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0화 (70/925)

20. 나비의 날갯짓 (2)

‘왜 여기에 있는 거냐.’

한눈에 내가 알아봤다는 걸 눈치챈 30대 버전 황호가 눈을 반짝이며 씩 웃었다.

‘숨길 생각이 없나 보네.’

깔끔하게 뒤로 넘겨 정리한 머리 모양 탓에 표정이 확실히 드러나 있었다.

나이대별로 분신을 여럿 다루기 때문일까, 30대 버전의 황호는 그 나이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황지호가 상시 얼굴에 띄우고 있는 장난기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인상이 매우 달라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많이 닮은 친척 정도로 보일 거다.

‘눈을 빛내는 건 10대 버전이랑 똑같지만.’

대화하며 걸어오던 황호를 둘러싼 집단은 내가 소리를 들을 만한 위치에 들어오자 입을 다물었다.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보다.

“얘는 알아. 괜찮아.”

알긴 알지만, 괜찮은지는 모르겠는데.

양복 차림의 집단이 내 쪽, 목걸이 타입의 스태프 명찰에 시선을 주는 게 보였다.

“일일 스태프, 조의신.”

“조의신······.”

내 명찰을 소리 내어 읽고는 양복 차림의 네 남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이 학생이 그······.”

“진짜 인간이네요.”

“은호 님의 후예를 구한 그분이시군요.”

말하는 걸 보니 이 넷은 호족이었나 보다.

‘호족들 사이에서 내 이름이 퍼진 것 같은데.’

호족 사이에서 내 이름을 퍼뜨리고 다닌 범인은 황지호일 거다.

백호군이나 적호, 김신록이 말하고 다닐 리는 없으니까.

“진족이거나 후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네요.”

“신기하다······!”

넷은 황호를 내버려 두고 나한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디바이스 코드도 교환한 후, 호족들이 내민 명함을 보니 전원 황명 그룹 소속이었다.

“나 얘랑 할 얘기 있는데. 가 봐.”

30대 버전 황호가 넷을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네?”

“정말 가도 됩니까, 황호 님?”

“진짜요?”

“진심입니까.”

호족 넷이 경계심을 숨기지 않았다.

‘설마 황호와 나를 단둘이 남기는 걸 경계하는 건가.’

조금 전까지는 은호의 후예의 은인이 어쩌고 하더니 무슨 소리인가.

“황호 님, 지금 저희 들어가면 티켓 써서 바로 자리에 앉을 겁니다.”

“황호 님, 티켓 안 뺏어 갈 거죠? 저 이번 권제인 양 내한 공연 정말 기대 많이 했어요. 그냥 오신 거죠? 그렇죠? 저 진짜 들어가도 되죠?”

“황호 님······! 마음 바꾸시면 안 됩니다.”

“저희 오늘 쉬려고 일 열심히 했습니다.”

“같은 호족이라도 태호권으로 치면 겁나 아픈데요! 아파도 참고 싸웠는데요!”

변덕스러운 호족의 수장 때문에 저랬나 보다.

티켓을 뺏으면 울 거라고 했는데, 지금 저 절실한 표정을 보니 지금 뺏으면 바닥에 엎어져서 울 것 같다.

“맨체스터 아레나 단독 콘서트 때 꼭 가고 싶었는데······ 여권이 늦게 나와서!”

“그때 외교부랑 이계부가 진족들의 출입국 문제 안건 업무 분담을 두고 힘겨루기 할 때라 늦었지······.”

“그러다 장관 둘 다 자식 놈들 입시 비리가 동시에 터져서 같이 잘리지 않았냐.”

“용족 놈들이 뭐 자기들 후예가 방학이라고 단체로 해외여행 가려다 못 갔다고 생지랄을 떨면서 뒤를 캤던 거 같은데.”

“아, 그거 우리 비서팀에서 도운 거야. 그 새끼들 잘려도 끝난 콘서트는 안 돌아오지만.”

얘기를 들어 보니 외교부와 이계부가 진족과의 커넥션을 확보한답시고 진족의 출입국 안건 업무 분담을 두고 싸우다 둘 다 털린 모양이다.

게임 속에선 다뤄지지 않았지만, 호족과 용족은 의외로 통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하여튼, 티켓 뺏어 갈 거면 태호권으로 뺏어 가세요······ 황호 님에겐 당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청호 님의 의지를 이었다. 싸우기 전부터 약한 소리 하지 마! ······질 게 뻔하지만.”

“태호권의 원류, 창시자 청호 님의 수제자로서 최선을 다해 응전하겠습니다!”

“청호 님, 지켜봐 주세요!”

태호권의 창시자가 청호였나 보다.

이 넷은 청호의 제자고.

30대의 황호가 호족 네 명이 호들갑을 떠는 꼴을 무표정으로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마음 바뀌기 전에 꺼져라.”

은근히······ 아니, 대놓고 긁어대서 저러다 진짜로 티켓 털리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호족의 수장이 자비를 베풀었다.

“네, 꺼지겠습니다!”

“황호 님, 감사합니다. 지금 당장, 바로 꺼질게요!”

“그럼 다음에 봐요, 황호 님.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절대 찾지 말아 주세요.”

“후예의 은인도 안녕, 다음에 봐!”

호족 네 명이 신속하게 나와 30대의 황호 앞에서 꺼졌다.

그들은 인간이 뛰는 속도 이상으로 경보하듯 걸어가 호연관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30대의 황호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청호가 남긴 놈들만 아니었으면 태호권으로 참교육을 해 줬을 텐데.”

“······청호의 제자라는 호족들이 권제인 열성 팬인가 보네.”

“그래. 청호도 그렇고 저 제자 놈들도 ‘소리’에 아주 제대로 환장한 놈들이라서. 청호도 있었으면 저 권제인의 음악에 죽고 못 살았을 거다.”

개천신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신화계 호족, 청호.

항상 신인을 모시는 걸 천신에게 소원으로 빈 그 신성한 범이 게임 속에서 직접 등장한 적은 없었다.

청호는 자신의 수제자도 황호 옆에 남겨 두고서 어디로 간 걸까.

‘청호는 지금도 신인의 곁에 있을까.’

“청호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어?”

“궁금해하는 얼굴이라서 답해 준 거다. 청호는 ‘신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라는 말을 남기고 아무 예고 없이, 미련 없이 사라졌어.”

청호는 그렇게 사라진 건가.

신인의 소원을 위해서?

천신의 아들이 무슨 소원을 품었는지 짐작이 안 간다.

“우리 호족의 신역이 이 은광고에 있고, 은광고는 멋진 소리로 넘쳐 나. 청호는 반드시 은광고로 올 거다.”

황호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황호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예술계 동아리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

은광고의 수업종 제도.

끊이지 않는 상인관 초청 공연.

‘단순히 학생 복지 향상만을 위한 건 아니었구나.’

사라진 옛 친우, 청호를 기다리며 벌인 일들인가 보다.

“그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신인의 목소리라 먼저 신인을 낚는 게 빠르겠지만.”

신인도 청호와 마찬가지로 행방불명 상태다.

단서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청호의 제자들이 방정을 떨다 꺼졌을 때에 비해 훨씬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이럴 땐 대화 주제를 바꾸는 게 최고다.

“나한테 할 얘기 있다면서.”

“아, 내가 여기 온 이유 말인데. 권제인이 우리 호족 쪽에 접촉해 왔어. 호족의 관계자와 얘기하고 싶다더군. 그래서 내가 왔다.”

주제가 너무 크게 바뀌었다.

‘권제인이 호족에 연락을 취해? 왜?’

게임에서는 없던 전개다.

그러나 권제인이 이 시기에 내한했거나 호족에게 접근한 묘사도 없었다.

게임에서 다루지 않았을 가능성도 남아 있긴 하지만.

‘여태까지 일어난 사건 중, 무엇이 권제인의 행동 패턴을 바꾸게 만든 걸까.’

카오스 이론에서 논하는 현상 중 하나인,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부를 수 있다는 나비 효과처럼 내 행동의 결과가 이 상황을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이 세계에 와서 일으킨 사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고 있을 때.

30대 황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다른 놈을 보냈겠지만, 신경 쓰이는 이야기가 있어서.”

“뭔데?”

“권제인이 갑자기 내한한 건 용제건의 요청이 있던 탓이라더군.”

원인은 용제건이었나.

그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황명호 앞으로 온 것만이 아니라 호족의 대변인 앞으로도 표가 한 장 더 왔어. 덕분에 콘서트홀 입장도 가능해진 거다. 청호의 제자 놈들한테는 말 안 했지만.”

그의 양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초대권이 한 장 나왔다.

“사실 여차하면 쟤들 티켓 하나 뺏으려고 했는데, 잘됐군.”

그렇게 말하는 30대 황호는 10대 황지호 같은 장난기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호의 제자들이 울 일이 없어져서 다행이다.

*    *    *

정해진 위치에 포스터를 전부 붙이고 콘서트장에 돌아왔다.

잠깐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을 뿐인데 공기가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이 작업을 멈추고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 끝에 바이올린을 든 권제인이 있었다.

‘실물은 더 박력이 넘치는구나.’

청람색의 오프 숄더 드레스를 입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무대 위에 우아하게 서 있었다.

권제인은 음향 스태프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목 밑에 바이올린의 턱받침을 가져갔다.

권제인이 호수를 담은 것 같은 푸른 눈을 조용히 감자 세상에서 소리가 없어진 것 같았다.

그녀의 활이 현 위를 긋자 콘서트홀이 다시 소리로 넘쳐 났다.

“와······!”

“튜닝 중에도 이런 소리가 날 수 있다니······!”

권제인은 바이올린 조율을 하고 있었다.

한 음씩 켜 가며 줄감개로 음을 조정하고 있을 뿐인데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대단하군. 일순 이능파가 흘러나왔다고 착각했어. 고작 조율 중에 저런 훌륭한 소리를 자아내다니.”

30대의 황호가 눈을 빛내며 권제인을 바라봤다.

‘게임에선 권제인의 연주가 나오는 장면엔 디지털 신시사이저에 악보를 입력해 출력한 게 배경음으로 흘렀으니까, 이 정도로 굉장한 줄은 몰랐다.’

실제 연주는 어떨지 상상하는 사이.

조율을 마친 권제인이 바이올린을 내리고 음향 스태프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거의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던 김유리와 이레나가 그제 서야 내가 온 걸 알아챘다.

“어, 의신아. 왔어?”

“아, 포스터 붙이는 거 전부 맡겨서 미안······!”

“아냐, 괜찮아.”

티켓팅 전쟁은 이겨 주지 못하지만, 포스터 붙이러 다니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나중에 보자, 조의신.”

두 사람이 가까이 오자 30대의 황호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김유리와 이레나 눈에 띄면 이야기가 복잡해지니 좋은 선택이다.

“어딘가 지호랑 닮은 분이시네.”

“어? 그랬나······ 분위기가 너무 다른 것 같은데. 모르겠어.”

이레나가 보는 눈이 날카로운 것 같다.

저번에도 나와 염준열을 구분해 낸 이레나다.

어떻게 화제를 전환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고민할 필요성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녕.”

담담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설마, 하고 고개를 돌리자 우리 셋을 바라보는 푸른 눈이 보였다.

권제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와, 와아······!”

나도 김유리도 반사적으로 인사했지만 이레나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입을 틀어막았다.

권제인은 고요한 눈으로 우리를 차례차례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멈춘 건 이레나가 목에 걸고 있는 스태프 명찰이었다.

“······일일 스태프? 아르바이트를 해?”

권제인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하다.

그렇게 의외였나.

이계 공략이 가능한 은광고 학생이 돈이 없어 아르바이트하는 건 이상하긴 할 거다.

시선을 받으며 굳어 있던 이레나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저, 저······ 권제인 선배님의 콘서트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이레나의 말에 권제인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은광고 후배가 걱정됐었나 보다.

“······그래, 그랬었구나. 영광이야.”

권제인은 독특한 감성을 가진 예술가, 변덕쟁이라는 인상이었지만 지금 이 모습은 배려심 깊은 학교 선배처럼 보였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김유리가 주저하다 용기를 내 물었다.

“선배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드려도 될까요?”

“말해 봐.”

“오늘은 상인관 사용이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호연관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그건 나도 좀 궁금했다.

상인관이었으면 티켓팅에도 좀 여유가 있었을 거다.

“호연관이 예뻐서.”

그 대답에 김유리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세계적인 예술가의 감성은 좀 특이한 것 같다.

“그러면 나도 질문 하나 할게.”

“네? 네, 말씀하세요!”

질문이 돌아올 줄 몰랐는지 김유리가 놀란 목소리로 답했다.

긴장한 그녀를 향해 권제인이 물었다.

권제인은 김유리가 착용 중인 나비를 이미지한 비즈 머리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비, 좋아하니?”

이전에 학교 동문 앞, 수제 액세서리 전문점에서 샀다는 그 머리핀인가.

김유리가 긴장을 풀고 밝게 대답했다.

“네, 좋아하는 편이에요! 선배님도 나비 좋아하시나요?”

“아니, 안 좋아해.”

그 대답에는 사교력 만렙인 김유리도 당황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안 좋아하는 나비를 굳이 좋아하네 마네 하고 물어보다니.

권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래도 한국에는 나비를 찾으러 왔어.”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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