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5화 (75/925)

21. 여섯 개의 단어 (3)

아침 훈련을 마치고 도착한 기숙사 식당.

오늘 아침 메뉴는 한식과 양식이었다.

한식은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알토란 계란찜과 불고기.

양식은 딸기와 페퍼민트 크림치즈가 체크무늬로 발린 웨이브 토스트.

한식은 괜찮았는데 양식 쪽에 문제가 있었다.

‘왜 딸기와 민트, 두 개 중에 하나 고르는 게 아니라 둘 다 발린 채로 나오는 거야······.’

짧은 고민 끝에 한식을 택해 줄을 서니 여기저기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들은 주로 어제 있었던 권제인 내한 공연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

“권제인 선배 당분간 한국에 있을 거라는데?”

“또 공연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번엔 상인관에서······!”

“어제 공연 첫 곡이 신곡이라는데. 음원 언제 풀림?”

행여 나비령이 보낸 메시지가 화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관객석 측에선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진족이나 진족 정도로 예민한 감지 능력이 있는 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이건 권제인 측에서 숨겨진 연출을 운운하며 묻어 버리면 그만이니 괜찮긴 할 거다.

뚝배기 불고기와 뚝배기 계란찜, 두 개의 뚝배기를 식판 위에 올리고 자리를 잡으려 주변을 둘러보니 저 멀리 맹효돈이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야, 안녕.”

“······어, 왔냐. 부반장.”

맹효돈은 홀로그램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밥 먹을 때 저러는 걸 보니 중요한 건가?

물어보기로 했다.

“뭐 보냐.”

“스승의 날에 담임 선생님들 줄 선물 고른다.”

담임 선생님‘들’이라 말하는 걸 보니, 이전에 말한 수학을 가르친다는 중학교 3학년 담임과 함근형에게 줄 선물인가 보다.

“선물? 뭐 살 건데.”

“시계나 가방? 어차피 돈 쓸 일 없는데 알바비랑 상금 그냥 다 쓰려고.”

맹효돈은 여태까지 근로 장학 아르바이트와 저번 어린이날 잠실 야구장 에너미 토벌 기여금으로 받은 돈을 다 쓸 모양이다.

홀로그램을 흘끗 들여다보니 천만 원 단위의 금액이 적힌 카탈로그가 보였다.

‘정말로 돈을 다 써 버릴 생각인가 보네.’

맹효돈의 마음은 기특하지만, 안타깝게도 저걸 선물하면 받은 사람과 준 사람 다 법에 걸린다.

“청탁 금지법에 걸려, 사지 마.”

“그게 뭔데.”

짱돌 맹효돈 선생에게 5분 정도 알기 쉽게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 관해 설명했다.

맹효돈을 평가, 지도하는 함근형의 경우 직무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어, 직무 관련성이 확실해 뭘 선물해도 서로 곤란해진다.

“······이런 이유로, 가액 기준과 상관없이 함근형 선생님이 담임으로 있는 한 개인적인 선물은 안 돼.”

설명을 들은 맹효돈이 오만상을 쓰며 홀로그램을 꺼 버렸다.

“그게 뭐야. 뭐 살지 개같이 고민했는데!”

“그리고 너 중학교 공립인 것 같은데. 네 중3 담임 선생님이 공무원이면 직무 관련성 없어도 비싼 선물은 안 돼. 100만 원 넘어가면 무조건 걸려.”

“아, 망했네.”

맹효돈은 대충 먹던 밥에 분노의 숟가락질을 하며 힘차게 퍼먹었다.

스승의 날 선물을 못 사 주는 걸 매우 아쉬워하는 것 같다.

“오늘은 뭐가 맛있어?”

“······뚝불에 들어간 숙주나물. 익은 정도나 불고기 양념에 배인 정도가 절묘해. 토스트는 될 수 있으면 먹지 마. 페퍼민트 향이 너무 강해서 딸기 크림치즈 맛이 전혀 안 나. 치약 같아.”

선물을 고르는 와중에도 맛은 기억하면서 먹었나 보다.

“안녕하세요! 옆에 자리 비었나요?”

한참 미식가 맹효돈의 맛 감상평을 듣고 있을 때, 사월세음이 인사해 왔다.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사월세음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월세음의 식판 위에는 맹효돈이 악평을 날린 웨이브 토스트가 네 개나 쌓여 있었다.

“뭐냐, 오늘도 양식이냐?”

“네? 색도 예쁘고, 맛있어 보여서요!”

“한식 먹는 걸 본 적이 없네.”

맹효돈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월세음은 행복해하는 얼굴로 쌓여 있는 토스트를 하나씩 해치워 갔다.

하도 맛있게 먹길래 사월세음에게 부탁해 반 조각 잘라 달라 부탁해 먹어 봤지만, 맹효돈의 말대로 치약 맛밖에 나지 않았다.

“오늘은 같이 등교해요!”

“그래.”

“나 뚝불 하나 더 먹고 갈 건데.”

조례할 때까지 여유가 있어 우리는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함께 등교하기로 했다.

1학년 0반 교실.

교실 안에선 우울해하는 한이를 김유리와 이레나가 달래고 있었다.

“올해부터 은광고에서 근로 장학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버니까, 좋은 선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밖에 안 했어······ 공청훤 선생님 새 양복 맞춰 드리고 싶었는데.”

공청훤은 한이가 자란 보육원에서 교육 봉사 활동을 하고 있어 오랜 시간 서로 알고 지낸 사이다.

한이는 은광고에 들어와 근로 장학 아르바이트를 한 돈을 모아 은사인 공청훤에게 스승의 날을 맞이해 좋은 선물을 해 주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공청훤은 올해부터 은광고의 정교사가 된 데다 한이가 수강 중인 에너미학 개론 담당 교사이자 태호권 소모임 고문이다.

작은 선물을 전하는 것도 법에 걸렸다.

“공청훤 선생님은 한이가 카네이션만 전해 줘도 기뻐하실 거야!”

“맞아. 공청훤 선생님은 연예계나 프로 플레이어 팀 스카우트가 계속 들어온다고 들었는데, 죽 교사로 계셨잖아. 물욕이 없는 타입이시니까 좋은 선물 해 드리면 오히려 부담스러워하실지도 몰라.”

비슷한 처지인 맹효돈도 그 말을 들으며 복잡한 얼굴을 했다.

함근형도 맹효돈의 중3 담임도 공청훤처럼 물욕이 없는 타입일 거다.

‘그냥 맹효돈이랑 한이가 건강하게만 지내도 기뻐하실 분들인데.’

최편득 같은 놈들 때문에 청탁 금지법이 생겨서 선물하는 건 어렵게 됐지만, 이런 행사에서 마음만 전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선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거다.

나도 함근형에게 돈과 상관없는 선물을 하고 싶었다.

‘이번 주 금요일이 스승의 날인데, 민그린은 아직도 연락이 없네.’

하루만 등교해도 함근형이 좋아할 텐데.

“야, 조의신.”

반 아이들이 한이의 주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황지호가 불쑥 말을 걸었다.

“수업 끝나면 와라.”

앞뒤 맥락을 알기 어려운 소리였지만 바로 이해했다.

황지호의 표정을 보니 권제인이 꽤 중요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    *    *

방과 후.

부활동을 마치고 방문한 황명호 대저택.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올무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왕왕―!

“그래, 올무야. 잘 있었어?”

마치 올무는 내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내가 말하는 사이에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다 내 발치에 머리를 비볐다.

왕왕, 왕!

잘 지냈으니 쓰다듬어 달라는 뜻 같다.

사실 올무는 그런 생각을 안 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쓰다듬고 싶으니 일단 쓰다듬기로 했다.

올무는 머리를 쓰다듬으니 기뻐했다.

내 행동은 정답인 모양이다.

“그래, 잘 지냈나 보네. 호랑이들하고는 사이좋게 지냈고?”

황지호는 기가 찬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황지호를 가만히 보던 올무가 힘없는 소리를 냈다.

······끄응.

황지호와는 별로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다.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읽는다고 생각은 했는데, 내 말을 전부 알아듣고 있는 걸까.

올무는 발견될 당시엔 신수로서의 자각을 완전히 잃었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나는 똑똑한 올무 편을 들기로 했다.

올무를 안아 들고 황지호를 바라봤다.

“너 우리 올무 괴롭히냐?”

“······조의신 너는 날이 갈수록 신수 앞에서 멍청해지는구나.”

황지호가 매우 정색한 얼굴을 했지만, 올무가 내 편을 들어주는 걸 알고 애교를 부려 왔기 때문에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올무를 안고 이동한 응접실에 미리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는지 달콤한 향이 났다.

오늘의 차는 실론 베이스에 루바브 잎에 딸기 향을 더한 가향 홍차.

다과로 나온 건 버터 조각을 얹은 핫케이크였다.

‘아주 엉성한데?’

핫케이크는 여기저기 타고 찌그러져 있었다.

홍차와 다과, 다기까지 완벽하게 갖추던 황지호답지 않은 음식이다.

“은호의 후예들이 직접 만든 거다. 저녁 식사도 그 녀석들이 만드는 중이지.”

은호의 후예들이 어딜 갔나 했더니 부엌에서 요리 중이었나 보다.

‘티는 안 내지만 친하게 지내고 있구나.’

황지호는 동요한 건지 은호의 후예 장남 은서호를 처음 만났을 때 험한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지내나 조금 걱정했는데 어버이날 때도 그렇고, 애들이 황지호를 잘 따르고 있는 거 같다.

은호의 후예들이 만든 핫케이크를 입에 들어갈 크기로 잘라 한입 맛보았다.

‘······핫케이크에서 쓴맛이 난다.’

표정을 보니 황지호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지만 아무렇지 않게 핫케이크를 먹어 갔다.

백호군도 무표정으로 먹고 있었다.

두 호족은 쓴맛 핫케이크를 전부 먹을 생각인 것 같다.

“그럼 본론에 들어가 볼까.”

황지호는 은휘관에서 권제인과 나눈 이야기에 대해 말해줬다.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의 전날, 진족에 의한 플레이어 협회 영국 지부 습격.

그곳에서 사로잡힌 진족.

진족 중 영물이라는 존재의 도움으로 10년에 걸친 심문 끝에 얻은 단서.

‘그분’이 보낸 한반도 출신의 웅족.

‘배경으로만 언급되었던 사건도 흑막과 연관되어 있었구나.’

황지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권제인은 어느 접족을 찾기 위해 죽 영국에 머물렀다 하더군. 접족은 진족 중에서 흔히 ‘미물’로 취급받는 존재다. 김신록이 찾아냈던 정보와 무관할 것 같지 않아.”

김신록에게 심문당하던 웅족이 뱉은 ‘그분 곁에 있는 미물’.

황지호의 말, 내가 알고 있는 게임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권제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영국에서 나비령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왜 권제인 선배님이 접족을 찾는 거야?”

“접족은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전날, 영국 협회에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던 영원의 호수 팀 앞에 나타났다 한다.”

“접족이?”

“그래. 권제인은 10시간가량을 접족의 함정에 빠져 현실과 꿈 사이에 갇혔다더군. 영원의 호수 팀 전원은 협회 지원을 포기하고 권제인을 구조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팀 마스터가 위기에 빠졌을 때 팀원들은 보통 저런 선택을 할 거다.

특히 영원의 호수 팀원들은 권제인의 진성 팬들인 데다,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전엔 팀 서브 마스터가 권제인의 어머니이기도 했으니까.

“현실에 남아 있던 팀원들은 나비가 남긴 암호 메시지를 받았다. 수학자이기도 했던 그녀의 어머니가 메시지를 해독했다 하더군. 그게 위도와 경도를 나타내는 GPS 좌푯값이라는 걸 안 그들은 그곳으로 향했는데······.”

권제인이 접족의 함정에 사로잡혔으나 10시간 만에 자력으로 현실로 돌아왔다.

GPS 좌표가 가리키는 장소, 현재 레나 호수가 위치한 장소로 간 팀원들과 연락이 되지 않자 그녀는 남은 팀원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권제인은 지옥을 마주했다.

다섯 개의 던전과 한 개의 타워, 두 개의 미궁.

진족의 습격으로 협회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탓에 경보는 울리지 않았고, 그 지역의 통신은 끊겨 있었다.

영국 내의 프로 플레이어 팀들도 진족과 다른 이계의 대응에 벅찬 상태였다.

지원을 기다리는 걸 포기한 영원의 호수 팀은 모든 이계를 공략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권제인은 어머니와 초기 팀 메이트 대다수를 잃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나비를 찾고 있다고 해.”

나비령은 뒤에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나.

‘적어도 흑막의 곁에서 오랜 시간 곁에 있고, 주요한 정보를 미리 알 만큼 신뢰받고 있는 모양이군.’

지금도 웅족이 질투를 느낄 만큼 가까이에 있는 모양이고.

“그리고 너도 눈치챘겠지만, 나비가 권제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겁도 없이 은광고의 결계를 뚫고, 내 눈앞에서.”

황지호는 인상을 쓰며 핫케이크를 한입, 홍차를 한입 번갈아 삼켰다.

“남긴 메시지는 이거다.”

황지호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움직이자 황금빛의 글자가 중앙에 놓인 테이블 위에 새겨졌다.

의외. 예매. 그대

items. exhales. dame

내가 로그에서 본 것과 일치하는 메시지였다.

권제인은 그 빨리 스쳐 간 메시지를 정확히 읽어 내고 암기했나 보다.

“아직 무슨 뜻인지 파악은 되지 않았다. 저번의 수학 퀴즈와는 형식이 다른 모양이야. 그녀와 관계가 있어 보이는 단어도 있지만, 문법도 그렇고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지금은 수학자인 그녀의 어머니가 없으니 형태를 바꾼 건가.

‘나비령이 남긴 여섯 개의 단어······.’

분명 권제인이 해독이 가능한 메시지를 보냈을 거다.

권제인.

나비령이 이전에 남긴 메시지.

GPS 좌푯값.

‘혹시······ 이 단어들은 어느 장소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정리해 가니 답이 떠올랐다.

“조의신?”

디바이스를 가동해 하나씩 값을 입력해 봤다.

한 번, 두 번.

두 결과는 같았다.

내가 답을 찾아낸 것 같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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