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중간고사 (3)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시야는 완전히 검붉게 물들었다.
이제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시야가 불길한 색으로 물들었다고 확연하게 느낄 정도였다.
더 이상 어둠은 그녀를 지켜 주지 못했다.
‘이젠 혼자 못 있겠어. 미칠 것 같아!’
그녀는 필사적으로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었다.
가장 사람이 많았던 곳은 지익회관 자습실이었다.
밤샘 공부를 하는 학생들 속에 섞여 있으면 시야가 이상하게 변해도 아주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면, 어쩌면 다 없어질지도 몰라. 그냥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이런 건지도 모르잖아.’
중간고사 기간 내내 기대했었다.
저 얼룩, 저 소리, 시도 때도 없이 솟아오르는 피.
시험이 모두 끝나면 마법처럼 깨끗하게 사라질 거라고.
‘그대로야······.’
아니, 오히려 심해진 것 같았다.
이제 시험 기간이 끝나 자습실은 텅 비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나마 학생이 많은 건 기숙사 식당이었다.
하루 종일 식당에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특식으로 나온 달토끼떡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
하지만 저녁 시간이 끝나고 식당이 폐쇄되면 어디로 가야 하지?
집으로 가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다.
학교 밖으로 도망가서 24시간 운영하는 카페라도 갈까······.
“앞에 앉아도 돼?”
검붉은 얼룩과 이명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맑아진 시야 안에 안다인이 있었다.
“다인아······?”
“시험 기간 계속 못 만났잖아. 같이 먹자.”
안다인은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물게 보이는 미소다.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풀려 안다인을 따라서 입꼬리를 올렸다.
“나 중앙 구역 중앙 도서관 갈 건데, 밥 먹고 같이 갈래? 주수······ 아니, 아는 애한테 책을 추천받아서······.”
“안 돼!”
끔찍한 단어가 들려서 또 목소리를 높여 버렸다.
“아······.”
안다인에겐 항상 후회할 짓만 하고 있다.
밀려오는 죄악감과 자책감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제법 큰 목소리였지만 다행히 기숙사 식당은 한산했고 시험이 끝나 모여 있는 학생들은 수다 떨기 바빠 주목을 끌진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미안, 다인아. 중앙 도서관은 절대······ 가지 마.”
안다인은 눈을 깜빡거리다 고개를 끄덕여 줬다.
운영 시간은 중앙 도서관에 비해 짧지만 1학년 전용 도서관이나 지익회관 도서관을 이용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나 보다.
안다인이 더 깊게 생각에 잠기기 전에 말을 돌렸다.
“오, 오늘. 밤새 영화 보지 않을래? 얘기도 하고. 내 방이나 다인이 방에서!”
“그래. 내 방으로 올래?”
“응······! 다인아, 진짜 고마워······.”
적어도 내일까지는 얼룩도 이명도 없을 거란 생각에 아주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 * *
매캐한 먼지가 피어오르는 구교사의 교실.
내 쪽팔린 적밍아웃이 끝나기가 무섭게 염준열이 허공에 손을 뻗어 홍룡을 소환했다.
파아아―.
염준열의 손끝에서 나타난 이공간의 틈.
그 사이에서 그의 힘의 결정체, 불꽃을 머금은 붉은 용이 나타났다.
하나 적의도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몇 번 전투 경험을 거쳐 봤더니 저게 허세라는 걸 알겠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아직 레벨이 낮아. 홍룡의 크기도 감고 있는 불의 위력도 그리 높지 않아.’
홍룡이 나를 향해 불을 뿜으려 하는 모션을 취하는 순간.
염준열이 손짓을 멈췄다.
“역시 용족이 아니시군요.”
“용족······?”
“제가 적벽괴도를 찾는 걸 막으려고 몇 번 가짜 적벽괴도 놀이를 하시는 용족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후예라 공격 모션도 취하지 못하니 바로 들켰지만요.”
용족이 뒤에서 그런 멍청한 짓을 했었나!
저러고 다니니 염준열이 나를 스승으로 모시네 마네 하는 거다.
아들 바보 팔불출 염방열도 저 맛탱이가 간 놀이에 한몫했다는 것에 올무 사진 원본······은 차마 못 걸겠고 복사본을 건다.
“갑자기 공격하려 해서 죄송합니다······ 당신은 제가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채신 것 같지만요.”
“아니. 나도 사칭해서 미안.”
“괜찮아요. 덕분에 환몽 게이트가 드러나고, 세음이가 학교에 왔잖아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염준열이 이렇게 좋은 놈이다.
나 때문에 귀찮은 일을 겪었으니 주먹으로 한 대 처맞아도 할 말 없는 상황인데.
“제가 왜 당신을 찾는지 아시나요?”
“나를 스승으로 삼고 싶다면서.”
염준열은 조금 놀란 얼굴을 하다 기뻐했다.
“네······ 제자로 삼아 주시겠습니까?”
저 반응을 보니 정말 나를 스승으로 삼고 싶나 보다.
염준열을 무수한 프리 퀘스트에서 뺑뺑이를 돌리며 캐릭터 육성을 하던 나다.
어떻게 성장시켜야 할지는 대충 감을 잡고 있다.
그래도 그 전에 부탁해야 할 게 있다.
“조건이 있어.”
“네. 말씀하세요!”
염준열이 CF찍을 때나 보여 주던 얼굴을 하고 있다.
저 착한 용족의 후예를 이용하는 거 같아서 양심이 아프지만, 더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5월 5일. 잠실 야구장에서 시구하고 경기를 끝까지 봐줘. 대신 네가 시구를 하는 건 당일까지 비밀로 해야 해.”
매년 5월 5일.
년당 누적 관중 수 800만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프로 야구 최고의 흥행 카드 중 하나인 어린이날 잠실 시리즈가 열린다.
잠실 야구장을 홈구장을 하는 두 라이벌 팀.
주오 드래곤즈.
TC 나이츠.
어린이날 시리즈마다 두 팀은 격년으로 홈 팀을 맡으며 경기를 한다.
두 팀 중 주오 드래곤즈가 홈 팀이 된 경우, 팀 상징을 따 어린이날엔 시구자를 용족으로 삼는 게 관례다.
“······주오 드래곤즈와 TC 나이츠의 어린이날 잠실 더비 매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주오가 홈일 때는 용족이 가서 광림을 보여 주고 2년마다 시구를 하긴 하는데요.”
“그래. 시구자로 선정된 용족과 교대해서 시구해. 무사히 경기가 끝나면 네 스승이 될게.”
세계 10대 팀에 들기도 하는 붉은 사자 팀은 국내에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다.
그 붉은 사자 뒤에 있는 용족도 마찬가지였다.
주오 드래곤즈는 마침 팀 이름에 드래곤도 붙었겠다, 시구자로 용족과 붉은 사자 팀원들을 적극 유치했다.
“······용족 형들과 삼촌들은 귀찮아해서 4회나 5회쯤에 몰래 도망쳐 나오시던데. 정말 시구만 하고 끝까지 경기를 보면 제자로 삼아 주실 건가요?”
“응. 당일까지 비밀로 하는 거 잊지 말고.”
“네!”
염준열이 별 의문을 품지도 않고 힘차게 답했다.
좀 더 묻고 따질 줄 알았는데.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염준열이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사제지간이 되면 얼마든지 당신을 알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조건은 일종의 시험이죠?”
어떤 의미론 그렇다.
염준열이 제 역할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5월 5일, 당신이 제 스승이 되는 날이 될 겁니다.”
멋진 말 뒤에 아주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기다리세요, 적벽괴도.”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내가 염준열의 스승이 되면 저 칭호로 못 부르게 할 거다.
* * *
다음 날.
학생들은 시험이 끝나고 푹 쉬었다.
은광고를 지배하던 미친 분위기는 진정되어 갔다.
그저 시험 결과에 희비가 엇갈릴 뿐이었다.
종합 게시판에 아직 한강 수온이 너무 낮아서 빠지러 가기 힘들다는 불만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장난으로 한 소리겠지만 어차피 송만석의 한강 싸이클링 팀 때문에 빠지기도 힘들 텐데.’
쓴웃음을 지으며 종합 게시판 글을 몇 개 읽어 내렸다.
아침 일찍 등교해서 교실에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쉬익―.
자동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로 들어온 놈은 별 인사도 없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로 일찍 불러냈냐. 디바이스로 말하기 곤란한 내용이야?”
기다리던 황지호가 도착했다.
다른 애들이 오기 전에 본론부터 꺼냈다.
“중간고사 시작 2주 전부터 어제까지. 우리 학교 양호실에서 눈 종합 검진을 받고 디바이스 교체를 신청한 학생. 그중 교지 편집부에 소속한 학생. 이 세 조건 중 두 개 이상에 해당하는 학생들의 명단이 필요해.”
저주가 발동하는 것은 중간고사 전후였다.
‘이번 일을 억지로 막았다간 내가 모르는 아이들에게, 내가 모르는 저주를 걸 가능성이 있었어.’
그래서 알면서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저주에 걸린 학생들은 어떤 의미로 당해도 싸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마 유혹을 이기긴 어려웠겠지.’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고 싶어 한다.
좀 더 쉬운 길을 택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교지 편집부와 신문부 사이에 문제가 있었지. 그것과 관계있어?”
“그래.”
“문새론의 이야기를 듣고 교지 편집부를 캐 봤는데 이상하더군.”
직접 캐 봤냐.
황지호의 태도가 정말 달라진 게 느껴진다.
학교가 개판이 되는데도 ‘그게 뭐’라고 답하던 이사장과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진족으로 느껴진다.
“교지 편집부의 뒤를 봐주는 자들이 최편득 일당과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안 서.”
그거야 그럴 거다.
“교무 회의록을 보면 최편득 일당이 추진하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고 추측되는데······ 이들은 핵심 세력과 개인적인 친분도 없고, 어떤 이득도 얻은 적이 없어.”
황지호가 5천 년을 넘게 살았지만 이해하기 조금 어렵나 보다.
같은 사람끼리도 이해하기 어렵긴 하다.
“그들은 ‘추종자’야.”
“······아, 그놈들한테 그런 게 있었군.”
높으신 분들과 연결된 최편득 일당은 전부 갈려 나갔다.
최편득은 은영관의 지하에서 썩어 가고 있고, 다른 이들도 법의 심판을 받아 은광고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야.’
악당질도 도가 지나치면 추종자가 생긴다.
아무 대가도 받지 못하더라도 그저 자신의 우상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자들이 생긴다.
최편득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악당으로서 매우 잘나간 탓인지 추종자가 있었다.
“조의신, 혹시 네가 말하는 그 조건에 해당하는 학생들은······.”
“그래. 그 추종자들의 영향을 받은 학생이야.”
“그 추종자들은 왜 교지 편집부에서 저러는 거지?”
그건 이 은광고의 역사와 연관이 있다.
“15년 전에 지익회가 생겼던 계기 생각나? 지익회 때문에 그들의 계획이 늦춰지고 이사들도 다 잘려 나간 거.”
“······그래. 그때 나랑 1 대 1로 대화한 학생회장 놈 얼굴도 기억나.”
“전교생의 서명을 받은 서명 운동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어. 이사진들이 궁지에 몰린 건 학생회가 사건을 언론에 뿌린 이후야.”
사건 당사자였던 황지호다.
나중에 학생들의 손을 들어준 거 보면 학생회장이 마음에 들었을 테니 사건도 대충은 조사했을 거다.
황지호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본 추종자들은 생각한 거야. 이 학교의 공신된 언론 동아리를 장악하면 저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그래서 10년 전에 만든 게 교지 편집부야.”
“······고작 고등학교 동아리를 장악해서 무슨 도움이 되는데?”
“한국 최고 명문고의 유일한 공식 언론 동아리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 학생들의 이름을 빌려서 개소리를 해도, 적극적으로 반박 기사를 쓰는 곳이 없잖아. 또, 외부에서 보면 그럴싸하게 ‘은광고 학생 모두의 의견’으로 보여.”
“그렇군. 언론 동아리는 손대기 어렵지. 노골적으로, 지속적으로 허위 기사를 내지 않는 한 교사진이나 학생 기구가 제재를 가하기도 어려워. 언론 통제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황지호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나는 계속 설명충이 되기로 했다.
“예를 들어, 100% 최편득이 잘못한 일이 발각됐다고 쳐. 하지만 학생들한테도 잘못이 있는 것처럼 기사를 뿌리면 양비론으로 끌고 갈 수도 있어. 같은 학생이 쓴 기사를 외부에 뿌려서 둘 다 잘못했다는 식으로 여론 조성이 되면 반은 먹고 가는 거지. 미묘하게 조작된 증거 몇 개 뿌려서 기사화하면 피해자 학생들 정신을 빼놓을 수도 있고.”
“······최편득이 사라진 이후에도 왜 저러는지 이해했다.”
여기까지 내 말을 들은 황지호는 나와 같은 추측을 한 것 같다.
인간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 헤맨 것 같지만 단서를 던지니 황지호가 나잇값을 하며 곧장 이해했다.
“최편득이 있었을 땐 도움이 되고 싶었을 거고, 사라진 지금은 최편득의 과거를 미화하고 싶은가 보군. 어쩌면 최편득이 부활할 때를 대비해서 저러는 걸 수도 있고.”
황지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악당들은 허무맹랑한 생각을 잘 한다.
게임 속에서 그 생난리를 친 추종자 집단이 최편득 일당이 학교에서 없어졌다고 쉽게 태도를 바꿀 리는 없었다.
“알았다. 명단 외에 필요한 건 없어?”
“잘릴 교사들 새로 뽑을 준비 해. 돼지들 잘 감시하고.”
이번 일에 학교 측이 크게 개입하면 망한다.
할 일이 많은 호족의 전력을 움직이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잘못하면 제갈재걸이 눈치채고 내가 하려는 짓을 저지하려 할지도 모른다.’
어떤 수를 두어야 할지는 생각해 뒀다.
* * *
방과 후.
오늘은 1/4분기 학생 대표 회의가 열린다.
우리 반에서 참가하는 건 반장인 김유리와 부반장인 나였다.
김유리의 경우 학생회에도 소속되어 있지만, 학급 임원과 다른 학생 기구 보직이 겹칠 경우 학급 임원으로서 참가하는 게 우선시된다.
그래서 학생회장, 선도부장, 지익회장, 총동아리회장.
각 학생 기구의 대표자는 2학년 때 미리 선출하여 3학년 때는 학급 임원을 맡지 못하는 게 원칙이었다.
“학생회관은 몇 번 와도 진짜 시설 좋은 거 같아.”
김유리와 함께 온 중앙 구역 학생회관 복도.
복도에는 은광고의 역사와 학생 기구의 활약상을 담은 홀로그램이 전개되고 있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학생회 소속이라 학생회관 지리에 익숙한 김유리가 앞서 걸으며 학생회관 시설 안내를 해 줬다.
“맞다. 의신아! 자료 읽고 왔어?”
“그래. 정리 잘했던데. 못 도와줘서 미안.”
“아냐, 내가 말도 안 하고 혼자 한 건데, 뭐.”
김유리와 잡담을 하며 학생 대표 회의용 대회의실A로 이동하던 중에 누군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야, 조의신.”
“유상훈, 너 왜 여기 있어.”
유상훈은 안다인과 같은 1학년 1반.
게임 속에서 1학년 1반의 반장은 안다인, 부반장은 부정 입학자 놈들 중 하나였다.
설마 유상훈이 부반장이 됐나.
“너도 학급 임원이었냐.”
반이 다르고 서로 반에서 뭐 어떻게 사는지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하는 타입이 아니라 몰랐었다.
유상훈은 농구 관련 얘기가 아니면 보통 말수가 적었다.
“그래. 부정 입학자 새끼 퇴학하고 내가 부반장 됐다.”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억지로 떠밀려서 하게 됐나 보다.
안다인의 기백에 위축되지 않고 옆에 서서 부반장을 한 인재가 드물긴 하다.
부정 입학자 놈은 공명심 때문에 억지로 버틴 걸 거다.
그래서 게임 속에서 최편득과 함께 안다인을 괴롭히려고 염병을 한 거고.
“아, 학생 대표 회의 가기 싫다.”
유상훈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놈이지만 뭐 다른 이유라도 있나.
“쉿!”
그때 문새론이 히죽거리며 나타나 입술에 손가락을 하나 가져다 댔다.
문새론은 1학년 2반 부반장이다.
게임 속에선 학생 대표 회의에 들어가야 여러 소문을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부반장을 노렸다는 묘사가 있었다.
‘2반 반장은 주수혁이었지.’
문새론이 다른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그리고 주인공이 창문을 열고 ‘태양이 없어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어.”
“어, 나도······! 그 뒤에 ‘꽃이 지는 그 순간까지’라는 대사도!”
주수혁과 안다인.
두 사람이 복도 한구석에서 도서 감상회를 가장한 썸을 타고 있었다.
보아하니 서로 책을 추천해 주고 시험이 끝난 김에 읽고 왔나 보다.
그런데 어떻게 대사가 줄줄 나오지.
설마 책을 통째로 암기한 건가.
“······알았지?”
문새론은 둘을 방해하지 말자며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김유리가 안다인을 보고 놀란 얼굴을 하다 아주 기뻐하는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고 나서도 아주 잘 대화했나 보네.’
흐뭇해하고 있을 때.
퍽.
내 어깨에 누군가 부딪쳤다.
일부러 부딪친 걸까.
복도가 이렇게 넓은데 왜.
“비켜라, 1학년.”
어깨를 부딪쳐 온 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
학생회장 ‘강철의 쐐기 도원우’였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만우절 날 부정 입학자들을 족칠 때 광림으로 사용한 캐릭터이기도 했다.
재능이 없는 전기술을 오로지 노오력으로 얻은 노력파.
유상훈이 죽은 후 마수종 사냥에 점점 미쳐 가는 학생회 임원 유상희를 끝까지 옆에서 지지한 리더.
졸업도 못 하고 마지막까지 학교를 지키다 죽은 열혈 소년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학생회장 도원우였다.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왜 이렇게 까칠하지?’
갑자기 도원우가 내 옆에 있는 유상훈을 보곤 갑자기 헤벌쭉한 얼굴을 했다.
“아, 우리 처남도 왔었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문새론이 처남이라는 단어에 눈을 반짝거리는데······.
슉!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도원우의 배와 등에 공격이 날아왔다.
정면에서 주먹을 꽂은 건 유상훈, 뒤에서 수도로 후려갈긴 건 유상희였다.
굳이 피하지 않고 모든 공격을 받은 도원우가 비틀거렸다.
“원우야, 미치려면 곱게 혼자 미쳐야지. 왜 후배들 앞에서 지랄이니?”
“미친놈.”
생긋 웃으며 매도하는 유상희와 썩은 얼굴을 하는 유상훈은 호흡이 척척 맞았다.
공격하는 타이밍도 그렇고, 둘은 정말 남매구나.
“하하······하, 미래의 가족이 주는 사랑의 매는 하나도 안 아프다!”
아파 뒤질 거 같은 표정을 짓는 주제에 뭔 소리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우리 학교 학생회장은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