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중앙도서관 지하서고 (4)
황명호의 대저택, 현관.
평소의 패턴을 생각하면 문을 연 순간, 올무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나는 올무를 안아 들고 쓰다듬어 주고······.
······가 되어야 하는데.
“올무야······?”
현관 앞에 앉아 있던 올무는 꼬리를 살랑거릴 뿐.
나한테 올 생각을 안 한다.
섬뜩한 예감이 든다.
‘설마 자주 안 와서 토라진 건가!’
나를 기다리다가 백호군과 싸우기까지 한 올무다.
그때 일로 정말 정이 떨어졌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풀어 줘야 하지? 먹을 거라도 사서 바쳐야 하나. 신수는 뭘 좋아하지. 얼마가 들든 다 쏟아부어서 올무가 먹고 싶은 걸 먹여야지. 부족하면 안 쓰는 아이템을 플레이어 마켓에 팔고, 그리고······.’
끄응―.
나를 빤히 올려다보던 올무는 금방 옆으로 다가와 머리를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아직 그렇게까지 싫어진 건 아닌가 보다.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올무야.”
올무는 계속 느릿느릿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기운이 없어 보인다.
왕―!
갑자기 올무가 내 뒤쪽을 보다 몸을 굳히곤 적극적으로 안겨 왔다.
뭐냐,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안아 주고 생각해 보자.
올무를 안아 들고 뒤를 돌아보니 기척 없이 나타난 백호군이 있었다.
왕왕······!
올무는 백호군을 대놓고 경계하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끙끙거리며 백호군과 나를 번갈아 흘끗거렸다.
이건 대체 뭘 의미하는 건가, 하고 잠깐 고민했으나 금방 답이 나왔다.
‘백호군과 싸웠으니까 자기편 들어달라는 건가!’
뛰어난 의사 전달 능력에 나도 모르게 올무를 높게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우리 올무가 천재구나!”
똑똑한 올무가 자기를 칭찬하는 걸 알아듣고 꼬리를 파닥파닥 흔들며 혀를 내밀었다.
“조의신, 너 가끔 아주 멍청해 보일 때가 있다.”
황지호는 방과 후 함께 이동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어처구니없어하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러면 뭐 어떤가.
내가 멍청해도 우리 올무가 이렇게 천잰데.
* * *
은서호, 은이호, 은재호 삼 남매와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올무를 안아 들고 응접실로 향했다.
오늘은 적호가 자리를 비워 백호군과 황지호, 나까지 셋이다.
오토매틱 메이드가 내온 차는 등나무꽃차, 다과는 송화다식.
등나무꽃 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진 도자기 다기 세트에 담겨 나왔다.
‘황지호는 여전히 센스가 좋네.’
5월 경에 등나무꽃이 피기 시작하니 풍류를 즐기는 황지호다운 선택이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
황지호가 먼저 꺼낸 화제는 중앙 도서관 지하 서고 사건이었다.
“홍규빈의 연락을 받았다. 이번 일은 황명재단에서도 소수의 인원만 움직여 해결하기로 했다.”
“홍규빈 팀장님하고 아는 사이야?”
“그래. 홍규빈은 좀 거슬리는 진족 놈의 가호를 받아서 몇 번 관찰한 적이 있어. 그 녀석이 플레이어가 된 계기가 재밌기도 하고.”
홍규빈은 예지 스킬 때문에 귀찮게 구는 진족에게 가호를 받았다고 했지.
황지호는 그 진족이 누군지 아는가 보다.
거기에 그가 플레이어가 된 계기라.
홍규빈이 다 밝히지 않은 비밀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의외야.”
“뭐가.”
황지호는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네 비호의 대상은 학생이거나 약한 존재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번 일은 교사에다 강자인 제갈재걸을 위해서잖아.”
황지호는 내 행동 원리를 캐고 있었지.
아직도 관찰 중인가 보다.
“그럼 다음 얘기를 해 볼까. 적호의 보고다. 달토끼들이 월궁의 기술을 사용해 관측한 바에 의하면 한반도에 진족이 모여들고 있다더군. 관심을 보이는 상위 존재도 늘고 있다 해.”
앞으로의 전개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호족과 토족이 알았다는 건 고무적이다.
이들이 그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면 대처하기도 더 쉬워질 거다.
“그렇구나.”
“별로 놀라지 않네?”
“놀랐는데.”
황지호는 조금도 믿지 않는 표정이다.
나는 모르는 척 올무를 쓰다듬었다.
“그렇다고 칠까.”
황지호가 할 이야기는 전부 끝난 것 같다.
다음은 내 차례다.
아이템창에서 운명력으로 건네받은 고서를 꺼내 황지호에게 건넸다.
“이거 좀 읽어 봐.”
“지하 서고에서 들고나온 책이 이거냐. 왜 이 책을 가져왔지?”
“그냥.”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일단 줘 봐.”
황지호는 불만스러워하면서도 고서를 받았다.
책을 손에 쥔 순간,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파앗―!
곧바로 황지호의 눈과 머리카락이 황금색으로 바뀌어 갔다.
그가 신화계 호족, 황호로서의 힘을 개방했다는 증거였다.
황금의 빛이 응접실에 가득 찼다.
“조의신, 정말 이게 지하 서고에 있었나?”
황지호의 손 위에서 고서가 빛을 머금다 천천히 떠올랐다.
허공을 부유하는 고서가 황지호의 눈앞에서 한 페이지씩 넘어갔다.
황금빛을 뿜는 맹수의 눈에 경악이 서려 있었다.
“······이 고서에는 무수히 많은 신, 상위 존재들의 기척이 남아 있어. 아니, 어쩌면······ 상위 존재보다 더 높고, 멀고, 아득한 ‘무언가’와도 이어져 있었을지도 몰라.”
황지호의 목소리가 점점 딱딱해졌다.
“많이 지워져 있지만, 이 고서는 오로지 하나의 ‘힘’에 대해 서술하고 있어. 이를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그래, 이 나라의 언어로 말하면 ‘운명력’이라고 부르는 게 가장 가깝겠군.”
운명력.
그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이 고서는 운명력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건가.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을지 모르는 운명력. 만약 이 힘이 스킬로 존재한다면······ EX급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할 거야. 그 이상의 단위가 없으니까. 그 스킬의 레벨에 따라선 세계를 바꿀 만한 위력의 스킬이다.”
황지호의 이마에 땀방울이 하나 맺히다 흘러내렸다.
저 태평한 놈이 저렇게 반응할 정도라니.
황지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힘을 거뒀다.
응접실에서 황금빛이 사라지고, 고서는 사뿐히 그의 손 위로 내려왔다.
“이 고서 자체에는 힘이 없지만 해석할 가치는 충분하군.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나에게 맡겨라, 조의신.”
진지하게 말하는 황지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마친 후, 현관.
“조의신 형, 안녕히 가세요.”
“의신 오빠, 다음에 봐요!”
“아, 안녕히 가세요······.”
은호의 후예 삼 남매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바로 고서 해석에 들어간 황지호는 배웅을 나오지 않았다.
그룹 일, 학교 일로 다른 분신 쪽에 힘을 사용해야 할 일이 없을 땐 고서 해석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해야 하는 건 올무인데.
끄응······
올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현관 근처에 마련된 올무용 캐비닛 옆에 걸려 있는 리드를 봤다가 나를 봤다가 백호군을 봤다가 정신이 없다.
‘내가 기숙사 가는 길까지 따라서 산책하고 싶은 것 같은데.’
은호의 후예 삼 남매는 저택 밖으로의 외출 금지령이 내린 상태다.
황지호는 고서 해독을 한다고 처박혀 있는 중이고 적호는 부재중이다.
남은 건 백호군뿐인데 싸워 버렸으니 에스코트를 부탁할 수 없고.
‘고민하는 것도 귀엽다. 어쩌지.’
올무를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고민이 깊어졌다.
“가자.”
대치 상황을 깬 건 백호군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듯이 리드를 잡고 올무를 향해 내밀었다.
바로 반응하지 않던 올무였지만 리드를 보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다 백호군에게 달려들었다.
왕왕!
올무가 백호군의 발치를 빙글빙글 돌았다.
백호군은 무심한 얼굴로 올무에게 리드를 채워 주고 대저택을 나섰다.
올무는 1학년 기숙사 건물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나와 백호군 사이를 오가며 애교를 부렸다.
‘이걸로 둘이 화해했다고 봐야 하나?’
이렇게 백호군과 올무 사이의 싸움이 종결되었다.
일방적으로 올무가 삐졌다가 풀린 것뿐일 테지만.
* * *
다음 날, 학교.
1학년 0반은 평소대로였다.
특이 사항을 꼽자면 평소보다 들뜬 얼굴로 소풍 계획을 더 디테일하게 세우는 중인 김유리.
김유리에게 소풍 희망 사항을 하나씩 읊는 아이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황지호.
그 외에는 별다른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평소처럼 보낼 수 없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오후 선택 수업은 공청훤의 에너미학 개론이었다.
하지만 나는 수업에 나가지 않았다.
만우절 이후로 처음 치는 땡땡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기숙사 내 방 안.
‘공청훤 선생님, 죄송합니다. 한이야, 미안하다.’
수강생 수가 적은 수업이라 눈에 띄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곧 예매 전쟁이 벌어진다.
곧 있을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빅 매치 중 하나.
오늘은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하는 두 팀의 어린이날 잠실 시리즈 예매일이다.
[05/05 14:00 주오 드래곤즈 vs TC 나이츠]
유감스럽게도 예매일은 평일, 그것도 수업 시간에 예매가 시작되니 어쩔 수 없었다.
‘가능하면 중앙VIP석이나 테이블석. 좀 말아 먹으면 블루석. 최악의 경우엔 레드석도 괜찮은데······.’
준비는 완벽하다.
시간 날 때마다 티켓팅 노하우 글을 몇 번이나 읽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2시.
예매가 시작되고.
“왜 팝업창이 안 꺼져! 서버 사용량이 많음? 이게 무슨 개소리야.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로딩 중? 이 세계의 과학 기술 수준에서도 이런 게 있나!”
“뭐?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
“왜 결제가 안 되는 거야!”
혼자 생난리를 피우다 10분 후.
[중앙VIP석 남은 좌석 수: 0]
[테이블석 남은 좌석 수: 0]
[블루석 남은 좌석 수: 0]
······.
······.
······.
결국 남은 건 무수한 ‘0’뿐이었다.
전부 매진되고 외야석만 수십 자리 남아 있었다.
디바이스 홀로그램에 외야석 결제 완료 창이 떠 있었다.
그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는 내 눈은 죽어 있었다.
‘망했다.’
완벽하게 망했다.
좀 말아 먹으면 블루석? 레드석?
놀고 있다, 네이비석도 못 잡은 나다.
현실은 덕아웃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외야석이었다.
‘암표를 사는 건 미친 짓이고. 현장 구매나 취소표를 노려야 하나? 어린이날에 높은 등급 좌석이 풀리긴 할까.’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밀려오는 패배감에 좌절하다 종례 시간에 참가하기 위해 1학년 0반 교실로 향했다.
“부반장, 얼굴이 왜 그새 썩었냐.”
“뭐래.”
교실에 들어갔더니 맹효돈이 참 반갑게 인사해 왔다.
무시하고 내 자리에 앉았더니 앞에 앉은 한이가 휙, 하고 돌아봤다.
한이가 사용하는 기척 감지 스킬은 언제 봐도 귀신같다.
“왜 안 왔어?”
“······좀 할 일이 있어서.”
“노트 보여 줄까?”
“고마워.”
한이는 깊게 따지지 않았다.
우리 반 아이가 이렇게 착하다.
피 말리는 티켓팅, 피켓팅으로 고통받은 마음이 치유된다.
한이에게 에너미학 개론 수업 진도에 관해 묻고 있을 때.
어두운 얼굴의 함근형이 등장했다.
중간고사 부정행위 사건이 함근형한테 전달되었나 보다.
“수업 듣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번 종례 시간에 중간고사 결과가 나오고 추가 시험 일정이 발표될 예정이었지만 하루 미뤄졌다. 그 이유에 관해 알릴 게 있다.”
함근형은 중간고사 문제 유출 사건에 관해 설명해 줬다.
함근형의 설명이 끝나고, 황지호와 나를 제외한 아이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번 일은 부정과 직접 연관된 교사와 학생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같은 학교의 소속원으로서 관리, 감독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교사진의 잘못도 있다.”
함근형은 단순히 이번 일이 어떻게 처리될지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너희들이 최선을 다한 도전, 노력의 결과물을 공정하게 지켜 주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함근형 선생님······.”
은광고에 쓰레기 같은 교사들이 그리 날뛰었는데도 망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렇게 좋은 교사가 있기 때문일 거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다.’
조금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함근형이 종례를 마무리 지었다.
“종례는 이상이다. 귀가하도록.”
나는 부반장으로서, 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을 위해 한마디 했다.
“선생님, 저희 소풍 갈 예정인데 이번 주말에 시간 되세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