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5월의 시작 (1)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매일 같이 칭찬과 상장을 받았다.
개화한 이능도 강력했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모두의 응원과 시샘을 받으며 은광고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한국 최고의 명문고니까 욕심내지 말고 상위 10% 안에 드는 걸 목표로 할까?’
그런 생각도 잠깐이었다.
전국의 천재와 수재가 모인 은광고에서 위에는 위가 존재한다는 현실과 마주했다.
은광고 생활을 즐기는 건 잠깐이었다.
점점 테스트의 난이도가 올라갔다.
그 테스트에서 태어나서 처음 받는 점수와 등수에 절망했다.
‘중간이라도 갔으면 좋겠어······.’
목표는 날이 갈수록 낮아졌다.
하지만 상위 10%, 중위권은커녕 하위 10%에서 벗어나는 것도 어려웠다.
신문부와 비교해 과제가 적다는 말에 들어간 교지 편집부.
그곳의 고문에게 위험한 제안을 받게 되고,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더 할 얘기 없니?”
계속 자신의 말을 듣기만 하던 플레이어 협회 소속의 인물이 되물었다.
이 홍 팀장이라는 플레이어는 자신 외에도 잘못된 선택을 한 네 명의 아이들에게는 몹시 냉정했다.
그나마 자신에게는 나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자신에게 아주 조금은 관대하게 대해 주고 있으니, 부탁 하나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았다.
“······부모님하고 친구한테 메시지 하나만 보내도 될까요?”
“아직 저주의 영향이 남아 있을 수도 있어. 이런 상황에선 플레이어 자격을 가진 변호사 이외의 사람과 나누는 메시지는 검수하는 게 규정이야. 개인적인 메시지라면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거다.”
언제나 자신을 응원해 줬던 부모님.
그리고 은광고에서 사귄 친구 한 명.
자신이 속이 터지게 질투하는 것도 모른 채 자신의 저주의 진행을 늦춰 주던 안다인.
그들에게 너무 늦기 전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냥······ ‘미안해’라고 말하고 싶어요.”
* * *
방과 후 학생회실로 향하는 김유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번 주말에 1학년 0반 아이들과 소풍을 갈 예정을 잡았다.
그 계획에 소극적으로 보이던 부반장, 조의신이 자신이 말하기도 전에 담임 함근형에게 소풍을 권유했다.
‘함근형 선생님도 시간 내신다고 하셨으니까 다 같이 소풍 갈 수 있어!’
주말 계획을 생각하니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오려 했다.
김유리는 콧노래를 꾹 참고 학생회실 출입 허가 코드가 입력된 학생증을 문가에 찍었다.
보안 인증 과정을 몇 초간 거친 후, 학생회실 문이 열렸다.
오늘은 자신이 조금 일찍 온 걸까.
학생회관 학생회실에는 학생회장 도원우와 학생회 서기 유상희밖에 없었다.
“상희야, 5월 5일에 시간 있어? 이번에 부모님 모시고 놀러 갈 예정인데······.”
“어떡하지. 시간은 있지만 원우 너랑 같이 있는 건 싫어.”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 부모님도 상희 너라면 아무 문제없다고 하셨어!”
“원우야, 네 언어 표현을 보니 사고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좌뇌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한 대 치면 정상이 될지도 모르잖아. 쳐도 돼?”
도원우는 매도당해도 그저 행복해하는 얼굴로 유상희를 바라봤다.
대화 내용은 그렇다 쳐도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중인데 김유리는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핀잔을 주던 유상희가 김유리가 온 걸 보고 부드럽게 웃어 줬다.
“유리야, 어서 와.”
“상희야······ 어린이날에 시간 내 주면 안 돼······?”
“원우야, 후배가 왔는데 인사도 안 할 거니? 추잡해.”
“······안녕.”
도원우는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어쨌든 김유리를 향해 인사했다.
이런 흐름은 일상다반사라 김유리는 그러려니 하며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쉬익―.
김유리가 인사할 때, 학생회실 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온 건 학생부회장 지명수와 안다인이었다.
“나 왔다.”
“안녕하세요.”
지명수가 메고 있던 가방을 테이블에 휙 던지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준열이 오늘 못 온대. 뭐 연습한다고 하던데.”
“준열이는 정말 뭐든 열심이네. 곧 이명에서 소(少)자가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실적에 따라 플레이어SAT-K가 이명을 바꿔 주기도 하니까.”
“내 이명은 어떻게 생각해? 상희 네가 원하면 나도 노력해서 이명 바꿀게!”
“응? 원우 네 이명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데, 네 이명이 뭐였더라······.”
충격받은 도원우, 진심 어린 표정의 유상희, 그 옆에서 지명수가 빵 터지려 하고 있었다.
어느덧 익숙해진 학생회의 풍경이다.
하지만 오늘 그 자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안다인이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편이지만 어쩐지 느낌이 달랐다.
안다인의 절친인 김유리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다인아, 무슨 일 있었어?”
“응, 그게······.”
안다인은 목소리를 작게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갑자기 기숙사로 오지도 않고, 학교에 안 나오고, 디바이스 연락도 안 되던 친구가 있는데······ 방금 메시지가 왔어. 미안하다고.”
그 말을 들은 김유리는 생각했다.
미안하다라.
혹시, 생각도 하기 싫지만.
그 중간고사 부정 문제 유출 사건과 관련 있는 게 아닐까?
중간고사 문제 유출을 대가로 교사들의 위험한 실험에 휘말려서 저주에 걸렸다던데.
현재 학교 밖에서 협회에 의해 격리 조치를 당했다 하니 가능성이 컸다.
아마 다인이도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렇구나.”
“응, 걱정돼.”
안다인에게 편하게 식사할 기숙사 친구가 생겼다는 말에 기뻐했었던 김유리였다.
안다인은 지나치게 우수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기백을 띄고 있다.
성격도 내성적인 편이라 말수가 적은 안다인에게 기가 눌리는 경우가 많아 친구가 쉽게 생기지 않았다.
안다인의 겉모습만 보고 들이대는 애들은 많지만 그건 친구라기보다는 숭배자라는 느낌이 강하고.
‘음······ 어떡할까.’
김유리는 그 기숙사 친구에 대한 화제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다인아, 학생회 일 끝나고 쇼핑 갈래? 동문 쪽에 수제 액세서리점 새로 생겼어. 우리 반 애들이랑 같이 가 봤는데 진짜 예쁜 거 많이 팔더라. 매일 신상도 나오는 거 같고.”
“······그래.”
자신이 위로해 주려는 걸 아는 걸까.
안다인이 작게 미소 지었다.
* * *
방과 후.
교지 편집부 소속 학생들을 중심으로 터진 스캔들로 신문부도 시끄러웠다.
각 반의 종례 시간에 교사진들이 학생들에게 사건에 대해 밝힌 모양이다.
“학교에 불상사가 터진 게 좀 그렇고. 앞으로 교지 편집부 일로 제갈쌤이 고통받지 않을 거란 생각에 미묘하게 기쁜 이 기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종합 게시판에 올라온 것과 자신이 직접 찍은 2학년 0반 사진 중 베스트 컷을 추리던 문새론이 중얼거렸다.
대부분의 신문부원들도 비슷한 심정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건으로 교무부장으로서 업무량이 급증한 제갈재걸이다.
오늘도 그는 신문부에 얼굴을 비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부실에는 이전처럼 암울한 분위기는 돌지 않았다.
그렇게 부활동을 마치고.
사전에 약속했던 그들을 만나러 이동했다.
“좀 알아보니까 걔들이 걸린 저주 장난 아니던데? 지금 잡혀간 교사인지 사람인지 쓰레기인지 모를 놈들이 우리 제갈쌤한테 그걸 다 떠넘기려고 했다고?”
“우리 반 애들도 보고 있고 제갈쌤도 있어서 티는 안 냈는데 기분 참 더럽네. 잡혀가기 전에 몇 대 팼어야 했는데!”
드라이클리닝 한 제갈재걸의 옷을 건네주기 위해 2학년 0반 학급 위원 콤비 금찬솔과 왕찬솔과 만났다.
이 둘은 비밀 유지를 위해 1박 2일 소풍 계획의 진짜 이유는 밝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밀을 지키고 작전을 수행한 두 사람도 대단했지만, 그걸 모르고도 그냥 신나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2학년 0반도 대단했다.
“당분간 바쁘시겠지만 앞으로 교지 편집부 일로 제갈재걸 선생님이 시간 빼앗길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그래, 신문부에서 독점하려 하면 싸우자는 뜻으로 알 거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이렇게 사랑받고 있구나.
두 사람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이 둘은 훌륭하게 제갈재걸을 지켜 냈다.
“네. 대신 제갈재걸 선생님이 계속 이번 일의 진상은 모르시는 상태로 있게 해 주세요.”
“걱정하지 마. 뭐 의심하거나 그쪽으로 캐 보려 하거나 할 거 같으면 우리가 알아서 정신을 빼놓을게.”
“응. 작전 몇 개 짜 놨어. 제갈쌤이 별로 의심하지 않아도 몇 개는 그냥 해 보고 싶은데.”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한테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
살살해라.
종이 가방에 담긴 옷을 받아 든 금찬솔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음, 사실 은광고 교사진도 속여 넘긴 그 제갈쌤의 더미가 어떤 건지 신경 쓰이는데. 우리도 그런 거 쓸 수 있으면 장난질 레퍼토리가 확 늘어날 거 아니야.”
“금찬, 우리도 여태까지 친 비장의 장난들의 비밀을 다 밝힌 건 아니잖아. 매너 좀.”
“······네 말대로야, 왕찬. 아깝다. 음! 장난질 소재 교환은 언제나 환영한다, 0반의 의지를 잇는 자여!”
금찬솔과 왕찬솔이 밝게 말했다.
두 사람에게 하나 물어볼 게 있었는데, 이 분위기라면 답해 줄 것 같다.
“물어볼 게 있는데요.”
“우린 비싸.”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 들은 대사지만 그때와 표정도 분위기도 전혀 다르다.
장난스럽게 웃는 두 사람에게 중요한 걸 물었다.
“반 티 어디서 맞추셨어요?”
1학년 0반 부반장으로서 일해야 할 때다.
* * *
다음 날 아침.
1학년 0반은 평소보다 일찍 모였다.
김유리는 전자 칠판 위에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다음과 같이 썼다.
[반 티 문구 정하기]
“의신이가 반 티 빨리 뽑을 수 있는 곳을 알아놨어! 문구만 정하면 바로 나올 거래.”
“부반장, 웬일로 일했냐.”
“와! 너무 시간이 없어서 안 될 줄 알았는데.”
부모님이 의류 업계의 큰손이라는 왕찬솔의 소개로 반 티 맞출 곳을 정했다.
형광색은 이미 자신들이 했으니 안 된다며 따라 하지 말라는 금찬솔과 왕찬솔의 엄포에 기꺼이 흰색 반팔 티로 정했다.
“좀 수수해도 깔끔하고 예쁜 거 같아.”
“응.”
흰 티에 검고 굵은 궁서체로 문구가 박힐 예정이다.
‘색은 수수해도 엄청 눈에 띌 텐데.’
선심 쓰는 척하던 금찬왕찬 콤비가 지정해 준 디자인이다.
눈에 안 띌 리가 없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 반 친구들이 기뻐하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누가 누구한테 뭘 써 줄지는 랜덤하게 제비뽑기로 정하자. 함근형 선생님 옷에 문구 넣을 사람은 따로 먼저 한 명 뽑을게!”
김유리가 사다리 타기 어플리케이션을 전자 칠판에 투사했다.
그리고 함근형의 티셔츠 문구를 정할 영광의 주인공은 무려······.
황지호였다.
‘불길하다!’
고서 해석에 애를 먹는지 피곤한 얼굴을 하던 황지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하하하, 뭐로 할까!”
하필 저놈한테 걸리다니.
함근형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
이상한 문구를 넣기만 해 봐라.
황지호가 주변을 둘러보다 좋은 생각이 난 듯 전자 칠판에 문구를 입력했다.
그 결과.
[등신 같은 급훈 지은 사람]
쾅―!
그 문구를 본 맹효돈이 초강화 세라믹 소재의 책상 상판에 짱돌 머리를 박았다.
맹효돈아, 학교 비품은 살살 다뤄야지.
그 당시 자리에 없었던 사월세음은 어리둥절해 했지만 이레나의 설명을 듣고 다른 아이들과 같이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아······ 어떡해, 웃으면 안 되는데······ 풉.”
몇십 초 동안 큰 웃음이 터지고 나서야 교실이 진정됐다.
“야, 황지호! 좀 봐줘!”
얼굴이 시뻘게진 맹효돈이 항의했고, 황지호는 선심 쓰듯 문구를 바꿔 줬다.
[정시 등교]
결국 급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교사가 입기엔 미묘하지만, 저 급훈은 함근형이 좋아하는 말이니까 괜찮을 거다.
아마도.
“선생님 것 정해졌으니까 이번엔 우리끼리 정하자!”
그리고 한 명씩 돌아가면서 뽑기로 했다.
먼저 나부터다.
내가 뽑은 건 맹효돈이었다.
[조의신 → 맹효돈: 짱돌 맹효돈 선생]
“야, 부반장! 이게 뭐야!”
“괜찮은데!”
“잘 어울려요!”
중간고사 때 보인 저력에 감탄해서 붙인 별명이다.
맹효돈은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다른 아이들의 호평 속에 무사히 통과되었다.
하지만 그다음, 맹효돈이 나를 뽑아 버렸다.
[맹효돈 → 조의신: 수상한 부반장 조의신]
“하하하하!”
“뭐 생각할 때 개 수상해 보여.”
“어······ 뭐라 말해야 하지······ 음.”
황지호의 폭소와 다른 아이들의 묵인 속에 통과했다.
내용이 어떻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붙여 준 건데 뭐 어쩌겠나.
그냥 받아들여야지.
[사월세음 → 이레나: 바이올리니스트 이레나]
“죄송해요, 전 이런 거 잘 못 지어서······.”
“아냐, 정말 마음에 들어!”
“응, 괜찮은 것 같아.”
서로 다독여 주는 분위기 속에서 통과.
[이레나 → 김유리: 능력자 반장 김유리, 언제나 고마워!]
“나야말로 고마워.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
“응!”
김유리와 이레나가 환하게 웃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통과.
[김유리 → 한이: 하니 Honey 한이]
“귀엽게 잘 붙은 거 같아!”
“고마워.”
한이가 매우 마음에 들어 하고 통과.
다음은 한이.
[한이 → 황지호: 그만 처웃어 황지호]
“찬성.”
“잘했다!”
“······야, 진짜 이걸로 하는 거냐?”
한이는 평소 태호권으로 장난질을 거는 황지호에게 쌓인 게 많은 탓일까.
황지호에게 아주 좋은 문구를 써 줬다.
나와 맹효돈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통과.
[황지호 → 사월세음: 비행 스킬 이펙트가 신경 쓰임]
“네? 이름도 안 써 주시나요?”
“하하하하.”
“진짜로요? 네?”
황지호는 대충 웃기만 하고 말을 안 했다.
사월 일족이 이름이 크게 박힌 티셔츠를 입고 한강을 싸돌아다니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긴 했다.
이사장답게 학생의 사정을 고려하여 배려해 준 건가.
그냥 계족의 가호로 인한 이펙트가 신경 쓰여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 * *
그리고 5월, 주말.
1학년 0반 일동은 전원 단체 티셔츠를 맞춰 입고, 한강으로 소풍을 하러 갔다.
이동 중에는 단체복 위에 겉옷을 하나씩 걸쳐 입긴 했다.
오리배도 탈 예정이라 우선 양화대교 근처, 양화 한강공원에서 합류한 우리.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송만석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함근형이 인사한 그 인물.
한강 싸이클링 팀의 마스터, 무쇠팔 송만석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