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4분기 학생대표회의 (1)
유상희의 전사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학생회 임원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다.
하지만 통신병 역을 맡은 신문부 학생들이 보낸 영상을 확인한 후 입을 다물었다.
3학년 임원과 같이 영상을 본 1학년생 하나가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망할 년······ 그러다 개죽음 당할 줄 알았어. 왜 지까지 동생 뒤를 따라가냐고. 진짜 못된 년, 나쁜 년.]
평소 유상희와 가장 사이가 안 좋던 선도부장 오혜지가 대성통곡했다.
찬 바닥에서 누워 쉬고 있던 부상자들도 몸을 웅크리고 흐느껴 울었다.
지익회 전멸 소식 이후로 비보(悲報)밖에 전해지지 않았다.
[스무 시간만 버티면 협회에서 지원이 올 거야. 해야 할 일을 하자.]
[도원우, 미친 새끼야! 상희가 죽었는데 일이 돼? 일이 되겠냐고!]
[두 시간 쉬고 전선에 있는 애들과 교대한다. 쉬고 있어.]
학생회장 도원우는 냉정하게 지시를 내리고 밖으로 나섰다.
도원우를 따라 나온 학생부회장 지명수가 앞을 막아섰다.
[어디 가.]
이때 클로즈업되는 건 지명수의 얼굴이었다.
도원우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상희 데리러.]
지명수는 도원우를 잡지 못한다.
도원우는 어두운 복도 끝을 향해 사라지고.
잠시 후 커튼 천으로 감싸인 유상희와 함께 돌아온다.
이 장면이 게임 속에서 그녀가 언급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리고 현재.
“미래의 가족?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어, 원우야. 맞는 부분이 족밖에 없는데. 족 같으니까.”
유상희는 봄바람이라도 불어오는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극딜을 넣었다.
도원우는 굴하지 않았다.
“족 앞에 ‘가’가 빠졌어. 상희야. 작은 실수를 하는 모습도 사랑스럽······.”
퍽!
유상희가 수도를 한 방 더 갈겼다.
도원우의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피할 수 있는 레벨의 공격인데도 맞아 주면서 좋다고 처웃었다.
웃으면서도 고통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아픈 게 좋아서 저러는 건 아닌 것 같다.
트루 러브구나, 도원우.
유상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니 응원하기는 미묘하지만.
“하, 하하······! 괜찮아, 상희야. 난 다 받아 줄 수 있어!”
유상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학생 대표 회의에 나오기 싫었던 이유가 도원우 때문이었나.
“왜 나이를 처먹어도 변함이 없냐.”
“······어렸을 적부터 아는 사이야?”
“어.”
유상훈이 짧게 도원우와의 악연을 설명해 줬다.
유상희는 어렸을 때부터 희귀한 치유 이능에 눈을 떴다.
유상희는 장학금을 받고 이능 센터에 다니게 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게 도원우였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저 모양이라 하는데 가족끼리도 교류가 생기는 바람에 칼같이 잘라내기도 뭣하다고 한다.
“의신아, 정말 미안해. 어쩜 저런 게 학생회장으로 뽑혀서······ 어깨는 괜찮아? 너도 한 대······ 아니, 치고 싶은 만큼 쳐. 세게.”
“상희야, 네가 대신 패 주면 맞을게!”
“의신이한테 사과부터 해. 추잡해.”
계속 얼굴이 녹을 기세로 웃던 도원우가 그 말에 처음으로 정색하며 나를 봤다.
하기 싫어 죽는 표정이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이렇게 추할 리가 없어!
하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미······안.”
들릴까 말까 한 작은 목소리였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안 봐줬다.
이미 유상희와 유상훈이 패 줬기도 하고.
“괜찮아요.”
내 대답에 유상희가 밝게 웃었다.
“우리 의신이가 더 어른이네.”
“우리······ 의신이?”
유상희가 기름을 끼얹었다.
도원우가 뭐라 중얼거리긴 했지만 유상희는 더 이상 먹이를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먹이 주기 금지, 먹금.
관심 종자를 퇴치하는 최고의 전법이었다.
“들어가자, 얘들아. 1학년들은 학생 대표 회의 처음이잖아. 자리 안내해 줄게.”
유상희는 1학년생들을 이끌고 대회의실A로 향했다.
유상희의 뒤로 패배자 도원우가 애잔하게 남았다.
“······으하하하하! 아, 아하하하하! 도원우 개발렸네! 무명의 초신성을 엄청 경계하더만. 하하하하!”
도원우는 세상 다 산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 도원우를 보고 숨도 못 쉬고 빵 터진 게 학생부회장 지명수였다.
둘 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실체가 이랬구나.
인생무상.
허무감이 밀려왔다.
* * *
300석이 준비된 계단식 회의실.
앞쪽에는 의장석과 학생회 임원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의장석 위로는 손으로 수를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광고의 교기가 걸려 있었다.
‘맨 앞자리네.’
유상희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자리 배치상 각 학년의 0반이 가장 앞줄에 앉고, 1반부터 10반까지 차례로 뒷자리에 앉게 되어 있었다.
팻말이 놓여 있는 자리에는 거의 모든 학생이 앉아 있었다.
비어 있는 건 2, 3학년 0반 자리뿐이었다.
‘다른 자리는 다 찼는데, 역시 0반답다. 2학년 0반은 오늘 만나고 싶었는데······.’
회의 시작을 앞두고 여기저기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준열이 왔네······! 신난다.”
“학생회잖아. 차기 학생회장 후보이기도 하고.”
“마진승 표정 개구리더만, 준열이 때문이었나······ 아직도 혼자 라이벌이라고 불타고 있음?”
“3학년 0반 임원들은 아직이네. 걔들은 회의 시간은 잘 지켰는데.”
“오늘 3학년 0반 단체로 우주의 기운을 느끼러 감. 안 올 예정임.”
“만우절에 중앙 구역에서 공중 정원 띄우고 우주가 어쩌고 염병을 떨더만 또 그럼?”
“중앙 구역에서 포스를 느꼈대.”
“······그 휴먼들은 미쳤습니까.”
3학년 0반은 대체 뭘 하는 걸까.
우주······.
그걸 느껴서 어쩔 건가.
그 말을 들으며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봤을 때.
‘뭐야, 저게!’
천장 조명 사이로 체육복 차림으로 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두 남녀를 발견했다.
두 남녀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해 닥치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뭘 하려는지 몰라도 엮이기 싫다.
저 두 사람의 소원대로 닥치려 했었다.
하나 안타깝게도 의장석에서 나를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던 추한 자가 하나 있었다.
내 시선을 따라 도원우가 천장을 보다 두 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내려와.”
목소리에 희미하게 압력이 실려 있었다.
조금 굳은 표정에서 거역하기 힘든 분위기가 묻어났다.
‘내가 기억하던 게임 속 학생회장 도원우의 모습이네.’
맛이 가는 모습은 유상희 관련 사항 한정인 모양이다.
그의 한마디에 모든 학생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하자 두 남녀가 탄식했다.
“아오, 진짜!”
“망했네!”
뭘 하려 했는지 몰라도 포기한 모양이다.
비어 있던 2학년 0반 책상 위로 두 남녀가 화려하게 착지했다.
퍼퍼퍼펑!
[2학년 0반 반장, 금찬솔 등장!]
[2학년 0반 부반장, 왕찬솔 등장!]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현수막이 떨어져 내렸다.
오색찬란하고 유치한 색과 디자인이었다.
심미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튀는 것만을 생각한 무식한 디자인의 현수막이다.
저 짓을 하며 등장하려고 천장에 붙어 있었나 보다.
‘······2학년 0반 학급 임원이었나!’
현수막 위치를 보니 반장, 여자가 금찬솔.
부반장, 남자가 왕찬솔인 모양이다.
성은 다르지만 동명이인이었다.
그것도 최강최악의 악동이 모인 2학년 0반의 반장과 부반장이라니.
운명적인 두 콤비다.
“학생회장이 산통을 깼네, 주인공은 원래 늦게 등장하는 거잖아! 안 그러냐, 금찬?”
“그래. 주인공답게 등장해서 완전 멋있을 예정이었는데! 기척 차단하느라 죽는 줄 알았는데······ 왕찬아······ 이게 다 투명화 아이템 깜빡한 너 때문이라고!”
“금찬아, 좀 잊어 먹을 수도 있지. 뭘 따져. 그런데 왜 3학년 0반 왜 이렇게 안 와?”
“1년 늙었더니 노환이 와서 늦나 보네.”
안심해라, 너희들이 가장 마지막에 등장했다.
3학년 0반은 우주의 기운을 느낀답시고 결석할 예정이니까.
“하, 1시간을 붙어 있었는데······ 실패다.”
인생을 1시간 낭비하는 방법을 배웠다.
1학년들은 입을 떡 벌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2, 3학년들은 이미 익숙한지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은데. 재적 인원 중 3학년 0반 두 명 이외엔 전원 참석했으니 성원이고.”
도원우가 의장석에서 몸을 일으켜 말했다.
“지금부터 1/4분기 학생 대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도원우가 간략히 개회사를 했다.
약식 절차로 진행된 국민의례를 마쳤다.
‘이제 학생 대표 회의가 시작되는구나.’
선도부 내부에서 결정되는 선도부장.
기숙사생들끼리 투표를 해 뽑는 지익회장.
각 동아리와 소모임의 부장들이 선출하는 총동아리회장.
그리고 전교생이 참가하는 선거로 당선되는 학생회장.
넷 중 가장 크게 학생을 대표하는 게 학생회장이다.
따라서 학생회장은 학생 대표 회의의 의장 역을 맡고 학생회가 학생 대표 회의를 이끌었다.
‘깔끔하게 진행하네.’
실질적으로 회의를 진행하는 의장 학생회장 도원우.
회의 순서를 알리는 사회자 학생부회장 지명수.
학생회 활동 내역을 정리해 보고하는 서기 유상희.
전원 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여 안정적으로 학생 대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훌륭하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다.
12지 동맹 회담의 그 무질서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회의장 밖에서 보인 추한 모습은 무시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회의에 집중했다.
학생회의 보고가 끝나고 각 학급 운영 내역, 반성 및 계획 발표가 이어졌다.
각 반의 학급 임원이 사전에 전달한 학급 운영 자료를 요약한 자료가 중앙에 거대 홀로그램으로, 각 테이블 위의 소형 홀로그램으로 각각 떠올랐다.
특이 사항은 없지만 2, 3학년 0반들이 크고 작은 사건을 쳤다는 기록은 있었다.
‘2, 3학년은 고생이구나.’
학급 임원 보고가 끝난 후, 현재 기획 중인 일정과 진행도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각종 기념일 상인관 초청 공연 행사.
교내 환경 미화 평가.
소풍이라고도 하는 학년별 현장 체험 학습.
학술제, 논문 발표회.
모범 학급, 모범 학생 선정식.
청소년 수련회.
대학 수시 지원 워크숍 등등.
‘유상훈이 학생회 일 많다고 말린 이유를 알겠다.’
매년 하는 행사도 꽤 있지만 전례를 참고해도 저걸 다 기획하고 예산을 짜고 집행해야 하면 머리가 아플 거다.
하지만 저 힘든 걸 학업과 이계 공략을 병행하여 해내는 게 학생회였다.
학생회장 도원우만 해도 만년 1등이고 유상희도 10등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묘사가 있다.
“다음은 선도부에서 발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도부의 보고는 간략하게 끝났다.
은광고 선도부의 주요 활동은 다른 학생 기구의 감시와 견제라 업무량이 적은 편이었다.
지익회나 총동아리회는 각자 기숙사와 동아리 관리에 바쁘니 감시고 견제고 할 겨를이 없으니까.
선도부장 오혜지의 활동 보고 이후에는 지익회장 성시완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총동아리회장의 보고가 있었다.
‘총동아리회 발표가 제일 기네.’
동아리와 소모임이 많다 보니 각 동아리, 소모임의 발표회나 대회 일정 조정, 장소 확보, 예산 분배에 애를 먹는 것 같았다.
음악 관련 동아리의 경우 협연이 잦다 보니 서로 친해서 쉽게 협의가 됐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많다 한다.
‘바둑부, 장기 소모임, 체스 소모임. 각각이 주최하는 대회 일정 조정 안건······.’
홀로그램으로 뜬 부제와 요약된 정보 중에 눈에 걸리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체스 소모임 고문이 용제건이었나.’
유희계 용족 괴짜 교사 용제건.
소모임의 고문이란 건 알고 있었는데 체스 소모임인 줄은 처음 알았다.
그 많은 소모임 중에 주요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체스 소모임 고문이라니.
“의신아?”
“어?”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어디 아파?”
“아니, 괜찮아.”
김유리가 목소리를 낮춰 걱정스레 물어 왔다.
한국은 체스 불모지다.
중학생 때 체스를 그만두고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지만, 세계가 달라졌다.
‘약점을 남기면 안 돼.’
체스 소모임에서 주관하는 체스 대회 일정을 내 디바이스에 저장해 뒀다.
질의응답 시간, 기타 주요 안건 토의, 건의 사항, 본 회의록 낭독이 끝난 후 학생 대표 회의는 무사히 폐회하였다.
* * *
1/4분기 학생 대표 회의에서 앞으로 진행될 이벤트의 흐름을 확인했다.
직접 보고 싶었던 주요 캐릭터들의 실물도 봤고.
그리고 접촉해야 했던 인물들과도 만났다.
“왜 그 무명의 초신성이 우리를 불러냈지?”
“얌전하기로 유명한 1학년 0반 놈이면서. 0반답게 놀아라!”
“우리한테 한 수 전수받고 싶은 거야? 10년은 일러! 출석률부터 올리고 와라, 신참!”
2학년 0반 반장, 금찬솔.
2학년 0반 부반장, 왕찬솔.
2학년 0반이 직접적으로 게임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묘사에서 반장과 부반장이 대부분의 장난질을 주도했다는 말이 있었다.
0반을 움직이려면 먼저 이놈들하고 이야기해야 할 거다.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내 말에 금찬솔과 왕찬솔은 서로 마주 보다 뭔가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혈연관계는 아닌 거 같은데 이름이 같아서 그런가 묘하게 닮아 보인다.
그러다 입을 죽 내밀며 말했다.
“우린 비싸.”
“응. 웬만한 돈으로도 안 될걸? 어차피 돈은 이계 가서 털어 오면 버는 거잖아.”
“들어는 봐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돈이 없어도 괜찮을 거다.
2학년 0반이 돈보다 훨씬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관련된 일이니까.
“제갈재걸 선생님 일입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