현도 제 친구랑 평범한 학교생활을 보낼 수 있겠지.
“난 갈게.”
“어, 잠깐 조의신!”
박승현이 좀 머뭇거리다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하자고 제안해 왔다.
조금 의외다.
‘게임 속에선 적극적으로 사람과 사귀려 하지 않았는데.’
그 가해자 자식들 때문에 트라우마가 쌓인 탓에 박승현은 내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나는 기꺼이 디바이스 코드를 그와 교환한 후 내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만우절이 끝나 맞이한 4월 2일.
1학년 0반 등교생은 총 7명이 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