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9화 (69/925)

20. 나비의 날갯짓 (1)

어른스럽고 얌전하고 착한 아이.

이레나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잘 울지 않았고, 또래 아이들에게 양보도 잘하는 착한 아이 취급을 받았다.

정작 이레나는 자신이 단 한 번도 착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냥 울어도 달래 줄 사람이 없고, 떼를 써도 받아 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뿐인데.’

이레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넓고 차가운 거실 바닥에 홀로 앉아 있던 것이었다.

밤마다 어른들과 모임을 하느라 바쁜 부모.

기숙사에 간 이후로 얼굴 보기가 어려워진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언니.

가족 넷이 모이는 일은 드물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능이 개화한 이후로 더 가족끼리 소원해진 것 같아······ 내 이능 때문에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된 건 아닐까.’

이능이 개화한 이후에는 머리도 좋아지고, 신체 능력도 다소 향상되어 ‘모범생’이라는 수식어도 붙기 시작했다.

현재 이레나는 은광고에선 낙제를 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처지지만, 플레이어 전체로 따지면 상당히 우수한 편에 속했다.

‘······부모님께 칭찬을 받은 적이 없지만.’

이레나의 부모는 이레나의 양육, 교육에 얼마나 많은 돈과 수고가 들어가는지, 그로 인해 자신들이 얼마나 불행한지 역설해 왔다.

이레나가 이 집에 있어 돈과 시간이 들어가는 건 그녀로선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태껏 들어간 돈의 가치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부모의 말에 순종해 왔다.

환몽 경매에 관해 증언한 것만 빼면.

‘부모님은 전부 나를 위해서라고 말씀하긴 하셨지만······ 환몽 경매가 없어졌으면 했어······.’

이레나는 중학생 시절 환몽 경매장에 가게 되었다.

희귀 이능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끔찍한 꼴을 당하는 걸 보며 이레나는 겁에 질렸다.

그녀는 자신의 혀가 영구히 사라져도 좋으니, 침묵 맹세를 깨고 플레이어 협회와 경찰에 알리고 싶다고 부모를 설득했었다.

돌아온 건 질타와 체벌이었다.

‘이게 다 너 잘되라고 어쩔 수 없이 가는 거다.’

‘널 위해 높으신 분과 연을 맺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가는 건데.’

‘너를 위해 이렇게 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못된 년!’

그 모진 말들을 듣고도 부모가 정말 자신을 위해 환몽 경매에 참여했다고 이레나는 믿었다.

그렇다면 억지로 환몽 경매에 참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이 성공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를 위해 한국 최고의 플레이어 특목고, 은광고의 입시를 치렀다.

막상 합격하고 나니 ‘은광고에 들어갔으니, 그곳 높은 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환몽 경매에 반드시 가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절망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끌려간 환몽 경매는 적벽괴도의 손에 끝났고 은광고에 계신다는 높은 분들 대부분은 잡혀갔다.

‘부모님이 어쩔 수 없이 참가해야 했던 환몽 경매가 없어지면 다 잘될 거라고 믿었는데.’

이레나는 환몽 경매에 대해 적극적으로 증언하고 적벽괴도에 관해선 침묵을 선택했다.

앞으로 자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오던 가족들도 마음고생을 할 일이 없어질 거라 믿고 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레나의 부모는 그녀를 핑계로 사리사욕을 채우려 했을 뿐이었다.

증언한 결과, 이레나는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이레나의 부모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가 죽고 싶어질 만큼 몰아붙였다.

은광구 퇴폐 업소 사건에 휘말리며 연락이 뚝 끊겼지만.

‘그래도 환몽 경매가 없어지고, 세음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만우절에 사월세음이 처음으로 등교했을 때, 이레나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적벽괴도가 없었다면 반 친구가 노예로 팔려나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을 거란 사실에 자기혐오에 빠졌다.

‘내가 그날 경매에 참가자로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세음이도 우리 반 애들도 나한테 실망할 거야······.’

이레나의 입학을 취소시키려던 이사진들 사이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0반으로 받아 준 함근형 선생님.

입학 첫날, 기숙사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던 자신을 구해 준 부반장 조의신.

처음으로 등교한 날, 계속 등교해 달라며 웃던 반장 김유리.

중간고사 기간, 자신의 공부할 시간을 아껴 가며 도와준 한이.

중간고사 때 함께 밤을 새우며 서로를 격려한 맹효돈과 사월세음.

권제인 내한 콘서트의 일일 스태프 자리를 알아봐 준 황지호.

반 아이들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동시에 무거워지기도 했다.

‘다 좋은 애들인데······ 나는······.’

기숙사 방 책상 위.

인쇄해서 붙여 둔 1학년 0반 소풍 기념 단체 사진을 보며 이레나는 자책했다.

반 아이들 사이에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혼자 있을 때면 부모에게 들었던 말과 어두운 생각이 밀려들었다.

‘······빨리 학교에 가자.’

오늘은 영원의 호수 팀 마스터 권제인의 내한 공연일이다.

잠이 오지 않았던 탓에 일찍 일어나 쓸데없는 생각을 해 버렸다.

몸단장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현악부에서 받은 바이올린 모양의 배지를 교복 위에 달았다.

음악 관련 부활동 소속 학생들은 협연이 잦았다.

그 탓에 원활한 연주자 확보와 협연 제안을 위해 각자 다루는 악기를 데포르메한 배지를 착용하는 게 관례였다.

아직 이레나는 협연이 가능할 만한 연주를 하지 못했지만.

‘그런데 염준열 선배님은 적벽괴도가 아니셨는데······ 적벽괴도는 누구일까.’

적벽괴도, 염준열.

두 사람과 길게 대화를 하진 않았지만, 동일인물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반 친구도 자신도 구해 준 적벽괴도.

언젠가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    *    *

약 천 명을 수용하는 공연장, 중앙 구역 호연관 콘서트홀.

아직 공연 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는데, 호연관 주변이 사람으로 넘쳐났다.

은광고 보안 절차가 복잡하다 보니 상시 출입 허가가 없는 외부인들은 시간 여유를 두고 일찍 온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부지런한 사람들이니까 티켓팅 전쟁에서 승리한 거겠지.’

1학년 0반은 티켓팅 전쟁에 패배해서 스태프로 일하게 됐다.

그중에서도 오늘 일일 스태프 역을 맡은 건 넷이었다.

나, 사월세음, 김유리, 이레나.

황지호가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모집하는 일일 스태프는 네 명이었다.

‘황명호 이사장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설정의 황지호가 스태프 자리를 하는 건 눈에 띈다.’

그 말로 설득하니 황지호가 투덜거리다 포기했다.

그를 버리고 우리 넷은 무사히 호연관 무대 뒤에 도착했다.

“······우리 팀 마스터 변덕이 죽 끓듯 해서 여러 사람 고생시키네. 갑자기 내한 공연이라니. 그것도 설비가 갖춰진 상인관도 아니고 호연관! 제인이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이번 내한 공연의 기획자를 맡은 건 영원의 호수 팀원 중 하나.

재러드 리(Jared Lee).

권제인의 음악성과 이능에 영감을 받고 원래 속해 있던 팀, 당시 세계 10대 팀 중 하나였던 ‘세 기사의 맹세’를 때려치우고 나온 금발의 외국인이다.

‘지금이야 영원의 호수도 10대 팀에 들어가지만, 그때는 만들어진 직후였는데.’

권제인이 직접 언론을 상대하는 건 드물었다.

그녀를 대신해 언론을 상대하는 게 재러드였다.

한국에선 ‘한국인보다 한국말 잘하는 금발 외국인’으로 제법 인기가 좋았다.

“갑자기 정해지는 바람에 사람 뽑기 어려웠는데. 고마워, 얘들아.”

재러드는 우리 넷에게 명함을 나눠 주고 완벽한 한국말로 구사하며 친근한 말투로 인사했다.

어조, 억양이 한국인 그 자체라 마치 우리말 더빙을 보는 기분이었다.

재러드는 우리가 해야 할 일과 주의해야 할 점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잡일 스태프지만 권제인의 후배라 그런가. 기획자가 직접 설명해 주다니.’

우리가 맡을 일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우리가 맡게 된 건 전문 기술을 가진 스태프가 맡기에는 미묘하고, 정식으로 사람을 뽑기에는 더욱 미묘한 잡일들이었다.

장비 나르기.

소책자 파본 점검 및 배부.

종이 포스터 게재.

좌석 안내.

몇 시간 안 되는 콘서트를 위해 뒤에서 어떤 노력을 하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그럼 열심히 일해 볼까!’

게임 화면 너머로만 보던 권제인의 연주.

잡일을 하는 것뿐이지만 그 일부가 되는 건 생각보다 보람찬 일이었다.

“이건 천장에 설치하면 되나요?”

“그래. 벽 쪽 조명 각도 조절도 부탁하고 싶은데.”

“네! 어느 쪽을 손보면 될까요.”

우리 넷 중 가장 크게 활약한 건 사월세음이었다.

사월세음은 은광고 플레이어 중에선 약체에 속하지만, 일반인보다 근력도 좋은 데다 비행 스킬도 가졌으니까.

‘아르바이트 경험도 콘서트를 보는 것도 처음이라 본인도 즐거워하는 것 같고······.’

일일이 비행, 이동 아이템을 사용하는 건 번거롭고, 비행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는 고급 인력 취급을 받아 섭외하기 어려웠다.

이런 잡일을 웃으며 하는 사월세음은 가장 크게 환영받았다.

“비행 스킬을 가진 은광고 학생을 이렇게 부려 먹어도 되나 모르겠다. 나중에 제인이한테 혼나는 거 아냐?”

“갑자기 공연 일정을 잡은 팀 마스터님 잘못도 있습니다. 모른 척하죠.”

소책자의 파본을 점검하던 중, 음향 스태프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이 음향 스태프지, 권제인이 데리고 온 이들 대부분이 영원의 호수 팀 소속 멤버들이었다.

‘최상위급의 플레이어면서 음향 조정 중인 사람들이 할 말이 아닌데.’

이능을 타고났지만, 영원의 호수 소속의 플레이어들은 이계 공략보다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재야에 묻혀 있던 이들은 권제인의 선율에 이끌려 영원의 호수에 들어왔고 그 결과 팀이 커졌다.

‘진족은 물론이고 상위 존재 중에서도 권제인 팬이 있을 정도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맨체스터 아레나에서 권제인 단독 콘서트를 열고 열렬한 앙코르 요청에 응해 ‘for LENA’를 연주했을 때.

무사이 아홉 자매, 뮤즈 중 테르포시코레와 에우테르페, 칼리오페가 1분간 강림하여 춤을 추고 사라진 일화는 유명했다.

“정말 남는 포스터와 소책자······ 가져가도 되나요?”

“그래. 넉넉하게 준비했으니까 필요한 만큼 가져가도 돼.”

“감사합니다······!”

“레나야, 잘됐다. 아, 나도 소책자 남으면 하나 가져야지!”

이레나가 재러드의 말에 감격한 얼굴을 했다.

옆에서 소책자 파본 점검을 하던 김유리도 밝은 표정이었다.

내 몫으로 놓인 소책자들 파본 점검을 마쳤을 때, 영원의 호수에서 차출된 스태프가 말을 걸어왔다.

“조의신 학생. 이 포스터, 사전에 말한 위치에 부착 부탁드려요. 보통은 홀로그램으로 처리하지만, 우리 팀 마스터가 종이 포스터 설치를 고집해서······.”

“네, 다녀올게요.”

고급 인력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월세음.

아직 소책자 점검이 끝나지 않았고, 리허설 공연을 보고 싶어 할 이레나와 김유리.

이 셋을 대신해 내가 호연관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을 거다.

포스터와 테이프, 가위가 들어 있는 박스를 들고 호연관 밖으로 나섰다.

*    *    *

호연관 앞에 놓인 두 마리의 석고 호랑이 조각상 앞.

그 앞은 시끌시끌했다.

은광고 교복을 입은 집단이 그 시끄러운 중심에 있었다.

우리 학교에 단체 티켓팅에 성공한 용자들이 있나 보다.

“가위, 바위, 보!”

“아, 또 비겼네! 따라 하지 마. 왕찬, 이 등신아!”

“반사!”

“그럼 난 무지개 반사!”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다.

‘2학년 0반 금찬왕찬 콤비잖아······!’

잘 보니 교복을 입은 2학년생들 사이에 제갈재걸 선생님도 서 있었다.

“아, 쟤들 벌써 열 번째 똑같은 거 냈어.”

“원래 미친 애들끼리 사고 회로가 비슷하잖아. 자기들 나름대로 고도의 심리전 펼쳐서 가위바위보 한 게 저 결과일걸.”

들려오는 대화를 들어보니 2학년 0반 일동들은 이번 콘서트 단체 관람을 노리고 티켓팅을 했고, 멋지게 성공한 것 같다.

‘저런 놈들 때문에 우리 반 티켓팅이 망했구나!’

그리고 현재 티켓팅에 성공한 이들은 제갈재걸의 옆자리를 두고 가위바위보 토너먼트를 치르는 중이었다.

제갈재걸의 오른쪽 자리는 2학년 0반 심리전의 최강자, 연극부의 에이스가 일찌감치 차지했다 한다.

문제는 왼쪽 자리였다.

그 한 자리를 두고 자존심 강한 두 학급 임원이 결승전을 치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 눈에 띄지 않게 기둥 뒤에 적당히 몸을 숨기며 작업을 진행했다.

‘······아는 척하지 말자.’

오늘 2학년 0반의 돌아이짓은 학교 일과 중에도 있었다.

권제인의 내한 콘서트, 그것도 호연관 콘서트가 오늘 열리니 방송부는 수업종으로 권제인이 작곡한 곡들을 편성했다.

하지만 2학년 0반이 모든 곡을 ‘for LENA’로 몰래 바꿔 버렸다.

방송부 홈페이지도 정복한 2학년 0반이 남긴 코멘트는 다음과 같았다.

[명곡은 들으면 들을수록 새로운 법!]

그 결과 오늘 수업종은 온종일 같은 곡이었다.

같은 곡이지만, 연주자와 악기는 계속 변하긴 했다.

역대 음악 동아리들이 온갖 악기로 ‘for LENA’를 커버한 곡들이 수업종으로 사용되었는데, 2학년 0반의 말대로 들으면 들을수록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해금하고 태평소 버전이 제일 인상 깊었어.’

작업을 마치고 다시 2학년 0반 일당을 둘러보니, 오늘 날짜와 개요가 적힌 단체 천 엠블럼을 착용한 게 눈에 들어왔다.

제갈재걸도 착용 중이었는데, 그의 것에만 금박 장식이 들어가 있었다.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이네.’

제갈재걸도 있으니 콘서트 중에 사고 치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금찬왕찬의 가위바위보 대결 결과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쪽 포스터 게재가 끝나 이동하기로 했다.

홀로그램을 체크하며 다른 지점으로 이동했을 때였다.

양복을 입은 집단과 마주쳤다.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눈에 익었다.

‘······황지호잖아!’

머리 스타일도 다르고, 머리나 눈 색도 황지호보다 검다.

그래도 게임에서 몇 번 봐서 바로 알아봤다.

이건 30대 버전 황호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