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12지 동맹 회담 (2)
양족의 마지막 발언으로 다시 12지 회담은 병맛이 되었다.
戌[개같다고 말하는 놈이 제일 개같음] “부끄럽다. 잠깐 양 놈이 멋있다고 생각했었어.”
申[우주최강 제천대성] “너님은 잠깐이라도 멋있던 적이 없잖아요.”
戌[개같다고 말하는 놈이 제일 개같음] “필마온은 마구간 청소나 해라.”
午[예민한 흑마] “청소하러 올래?”
申[우주최강 제천대성] “내가 딱 봤어. 딱 봤다고.”
戌[개같다고 말하는 놈이 제일 개같음] “먼저 시비 턴 놈이 왜 성을 냄? 봐서 뭘 어쩔 건데. 실컷 보고 마구간으로 꺼져.”
견원지간의 만담이 이어졌다.
황지호는 ‘악몽’이라는 단어가 나온 이후 계속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엉망진창인 회담장을 보다 내게 물었다.
“조의신, 이 정도면 충분하나?”
“어.”
“알아냈나 보군. 악몽 건은 나중에 생각한다. 지금부터 나와 망할 달토끼가 나선다.”
옥토연은 붉은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오. 악몽이 무슨 복불복도 아니고. 설마 여기에 있는 건 아니겠지? 당분간 여기랑 다른 12지 근처엔 가지도 않을 거야.”
“환영한다. 반년 은광구에 접근하지 않는 조건으로 은광고 학교 식당에서 한 달 동안 달토끼떡을 급식으로 내놓는다.”
“콜!”
“계약 성립이다. 은호의 후예를 보러 왔다는 명목도 안 먹힌다.”
황지호가 의기양양하게 웃자 옥토연이 처음으로 여유를 잃었다.
“어! 그건 좀······ 아 취소할래, 취소! 난 그 애들 자주 만나고 싶은데!”
“구두 계약 이미 맺어진 거 알지?”
“······은호, 돌아와 줘.”
밀당과 말싸움은 황지호 쪽이 위였나 보다.
결국 옥토연은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후려치기, 불공정 계약을 맺게 되었다.
두 달간 은광구에 접근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달토끼떡을 1/3의 가격으로 한 달간 은광고 식당에 팔기로 했다.
‘학생 입장에선 개꿀이네. 급식으로 달토끼떡······!’
급 기분이 좋아진 황지호가 황금색의 눈을 반짝거리며 웃고 있었다.
“토윤이 언니한테 난 이제 죽었다······ 팔면 팔수록 손해잖아, 이거!”
“죽으면 조의금은 두둑하게 내주마.”
황지호가 오늘 본 얼굴 중에 가장 밝고 환한 미소를 짓다 아수라장인 회담장을 향해 일갈했다.
寅[호랑이님] “12지 회담의 개최자로서 명한다. 정숙!”
파앗―!
황지호의 일갈에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오던 문자와 음성의 나열이 멈췄다.
활발하게 문자와 음성이 오가던 회담장이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완전히 정지되었다.
마법진 밖에서도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다.
통신 당사자들은 더 확실하게 감지했을 거다.
酉[계룡산 구구탁예설락] “언제 봐도 저릿저릿한 마력이네.”
辰[만렙 청룡] “저 정도 되지 않았으면 내 동료와 후예는 맡기지 않았다.”
巳[탈피ing] “믿고 맡기는 신화계 호족.”
亥[나는나는저팔계] “귀 따갑잖아. 그런 건 말이야, 엉? 예고를 하고 써야지 말이야. 암, 진족 간이라도 예의가 있어야지.”
未[양Zzz] “아, 잠 깼네.”
양족 우두머리는 그새 자고 있었나 보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황지호가 음성에 마력을 실어 무겁게 말했다.
寅[호랑이님] “본론에 들어가지. 12지 동맹에서 배신자가 나왔다. 불가침 조약을 어기고 은광고의 결계와 호족의 후예를 공격한 자가 있다.”
잠시간 정적이 이어졌다.
卯[망할 달토끼] “나도 당했어······ 우린 전멸할 뻔했거든? 12지 동맹이 친 보호 결계가 제대로 무력화됐어. 우리 중 누군가, 그것도 우두머리급이 손을 댄 게 확실해. 공격한 본인은 알겠지만.”
寅[호랑이님] “노리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전원 명심해라. 이제 이 12지 동맹이 친 보호 결계는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침묵을 깬 건 용족이었다.
辰[만렙 청룡] “······용족의 수장으로서 선언한다. 용족은 호족에게 전면 협력하여 배신자를 잡아내겠다. 은광고를 노린다는 건 내 동족과 후예를 노린다는 것과 마찬가지.”
용족의 수장은 노기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辰(용)영역이 푸른 불꽃으로 일렁이는 게 강력한 이능파를 방출하고 있나 보다.
辰[만렙 청룡] “우리 후예, 특히 준열이 다치면 동맹이고 뭐고 너네 신역 다 불바다 될 줄 알고 있어라.”
申[우주최강 제천대성] “아, 알았다 알았어. 후예 없는 진족은 서러워서 죽겠네.”
辰[만렙 청룡] “죽으면 되겠군.”
戌[개같다고 말하는 놈이 제일 개같음] “원숭이는 좀 뒤졌으면.”
이 아수라장같은 회담장 분위기가 장시간 진지해지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子[꾀돌이 쥐] “이계 충돌이 가장 먼저 일어난 한반도. 그리고 이 한반도에서 최고(最古)의 신화가 새겨진 호족의 신역. 뭐, 호족과 용족······ 덤으로 토족의 분노를 사고도 노릴 만하군요.”
酉[계룡산 구구탁예설락] “천신님만 아니었으면 당장 쳐들어가서 드러눕고 싶긴 해.”
午[예민한 흑마] “이젠 마족(魔族)말고도 배신자까지 신경 써야 하나? 아······.”
丑[우직한 소] “우리 진족 존재 파이팅^_^!”
巳[탈피ing] “다음에 상위 존재님 계시 내려올 때 상담 좀 해 본다.”
未[양Zzz] “악몽에 배신자에······ 지력만 아니면 바로 한반도 떴다.”
회담장은 분위기는 천천히 잦아들었다.
배신자도 배신자가 아닌 진족도 이번 일에 대응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해야 할 테니 자연스레 파장 분위기가 되었다.
寅[호랑이님] “물론 당한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예정이다. 배신자가 밝혀지는 즉시, 12지 동맹의 약조에 따라 배신자는 퇴출하고 단죄할 것이다.”
卯[망할 달토끼] “나도! 걸리면 다 뒤졌어!”
황지호가 멋있는 말을 하고 있지만 옥토연의 깨방정에 분위기가 영 안 산다.
황지호는 꿋꿋하게 마무리를 했다.
寅[호랑이님] “우리 사이에 인사 같은 건 필요 없겠지······ 다음 회담은 배신자를 단죄하는 장이 될 거다. 이상이다.”
황지호의 말이 끝나자 마법진이 조금씩 빛을 잃어 갔다.
그때.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차원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들어 보는 시스템 문구였다.
〈스킬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의 스킬 레벨이 2에서 3으로 상승합니다.〉
한반도의 12지 동맹의 수장들과 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요 사건들의 배후에 있던 범인을 추측해 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레벨업은 언제나 감사한 일이었다.
‘그럼 확인해 볼까.’
전용 메뉴 레벨 상승으로 개방된 메뉴는 ‘로그 다시 읽기’.
게임에서 특정 맵에 입장했을 때, 맵에서 있던 대화 기록을 다시 읽는 기능이었다.
‘대화량이 많거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로그가 지워지는 것 같긴 한데······ 정보 수집이나 정보 재확인에 유용하겠군.’
12지 회담 기록도 충실하게 남아 있었다.
한편 내가 새 전용 메뉴를 확인하는 동안 마법진의 가동이 완전히 멈추고, 황지호의 눈과 머리카락 색도 평소의 색으로 돌아왔다.
“자, 조의신. 그럼 네 말을 들어 볼까. 일단 자리를 옮기지. 이 자리는 마력, 이능력, 성력 밀도가 지나치게 높아서 오래 있을 곳이 못 돼.”
* * *
1층, 응접실.
오토매틱 메이드가 내온 차는 송화밀수, 소나무의 꽃가루 송화가루를 꿀물에 풀고 잣을 띄운 전통차였다.
송화밀수는 상감 기법으로 제작한 청자 잔에 담겨 나왔다.
곁들여진 다과는 옥토연이 가져온 것으로 추측되는 달토끼떡 세트였다.
“음······ 수상한 말을 하는 애들은 없었던 거 같은데! 다들 머리가 이상한 거 같긴 했지만.”
“내용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용 외적인 문제가 단서가 됐겠군.”
옥토연, 황지호 두 떡보가 진달래 화전을 먹으며 말했다.
사이는 더럽게 안 좋은데 음식 취향은 맞나 보다.
“황지호, 네 말이 맞아. 범인 중 하나를 알아냈어.”
“범인 중 하나······? 조의신이 알아낸 배신자는 혹시 꼬리가 짧습니까?”
황지호, 적호 둘 다 날카롭다.
적호의 질문에 답했다.
“맞아요. 꼬리가 긴 배신자는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게임 속. 주수혁의 1학년 말.
적호는 점점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절망했다.
어쩌면 12지 동맹 중에 배신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증거를 잡지 못한다.
진짜 적이 웅족뿐인지, 아니면 그 밖에도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적호에게 몇 없던 행운이었어.’
어느 날 적호는 우연히 안다인을 훈계하는 교사를 목격했다.
그는 안다인을 걱정해서 안절부절못하고 긴 시간 숨어서 훈계를 같이 듣는다.
거의 1시간가량 그 개소리를 들었을 때.
적호는 그 교사가 12지 동맹의 한 우두머리와 흡사한 말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사용하는 어구, 어조, 톤, 말하는 속도 등등.
성대모사라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확신은 전혀 없었겠지만 적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교사를 철저히 조사했을 거야.’
그리고 그 결과.
적호는 그 교사가 은광고 환경 보호 구역 안에 퇴폐 업소를 다섯 개나 차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죽은 김신록이 맡기로 한 1학년 1반 담임, 지익회 고문을 꿰차고 있다는 것도.
그 교사의 이름은 최편득이었다.
‘적호는 12지 우두머리의 말버릇을 알았기에 최편득을 잡았었어. 역으로 생각하면, 최편득의 말버릇을 분석하면 그 우두머리를 잡을 수 있게 되는 거야.’
말버릇은 서로 옮고 전염된다는 말이 있다.
최편득이 접하는 ‘높으신 분들’ 중, 가장 높았던 사람은 그 진족의 우두머리였다.
최편득은 의도한 건지, 무의식적인지 몰라도 그 우두머리와 몹시 흡사한 말버릇을 갖게 되었다.
그 높으신 분들에게 죽고 못 사는 최편득이라면 의도적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최편득의 역겨운 수업을 참고 들은 보람이 있어.’
공청훤의 수업을 듣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그 이유만 있었다면, 수업 중에 귀마개 아이템을 쓰거나 땡땡이를 쳤을 거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참고 앉아서 그 개소리를 들어 줬었다.
‘그 시간에 철저히 최편득의 말투를 분석했었지.’
어조, 억양, 말버릇, 말하는 속도.
플레이어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기억해 왔었다.
그리고 그 덕에 진족 중에 최편득이 말투를 흉내 낸 오리지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최편득이 쓰던 말. 그거 자기가 접촉 가능한 사람 중 가장 높으신 분을 흉내 낸 겁니다.”
말끝에 붙이는 ‘말이야’.
‘크흠’ 하는 기침 소리.
‘엉?’ ‘암’ 하고 중간중간 끊는 소리.
그 외에도 말의 톤이나 속도.
모든 진족의 우두머리 중 이 특징을 가진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그 최편득과 매우 흡사한 말버릇을 가진 종족은 돈족입니다.”
최편득을 심문할 때 말하는 꼴을 보니 상대가 진족인 건 알아도 돈족인 줄은 모른 것 같았지만.
호족의 통수를 쳐야 하는 상황에서 최편득 같은 놈한테 돈족이 제 정체를 밝히는 리스크를 질 리가 없긴 하다.
김신록과 적호가 기억을 되짚어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돈족의 우두머리의 말을 들은 적이 없어서 잘 몰랐습니다. 지금 떠올리면 확실히 닮았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최편득의 말을 들은 건 심문할 때뿐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그리고 근거는 적호가 남긴 단서, 말버릇만 있는 게 아니다.
“근거는 하나 더 있습니다.”
황명호 이사장의 무관심 속에 은광고는 오랜 시간 개판으로 굴러갔다.
그간 망하지 않은 건 훌륭한 교사와 학생들의 의지에 의해서다.
“천익산과 거주 구역은 오랜 기간 야생 멧돼지의 침입에 시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지익회가 생기기 전까지 사감들과 관리자들의 태만, 횡령과 착복으로 수습이 전혀 되지 않았었죠.”
맹효돈에게 고기 싸대기를 맞고 이레나에게 리본을 건넸던 그 날, 지익회관에서 회의록을 읽어 확인했다.
작년 회의록에도 지익회에서 야생 멧돼지 퇴치 파티를 구성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15년간 지익회의 가장 큰 업무 중 하나는 ‘야생 멧돼지 퇴치’였습니다.”
게임에서 보상이 구려서 아무도 하지 않는 프리 퀘스트.
‘기숙사에 쳐들어온 야생 멧돼지를 퇴치하라’.
그 퀘스트를 발주한 건 지익회였다.
어쩌면 최편득을 시켜 지익회 고문을 맡게 하려 한 것도 지익회를 장악해 방해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천익산의 지맥을 끊어 놓은 범인. 그거 돈족일 겁니다. 야생 멧돼지들에게 대단한 힘은 없겠지만 수십 년에 걸쳐 천천히 산의 급소를 노려 파헤친다면 지맥을 끊는 건 가능하겠죠. 최근 15년간 지익회에 의해 진행이 늦어졌겠지만요.”
에너미도 권속도 아니지만 돈족이 야생 멧돼지에게 암시를 걸어 움직이게 하는 건 일도 아닐 거다.
그리고 은광고의 보호 결계는 야생 동물의 침입을 막을 수 없다.
“김신록 선생님이 살아남고 최편득이 토벌되면서 그들은 지익회 장악에 실패했죠. 또 신수인 올무가 보호된 뒤 천익산 조사에 들어가면서 몸을 사리는 건지 야생 멧돼지의 침입은 뚝 끊긴 것 같습니다.”
파티 모집 게시판 이력 중, 올해 지익회에서 야생 멧돼지 토벌 파티는 없었으니까.
“긴 꼬리는 아니니까······ 다른 진족 중에 배신자가 하나 더 있겠죠. 아직 남은 배신자는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을 말하는 건 끝났다.
호족 셋, 토족 하나, 호족과 웅족의 후예 하나.
이 중에서 내 말에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돼지 새끼들.”
옥토연이 반쯤 먹던 떡을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얘 생각이 맞는 거 같은데? 돼지들은 결계를 잘 못 다루잖아. 은광고 입학시험 얘기 들어 보니까 엄청 섬세하게 건드린 거 같더만. 진웅팔선이 손댄 건지, 12지가 손댄 건지 알지 못하게 교묘하게 했잖아. 아마 좀 더 능숙한 놈, 꼬리 길다는 놈이 그랬을 거야.”
황지호가 반박을 안 하는 거 보니 옥토연이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제 잘못입니다. 지익회 고문으로 3년이나 있으면서도 야생 멧돼지의 움직임에 의문을 표하지 못했습니다.”
김신록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건 다른 단서가 없으면 알기 어려웠을 거다.
야생 동물이 쳐들어오는 건 산을 끼고 있는 대한민국 기숙사 대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SNS를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대학 기숙사를 습격한 고라니와 멧돼지 사진을 볼 수 있을 거다.
적호가 김신록을 감싸듯 화제를 바꿨다.
“돈족을 시작으로 천천히 그 긴 꼬리를 잡으면 될 겁니다. 12지 전체를 감시하는 건 어렵지만 돈족 하나로 좁힌다면 문제없습니다. 당분간 은광구를 비우게 되겠군요.”
“응. 그럼 우리 쪽에서도 한 명 정도 보낼까. 돼지 새끼들, 다 죽었어!”
적호와 옥토연의 말이 끝나자 황지호가 말했다.
“내 오랜 방관이 상황을 여기까지 만들었군.”
간만에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은 황지호다.
“나는 눈빛이 바뀐 내 친우들도 은호가 남긴 후예들도 이 학교와 지금 다니는 1학년 0반도 마음에 들어. 이제부터 나도 진심을 다해 움직인다.”
황지호는 적호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적호, 너무 위험한 일은 하지 마라.”
오늘 12지 동맹 회담.
가장 큰 수확은 방관자 황지호에게 의욕이 생겼다는 걸지도 모르겠다.
* * *
저녁까지 먹고 기숙사로 향하는 길.
올무와 산책을 위해 백호군과 함께 나왔다.
올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나와 백호군이었다.
직접 리드를 입에 물고 현관에서 대기하던 올무가 산책하러 가자며 우리 둘에게 들이댔다.
내가 돌아가는 길까지 같이 있고 싶다는 거다.
백호군은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에스코트하란 뜻이겠고.
‘저번에 애교를 부리며 잡는 걸 그냥 두고 갔더니 다른 방법을 떠올린 것 같네.’
이건 어쩔 수 없다.
귀여운 데다 똑똑한 올무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함께해야 했다.
솔직히 기숙사 애완동물 반입 금지만 아니었다면 신수고 호족이고 뭐고 그냥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
왕왕―!
“그러다 다친다.”
오늘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백호군이 들떠서 마구 달리는 올무에게 말했다.
과묵한 백호군도 올무 앞에선 어쩔 수 없구나.
그래, 이해한다.
백호군이 입을 연 김에 궁금했던 걸 물어야겠다.
“악몽이 뭐야?”
진족들은 12지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보다 악몽이라는 말에 격하게 반응했다.
대화 내용으로 추측해 봤을 때 ‘현세에 개입 권한이 큰 상위 존재’라는 건 알겠다.
자칫하면 진족의 우두머리를 삼켜 버릴 만큼 강력하다는 것도.
“너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다. 조의신.”
동문서답이 나왔다.
더 자세히 설명해라, 항의의 의미를 담아 백호군을 쳐다봤다.
하지만 백호군은 저 할 말만을 했다.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을 해라.”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게 많긴 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추궁하기가 어려웠다.
* * *
올무와 기나긴 산책과 눈물겨운 이별을 마치고 기숙사에 도착했다.
디바이스 알림을 켜니 온갖 메시지와 동영상, 사진 등이 쏟아졌다.
‘이걸 다 언제 확인하지.’
내용물은 은광고와 군사관학교 고등부 1학년 사이에 있었던 농구 시합에 관한 것들이었다.
시합 영상을 보던 중 알던 얼굴이 꽤 보여 놀랐다.
‘주수혁과 방윤섭도 여기에 참가했네.’
생각해 보면 이번 농구 시합을 주도한 도시후의 절친 주수혁이 안 올 리가 없었다.
코트 너머에 간식으로 사 온 듯한 빵 더미가 있는 걸 보니 주수혁이 방윤섭을 빵셔틀시키는 김에 끌고 갔나 보다.
‘저건 내가 낸 빵값으로 살 수 있는 양이 아닌데. 주수혁이 한턱 낸 건가.’
인원수상 학교당 두 팀이 나와서 네 팀이 토너먼트식으로 농구 시합을 진행했다.
결승에서 만난 건 은광고A팀과 사관학교B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학교 대항전으로 하자며 이미 패배한 팀에서도 교체 선수를 뽑아 와 대접전을 벌인 모양이다.
‘내 빵셔틀 방윤섭이 또 사고를 쳤구나······.’
2쿼터에 방윤섭은 온갖 파울과 초보나 할 법한 실수로 혼자 30점을 넘게 헌납했다고 한다.
더 웃긴 건 이놈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온 힘을 다해 열심히 했는데도 저렇게 된 거라 한다.
그리고 3쿼터에 방윤섭과 교체로 주수혁이 들어갔다.
만능 먼치킨 주수혁은 화려한 플레이로 시합을 제압하며 방윤섭이 낸 실책을 무섭게 커버해 나갔다.
‘괜히 주인공이 아니네······ 농구도 잘할 줄은 몰랐는데.’
주수혁의 독무대나 다름없는 3쿼터가 끝나고.
4쿼터에 군사관학교 팀에 도시후가 투입되어 주수혁을 1 대 1로 마크해 은광고는 주춤했다.
2점 차로 은광고가 밀리던 상황.
남은 시간은 5초.
그 마지막 순간에 주수혁의 패스가 유상훈의 3점 슛으로 이어져 버저비터를 꽂고 은광고가 대역전승을 거뒀다.
[유상훈] 이겼다. 보이냐! 영상 다 보면 감상 ㄱ
[장남욱] 아 진짜 아깝게 졌다······ 아쉽다······.
오늘 경기 MVP로는 주수혁이 뽑혔지만 득점왕은 유상훈이었다.
장남욱은 큰 키를 살려 좋은 디펜스를 보였지만 기술이 딸리니 어쩔 수 없었다.
[유상훈] 니 빵셔틀 울었음
첨부된 사진을 보니 방윤섭의 퉁퉁 부은 얼굴이 있었다.
전에 맹효돈한테 예선에 털렸을 때도 울었다 하더만 눈물샘이 약한 놈인가 보다.
내 빵셔틀이 운 사진 밑으론 단체 사진이 있었다.
흰 티셔츠는 은광고, 검은 티셔츠는 군사관학교.
티셔츠 색은 달랐지만 다들 사이가 좋아 보였다.
‘다들 사이가 좋아 보이네.’
승패가 갈렸어도 감정의 앙금 같은 건 없는지 학교 가릴 것 없이 어깨동무를 하고 친한 척하고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었다.
내가 12지 회담을 가장한 병맛 토크를 듣는 동안 이놈들은 청춘을 즐겼구나.
‘하루만 날짜가 달랐어도 12지 회담, 농구 시합 둘 다 갔을 텐데······.’
하지만 인생과 시간은 한정된 것.
원하는 걸 다 갖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게 이 은광고의 중간고사 기간이다.
곧 중간고사가 시작된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