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영원의 호수 팀 마스터 내한 공연 (3)
은광고 연구동 구역 광림 연구 4관, 은영관의 지하, 표시되지 않은 층에 있는 시설.
최근 김신록은 매일 같이 수업을 마치고 웅족의 심문을 위해 이곳에 들르고 있었다.
‘오늘은 수확이 있으면 좋겠군.’
처음에는 적호가, 그다음에는 황호의 심복들이 웅족을 심문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적호의 추천과 황호의 허락을 받아 김신록이 웅족을 맡게 되었다.
쉬익―.
보안 절차를 거쳐 몇 개의 문을 통과한 후, 생포한 웅족들을 가둬 둔 밀실 앞에 도착했다.
황명 그룹에서 파견된 호족 둘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김신록은 조의신이 ‘조금도 인간다워 보이지 않다’라고 평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답인사는 들리지 않았다.
두 호족은 그저 들어가도 좋다는 의미로 눈인사를 했다.
진족이 그 후예를 대하는 태도라 보기 어려웠다.
웅족, 그것도 적호를 그리 만든 비탄의 웅녀의 피를 이은 김신록은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살가운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낙담하는 일도 없이 김신록은 안으로 들어갔다.
‘황호 님은 기대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반드시 성과를 내고 싶다. 알아내고 싶은 것도 많아.’
진족의 후예는 피와 근원에 묶여 있다.
진족 누구나 그 후예를 아끼고, 후예는 진족을 진심으로 따르는 게 보통이라 그 제약은 보통 의미가 없었다.
예외는 있지만, 그 예외는 빠르게 사라진다.
‘진족과 후예의 사이가 틀어지면 보통 후예가 사망하고 끝나니까.’
후예는 피를 나눈 진족에게 저항할 수 없으니 진족에게 외면받는 순간 빠르게 죽고 만다.
후예는 진족에게 공격 모션조차 취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으나 구체적인 범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건 기회다. 후예가 진족에게 얼마나 저항할 수 있는가 확인할 수 있으니. 실험대는 많다. 하나는 그 호족의 원수라 양보해야 했지만.’
그 호족은 황호를 직접 찾아가 무릎을 꿇고 ‘제게 복수할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황호가 흔쾌히 이를 받아들여 그 웅족을 넘겨줬다.
만약에 대비해 황명 그룹의 감시하에 놓여 있는 구역에서 복수극을 벌이고 있다 들었다.
‘남은 다섯 개의 실험대를 최대한 활용해 주겠다. 내가 웅족을 상대로 얼마나 싸울 수 있는지 확실하게 알아 둬야 한다.’
호족의 수석 주술사는 웅족을 가두기 위해 다섯 개의 결계를 작성했다.
거기에 더해 고문 효과를 늘리기 위해 수석 주술사는 웅족들의 몸 안에 갖은 저주와 주술을 심었다.
웅족들이 이 결계 안에 있는 한, 시간이 몹시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안에 갇힌 건 한두 달이지만 체감상 수십 년은 흘렀다고 느끼는 중일 거다.’
결계의 경계인 인줄이 우두머리인 황호의 검수를 받아 황금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안에 있는 자들과 존재의 근원이 연결되어 있다는 게 역겹군.’
하나는 붉은 형틀에 묶인 쓰레기가 태어난 날에 잡힌 조련계 웅족.
남은 넷은 감히 은호의 후예를 노린 웅족들.
근원이 연결되었다 하나 전원 신역을 침범하고 자신이나 은호의 후예를 죽이려 한 이들이었다.
고문을 꺼릴 이유가 없었다.
휘이이―.
김신록이 겹겹이 쳐 있는 황금빛의 인줄을 향해 걷자 바람 소리를 내며 투명하게 변했다.
결계 안으로 들어가자 다섯 개의 문이 보였다.
김신록은 가장 왼편에 있는 문부터 열었다.
첫 번째 방.
양팔을 잃은 조련계 웅족이 볼품없는 봉제 인형을 베고 누워 있었다.
김신록이 봉제 인형을 잡아채 웅족의 초점 없는 눈에 들이댔다.
“이번 아이가 마음에 드나? 그럼 처분해야겠군.”
“우······ 아아······.”
“싫어? 싫으면 말을 해라. ‘그분’에 대해서.”
조련계 웅족은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속으로 10까지 세던 김신록은 지그재그 가위로 봉제 인형의 목을 잘라 버렸다.
부욱―.
가위 날이 비교적 무딘 편이라 잘렸다기보단 뜯겨 나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형태가 되었다.
조련계 웅족의 앞에 봉제 인형 뭉치가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아!”
착란과 주술로 인해 봉제 인형이 제가 아끼는 에너미라 착각하는 조련계 웅족이 비통한 비명을 내질렀다.
제가 만든 에너미를 사람과 호족을 죽이기 위해 소모품처럼 내던지던 웅족이었지만, 제 자식처럼 아끼던 에너미도 있었나 보다.
“네 아이를 지키고 싶으면 그분에 대해 말하는 게 좋을 거다.”
김신록은 봉제 인형 부스러기를 짓밟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만들고 방 밖으로 나섰다.
두 번째 방.
검은 형틀에 묶여 있는 웅족이 웅얼거리고 있었다.
김신록은 웅족의 입가에 귀를 가져갔다가 고개를 저었다.
“죽여 달라고? 그건 불가능해. 나는 당신들의 후예라 죽여 줄 수 없다. 그 아이들을 죽이려 했던 당신들을 쉽게 죽여 줄 생각도 없고.”
이대로 가면 조만간 정보를 대가로 자신의 죽음을 요구해 올 것 같았다.
“죽고 싶으면 정보를 줘.”
김신록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뒤로했다.
물론 정보를 줘도 귀중한 실험 재료를 죽게 할 생각은 없었다.
세 번째 방.
비쩍 마른 웅족이 땅바닥을 기어 다니다 김신록을 보고 기겁하며 숨을 헐떡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김신록이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아무리 배고파도 샤프심은 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예비로 남겨 둔 샤프심 통이 텅 비어 있었다.
자신은 명백하게 이 웅족을 아사시킬 기세로 에너지원을 차단하고 있다.
하지만 후예가 받는 특유의 제약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말 그대로 공격할 수 없을 뿐, 사망에 이르게 간접적으로 몰아가는 건 가능하다. 이 자존심 강한 웅족이 살기 위해 흑연을 훔쳐 먹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어. 실험은 성공이다.’
김신록은 음산하게 웃으며 밥 덩어리를 하나 던져 줬다.
웅족은 감격한 얼굴로 허겁지겁 음식물을 삼켰다.
네 번째 방.
상위 존재, 악몽 인섬니움이 현세에 남긴 티끌을 어렵게 구해 심어 놓은 웅족이 있었다.
막 꿈에서 깨어난 건지 웅족은 겁에 질린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던 웅족이 김신록을 발견하고 끌어안으려 했다.
사앗―!
“다음에 또 멋대로 나를 만지려 하면 압정을 삼키게 될 거다.”
김신록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으며 몸을 피했다.
웅족은 오열을 터뜨리곤 제 몸을 부둥켜안고 벌벌 떨었다.
고작 티끌에 불과한 잔해를 심어 줬을 뿐인데, 악몽이 강력하긴 한가 보다.
“악몽 속에서 무엇을 보았나. 대답에 따라 꿈 없이 잠들게 해주겠다.”
웅족은 곧바로 입을 열어 제가 본 것들을 읊기 시작했으나 전부 쓸모없게 들리는 정보뿐.
김신록은 웅족이 말을 멈추자 등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다음엔 좀 더 쓸 만한 꿈을 꿔라.”
오늘도 웅족은 악몽과 대면할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방.
사슴 일족, 녹족(鹿族)이 만든 환혹 최면향이 가득한 방 안.
김신록은 해독 환약을 입에 물고 안으로 들어갔다.
환약을 씹었는데도 머릿속이 잠시 몽롱해졌다.
“향······ 꺼 줘······ 제발······.”
김신록이 들어온 순간 공기가 조금 정화된 탓일까.
웅족의 이지가 한순간 돌아왔다.
김신록은 대답하지 않고 청동 향로의 불의 세기를 올려 버렸다.
“아, 아악······.”
진해진 향에 웅족이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웅족은 향의 효과로 과거와 현재를 헤매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니, 웅족은 슬슬 한계가 온 것 같군. 무언가를 말할 때가 됐다.’
김신록은 고문과 심문의 재능과 감은 타고났다.
그의 감이 곧 이자가 중요한 정보를 토해낼 것이라 고하고 있었다.
“미······물······.”
“미물?”
“미물(微物) 주제에······ 감히 그분의 총애를 받다니······.”
미물, 그분.
둘 다 웅족의 입에서 듣지 못한 단어였다.
김신록은 드디어 자신이 성과를 냈다고 확신했다.
* * *
아침, 1학년 0반 교실.
안으로 들어가니 달콤한 냄새가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만들었을 텐데.”
“메뉴가 안 겹쳐서 다행이야!”
교실 책상이 중앙에 모여 있었다.
이레나와 김유리가 책상 위로 S자 초콜릿 버터 쿠키와 시나몬 롤 스콘을 각각 꺼내는 중이었다.
“의신아, 안녕.”
“안녕! 오늘 나랑 레나가 간식 가져왔어. 조례 때 함근형 선생님 오시면 같이 먹자!”
이레나는 저번 티켓팅을 도와준 답례로 근로 아르바이트 중인 기숙사 식당에서 양해를 구하고 손수 쿠키를 구웠다 한다.
김유리는 어린이날 사건으로 고생한 나와 맹효돈을 위해 스콘을 만들어 온 모양이다.
곧 다른 애들도 교실에 도착해 우리는 어린이날 사건 이야기를 했다.
“와, 그날 용제건 선생님이 이계 공략 가자는 말에 바로 간 거야?”
“아······ 나 같으면 엄청나게 망설일 것 같은데.”
“비행 스킬을 그렇게 응용할 수 있었군요! 용족 분이 사용하는 비행 스킬도 직접 보고 싶어요.”
함근형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그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 말했다.
맹효돈이 가끔 몇 마디 거들기도 하고 다른 애들도 질문하기도 하며 대화가 이어졌다.
한편, 입을 다물고 있는 황지호가 뭔가 말할 게 있는지 눈을 반짝이며 내 쪽을 흘끗거렸다.
‘디바이스 메시지로 말 안 하는 거 보니 중요한 내용인 거 같네.’
그래도 오늘 오후는 바빠서 황명호 대저택에 갈 시간이 없다.
나는 황지호의 시선을 무시하며 반 아이들과 하는 잡담에 집중했다.
곧 조례를 위해 함근형이 교실로 들어와 다 같이 두 사람이 준비한 수제 간식을 맛보았다.
단것을 좋아하는 한이가 매우 행복해하는 얼굴로 한입, 한입 음미하고, 여전히 여자아이들과 어색해하는 맹효돈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 *
점심시간.
수업에 들어가기 전 1학년 산책로 벤치에 앉아 기사를 읽었다.
아직 어린이날 사건이 화제가 되고 있었다.
‘붉은 사자와 염준열 기사에 댓글이 많긴 한데······ 도원우도 만만치 않네.’
강철의 쐐기를 찬양하는 댓글 추천 수가 네 자리를 거뜬히 넘어가 있었다.
염준열만큼은 아니지만, 팬이 많은 것 같다.
도원우는 게임 속에서도 열혈 소년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학생회장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명문고의 만년 수석에 학생회장에 우수한 플레이어인 데다 노력가, 거기에 TC 그룹이라는 뒷배도 있다.
2학년 0반의 금찬왕찬 콤비를 어느 정도 통제할 능력도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데.
‘······왜 유상희 앞에서는 추해지는 걸까.’
해 봤자 소용없는 고민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의신 학생.”
기척을 완벽하게 죽인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선량함이 묻어나는 낭랑한 목소리였다.
‘공청훤 선생님이다.’
한이의 은사, 에너미학 개론의 담당 교사 공청훤이었다.
태호권의 달인이라 그런가.
기척을 죽이는 걸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는 것 같다.
교내에서는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저번 수업에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어요.”
“······죄송해요.”
“의신 학생은 늘 성실하게 수업을 들었으니, 사정이 있었겠죠. 다음에 연락을 주면 수업 자료를 보내 줄게요.”
공청훤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디바이스 코드를 알려 줬다.
내가 지은 죄도 있고 시험 기간 때 무시무시한 시험 분량을 맛봤기 때문인 걸까.
저 웃는 얼굴이 조금 무섭다.
“어린이날 사건, 고생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눌 때.
관악부와 오케스트라부에서 준비한 수업종이 울렸다.
‘페르 귄트 모음곡에 들어 있던 곡이네.’
노르웨이의 쇼팽이라고도 불리는 에드바르드 그리그가 작곡한 ‘산속 마왕의 궁전에서(In the Hall of the Mountain King)’.
페르 귄트가 초록 여인을 유혹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 트롤 마왕의 궁전까지 들어갔다가 괴물의 축제를 보고 도망가는 장면에 흐르는 곡이었다.
“그러면 수업에 같이 들어갈까요?”
공청훤은 오늘 내가 또 땡땡이칠까 봐 잡으러 왔던 건가 보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지만, 여전히 공청훤의 수업 내용은 알찼다.
* * *
방과 후.
신문부에선 문새론의 요청을 받아 또 인터뷰에 응하다보니 부활동이 끝났다.
질문 내용이나, 말하는 걸 보니 그녀는 맹효돈과도 인터뷰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직 반 여자애들하고도 말을 못 튼 맹효돈이 문새론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인데.’
문새론이라면 알아서 잘하겠지만.
‘나나 잘해야지.’
폐쇄 구역.
이전에도 왔던 구교사의 교실.
나는 교탁 위에 걸터앉아 염준열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스승님!”
염준열이 순간 적벽괴도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
어쨌든 부르지 않았으니 제자로서 합격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