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5월의 시작 (2)
며칠 전.
선도부 활동을 마치고 귀가하던 주수혁이 중앙 구역 선도부 회관을 나오던 중에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저 멀리서 안다인과 김유리가 학생회관을 나와 이동하고 있었다.
안다인은 김유리와 대화하다 가끔씩 미소 지었다.
안다인의 미소가 보일 때마다 가슴께에 따뜻한 바람이 부는 느낌이 들었다.
‘방과 후에 기운이 없어 보여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주수혁은 멀어지는 안다인을 보며 말을 걸까 말까 잠시간 고민했다.
‘친구와 둘이서 놀러 가는 모양이니까 방해하지 말아야지.’
절대 말을 걸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라고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저번엔 자연스럽게 책 감상회도 가졌으니까!
뒤늦게 ‘인사라도 할걸’, 하고 생각하긴 했지만.
“오셨습니까.”
“다녀왔습니다, 철이 형!”
한산한 남문 앞.
주수혁은 자신을 마중 나온 에어 스트레치드 리무진에 올라타며 밝게 인사했다.
“오늘 곽 사범님이 관장 대리로 무술 시연 일정이 잡히셨다고 합니다. 밤 수련 일정은 취소되었습니다. 대신 오혜지 양과 주오 건설 창립 29주년 행사에 참석하시게 됐습니다.”
“네? 그거 숫자가 미묘하다고 해서 빠져도 된다고 들었는데······ 요새 혜지 누나랑 자주 만나네.”
주수혁의 육촌 형 되는 인물의 약혼녀, 오혜정이 가출해서 행방불명된 이후 주수혁과 오혜지를 엮어 주려 하는 분위기다.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총명한 주수혁이라면 곧 알아채겠지.
괜한 말을 하여 회장 눈 밖에 나면 여차할 때 주수혁을 도와줄 수도 없다.
‘수혁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겠지만.’
김철은 주수혁이라면 어떤 난관이 있어도 제 장래, 사랑 정도는 어렵지 않게 붙잡을 수 있을 거다, 하고 믿었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인사도 못 한 주수혁의 한심한 현실을 모르는 김철.
그 앞에서 ‘언제 또 마주칠지 모르는데 그냥 인사할걸’, 하고 후회하고 있는 주수혁.
그런 두 사람을 태운 에어 스트레치드 리무진은 자동 저공비행 모드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수혁이 내리기 전, 김철이 말을 걸었다.
“이번 어린이날 일정은 꼭 참가해 주십시오. 사촌 동생 되시는 분이 직접 제게 부탁했습니다.”
“하하, 수리가 그런 거죠? 어제도 화상 통화했는데 그런 건 직접 말하지. 친구 불러도 되나요?”
“예비 좌석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친구분이라면 도시후 군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학교 친구예요. 저번에 농구 같이 못 했던 친구들이 있어서요. 두 자리 이상 확보되면 말씀해 주세요.”
주수혁의 눈앞의 홀로그램은 조의신과 맹효돈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을 표시하고 있었다.
* * *
한때 플레이어는 3D 업종 취급을 받았다.
제대로 된 공략 정보나 아이템 지원도 없이 오로지 플레이어의 이능만 믿고 이계를 공략하고, 에너미와 싸워야 했던 시절.
플레이어로서 차출되는 게 두려워 이능을 숨기려 하던 이들도 많았다.
플레이어들이 몸을 사리니 이계 공략은 점점 더뎌졌다.
이로 인해 전사하는 이들이 늘어나 기피 현상은 더 커지는 악순환이 이어지던 암흑기.
그러나 주먹 하나로 이계를 평정한 영웅이 등장하며 그 어둠의 시대는 끝난다.
그 대영웅이 플레이어계의 여명기를 이끈 무쇠팔 송만석이었다.
“그래, 오랜만이네. 근형이.”
로드 바이크용 헬멧, 고글, 글러브, 레이싱 팬츠.
송만석은 70대라고 믿을 수 없는 건장한 몸에 사이클링 웨어를 완벽히 갖춰 입은 차림새였다.
‘송만석과 함근형이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네.’
두 사람이 인사하는 걸 보고 반 아이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송만석이라는 이름, 교과서에서 본 적 있는데요.”
“동명이인 아니냐. 교과서에 나온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을 리가.”
살아 계시니까 닥쳐.
현대 정치사 외의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들이 아직 생존해 있으면 의외라고 생각될 때가 있긴 하다.
“오랜만에 보네.”
황지호는 송만석을 직접 본 적이 있나?
그런데 지금 나오는 대화 내용이 송만석 귀에 들어가면 다 좋지 않을 것들뿐이니 다 같이 닥쳤으면 좋겠다.
“정시 등교?”
함근형은 얇은 점퍼를 걸쳤으나 앞섶이 조금 열려 있어 문구가 보였나 보다.
송만석은 함근형이 입은 반 티셔츠에 궁서체로 크게 쓰여 있는 글자를 보며 의문스러워했다.
“급훈입니다. 제가 지었습니다.”
저걸 대영웅한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할 수 있다니.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마음가짐은 남달랐다.
송만석이 함근형과 잡담을 나누다 갑자기 우리 쪽을 봤다.
‘······설마 들린 건 아니겠지.’
고글 탓에 송만석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송만석은 우리를 둘러보다 고개를 돌렸다.
“반 아이들하고 놀러 왔나?”
“네.”
“그린이도 왔나? 저번에 학교 갔다고 하던데.”
“민그린은 그날 금방 집에 갔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이 갔다.
등교하지 않는 1학년 0반 아이 중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둘 있었다.
그 하나가 송만석의 손자인 송대석, 남은 하나가 송대석의 소꿉친구인 민그린이었다.
‘중간고사 첫날에 얼굴을 철저히 가려서 알아보지 못했어. 그날 온 게 민그린이었구나.’
둘 다 등교 거부자로 게임 속에서 1학년 내내 등교하지 않지만 0반이었다는 묘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엑스트라급 비중의 캐릭터였다.
스토리 속에서 플레이가 가능한 시간은 매우 짧았었지만, 송만석과 관계된 인물이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가 본다······ 근형이 제자들도 조심해서 잘 놀고.”
“들어가십시오.”
“아, 안녕히 가세요.”
“그래그래.”
갑자기 이쪽에 말을 걸어서 반 아이들도 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영웅 송만석은 우리를 보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사라졌다.
그 등이 어쩐지 작아 보였다.
송대석과 민그린, 두 사람과 같은 반인 우리를 보고 생각하는 게 많을 거다.
‘송대석과 민그린이라······ 송만석에게는 여러모로 신세를 졌으니까 도움이 되고 싶은데.’
1학년 0반 소속 송대석과 민그린.
둘을 위해 어떤 수를 둬야 할지 생각해 봐야겠다.
송만석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김유리가 밝게 외쳤다.
“그럼 제1회 1학년 0반 소풍을 시작하겠습니다!”
김유리의 힘찬 목소리로 소풍 일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1회라고? 2회, 3회도 있나 보다.
금찬솔이랑 비슷한 사고 회로다.
김유리도 0반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선유도 공원 양화 선착장으로 이동한 후, 치킨 맛 결정권이 걸린 오리배 경주! 그 조 추첨이 있겠습니다!”
랜덤 어플리케이션으로 한 조 추첨 결과.
1조 나, 이레나.
2조 김유리, 맹효돈.
3조 황지호, 사월세음.
4조 함근형, 한이.
혼돈이 넘치는 조 배정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랜덤 신의 선택을 따르기로 했다.
구명조끼를 입은 1학년 0반 일동은 치킨 맛 결정권을 두고 오리배 경주를 시작했다.
전원 플레이어라 그런지 다른 오리배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르다.
조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의신아, 열심히 할게!”
“그래.”
열심히 발을 움직이는 이레나와 함께 골을 향해 전진하는 내가 속한 1조.
“효돈아, 그렇게 바깥쪽에 앉으면 기울어져서 물 들어와. 내 쪽으로 와!”
“어, 어.”
여전히 김유리랑 눈도 못 마주치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남고생 맹효돈 때문에 지지부진한 2조.
“지호야, 모, 못 따라가겠어요. 너무 빨라요!”
“하하하하!”
“악, 뒤집힐 거 같은데. 뒤집혀요, 그만!”
최근 워커홀릭이 된 황지호가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나 보다.
평소 쉬어야 할 시간도 최근 고서 해독으로 날리고 있으니.
사월세음은 당장이라도 비행 스킬로 도망가고 싶어 하는 얼굴이다.
그게 재미있는지 황지호는 좋다고 막 밟아댔다.
3조는 레버를 멋대로 움직이는 황지호 때문에 이 방향 저 방향 지그재그로 움직이고 있었다.
“······.”
“······.”
한마디도 안 하는데 완벽하게 합을 맞추며 앞으로 전진하는 함근형, 한이의 4조.
반드시 달달한 맛 치킨을 먹겠다는 한이의 집념과 함근형의 배려가 느껴졌다.
‘예상대로 끝났네.’
1등은 무언으로 열심히 달린 4조.
2등은 안정적으로 우리 1조.
3등은 폭주한 3조.
단독 꼴찌는 2조.
“아깝다······!”
이레나가 아쉬워하는 얼굴을 했다.
사실상 제대로 경주를 한 건 우리 조와 4조뿐이라 두 조끼리 접전을 벌였으니 아깝긴 했다.
우리들은 구명조끼를 벗기 전 단체 사진을 몇 장 찍고 치킨을 먹기 위해 이동했다.
“오늘 날씨 좋아서 다행이다. 진짜 다 젖었어!”
“네. 그렇게 물이 튈 줄은 몰랐어요.”
오리배 경주로 여기저기가 젖은 탓에 우리는 반 티 위에 걸쳐 입던 겉옷을 벗었다.
그 탓에 반 티 문구가 더욱 눈에 띄게 됐지만, 어느 사이엔가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적응이란 게 무서웠다.
“여기 앉자.”
“네, 선생님!”
“돗자리 깐다. 부반장, 거기 잡아!”
“맹효돈, 그쪽은 좀 비뚤어진 거 같은데.”
우리는 한강공원 한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자리 잡고 배달 어플리케이션을 가동해 치킨 메뉴를 살폈다.
“와, 꿀 들어간 치킨 종류가 이렇게 많았구나.”
“맛있겠다.”
허니 갈릭 치킨, 허니 버터 치킨, 허니 후라이드 치킨······.
치킨 맛 선택권을 얻은 한이가 환한 얼굴로 달콤한 치킨들을 고르고.
꼴찌를 한 김유리와 맹효돈이 오늘 소풍에서 쓰레기 처리를 맡기로 했다.
다 먹고 나선 그런 거 없이 여덟 명 모두가 함께 치웠지만.
“무슨 게임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쌓여 있는 순서대로 다 하자.”
“그래요. 전부 해 보고 싶어요!”
우리는 치킨을 먹은 후 게임을 하기로 했다.
디바이스 게임이 아닌 아날로그한 파티 게임을 해 보자는 의견이 나와 파티용 보드 게임을 잔뜩 준비해 왔다.
“룰을 전혀 모르겠는데······.”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선생님!”
김유리의 룰 설명을 들은 후 게임을 시작했다.
원카드처럼 카드를 내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이용해 카드를 숨기거나 버리는 ‘나방 속이기’.
난무하는 권모술수 속에서 살아남는 우정 파괴 게임 ‘시타델’.
적군의 암살자와 스파이를 배제하는 힌트를 건네받으며 아군을 추리해 내는 첩보 게임 ‘코드네임’.
등등.
실컷 웃고 분해하면서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준비해 둔 모든 게임을 플레이했다.
“함근형 선생님, 너무 세!”
“조금 전까지 룰도 모르셨는데, 사기야!”
“또 이기셨어. 와······.”
최고의 승률을 자랑한 건 의외로 함근형이었다.
애들이라고 봐주는 것 없이 진지하게, 즐겁게 게임에 임한 그는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웠다.
“하하하! 난 계속 꼴찌네.”
최악의 승률을 보인 건 황지호였다.
오래 살아도 인간 심리 중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나 보다.
그냥 운이 없던 것 같긴 하지만.
오늘 소풍의 MVP는 암묵적으로 함근형으로 정해진 가운데, 제1회 1학년 0반 소풍은 무사히 막을 내렸다.
* * *
일요일.
주말이 되기 전 추가 시험 일정이 발표된 탓에 학교엔 조금 우울해 보이는 학생들이 있었다.
휴일인데도 홀로그램 암기장을 켜 놓고 걷는 학생들이 가끔 보였다.
‘우리 반 추가 시험자는 민그린뿐이구나.’
따로 원격 시험을 치른 반 애들은 전부 낙제점을 면한 것 같았다.
민그린도 그냥 시험을 빼먹어서 그렇지 낙제할 만한 인재는 아니다.
처음부터 원격 시험 신청할걸, 하고 후회하고 있을 거다.
‘······이번 일로 더 학교에 안 나오게 되겠네.’
민그린은 이미 학교에 안 나오고 있지만, 더 격렬하고 더 적극적으로 학교를 안 나오게 될 거다.
내가 기억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 민그린이라면 자다가도 이불에 하이킥을 넣으며 후회하는 중이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시뮬레이터실로 향할 때,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야, 2학년 지금 싸움 났대!”
“누구랑 누구.”
“홍룡 선배랑 마······ 마진, 뭐더라. 하여튼 홍룡 선배가 상대 안 해 줬는데 계속 들이대고 결국 싸움!”
“휴일에 학교에서 뭔 짓이야.”
염준열이랑 마진승 얘기인가.
학생회 소속인 소홍룡 염준열.
현재 시점에선 아직 이명을 받지 않은 선도부 소속 마진승.
둘은 마진승이 일방적으로 열을 내며 라이벌 선언을 한 사이다.
‘······둘 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라 한 편을 들 수가 없잖아!’
그래, 둘 다 응원해야겠다.
그런데 빵셔틀 매치도 그렇고 우리 학교 애들은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 세상 최고의 구경거리는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 한다.
염준열이 끼면 두 개 다 해당되니 눈길이 가는 건 당연한가.
‘마진승의 이능은 식물을 조작하는 능력······ 불을 다루는 염준열과 상극인데도 저러고 있지.’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별짓을 다했던 마진승.
죽자고 공부해서 추가 시험의 늪에서 벗어난 이레나와 맹효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본받아야 할 때다.
훈련을 시작하기 전.
저장해 두고 계속 외면했던 페이지를 디바이스 홀로그램으로 전개했다.
[체스 소모임 주최, 교내 체스 대회 신청 폼]
나도 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한 걸음 나가자.
곧 홀로그램 위로 ‘신청 완료’라는 안내문이 떠올랐다.
* * *
일요일에 계획해 둔 훈련 일정을 마치고, 내 기숙사 방.
어린이날 경기 취소표가 풀리지 않았나, 하는 헛된 기대로 무한하게 새로 고침을 하던 중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주수혁] 의신아, 효돈아. 5월 5일에 바빠?
[맹효돈] 아니
[주수혁] 야구장 가지 않을래? 두 자리 남음!
생각지 못한 전개다.
주수혁은 잠실 야구장 좌석 배치도를 메시지창에 올리고 직접 표시해 줬다.
주오 그룹 총수 증손자가 확보한 자리답게 포수 뒤 중앙석이다······!
[나] 갈래!
[맹효돈] 그럼 나도
[주수혁] 잘됐다. 그럼 미리 만나서 점심 먹고 같이 들어가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됐다.
처음부터 주수혁에게 부탁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너무 뻔뻔해 보일 것 같아서 그냥 자력으로 해결하려 했는데.
‘좋은 좌석을 확보한 것만이 아니라 주수혁과 함께 움직일 수 있어. 운이 좋네.’
드디어 티켓팅 지옥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외야석을 환불 처리해 버렸다.
속이 시원하다.
평소에도 꿈 없이 잘 잤지만, 오늘은 더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가벼운 마음으로 잠들려 할 때, 가볍지 않은 메시지도 도착했다.
[황지호] 고서 해독 끝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