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3화 (73/925)

21. 여섯 개의 단어 (1)

이계의 틈을 제어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하나, 이계를 클리어하는 것. 이계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보스를 쓰러뜨리고 클리어해 소멸시키는 것.

둘, 이계를 지배하는 것. 이능파로 이계에 간섭해 자신이 직접 이계의 보스가 되어 그 이계와 그곳에 속한 에너미를 복종시키는 것.

두 번째 방법은 클리어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이능을 필요로 했으며, 보스가 된 존재가 에너미화될 가능성이 컸다.

이처럼 리스크가 큰 ‘이계 지배’는 진족이나 가능하다고 알려졌다.

또 누군가에 의해 지배된 이계는 ‘가든’이라고 칭해졌다.

[당신은, 그때 그 가든을 지배하던 진족······!]

3학년이 된 주수혁.

주수혁은 그간 나비령을 몇 번 만났다.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사라지는 의문의 여자, 나비령.

주수혁이 그 나비령의 정체를 알게 된 건 그녀의 가든에서였다.

[후후, 그때 내 가든을 클리어한 주오 그룹의 도련님이네, 안녕.]

[······당신은 제가 보스 에리어에 진입하자 이계 지배를 중단하고 사라졌잖아요. 제가 당신의 가든을 클리어한 건 아니에요.]

쾅―!

그 대사 직후에 지면이 갈라지는 폭음이 울려 퍼진다.

나비령이 서 있던 자리가 크게 패이고 맹효돈이 등장한다.

[야, 주수혁! 이 나방 새끼가 지배하는 이계에서 세음이가 죽었잖아! 뭘 친한 척하고 얘기 같은 걸 하고 있어!]

맹효돈은 눈이 시뻘게져 외쳤다.

그의 주먹이 지면에 박혀 있었다.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나비령을 노려보는 맹효돈의 온몸에서 살기가 넘쳤다.

[그놈은 학교를 반년도 못 다니고 갔어······!]

같은 해, 1월 1일.

주수혁 일행과 함께 맹효돈은 환몽 경매에 잠입해 사월세음 구출전에 참가하여 활약했었다.

이전 파이트 클럽에 있던 자신과 비슷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던 사월세음을 안쓰럽게 여기던 맹효돈이었다.

실종 후 휴학 상태였던 사월세음은 1학년 후배로 복학했고, 학교 선배, 기숙사 선배로서 맹효돈은 사월세음을 많이 신경 썼었다.

그리고 사월세음은 이 진족 중 접족, 나비령의 가든에서 죽었다.

[이 나방 새끼 광림이 개 같긴 하지만, 내 광림으로 묶고 우리가 다 같이 협공하면 잡을 수 있어!]

광림을 발동하려던 맹효돈을 가로막은 건 안다인이었다.

[그만해. 지금 이 진족과 싸우면 우리 중에 또 누가 죽거나 크게 다칠 거야. 그리고 우린 단서가 없어. 지금 정보를 얻지 못하면 우리 학교는······.]

안다인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이미 많은 이들이 떠나는 걸 지켜본 주수혁의 일행이었지만, 그 고통에 익숙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다인도 사월세음이 죽는 광경을 옆에서 같이 지켜보고 고통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맹효돈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입을 다물었다.

[젠장······.]

맹효돈이 전의를 상실하자 나비령은 현실과의 경계를 잃어 흐릿해져 있던 몸을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나비령은 뜻 모를 표정으로 주수혁 일행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조금 전 맹효돈에게 공격당했는데도 갚아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 전령 꼬마가 너무 착하게 구는 바람에 일이 그렇게 됐어. 몇 년 괴롭히면 그 애가 망가지거나 타락할 거라고 생각하신 분이 계셨는데, 변하질 않았으니까.]

주수혁 일행은 전령 꼬마가 사월세음을 칭하는 걸 깨닫고 동요했다.

나비령이 한 말을 듣던 주수혁이 ‘그 애가 망가지거나 타락할 거라고 생각하신 분’이라는 발언에 의문을 품고 되물었다.

[세음이를 노린 건 당신의 의지가 아닌가요? 누군가의 사주로 움직인 겁니까?]

[······.]

나비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수혁은 사월세음이 죽던 광경을 떠올렸다.

사월세음의 삼촌, 사월세민의 주검을 부리던 농락계 사령종 에너미의 모습도.

형태나 힘의 성질상 그 에너미가 접족의 권속이라 생각하기 어렵긴 했다.

[······주오 그룹의 도련님이 그 전령 꼬마를 구출해서 은광고에서 보호해 버렸으니까. 게다가 도련님 때문에 그 애가 아주 성가신 광림까지 각성해 버렸잖아. 그 탓에 은광구 밖으로 끌어내서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는 분이 계셨어.]

[야, 이 미친 나방 새끼야! 어디서 주수혁 핑계를 대고 지랄이야! 닥쳐!]

맹효돈이 답답하고 분한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소리 질렀다.

나비령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네 친구의 스킬과 광림이 성가신 탓도 있었지만······ 그 아이를 죽이고 싶어 하신 분은 이 나라의 마지막 왕조에 불만이 많으셨나 봐. 그래서 역대 왕이 귀히 여긴 그 전령의 후계자를 최대한 처참하게 죽이고 싶어 하셨어.]

사월세음이 단순히 진족의 유희에 휘말려 죽은 게 아니란 걸 깨달은 주수혁 일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비령은 여전히 제 할 말을 했다.

[내게 물어볼 게 있었다고 했지?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너희들 학교 친구 중에 신문부 부장을 한다는 귀여운 아가씨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학교 친구, 신문부 부장.

그 말에 떠오른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툭하면 취재한답시고 주수혁 일행에게도 살갑게 말을 붙이던 문새론을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빨리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이 세계에서 많이 안다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잖아.]

디바이스로 문새론에게 전화를 걸던 안다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새론이랑 연락이 안 돼.]

주수혁은 나비령에게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렸다.

[새론이한테 가자······!]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며 사라지는 주수혁 일행을 보며 나비령은 배웅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작게 흔들었다.

이게 주수혁과 안다인의 3학년 시절 중, 나비령이 가장 많은 대사를 한 이벤트였다.

‘그땐 캐릭터들이 계속 죽어 나가서 혼란스러워서 지금만큼 냉정하게 상황을 보지 못했어.’

끔찍하게 죽어 나가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전부 지켜보며 멘탈이 터져 나갔다.

거기에 군대, 취준 같은 현실에서 기력을 소모해야 하는 일도 많았다.

지금처럼 하루의 모든 시간을 이 세계에 투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스토리에 대한 고찰이 지금보다 얕을 수밖에 없었다.

‘그땐 나비령은 그저 설명충, 떡밥을 던지는 캐릭터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 잘 생각해 보면······.’

현실이 된 이 세계에서 나비령처럼 행동하는 건 이상하다.

나비령은 악역의 진영에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여러 정보를 뿌려댔었다.

‘그저 재미를 위해 혼란을 주려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비령이 사월세음이 죽는 무대였던 가든의 주인이기도 했으니 완전한 선한 역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가짜 정보를 흘려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그 편린이 터지는 이펙트는 나비령이 메시지를 보내는 능력을 사용할 때 뜨던 거였어. 메시지도 대화 로그에 포함될 거야.’

1초 안 되는 시간, 저 멀리서 벽 너머로 순식간에 흘러간 문자의 나열이라 놓친 게 있거나 기억에 혼동이 있을 수도 있었다.

전용 메뉴의 대화 로그로 확인하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을 거다.

〈해당 지역의 로그를 열람합니다.〉

곡이 바뀌는 사이는 사이 기록된 관객들의 감탄과 잡담이 조금 기록되어 있는 가운데.

스크롤을 움직이니 나비령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자음과 모음, 알파벳들이 보였다.

조합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의외. 예매. 그대

items. exhales. dame

‘이게 무슨 소리야.’

영어 단어 ‘exhale’의 뜻은 숨, 연기를 내뿜는다, 내쉰다는 뜻.

‘dame’은 영국에서는 훈장을 받은 여성을 칭하는 말이고 미국에서는 구어 취급받아 거의 사용되진 않지만, 보통 여성을 칭할 때 쓰는 말이었다.

‘······권제인이 영국 여왕에게서 명예 훈장을 받긴 했지만, 작위를 받은 게 아니야. 권제인은 한국인이라 작위를 받을 수 없어. Dame은 훈장 중에서도 1, 2등급, 기사 작위 서임자에게 붙는 호칭인데.’

영국 여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는 한국인 권제인에게 Dame이라는 칭호는 붙을 수 없었다.

‘그냥 보기에는 의미 없어 보이는 단어의 나열인데, 왜 굳이 중간에 온점 ‘.’을 찍은 거지.’

사월세음의 밝은 목소리에 생각이 중단됐다.

“권제인 선배님이 기립 박수 받는 중에 갑자기 서두르셔서 놀랐는데, 여기로 오실 줄은 몰랐어요! 가까이에서 뵈니까 더 멋지신 분 같아요.”

로그를 확인하는 사이, 권제인은 재러드 리와 어딘가로 사라진 것 같다.

“진짜 꿈 같은 시간이었어······! 다음 콘서트도 꼭 와야지.”

“네. 다음에는 반 애들이랑 다 같이 보러 오고 싶어요!”

“나 오늘부터 티켓팅 연습할 거야!”

변덕스러운 권제인이 언제 또 콘서트를 열지 미지수인데, 김유리는 의욕이 넘쳐 보였다.

사월세음도 같이 할 생각인지 둘이 연습 계획을 잡고 있었다.

티켓팅에도 재능이 필요하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서도 재능충인 이 두 사람이 노력하면 뭘 못하겠나.

다음 티켓팅은 맡겨도 될 거다.

“······나도 연습할래!”

이레나는 ‘for LENA’의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손수건을 놓지 못했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갈채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레나는 어느 정도 눈물이 멈추자 같은 반 아이들 앞에서 펑펑 울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했다.

김유리가 옆에서 ‘만약 이 곡 이름이 ‘for Yuri’였으면 나는 레나보다 더 울었을 거야!’라며 달래 줬었다.

‘이제 정리하는 거 돕고 애들이랑 밥이나 먹으러 갈까.’

스태프들 사이에 섞여 짐을 나르던 중 메시지가 도착했다.

딩동.

[황지호] 권제인하고 달토끼, 용제건하고 은휘관에서 보기로 했는데.

[황지호] 너도 올래?

이 자리에 와 있었던 건 30대의 황호지만, 분신답게 그들은 항상 동기화되어 있다.

메시지는 어딘가에 있을 황지호 버전으로 보낸 것 같다.

‘가면을 쓰더라도 권제인과는 방금 막 만나서 체격을 정확히 기억할 테니 직접 내 모습을 보이기는 그렇고, 플레이어의 궤적을 쓰기에도 좀 그런데.’

무슨 대화가 오고 갈지 신경 쓰이지만, 반드시 직접 듣고 판단해야 할 일은 아니다.

또 이 자리에서 갑자기 빠져나가는 건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할 일도 많은데 이 셋한테 다 떠넘기고 가기도 좀 그랬다.

[나] 스태프 일 남음. 나중에 뭔 얘기 했는지만 알려 줘.

황지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무대 정리 작업을 도왔다.

스태프 역을 하던 영원의 호수 멤버 몇몇이 권제인과 재러드 리를 따라 사라졌지만, 대체할 멤버들이 와서 작업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오늘 일을 전부 마친 후.

연주회 뒤풀이에 같이 가자며 스태프들이 권유해 왔다.

그러나 미성년자들인 우리가 끼어 있으면 반주도 못 할 테니 눈치껏 빠지기로 했다.

“아직 그렇게 안 늦었으니까 좀 더 얘기하고 싶은데······.”

“나도. 유리만 괜찮으면 더 얘기하고 싶어.”

“집에는 걸어서도 갈 수 있으니까 좀 더 얘기하자!”

“저도요. 그럼 휴게실로 갈까요?”

김유리와 이레나의 제안으로 우리끼리 간소한 뒤풀이를 가지기로 했다.

우리 넷 중에선 김유리가 통학생이었기 때문에, 기숙사 건물 휴게실 대신 1학년 구역 산책로의 야외 휴게실을 택했다.

우리는 가장 가로등 조명이 잘 드는 곳을 골라 자리 잡고 자판기에서 산 과자와 음료수를 꺼냈다.

“권제인 선배님이 그렇게 큰 선물을······ 전 그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네요. 선배님과 그냥 대화할 뿐이라면 얼마든지 하고 싶지만요.”

사월세음도 김유리의 머리핀과 이레나의 이능 바이올린 카드 사건에 관해 들었다.

사월세음은 상상만 해도 부담스러운 모양인지 곤란해하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맞다, 그 이능 바이올린 구경해도 돼?”

“저도 보고 싶어요!”

“응! 자, 여기.”

이레나는 테이블 가운데에 카드를 뒀다.

이능 바이올린은 어떤 아이템인지 신경 쓰였다.

게임 속에서 입수할 방법은 없었고, 설정집에도 그 존재에 대해 언급만 할 뿐, 자세한 설명문은 없었으니까.

〈아이템 정보를 열람합니다.〉

[아이템명] 이능 바이올린

[형식] 악기

[희귀도] SSR---

[숙련도] 0%

[효과] 연주가 가능하다

[설명]

연주자의 경험, 기대, 사상, 목표, 신념 등에 근거하여 희귀도도 연주의 질도 변하는 악기.

최대 UR급까지 변화한다.

‘이 설명문은······.’

설명문을 읽는 순간 강력한 기시감을 느꼈다.

수많은 아이템 중에, 이 이능 바이올린과 매우 흡사한 설명문을 가진 아이템이 있었다.

‘내가 가진 ‘무명의 운명’과 설명문이 매우 흡사해!’

중앙 도서관 지하 서고에서 발견된 고서, 황지호의 해석 후 운명력이 발동되었다.

운명력으로 이어진 이공간 속, 하얀 그림자가 건넨 아이템 카드, ‘무명의 운명’.

그 아이템 카드엔 이레나의 이능 바이올린의 설명과 비슷한 글이 쓰여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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