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영원의 호수 팀 마스터 내한 공연 (6)
카네이션 전달식을 마치고 저녁 시간.
저녁 메뉴는 한정식이었다.
표고버섯전, 명태전, 호박전과 구절판에 얇게 썬 매운 소갈비찜.
주 요리는 입을 즐겁게 해주는 탕이라는 뜻의 열구자탕(悅口子湯), 신선로였다.
막내 은재호가 신선로에 손이 닿지 않아 허둥대는 걸 도와줬더니 첫째와 둘째도 그릇을 내밀었다.
“은행하고 표고버섯 퍼 주세요······!”
“새우 완자 많이 주세요!”
“그래, 많이 먹어.”
“감사합니다!”
셋은 부리지 않던 응석을 부렸다.
은호의 후예 삼 남매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호족과 후예들의 수만큼 카네이션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탓일지도 모르겠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지쳐 있는 셋을 위해 자주 손을 뻗는 반찬을 눈여겨봤다가 내 몫까지 건네주니 기뻐했다.
그 광경을 눈을 빛내며 지켜보던 황지호가 사고를 쳤다.
“먹어라.”
황지호는 내 흉내를 내며 막내 은재호에게 전복과 해삼을 잔뜩 건넸다.
‘얘는 해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은재호는 안 먹을 수도 없고, 먹기엔 손이 가지 않는 듯 눈물이 그득한 눈으로 앞접시를 내려다봤다.
달그락.
“아······.”
그걸 지켜보던 백호군이 말없이 소 갈빗살을 발라 놓은 접시와 바꿔 줬다.
“화, 황호 님. 백호 님. 감사합니다······.”
해산물의 압박에서 벗어난 은재호가 뒤늦게 인사했다.
황지호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백호군은 서늘한 얼굴로 계속 식사했다.
애 보는 건 백호군이 황지호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다.
* * *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천천히, 조심조심 종종 걷는 올무의 페이스에 맞춰 나와 백호군도 걸음을 늦췄다.
평소엔 나와 백호군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올무지만, 오늘은 종이 꽃관을 떨어뜨릴까 봐 걱정하나 보다.
‘현관에서 뛰다가 꽃관이 떨어졌을 땐 세상 다 잃은 얼굴을 했는데.’
올무는 마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췄다.
백호군이 다시 머리에 종이 꽃관을 얹어 줄 때까지 굳어 있었다.
삼 남매가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은 것 같으니 나중에 보내 달라고 해야겠다.
* * *
올무와 백호군과 긴 산책을 마치고, 기숙사.
1학년 기숙사 건물에 들어가기 전 종이 카네이션을 아이템창에 넣었다.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내 방으로 향하던 중에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어, 부반장.”
17층 공용 공간 중앙 휴게실.
꽤 늦은 시간인데 맹효돈이 휴게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늘 서너 명 정도는 휴게실에서 책을 읽거나 홀로그램을 켜 놓고 있는 게 보통인데.
지금은 맹효돈밖에 없다.
‘2, 3학년은 그냥 기숙사에 남은 사람도 많지만 1학년들은 대부분 귀가했어. 사월세음도 오늘은 귀가한다고 했었지······ 오늘은 어버이날이니까 맹효돈도 머리가 복잡하겠네.’
아직 맹효돈과 그를 팔아먹은 아버지 사이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다.
맹효돈은 생일빵 사건 이후로 아버지에 대한 화제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닐 거다.
“여기서 뭐해.”
“그냥 있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걸음을 돌려 맹효돈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넌 오늘 집에 안 가냐.”
“기숙사 들어오기 전에 해약해서 집 없어.”
“뭔 소리야.”
맹효돈의 질문에 너무 솔직하게 답해 버렸다.
적당히 말을 돌릴걸.
후회했지만 그냥 숨길 내용도 아니라 사실대로 말했다.
“부모님이랑 동생들이 떠난 지 좀 됐어. 밖에 집 남겨 봤자 관리할 사람도 없으니까 기숙사 오기 전에 정리하고 왔어.”
“······어, 미안.”
맹효돈이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는지 면목 없어 하는 얼굴을 했다.
“······언제였어?”
무거워진 분위기를 나름 어떻게든 해보려고 맹효돈은 억지로 말을 꺼냈다.
내가 ‘떠난 지 좀 됐어.’라고 말한 게 실수였던 거 같다.
내 기준으론 오래된 일이지만, 이 세계에선 아직 작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작년.”
쾅!
내 답변에 맹효돈이 소파 뒤쪽의 벽에 머리를 박았다.
그의 돌머리야 멀쩡하겠지만 기숙사 벽이 걱정이다.
“에이, 아, 미친······ 미안.”
“뭘 미안해하고 있어.”
“아, 하여튼 미안하다고!”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사람은 없고, 대화가 뚝 끊기고.
자판기에서 음료수라도 뽑아 올까, 고민하던 중에 맹효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야, 담임이랑 변호사들이 절대로 연락하지 말라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연락하지 말라는 대상이 누군지 짐작이 갔다.
분명 맹효돈을 파이트 클럽에 팔아넘긴 그의 아버지, 현재 무직 백수 빚쟁이에 다중으로 소송으로 걸린 그 쓰레기를 말하는 걸 거다.
맹효돈은 파이트 클럽에서 탈출하는 걸 택했지만 내적으론 아버지와의 연을 완전히 끊어 내지 못했나 보다.
‘맹효돈은 고작 17세야. 이런 일을 겪었다 해도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와 연을 단숨에 끊어 내는 건 어렵겠지.’
그는 머리를 벽에 박은 채로 시선을 천장을 향해 두었다.
“······죗값을 치르고, 갱생할 기회를 얻는 걸 지켜보는 것도 효도의 방법이라고 하는데, 모르겠다.”
맹효돈이 태어난 계기를 제공한 것 외엔 업적이 없는 쓰레기다.
당연히 연락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도 어차피 연락 안 할 맹효돈한테 그걸 또 말하지는 말자.’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맹효돈은 디바이스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고민을 하더라도 자신을 도와준 함근형이나 변호인단이 해준 조언을 어길 놈은 아니었다.
솨아아―.
또 말이 끊기고, 공기 청정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침묵이 길어져 대화 주제를 바꾸기 위해 아무 말이나 꺼내기로 했다.
“밥은 먹었냐.”
“······아니.”
평소대로 맹효돈의 맛 감평을 기대했는데.
기숙사 식당 전 메뉴를 섭렵하던 미식가이자 대식가 맹효돈이 저녁을 거르다니!
진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나 보다.
배가 고프면 쓸데없는 생각이 더 들 거다.
뭐든 먹여야겠다.
“편의점 가자.”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사람이 없어 바로 1층까지 갈 줄 알았는데 중간에 멈췄다.
“우리 반 애들이네.”
“응? 안녕······!”
맹효돈의 말대로 이레나와 한이가 있었다.
이 두 사람도 돌아갈 집이 없으니 기숙사에 남았구나.
“우리는 편의점 가는 중인데. 어디 가?”
“산책하려고. 레나가 휴게실에서 계속 새로 고침하던 중에 머리가 아프다 해서.”
이레나는 계속 취소 티켓팅의 지옥 속에 있었나 보다.
황지호와 얘기도 끝났으니 빨리 이레나를 지옥에서 해방해줘야겠다.
“그럼 편의점 같이 가자. 3+1 행사 하는 거 있으면 나눠 사 먹자.”
“그래.”
“응······! 아이스크림 행사하는 중이면 좋겠다.”
은광고 학교 부지 밖에 있는 편의점으로 이동하며 일일 스태프 자리가 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파리했던 이레나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와, 와! 진짜야? 꼭 하고 싶어!”
“잘됐다, 레나야.”
“응······!”
일일 스태프 자리는 한 자리만 남는 게 아니니, 나중에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한이나 맹효돈은 권제인의 내한 공연 날에 이미 근로 아르바이트를 잡아 둔 바람에 못 올 거라 하지만.
우리 넷은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 빵, 과자,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 왔다.
1학년 기숙사 건물 1층 로비, 남녀 공용 휴게실에서 5월 8일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간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 * *
아직 자정이 넘지 않은 시각.
김신록은 황명호의 대저택을 방문했다.
“죄송합니다. 교무부장 선생님과 의논할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황호 님, 백호 님. 조의신 군은 이미 돌아갔습니까?”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황호와 백호, 두 신화계 호족의 옷깃엔 종이 카네이션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래. 얘기는 끝났어. 조의신도 기숙사로 돌아갔고.”
황호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뭔가 시킬 생각이신가.’
사전에 이 자리에 못 올 것 같다고 말한 김신록에게 황호는 ‘반드시 오늘 저택에 들러라’라고 엄포를 놓았다.
최근 황호에게 의욕이 생긴 이후 호족들을 부리는 게 험해졌다.
호족들은 황호의 변화에 기뻐하면서도 늘어난 업무량 때문에 죽어 나갔다.
후예인 김신록도 수면 시간이 크게 줄었다.
“네 몫의 꽃이다. 얘들, 너 기다리다 잠들었는데. 오늘 전해야 한다고 나한테 신신당부를 하더군.”
황호가 테이블에 있던 종이 카네이션을 하나 들어 자신에게 건넸다.
소파 가까이 다가가니 소파와 러그 위에서 잠든 은호의 후예 셋과 신수가 보였다.
김신록은 자신이 받을 카네이션이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황호의 손에서 카네이션을 건네받으면서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종이 카네이션을 소중히 받아 들어 품 안에 넣었다.
“적호의 몫으로 만든 종이 카네이션도 있는데, 네가 전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신분을 바꿔 가며 수십 년 넘게 인간 사이에 섞여 교사를 하던 김신록이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카네이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김신록은 테이블 위에 남아 있는 조화 한 송이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아닙니다. 적호 님께는 그 아이들이 전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신록은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용건이 끝났으면 돌아가겠습니다. 이번 주 내로 국회와 서울 시의회에 제출해야 할 자료가 있습니다. 황호 님, 백호 님, 가 보겠습니다.”
김신록은 황호가 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정중하게 인사한 후 등을 돌려 버렸다.
김신록이 저택 밖으로 사라지자 황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묻지도 않는 걸 말하는 거 보니 어지간히 싫었나 보네.”
황호는 백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적호도 김신록도 멍청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백호?”
황호의 예상대로, 백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주말에는 유상훈과 장남욱, 셋이서 놀러 갔다.
“야, 너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냐?”
“어젯밤에 기숙사 애들이랑 놀다 늦게 자서.”
“뭐, 의신아. 10대 시절에 적절한 수면을 취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성장 발육도 저하되고 학업 능력도 떨어져. 특히 수면 부족이 이능 발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오늘도 장남욱의 잔소리는 한결같았다.
장남욱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도착한 영화관.
유상훈이 보고 싶다는 영화가 있다고 해서 첫 일정은 영화 감상이다.
유상훈이 선택한 영화는 한류 스타 플레이어가 카메오로 등장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였다.
대대적으로 포스터에 선전한 것과 달리 그 한류 스타 플레이어가 등장하는 장면이나 대사는 몇 마디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후 유상훈은 몇 번이나 그 몇 안 되는 장면들을 언급했다.
‘유상훈이 그 플레이어 팬이었나 보네.’
착지하기 직전에 발동한 이능이 절묘했다느니, 주인공과 농구 경기를 하는 장면에서 슈팅 폼이 완벽했다느니.
그 한류 스타 플레이어도 농구를 해서 유상훈이 좋아하나 보다.
그러다 화제가 바뀌었다.
“시후 육촌 형이랑 너랑 소꿉친구라고 들었는데. 특히 상희 누나가 그 육촌 형의 은인이자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
“아, 소꿉친구는 개뿔.”
도원우를 말하나 보다.
유상훈이 장남욱의 말을 끊고 격한 감정을 표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저쪽에선 칭찬밖에 안 하던데.”
“······완전 미친놈을 그냥 미친놈으로 만들어주기는 했다.”
결국, 어느 쪽이건 미친놈이니 마찬가지인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유상훈의 표정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도원우가 저렇게 된 사연이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유상훈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장남욱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말을 돌렸다.
“아, 시후한테 들었어. 다음이나 다다음 주말은 시간 비워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어린이날 잠실 야구장 사건으로 주오랑 TC 그룹 차원에서 준비한 상도 주고 파티도 열 예정이라고 들었어.”
그런 것도 하나.
만약 그런 게 열리면 다음 주엔 학교 쪽으로 연락이 올 거다.
‘주요 캐릭터가 참가할 가능성이 커. 파티가 열린다면 반드시 참가해 두고 싶다.’
셋이서 각각 대패 삼겹살 5인분에 냉면까지 먹은 후, 우리는 VR 게임방에서 놀았다.
플마고 외에 게임은 별로 한 적이 없던 탓일까.
셋 중 승률이 가장 낮은 건 나였고, 압도적인 승률을 보인 건 유상훈이었다.
장남욱의 통금 시간에 가까워질 때까지 놀던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 * *
주말이 끝나고 다시 주중.
영원의 호수 팀 마스터 권제인의 내한 공연일이 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