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청명, 하늘이 차츰 맑아지다 (1)
만우절 다음 날.
등굣길은 만우절에 있었던 장난질 사건들로 시끌시끌했다.
“시계탑 손 댄 범인 안 잡혔냐?”
“신문부 1학년인 문새론이었나? 걔가 취재한답시고 정문 근처에서 밤새 잠복했는데 못 잡았대.”
“게시판에 영상 올라온 거 봤는데 그냥 한순간에 확 원래대로 돌아옴.”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정문 시계탑은 네온사인 타워로 변했었다.
시계탑은 몇 초 사이에 귀신같이 원래대로 돌아갔고, 영상에 시계탑에 손을 댄 범인은 찍히지 않았다고 한다.
‘······시계탑에 무슨 이능을 쓴 건지 궁금한데.’
그 외에도 화제가 된 사건은 여럿 있었다.
호수 청랑호 저편에 등장한 공룡 그림자.
기숙사를 습격한 가짜 유령종 에너미 가스 사건.
연구동 구역 6번 온실에서 걸어 나온 거대 직립 보행 식물이 천익산까지 이동한 사건.
3학년 구역 모든 건물 13층의 미로화.
중앙 구역에서 1시간 떠 있다가 사라진 공중 정원.
등등이 화제가 된 사건들이었다.
“그래도 2학년 0반만큼 미친 자들은 없는 듯.”
“방송부도 대박이었는데 2학년 0반한테는 안 되더라.”
제일 큰 사건은 2학년 0반과 방송부의 정면 대결이었다.
‘게임에선 텍스트로만 봐서 나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작년 만우절, 당시 1학년 0반이었던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방송부에 잠입해 아침 수업종을 워터폰을 연주한 소리로 바꾼 게 그 대결의 계기였다.
‘호러 영화 효과음을 만들 때 쓰는 그 타악기······ 300만 원 정도 하는데 그걸 1분 동안 장난질하려고 사다니.’
워터폰 연주를 1분 간 수업종 소리로 내보내고 방송부는 유병장수할 만큼 욕을 먹었다.
작년 1학년 0반은 사과한다고 에어호텔 ‘이카로스’에서 파는 봄철 한정 벚꽃 복분자 다쿠아즈 20개 세트를 보냈다.
하지만 그 내용물 중 절반이 몸에는 매우 좋지만 혀를 죽여 버리는 맛의 한방 약재 다쿠아즈였다.
방송부는 한약 맛······ 아니, 사약 맛 다쿠아즈로 강제 복불복 게임을 한 셈이다.
이중으로 뒤통수를 맞은 방송부는 복수를 결심했다.
‘그 결과가 이건가······.’
올해 만우절 2학년 0반의 수업종은 거하게 테러당했다.
유리 깨지는 소리, 아기 울음소리, 저주파, 공사장 소음, 황병기의 미궁, Passenger of Shit의 This is Terror 등.
층간 소음 복수용으로 이름난, 거를 타선이 없는 음원 리스트의 향연이 만우절 내내 이어졌다.
2학년 0반은 이에 대응하여 방과 후에 방송부실을 점거하고 결계를 치며 농성전을 벌였다.
그리고 그 접전을 좋다고 학교 웹페이지로 생중계한 종군 기자들도 있었다.
‘제갈재걸 선생님 바쁘시겠네.’
역대 0반 중 현재 2학년 0반은 최강, 최악의 악동으로 꼽혔다.
그 명성에 걸맞게 방과 후에 방송부에 쳐들어간 걸 보니 수업 끝나기 전엔 다른 장난질을 치느라 바빴나 보다.
2학년 0반 담임 제갈재걸의 고생이 눈에 보였다.
‘우리 반은 진짜 얌전해.’
1학년 0반은 역대 가장 얌전한 0반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학교를 아예 안 나오고 있으니까.
그래도 오늘 1학년 0반은 입학 후 최고 출석률을 갱신했다.
“우리 반 이제 일곱 명이야. 며칠 사이에 거의 두 배가 됐어!”
김유리는 감격한 얼굴로 일곱 명이나 등교한 1학년 0반을 둘러보며 말했다.
남자는 넷. 나, 황지호, 맹효돈, 사월세음.
여자는 셋. 김유리, 한이, 이레나.
이렇게 일곱 명이었다.
‘이제 열여섯 명 중 일곱 명······ 아홉 명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밥은 먹고 다니냐.
한 달 내내 얼굴 한번 비추지 않은 아홉 명이 밥은 먹고 다닐지 궁금했다.
부반장이라 해도 출석부를 열람할 권한이 없어서 남은 아홉 명은 전부 알지 못한다.
게임에서 1학년 0반인 걸로 밝혀진 캐릭터라면 몇 명 알지만.
“사월세음입니다. 잘 부탁해요. 어제 뵈었던 분이네요. 어제는 맡기고 가서 미안해. 정말 감사했어요. 의······ 의신아.”
나보다 일찍 온 황지호와는 이미 인사를 마쳤는지 사월세음이 나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는 말을 마치기 전 내 명찰을 살짝 보고 이름을 불렀다.
아직 반말이 어색한 것 같다.
같은 반으로 1년 지내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그래. 잘 부탁해. 부반장 조의신이야. 기숙사에 들어간다고 했지? 나랑 맹효돈도 기숙사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네······ 응!”
그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김유리와 이레나가 사월세음을 보며 말했다.
“세음이는 성이 특이하네. 사월이란 성은 처음 들어 봤어.”
“이계 충돌 이후에 새로 생긴 성과 본이 꽤 된대. 법원에서 발표한 통계 보니까 신기한 성 많더라.”
“아, 그러고 보니 한이는 이름이 신기해. 성이 한, 이름이 이. 빨리 발음하면 ‘하니’라고 들려서 귀엽기도 하고.”
“어······ 김유리, 고마워.”
김유리, 이레나, 한이 셋은 꽤 친해진 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대화 주제가 바뀌어 셋은 서로의 이름을 칭찬해 주고 있었다.
“기숙사 몇 층이냐? 나랑 부반장은 17층이다.”
“같은 층이네요. 어제는 못 봤는데!”
“시간 맞으면 기숙사 밥 같이 먹자.”
“응, 효돈아! 어제 기숙사 밥 처음으로 먹었는데 식당 시설도 좋고 식기도 다 예쁘고······.”
맹효돈은 막 등교한 사월세음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배려해 말을 걸어 준 것 같다.
중학교 때 붕 떠 있던 맹효돈은 교실에 익숙해지지 않았을 때 얼마나 마음이 불안한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사월세음은 새처럼 재잘거렸고 맹효돈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며 맞장구쳐 줬다.
‘우리 반도 조금은 평범한 반다워졌어.’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제대로 끼지 못하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황지호.”
“······왔냐, 조의신.”
황지호는 평소대로 뭔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표정을 하고 있지만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은호의 후예 건으로 머리가 복잡한가 보다.
‘물어볼 게 많은데.’
붙잡은 웅족의 심문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은호의 후예를 보호하던 토족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보호한 은호의 후예 셋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이렇게 힘이 없어 보이는 황지호에게 묻고 싶지는 않아.’
황지호 옆에 자리를 잡고 말했다.
“야, 내년에는 꼭 하자.”
“뭐를?”
황지호는 그새 잊어버렸나 보다.
“만우절 장난. 같이 장난질하는 대신 도와주기로 했잖아.”
황지호는 그때 거래대로 아주 잘 도와줬다.
예상치 못한 일들 때문에 같이 만우절 장난을 치는 건 무산되었지만.
그는 아주 잠깐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다 크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래, 내년에는 학교를 뒤집어 놓자!”
이거 너네 학교다.
뭘 어떻게 뒤집어 놓을 생각이냐.
이사장의 장난질에 내년 은광고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황지호는 무슨 장난을 칠지 벌써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화제가 부활동으로 바뀌었다.
“신문부에서 온 메시지 확인했어?”
“어떤 거?”
“아침에 메시지 확인 안 했나 보네. 은광고 괴담이 최근 몇 개 늘어났잖아.”
은광고 괴담?
“기숙사를 덮친 의문의 붉은 번개와 구교사에서 유령에 홀려 아침에 발견된 두 명. 크게 소문은 안 났긴 한데 괴담 좋아하는 학생들이 은광고 커뮤니티에서 떠들고 있다.”
황지호는 마치 ‘그거 다 네가 한 짓이지?’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후자는 아마도 내가 한 짓이었다.
그래도 다른 하나는 너희 호족이 한 건데.
“이번에 신입생은 은광고 괴담을 조사하라는 게 부장 방침이야. 빵셔틀 매치 기사 작성이 끝난 조의신. 먼저 네가 열심히 해 줘야겠다.”
황지호는 그새 기운을 차리고 눈을 빛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 꼴이다.
‘앞으로도 바빠질 것 같네.’
오늘 수업종은 조지 거슈윈이 작곡한 ‘I Got Rhythm’이었다.
재즈 소모임과 피아노부, 현악부의 협연으로 원곡보다 조금 빠르게 편곡되어 있었다.
비브라폰 메인의 경쾌한 음색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1분은 금방 지나갔다.
* * *
토요일, 황명호 이사장의 대저택.
호족 셋과 후예 하나, 신수 하나가 있었다.
신수는 여전히 자신의 위엄을 잊고 백호의 품 안에서 애교를 부리고 있었고, 적호와 그의 후예는 황호를 면목 없어 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적호, 잡은 웅족의 심문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미안합니다, 황호. 이런 일은 제 후예가 적임이지만 그는 웅족을 상대로는 힘을 쓰지 못하니까요.”
“황호 님, 여러 방법을 시험해 보는 중입니다. 반드시 성과를 내겠습니다.”
“그래.”
황호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망할 달토끼들······ 토족과는 이야기가 끝났다.”
황호가 거실에 있는 두 호족과 후예 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빠르면 다음 주 주말, 늦어도 그 다음 주. 12지 동맹 회담을 개최한다. 빠지지 말고 참가해라. 주말은 늘 시간을 비워 둬. 백호, 적호, 김신록.”
황호는 한마디 덧붙였다.
“조의신을 부르는 것도 잊지 말고.”
* * *
오늘은 토요일, 유상훈과 약속한 주말이다.
우리는 점심에 만나 학교 근처 분식집에서 치즈, 떡, 계란, 라면 사리를 추가한 냄비떡볶이를 먹고 거기에 더해 김볶음밥까지 만들어 알차게 처먹었다.
소화시킬 겸 농구 하자는 유상훈의 제안을 받아 1학년 구역 운동장으로 왔다.
‘토요일인데도 사람들이 꽤 있네. 기숙사생들은 보통 지익회관에서 운동하니까 근처에 사는 놈들인가.’
말이 운동장이지 각 구역에서 시뮬레이터를 가동하면 선택한 종목에 맞춰서 알아서 경기장을 만들어 주는 시설이다.
주로 하고 있는 건 축구, 농구, 캐치볼, 배드민턴, 테니스였다.
명문 은광고의 플레이어들답게 프로 선수의 고급 기술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었다.
솜브레로 플릭, 호커스 포커스, 프리 드로우 라인 덩크와 총알처럼 학생들 사이를 오가는 공과 셔틀콕이 인상적이었다.
플레이어들과 일반인들의 운동 능력의 차이가 절절히 느껴졌다.
“조의신, 세팅 끝났다!”
유상훈이 운동장 한 구역에서 시뮬레이터를 가동하며 말했다.
시뮬레이터가 우웅― 하는 소리를 내자 바닥이 우레탄으로 바뀌며 코트 라인이 그려지고 골대가 생겼다.
“골대 1개, 반코트로 하자. 기본 득점은 1점, 3점 라인 밖에서 넣으면 2점. 21점 먼저 내는 쪽이 이기는 걸로.”
“그래.”
1대 1로 하다 보니 룰은 3X3을 적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약 10분 후.
내가 유상훈보다 조금 키가 큰 걸 제외하면 경험 등등은 전부 유상훈에게 밀렸기 때문에 참패했다.
현역 농구부가 너무 강했다.
변명 같아 보이지만 그는 강했다.
“아, 유상훈. 봐주질 않네.”
아슬아슬하게 더블 스코어는 면했다.
숨을 고르며 시뮬레이터 코트 옆 벤치에 앉았다.
“봐준 거다.”
“뭐래, 뭘 봐줘.”
열 받아서 농구공을 좀 세게 던져 봤지만 유상훈이 낄낄거리며 공을 한 손으로 가볍게 받았다.
1대 1이라 확인할 수 없지만 저 꼴을 보니 패스를 주고받는 능력도 끝내줄 것 같다.
‘슈팅 자세에 들어가면 그냥 들어가네.’
하루 이틀 만에 얻을 기술이 아니다.
옛날부터 농구했었나.
“너 어렸을 때부터 농구 했어?”
“······어, 아니.”
한 거냐, 안 한 거냐.
했는데 안 했습니다, 이런 건가.
“이능 생기기 전에는 몸이 약해서 밖에 못 나갔어. 생긴 다음엔 주변에 이능 가진 애가 거의 없어서 같이할 사람이 없었고. 혼자서는 했다.”
아, 그런 거구나.
함께 팀을 짜서 농구를 하긴 어려웠을 거다.
“은광고는 농구 같이할 애들이 많아서 좋아.”
유상훈이 손가락 위에서 농구공을 빙글빙글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도 벤치에 앉아 은광고 농구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루한 아침 훈련.
1,2학년과 3학년 사이에서 벌어진 농구 시합.
1,2학년 연합의 아쉬운 석패.
지나치게 열정적인 농구부 고문과 전문 코치의 농구 지도.
유상훈은 농구부의 비화를 아낌없이 풀었다.
‘유상훈이 말이 많네.’
평소보다 훨씬 많은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야, 한 판 더하자.”
“이번에도 안 봐줄 건데.”
유상훈이 드리블하며 말했다.
망할 놈.
여태까지 안 봐주고 했었나 보다.
격전 끝에 나는 또 그에게 졌다.
점수 차는 그럭저럭 줄일 수 있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몇 판 더했지만, 나의 전패로 끝났다.
우리는 오후 늦게까지 농구를 하다 기숙사로 향했다.
* * *
1학년 기숙사 건물 17층, 내 방.
“개 좋네. 둘이서 써도 넓을 것 같은데 혼자 쓰냐. 좋겠다.”
기숙사실을 둘러보며 유상훈이 감탄했다.
대충 기숙사실 구경을 끝내고 정문에서 받아 온 배달 음식을 거실에 늘어놨다.
오늘 배달 음식 메뉴는 집들이의 정석, 중국집 메뉴다.
짜장, 짬뽕, 볶음밥 각각 하나씩에 탕수육 중간 사이즈를 시켰다.
4~5인분에 해당하는 양이지만 배고픈 청소년 둘이 먹기엔 이걸로도 부족했다.
저 옆에는 간식으로 먹을 오리지널맛, 양파맛, 베이컨맛, 콘소메맛 등등의 감자칩 봉지를 쌓아 뒀다.
“야, 장남욱 약 올리자.”
“그래.”
우리는 기숙사실 내부가 잘 보이는 위치에 디바이스 카메라를 세팅하고 장남욱과 영상 통화를 연결했다.
통화 대기 시간 5초, 6초, 7초.
“뭐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장남욱은 평소보다 느리게 응답했다.
평소 꼬장꼬장하게 구는 만큼 연락은 칼같이 답하던 놈인데.
겨우 디바이스가 연결되었을 때였다.
“장남욱 보고 있냐, 은광고 기숙사 개쩔······.”
유상훈이 화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화면에 등장한 건 낯선 놈이었다.
누구냐 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놈이 쓰고 있는 건 장남욱의 안경이었다.
“너희들, 너무 화면과 가깝다. 홀로그램을 가까이에서 보면 시력이 떨어지니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라. 자세도 구부정해. 허리를 곧게 펴고 홀로그램을 응시해라.”
아주 어설픈 장남욱 흉내였다.
하는 말이나 말투는 똑같았지만.
‘이거 군사관학교 수석 놈이잖아!’
잘 보니 예전에 장남욱과 같이 인터뷰하던 그놈이었다.
한참을 장남욱 흉내를 내며 사관학교 수석이 우리를 향해 잔소리해댔다.
나와 유상훈은 얼빠진 얼굴로 수석 놈의 장남욱 성대모사를 지켜봤다.
“음······ 안 웃네.”
수석 놈은 우리의 반응을 보고 시무룩해 했다.
대체 뭐냐, 이 놈은.
유상훈도 내 옆에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그럼 비장의 개그를 보여 줄게. 기대해.”
조금도 기대되지 않았다.
“장남욱 군을 빠르게 발음하면······.”
저 뒤를 듣기 싫어졌다.
영상 통화를 꺼 버려야 하나, 하는 짧은 고민을 하는 사이.
나는 늦고 말았다.
“장나무꾼, 나무꾼. 하하하하!”
나와 유상훈은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 너머를 바라봤다.
한참을 혼자 빵 터져 있던 사관학교 수석 놈은 이쪽의 죽은 반응을 보더니 다시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민망한 침묵이 한참 흐른 후에야 장남욱의 목소리가 화면 너머에서 들렸다.
“야, 도시후. 장난치겠다고 광림을 쓰는 놈이 어디 있어!”
저놈의 정체는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고등부 수석 도시후였다.
차석인 장남욱과 룸메이트인 ‘특이한’ 놈이 이 녀석이었구나.
옷 여기저기가 너덜너덜한 상태의 장남욱이 드디어 화면 위로 나타나 도시후에게서 안경을 빼앗았다.
‘······장남욱도 고생하면서 살고 있구나.’
참고로 은광고에는 장난쳐 보겠다고 광림 스킬을 쓰는 미치광이들로 넘쳐 난다.
사관학교 고등부에선 수석이 그러고 다니나 보다.
“네 은광고 친구들이랑 얘기해 보고 싶어서.”
저 태도를 보니 평소에도 장남욱을 놀려 먹는 것 같다.
꼬장꼬장하고 성실한 장남욱을 골리는 재미가 남다르긴 하다.
“네가 그 무명의 초신성 조의신이구나. 옆에 농구공 끼고 있는 애는 유상훈이고.”
장남욱한테 얘기를 들었나 보다.
“유상훈, 농구부라고 했지? 나도 농구부야. 언제 학교 대항전 해 볼까.”
“그래, 하자!”
계속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상훈이 덥석 대답했다.
그 둘은 한참 동안 농구 얘기를 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각자 농구부 주장을 소개해 조만간 날을 잡을 모양이다.
은광고 vs 군사관학교 고등부 농구 친선 시합 얘기가 끝나자 이번엔 화제가 바뀌었다.
“너희들 주수혁 알아? 거기서 잘 지내고 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나왔다.
도시후의 말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게임 속에서 사관학교에 주수혁의 절친이 있긴 했다.
주수혁을 위해 암약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하는 인물이었다.
“도시후, 너 TC 그룹에 친척 있지 않아?”
내 질문에 그가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친척이 있다고 해야 하나······ TC는 우리 큰할아버지네 회사야.”
대한민국 4대 그룹 중 하나가 큰할아버지네 회사란다.
확실했다.
‘암살당한 게 아까울 만큼 치밀한 행적을 보인 놈이었는데.’
시나리오 중 4대 그룹 암투 편.
도시후는 주수혁을 살리기 위해 디바이스 메시지로 몇 번이나 암호를 섞어 중요한 정보를 전했었다.
게임 속에선 이름도 등장하지 않고 채팅 닉네임으로만 등장했었지만.
‘그게 이런 얼빠진 놈이었나······!’
장남욱이 옷을 갈아입고 재등장하자 우리 넷은 통성명을 하고 어쩌다 보니 디바이스 코드까지 교환했다.
도시후는 장남욱의 말대로 매우 특이한 캐릭터였다.
어쨌든 게임의 주요 스토리와 연관되는 인물이니 알아둬도 나쁘지 않을 거다.
아마도.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