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5화 (45/925)

14. 중간고사 (1)

은광고 거주 구역.

1학년 기숙사 건물 10층, 어느 기숙사방.

그 방의 주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었다.

시야를 어둡게 하지 않으면 보이는 붉은 얼룩, 검은 얼룩, 검붉은 얼룩, 얼룩······.

검붉은 얼룩은 그녀의 일상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대체 왜, 왜······!’

처음에는 단순히 눈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받을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받았다.

정밀 시력·시야 검사, 안압 측정 검사, 색각 이상 검사, 안저 촬영, 각막 표층 촬영 등등.

처음에는 중앙 구역 제1양호실에서, 두 번째는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안과에서, 세 번째는 대학 병원에서.

하지만 세 차례 모두 정상으로 판단될 뿐.

‘이제는 눈만 아니라 귀에도······.’

이어링 타입 디바이스를 착용하면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신경을 건드리던 작은 이명은 어느 순간인가 점점 커져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단순히 디바이스 문제라 생각해 교체 신청을 했었다.

새 디바이스를 지급받았을 때.

[으흐흐흐, 하하하하! 끄끄끄! 끼끽, 흐흐, 으흐하하하하하!]

착용한 순간 디바이스에서 기괴한 웃음소리 들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디바이스를 던져 버리고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다시는 열어 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시험 기간을 맞이해 오락 기능이 붙어 있는 디바이스를 멀리하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어링을 착용하지 않는 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혹시, 환혹계 에너미에 홀린 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환혹계 에너미가 은광고 보호 결계를 뚫고,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 플레이어의 정신을 장악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자신이 미쳤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었다.

‘안 돼······ 정신병자 취급받을 거야. 싫어······.’

요즘 들어 더 자주 부모님 생각이 났다.

입학식에서 중앙 대강당 상인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걸 마지막으로 부모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꿈꿔 왔던 은광고 생활을 즐기느라, 최근에는 디바이스 사용을 하지 못해 연락이 뜸해졌던 차였다.

‘엄마 목소리만 듣고 끊자······! 잠깐만, 아주 잠깐만.’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침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책상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었을 때.

“꺄아아악!”

피였다.

책상 서랍 안이 붉은 피로 가득했다.

안에 있던 모든 내용물이 피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피는 점점 그 양이 늘어나 책상 서랍 밖으로 흘러나오는데······.

똑똑.

“나 다인인데.”

기숙사 옆 방, 안다인.

기숙사 오리엔테이션에서 옆자리에 앉고, 방이 가깝게 배정된 안다인.

절친이라는 김유리만큼은 아니지만, 자신과도 꽤 친해졌다.

‘다인아······!’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큰 소리가 들려서. 벌레 나왔어?”

안다인의 손에는 벌레 퇴치 스프레이 세 종류가 들려 있었다.

명문고의 철저한 보안과 방역 업체의 관리도 천익산을 타고 오는 날벌레를 막을 수 없어 스프레이는 기숙사생의 필수 용품이었다.

“······아니야.”

벌레보다 더 무서운 게 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 사이에 정상으로 돌아온 방이 보였다.

평소 시야 한구석에 보이던 검붉은 얼룩도 보이지 않았다.

은광고의 수석, 역대 최고의 학생으로 꼽히는 완벽 초인 안다인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교지 편집부에서 무슨 일 있었어? 전에 힘들다 했었잖아.”

“아냐. 괜찮아.”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양호실 갈래?”

“괜찮아······.”

“정말 괜찮아?”

“괜찮다고!”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러 버렸다.

요새 정신이 과민해져 기분이 미친 듯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안다인이 와 줘서 안심했는데 왜 소리를 질러 버린 걸까.

곧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는 건 불가능했다.

“······다인아, 미안.”

“괜찮아. 나도 너무 따져 물어봐서 미안해. 그럼 쉬어.”

안다인이 부드럽게 답해 줬다.

누가 봐도, 자신이 봐도 걱정해서 달려온 그녀에게 화풀이한 꼴이 되었다.

구제 불능의 쓰레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달칵.

안다인이 방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고.

다시 검붉은 얼룩이 시야를 가렸다.

*    *    *

12지 동맹 회담이 끝나고 다시 주중.

월요일.

중간고사는 다음 주부터다.

즉, 앞으로 중간고사는 일주일가량이 남은 셈이다.

‘부지런한 애들은 미리 공부하고 있었겠지.’

지난 주 토요일에 거하게 농구 시합을 치르고 뒤풀이도 화려하게 한 은광고와 군사관학교 고등부 1학년생 같은 놈들도 있지만.

보통은 2~3주 전부터 중간고사에 대비하는 게 보통이다.

‘부활동은 오늘부터 휴부구나.’

방송부도 수업종을 전부 예약해 두고 휴부 중이다.

“나는 멍청이 또라이 등신이다. 나란 등신, 못난 등신······.”

“3 .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0······ 하, 왜 시험이랑 1도 상관없는 거만 이렇게 잘 외워지냐.”

“나 선택한 과목 중에 국어 과목 없는데 어젯밤에 관동별곡 암기했다. 존잼이던데.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 關관東동 八팔百ᄇᆡᆨ 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그만해, 미친놈들아!”

기숙사 식당엔 이미 시험 스트레스로 미쳐 가는 학생들로 넘쳐 났다.

‘자유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지.’

은광고는 자유를 중시한다.

출석률조차 내신에 반영되지 않는 그 자유로움은 전국 제일일 거다.

그러나 최고의 명문고답게 은광고의 정규 시험은 사악하고 악랄한 난이도로 악명 높았다.

정규 시험이란 각 학기별 중간고사, 기말고사.

3년 내내 등교하지 않아도 졸업이 가능한 은광고였지만, 1년 동안 네 번의 시험은 반드시 치러야 진급이 가능했다.

낙제점을 받으면 보충 수업과 추가 시험이 기다리고, 여기서도 제 점수를 못 내면 유급 확정이다.

‘수업 중간에 보는 미니 테스트같은 건 내신에 반영되지 않으니까······ 평소에 잘해도 정규 시험을 말아 먹으면 끝이야.’

또한, 등교가 불가능한 학생들은 원격 시험을 치르는 게 가능했다.

원격 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커닝 방지 주술이 수십 개는 걸린 헤드기어를 착용해야 하지만.

‘게임 속에서 맹효돈은 낙제를 겨우 면한 점수를 받은 걸로 조작되었지. 실종 처리된 사월세음은 그대로 유급이 되어서 구출된 시점에선 1학년부터 다녔어야 했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등굣길을 걸었다.

등굣길에 조성된 벚꽃 길에 벚꽃이 만개했지만, 학생들은 죽어 가고 있었다.

이동 중에 디바이스로 암기 과목을 체크하고 있는 학생들.

염불 외우듯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놈들.

이들을 보니 시험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시험 분위기가 가장 나는 건 파티 모집 게시판이지.’

은광고의 시험 기간 명물, 스터디 파티.

디바이스로 열어 본 파티 모집 게시판에는 온갖 스터디 파티 모집글이 가득했다.

[자율 열공팟. 하루 순공부시간(수업 시간 포함) 12시간 이상만. 공부 시간 조작 발각 시 종합 게시판 박제 간드아! (9/10)]

[플레이어 특별법Ⅱ, 시험 범위 모든 법조항 완벽 암기 파티. 아침 테스트 정답률 80%이하 칼강퇴 (8/10)]

[※3학년 한정※ 빙하 미궁 공략 실기 연습. 다섯 바퀴 돕니다. 원딜계, 서폿 모셔요. (6/10)]

[에너미학 개론······ Aㅏ······ 선생님은 착한데 시험 범위는 안 착하다······ 생존 파티 (4/10)]

[♬작곡부♬ 지금까지 만든 자작곡 들으면서 공부하자! 매너만 지켜 주시면 작곡부 아닌 분도 ㅇㅋ (8/10)]

[편득아, 평생 (지옥불)꽃길만 걷자! 현상 수배범 최편득을 까며 빡공하는 팟 (10/10)]

[최편득 까팟2 (10/10)]

[ㅊㅍㄷ ㄲㅍ3 (9/10)]

몇 개는 참가해 보고 싶다.

특히 뒤에 있는 스터디 파티.

유쾌한 최편득 토벌 파티에는 못 들어갔으니 저 까팟이라도.

하지만 중간고사를 앞두고, 시간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선택은 신중해야 했다.

‘일단 우리 반 분위기를 확인하고 스터디 파티에 들어가자.’

우리 반 중에 낙오자가 생기는 건 싫었다.

*    *    *

1학년 0반 교실.

예상대로 교실 분위기는 평소보다 어두웠다.

“유급하면 어떡하지······.”

이레나가 겁에 질린 얼굴로 단정한 손 글씨로 정리한 노트를 보며 말했다.

김유리가 옆에 붙어서 이레나를 격려해 주고 있었다.

“겹치는 과목은 도와줄게! 난 기숙사생이 아니라서 학교에 있을 때밖에 못 봐주지만······.”

남자 중에선 황지호······ 이놈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그래도 일단 물어는 보자.

“황지호, 너 시험은 어떻게 볼 거냐.”

“낙제점은 면할게.”

밑에 깔려 주겠다는 뜻이구나.

양민 학살을 시도해 은광고 학생들 멘탈을 박살 내려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훌륭하다, 황지호!

‘사월세음은······ 한 달 치 수업을 빼먹었으니 공부할 분량이 좀 많아서 고생은 하겠지만 낙제점 걱정할 필요도 없을 거고.’

내가 가장 걱정하는 건 맹효돈이었다.

맹효돈은 태어날 때 재능, 스탯 등을 본인의 개사기 스킬과 힘, 체력에 몰빵한 근육뇌 캐릭터였다.

그는 종이 교과서를 보며 굳어 있었다.

“영웅은 공부 따윈 안 한다네······.”

미친 건가.

그가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검은 건 글씨, 하얀 건 종이······.”

맹효돈이 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말려야겠다.

그가 구출된 건 3월이라 과목 변경이 가능했다.

아마 그때 모든 수업 과목을 다시 짰을 텐데, 실기 위주로.

공통 과목은 어찌할 수 없었겠지만.

“너 이번에 필기는 ‘플레이어의 전투 이론1’밖에 없지 않아? 그거 거의 실전을 글로 옮긴 거라 용어 몇 개만 암기하면······.”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맹효돈의 손에 들려 있는 건 플레이어의 전투 이론1 개념서가 아니었다.

“그거 수학책이야? 설마 수학 선택했어?”

내가 잘못 본 거였으면 좋겠다.

“그럼 이게 뭘로 보이냐, 부반장아.”

맹효돈이 내 눈앞에 수학 교과서를 펼쳐줬다.

대단원, 다항식.

소단원, 다항식의 연산.

그 큼지막한 글씨와 몹시 깨끗한 교과서를 보고 깨달았다.

‘1단원도 끝나지 않았구나!’

내가 들어갈 스터디 파티가 결정되었다.

“기숙사생 중에 밤에 모여서 스터디할 사람.”

맹효돈은 강제 참가다.

*    *    *

방과 후, 지익회관.

로비에서 스터디 룸을 배정 중인 지익회 사람들이 보였다.

지익회장 성시완이 나를 보고 바로 아는 척해 줬다.

“아, 의신이 왔구나! 1학년 0반 아이 중 다섯 명, 기숙사생 전원 스터디 모임에 참가한다 했지?”

“네. 스터디 룸 잡혔나요?”

“응! 의신이네는······ 지익회관 스터디 룸 존 2층 210호. 비밀번호는 0000으로 설정되어 있어. 중간고사 끝날 때까지 편한 대로 바꿔 써.”

성시완이 홀로그램을 보면서 스터디 룸 안내를 해 줬다.

“첫 중간고사 힘내. 효돈이, 세음이, 한이, 레나도.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자, 여기 간식.”

“올해 1학년 0반 애들은 너무 착하게 지내 줘서 특별히 더 챙겼다!”

성시완 옆에 있던 지익회 소속 임원들이 먹을 게 가득한 박스를 내밀었다.

견과류, 말린 과일, 삶은 달걀, 카카오가 들어간 과자, 초콜릿, 저지방 요거트, 두유······.

건강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허기를 달랠 만한 간식들이 잔뜩 있었다.

단것에 사족을 못 쓰는 한이가 옆에서 냉큼 박스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나를 필두로 우리 반에 있는 기숙사생, 맹효돈, 사월세음, 한이, 이레나가 인사를 한 후 다 같이 스터디 룸으로 이동했다.

“와, 스터디 룸은 처음 와 봤는데 엄청 좋네요!”

스터디 룸 210호.

눈의 피로함을 덜어 주기 위한 어두운색의 벽지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10명이 둘러앉아도 넉넉한 테이블 주변에는 장시간 앉아 있어도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설계된 인체 공학적인 의자들이 있었다.

한구석에는 밤샘할 학생을 배려한 건지 한 명 정도 누울 수 있는 크기의 카우치가 놓여 있었다.

모여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장소답게 꾸며진 곳이었다.

“한이야, 진짜 미안······.”

“괜찮아, 가르치면서 공부도 되니까.”

한이는 이레나 옆에 앉아 차근차근 개념을 설명해 갔다.

언뜻 듣기에도 논리 정연하고 핵심을 꿰뚫는 설명들이다.

‘공청훤의 제자답네.’

공청훤의 에너미학 개론은 착하지 않은 시험 범위만 제외하면 정말 훌륭한 수업이니까.

“전 대학은 가지 않고 바로 프로 팀에 들어가거나 가업을 도울 생각이어서요. 수학은 선택하지 않아서 도움이 되지 않겠네요.”

사월세음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거로 미안해하다니.

맹효돈이 정신이 나간 선택을 한 것뿐인데 네가 뭔 잘못이겠냐.

“수학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사월세음의 질문에 맹효돈이 툭 뱉었다.

뭘 하다 보니까야.

맹효돈이 특별 전형으로 들어온 걸 뻔히 아는데 함근형이 수학을 권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나밖에 도울 사람이 없네.’

어차피 내 시험 범위 공부는 대충 끝난 상태다.

맹효돈의 새로운 도전을 도와 보자.

“수학 어디까지 끝냈어? 솔직하게.”

“······인수분해.”

어, 의외네.

그거면 다항식의 세 번째 파트에 해당한다.

1단원은 끝난 건가.

“중학생 때 인수분해는 완벽하게 익혔다.”

완벽하게 망했다.

고1 때 배우는 인수분해가 아니라 중3 1학기 때 배우는 그 인수분해 말하는 거였나.

*    *    *

맹효돈과 수학과의 처절한 싸움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수요일.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선거, 총선이 치러지며 법정 공휴일이 되었다.

말이 휴일이지 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수업 없이 자습할 날이 하루 더 늘어난 거다.

“하하하······ 어제 수업종이었던 화학 원소 주기율표 암기송이 계속 머릿속을 돌아. 나 화학 선택 안 했는데!”

이레나가 절망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업을 한 달 빠진 탓에 해야 할 공부량이 만만치 않아 피폐해진 사월세음이 힘없이 말했다.

“작년에는 누가 장난쳐서 수능 금지곡을 틀었대요······.”

수능 금지곡.

듣고 나면 쉽게 잊히지 않아 집중력을 떨어뜨린다는 금단의 노래.

누가 시험 기간에 그걸 틀었단 말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2학년 0반에 소속돼 있는 놈이 그랬을 것 같은데.’

한편 영혼이 사라진 얼굴로 문제집을 보는 맹효돈은 무반응이었다.

손이 가끔 움직이는 걸 보니 살아 있긴 한 것 같다.

1학년 0반 기숙사생 스터디 모임에서 사람 같은 꼴을 하고 있는 건 한이와 나뿐이었다.

한이와 나는 다른 애들을 다독여 가면서도 너무 늘어지지 않도록 채찍질을 해갔다.

*    *    *

휴일 내내 우리 다섯은 함께 지냈다.

다 같이 저녁을 먹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니 금방 심야가 되었다.

지익회에서 눈 건강을 지키라며 챙겨 준 결명자차를 마시며 홀로그램을 확인했다.

‘게임 스토리대로 그 사람이 당선됐구나.’

내가 기억하는 그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이름 옆에는 ‘당선 확실’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출구 조사도 그렇고, 개표 중이지만 이렇게 나올 정도면 그냥 당선됐다고 해도 좋을 거다.

“깨울까, 아니면 담요를 가져올까.”

한이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홀로그램을 끄고 돌아보니 어느 사이엔가 사월세음과 이레나가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이 베고 있는 교과서를 살펴봤다.

“페이지 보니까 오늘 목표한 분량 다 못 끝낸 거 같은데. 조금만 재우다 깨우자.”

“지익회실에서 담요 가져올게. 나 잠도 깰 겸.”

한이는 두 사람을 깨우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여 스터디 룸 밖으로 나갔다.

체력 하나는 깡패인 맹효돈은 잠들지도 못하고 숫자와 개념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대체 왜 저 가시밭길을 택했는지 모르겠다.

“너 왜 수학 선택했어? 흥미가 있어서 고른 것 같진 않은데.”

2학년 때 은광고로 돌아온 게임 속 맹효돈은 수학을 선택하지 않았었다.

그가 중간고사 때 이렇게 개고생한 묘사는 없었는데.

똑.

맹효돈이 쥐고 있는 샤프 펜의 샤프심이 박살 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담임 선생님 과목이라서.”

함근형은 수학 교사가 아닌데.

“중3 담임이 수학이라서 배우고 싶었어.”

아······ 맹효돈의 중3 담임의 담당 과목이었나.

게임 속에서 맹효돈이 주수혁에게 가끔 이야기하곤 했었다.

중3 담임이 없었으면 은광고에 오지 못했을 거라고.

‘맹효돈이 은광고에 못 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밑바닥을 전전하며 위험한 일을 하고 있을 거란 건 확실하다.

다른 플레이어 특목고에는 은광고의 특별 전형만큼 파격적인 입시 전형이 없으니까.

공부를 토 나오게 못 하는 맹효돈이 갈 수 있는 플레이어 특목고는 없고, 일반고 중에 이만큼 학비나 잡비가 전혀 필요 없는 학교도 드물다.

맹효돈은 평생 중졸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 선생 같은 새끼가 하나도 없었다. 그 학교에 있는 유일한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수학밖에 없었어.”

맹효돈은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고1부터 하는 거면 어떻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 있는 새끼들 개 똑똑해. 교과서는 수학인지 개소리인지 구분도 안 가고.”

맹효돈은 텅텅 빈 샤프 펜에 다시 샤프심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굳이 종이로 된 책과 샤프 펜을 쓰는 것도 중학생 때 그렇게 수학을 공부해서 그랬던 건가.

게임 속에서 수학을 선택하지 않은 건 2학년 때부터 다니게 됐으니 포기한 거겠고.

맹효돈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수학을 버리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야, 일단 정의는 완벽하게 암기해. 문제 풀이 과정 말고, 이 기호가 뭘 의미하고 이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부터. 그다음부터 문제 풀어.”

그렇게 수학 지옥은 계속되었다.

맹효돈은 돌머리지만 돌에 새긴 건 안 지워진다는 말이 있다.

힘내라, 맹효돈.

죽어라 정의를 암기하는 그를 보며 이놈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유일하게 선생님으로 부를 만한 사람이라······.’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큰 의미를 붙여서 쓰는 사람도 있구나.

예전에 희미하게 느꼈던 위화감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    *    *

중간고사 첫날.

첫 시험은 ‘플레이어의 전투 이론1’.

공통 과목으로 1학년 0반이 다 같이 보는 필기시험은 이 과목뿐이다.

시험 당일이라 그런지 일곱 명 모두 일찍 등교했다.

“얘들아, 열심히 하자!”

김유리가 손수 포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하사탕 봉투를 나눠 주며 말했다.

주먹만 한 크기의 투명한 봉투 안에는 마름모꼴 박하사탕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사탕을 건네받은 아이들이 김유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받은 건 나였다.

“잘 먹을게. 아직 많이 남았네. 다른 반 친구 거야?”

“아니. 다 우리 반 거야. 혹시나 올지 몰라서 열여섯 개 가져왔는데······.”

김유리는 풀 죽은 얼굴로 종이 쇼핑백 안에 들어 있는 사탕 봉투를 내려다봤다.

중간고사니까 어쩌면 시험은 보러 와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저걸 다 준비했나 보다.

지금 꼴을 보니 누가 올 리가 없는데, 뭐라고 위로해 줘야 하나······.

쉬익―.

그때.

교실 자동문이 열리고 교복 위에 후드 점퍼를 뒤집어쓰고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여학생이 등장했다.

산발인 머리에 모자에다 뿔테 안경을 쓰고 있으니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뭐, 뭐야. 출석률 낮다고 들었는데!”

낮은데.

다른 반은 50명, 100% 꽉 채우는 동안 여기는 16명 중 50%를 넘긴 적이 없다.

“사람 너무 많아. 집에 갈래! 함근형 선생님 거짓말쟁이이익!”

여학생은 1인 단막극이라도 하듯 대사를 줄줄 내뱉고 등을 돌렸다.

쾅!

의문의 여학생을 자동문을 억지로 수동으로 닫아 버렸다.

두다다닥!

교실 밖으로 복도 바닥을 차고 내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척 들어도 엄청난 각력의 소유자라는 건 알겠다.

1학년 0반 일곱 명이 멍청한 얼굴로 닫힌 교실 문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다시 문이 열렸다.

설마 그 애가 다시 돌아온 건가? 싶었지만.

나타난 건 실망한 표정의 함근형이었다.

“······오늘 한 명 더 등교한다고 들었는데. 아직 안 왔나.”

그 한 명.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아······ 사탕 줄걸······.”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김유리가 아쉬워하는 얼굴로 박하사탕 봉투를 내려다봤다.

중간고사 첫날.

1학년 0반 출석률은 50%였다가 아니게 되었다.

쟨 진짜로 집에 가 버린 것 같으니 추가 시험 확정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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