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여섯 개의 단어 (4)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황지호가 말을 걸어왔다.
“······또 그 얼굴을 한 걸 보니 답을 찾아낸 모양이군.”
“무슨 얼굴.”
“수상한 얼굴.”
내 표정을 수식하는 말로 ‘수상한’이 고정된 것 같다.
“조의신, 말해 봐라. 암호를 풀어낸 거지?”
“암호를 풀어냈다고 하기에는 조금 모호해. 이 단어들은 단어 그 자체만으로 좌푯값을 표현하고 있으니까. 단어들 사이에 온점이 찍혀 있어서 금방 알아본 거야.”
“무슨 소리야.”
황지호가 의문을 품는 건 당연했다.
아직 이 체계는 생소했다.
영국 생활이 오래된 권제인도 익숙하지 않을 정도로.
“이전에 접족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메시지를 보냈는지 몰라서 비교하기가 어렵지만, 적어도 이번엔 굳이 복잡한 암호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을 거야.”
“왜?”
“신역의 수호자인 너조차 메시지를 확인할 수 없었으니까. 오로지 권제인만 보게 될 메시지인 셈이니, 굳이 암호화할 필요가 없었어. 그러니 이건 암호가 아니었다고 생각해.”
황지호는 매우 불쾌해하는 얼굴을 했지만 반론하지 않았다.
12지 동맹의 합작품인 결계 시스템이 뚫린 건 황지호의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배신자가 뒤통수를 친 게 큰데.
접족이 결계를 뚫고 메시지를 보낸 게 많이 분한가 보다.
그냥 배신자의 존재가 불쾌해서 저런 얼굴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장소를 지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야. GPS 좌표를 사용해도 되지만, 60진법이나 10진법을 써서 위도와 경도, 고도를 지정하는 GPS 좌푯값은 복잡하잖아. 장소를 지정하는 건 다른 주소 체계를 이용하는 게 직관적이고 편해.”
“너는 이 단어의 나열이 주소 체계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황지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차례대로 전부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구의 표면적을 제곱미터로 환산하면 얼마 정도 나온다고 생각해?”
“지구의 표면적은 약 510조 제곱미터다.”
질문하기가 무섭게 바로 답이 나왔다.
이걸 사전 준비 없이 바로 대답하다니.
“그래. 지구의 표면적은 약 510조 제곱미터야. 그리고 지구의 표면을 가로세로 3m씩, 9제곱미터의 정사각형을 이용해 나누면 약 57조 개의 조각이 나와. 이 각각의 조각들에 이름을 붙여 새로운 주소 체계를 만드는 시도를 한 사람이 있어.”
나는 홀로그램을 하나 띄우며 말했다.
‘what3words’
영국 음악 공연 업계에 종사하는 크리스 쉘드릭이란 인물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주소 체계다.
“한국은 주소 체계가 잘 정비되어 있지만, 외국은 그렇지 않은 곳이 많아. 아예 공식적으론 주소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사는 사람도 수십억이야.”
세계를 오가며 공연을 하던 크리스 쉘드릭.
그는 미비한 주소 체계로 인해 장비가 오발송되거나 길을 잃은 아티스트가 제시간에 공연장에 도착하지 못해 공연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태를 몇 번이나 겪게 된다.
아직 이 세계엔 주소 체계가 정비되지 않은 국가들이 많았고, 위도, 경도, 고도를 10진법, 60진법의 숫자로 나타내는 GPS 좌표는 지나치게 복잡해 실생활에서 사용하기엔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간단한 단어들로 주소화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어렵지 않은 단어들,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할 4만 개의 단어 중 3개를 조합하면 약 64조 개의 조합이 나와. 그러니 세 개의 단어를 사용하면 지구의 지표면 57조 개의 모든 조각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돼.”
이 새로운 주소 체계는 현재 수십 개의 언어로 만들어져 사용 중이다.
아예 국가적으로 이 주소 시스템을 채택한 나라도 있었다.
‘사람들은 GPS 좌푯값의 모든 숫자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단어 세 개 정도라면 기억할 수 있으니까.’
‘what3words’의 웹페이지가 홀로그램 위에 전개되었다.
나는 창을 두 개 띄웠다.
“그리고 이 세 단어로 이루어진 주소 체계는 한국어로도 영어로도 사용할 수 있어. 세 단어 사이에는 온점을 넣고 사용하면 돼.”
각각의 창에 나비령이 보낸 메시지들을 입력했다.
한 창에는 ‘의외. 예매. 그대’를 입력한 결과물.
다른 창에는 ‘items. exhales. dame’을 입력한 결과물을 띄웠다.
“······석촌호수!”
두 언어로 입력한 결과물은 같았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에 위치한 석촌호수.
석촌호수의 면적은 약 21만 제곱미터다.
나비령이 남긴 여섯 개의 단어들은 석촌호수에서도 정확히 9제곱미터에 해당하는 어느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영국인. 그것도 공연 업계 종사자가 만든 시스템이야. 권제인 선배님이 바로 알아보지 못하시더라도 전 세계를 오가며 권제인의 공연 기획을 담당하는 팀 메이트랑 상담한다면 두 가지 언어로 된 세 단어, 온점을 보면 누군가는 알아봤겠지. 접족은 그걸 노린 걸 거야.”
내가 말을 마치자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백호군이야 늘 조용했지만, 황지호도 몇십 초 동안 입을 다물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황지호가 입을 열었다.
“조의신, 너 가호 필요 없냐?”
“아니, 왜.”
이전에 12지 동맹 회담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나는 그때처럼 고민도 안 하고 철벽을 쳤다.
황지호의 눈이 불길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네 머릿속 좀 들여다보고 싶은데.”
“그 말을 듣고 잘도 가호를 받겠다.”
나는 내 몫으로 남아 있던 핫케이크를 전부 먹으며 황지호를 깠다.
* * *
우리 셋은 이야기를 마치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마침 조리가 끝났는지 은호의 후예 셋이 열심히 그릇을 나르고 있었다.
‘이 냄새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데.’
은광고 입학 전엔 주야장천 먹었지만, 기숙사 식당 덕에 연을 끊은 그 인스턴트식품의 냄새다.
황지호가 중얼거렸다.
“라면? ······매입한 기억이 없는데.”
다이닝 테이블 위에 기품이 넘치는 단아한 순백자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 팅팅 불어 터진 라면이 한 바가지씩 담겨 있었다.
“······신록 오빠가 준비해 주셨어요! 실패하면 라면이라도 끓이라고 하셨어요.”
“밥도 타고, 찌개류도 다 타서······ 찌개도 탈 줄은 몰랐어요. 많이 끓일수록 맛있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죄, 죄송해요······ 반찬류는 제가 전부 바닥에 엎어서······.”
은호의 후예들의 입고 있는 앞치마의 띠를 보면 새것 같은데, 앞면에는 온통 정체불명의 얼룩과 그을린 자국이 가득했다.
이 녀석들의 음식 솜씨와 조리 과정에 있던 일들이 짐작이 갔다.
‘김신록 선생님은 만약을 대비해 라면을 준비해 주신 것 같은데······.’
라면도 망했다.
은호의 후예들은 라면의 물 조절에도 실패한 것 같다.
흰 국물 라면은 아닌 것 같은데 국물이 투명하고, 그나마 면이 지나치게 불어서 국물은 거의 보이지 않고 면만 가득하다.
황지호도 그릇 안의 참상을 발견한 것 같지만, 부드러운 얼굴로 은호의 후예들에게 말을 걸었다.
“······너희들 몫도 준비했나?”
“저······ 전부 실패하고 성공한 건 이거밖에 없는데요.”
은서호가 들고 있는 냄비 안에는 한 그릇 정도 되는 분량이 남아 있었다.
이것도 그나마 실패를 거듭하고 남은 결과물이었나보다.
“그래. 씻으러 가. 먼저 먹고 있을게. 잘 먹으마.”
“잘 먹을게.”
“······.”
황지호와 나, 백호군이 각각 자리를 잡자 은호의 후예들이 안심한 얼굴로 웃고는 식당 밖으로 사라졌다.
가장 먼저 젓가락을 든 건 백호군이었다.
한입 삼키는 순간 잠깐 움직임이 굳었지만, 그 이후론 기계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인내심도 배려심도 강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본받아 나도 한입 먹었다.
물컹, 하는 감각이 입안으로 퍼졌다.
‘······방금 먹은 핫케이크가 그리워지는 맛이다.’
익힌 밀가루 덩어리를 씹고 삼키고 있을 때.
쉬익―.
식당과 외부를 잇는 자동문이 열렸다.
“식사 중 실례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녀왔습니다. 황호, 백호. 오랜만입니다, 조의신.”
“안녕하세요.”
“어서 와라, 적호.”
나타난 건 돈족의 감시로 바쁜 적호였다.
“오늘은 적호도 함께 얼굴을 보려 했는데 결국 늦었군. 권제인 건은 내가 전하지. 나가기 전에 얘기를 듣고 가라, 적호.”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적호는 평소보다 피로해 보였다.
대화 맥락상 또 나가 봐야 하는 모양이다.
“······라면입니까? 특이한 형태군요.”
적호의 시선이 휑한 식탁을 한 번, 우리가 먹고 있는 면 덩어리로 향했다.
우리 셋 중 가장 느릿느릿하게 젓가락을 움직이던 황지호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적호를 바라봤다.
“김신록이 준비한 라면을 은호의 후예들이 끓인 거다. 먹을래?”
황지호의 물귀신 작전이 작렬했다.
적호는 사양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기뻐하는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먹겠습니다.”
적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마지막 한 젓가락까지 다 먹었다.
* * *
다음 날, 방과 후.
신문부실의 신입생 전용 부실.
신문부장이 우리에게 새로운 과제를 줬다.
주제는 스승의 날, 학생들이 준비한 이벤트 취재.
선물을 주는 게 안 되니 각자 이능을 활용해 온갖 이벤트를 해주는 게 관례인 스승의 날.
취재할 거리가 넘칠 거다.
“스승의 날에도 0반은 어마어마했네.”
“2학년 0반이 또.”
작년 스승의 날에 취재한 내용을 읽어 보니, 경악할 만한 내용으로 넘쳐났다.
‘한국 최고 명문고 학생들의 재능이 이렇게 낭비되는구나······!’
1학년 0반의 모아이 사건.
그 당시에도 반장, 부반장을 하던 금찬솔, 왕찬솔 두 사람을 중심으로 1학년 구역의 흙 운동장에 제갈재걸을 모델로 한 모아이를 세웠다 한다.
이계 광석으로 만든 모아이의 길이는 약 20미터에 무게는 100톤가량.
선도부는 경악하면서도 대체 어떤 이능을 써서 모아이를 만들고 단시간에 설치한 건지 캐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금찬왕찬 콤비는 신문부의 취재에 응하면서도 비장의 장난질에 숨겨진 비밀은 자기들 입으론 밝힐 수 없다고 답했다.
‘2학년 0반은 변함이 없네. 현재 3학년 0반은······ 담임과의 관계가 미묘하네.’
문제아를 맡게 되는 교사의 유형은 여러 가지다.
예를 들자면 함근형 같이 엄격한 타입이 있다.
얼굴도 광림도 무서운 함근형에게 쉽사리 개길 학생은 없었다.
1학년 0반은 등교 중인 애들은 다 착하고, 나머지는 학교에 나오지 않을 만큼 얌전하니 함근형과 부딪칠 일이 없었지만.
‘은광고에선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게 교칙을 어기는 일도 아니니까. 우리 반은 문제아라고 하기엔 어렵긴 한데······.’
제갈재걸처럼 선량한 타입도 있다.
너무나도 좋은 교사인 탓에 학생들이 감화되는 경우다.
2학년 0반은 여전히 최강, 최악의 악동이었지만 제갈재걸에게 피해를 줄 일은 가능하면 만들지 않았다.
제갈재걸이 진심으로 말리면 말도 잘 듣고.
‘문제는 3학년 0반 담임 같은 타입인데······.’
학생들과 함께 미쳐 가는 타입.
3학년 0반 담임, 연구부장 임연화.
그녀는 이 세 번째 케이스였다.
‘진족의 이해1 수업할 때는 멀쩡해 보였는데······.’
내가 듣고 있는 진족의 이해 수업 담당이기도 한 임연화의 활약상은 굉장했다.
작년부터 현재 3학년 0반인 문제아들을 맡게 된 임연화.
그녀는 자기가 당하거나 목격한 장난질을 배로 갚아 주는 바람에 현재 3학년 0반은 그녀의 행적에 골머리를 앓았다.
‘지금 3학년 0반도 꽤 맛이 가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어떤 장난질을 한 걸까.’
그리고 맞이한 스승의 날.
그들은 0반 교실을 귀신의 집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임연화가 겁에 질려 놀라는 꼴을 보겠다고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임연화가 교실에 들어간 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0반 선배들은 뭔가 문제가 생겼나 싶어 교실로 난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태어나서 가장 무서운 꼴을 당했다고 한다.
‘역으로 귀신의 집을 더 무섭게 리메이크해서 학생들 놀려 먹는 데 쓰다니······!’
담임의 돌아이스러움에 한 수 밀린 3학년 0반 선배들은 그 이후로 얌전히 우주를 느끼러 다닌다고 한다.
‘······얌전한 건가?’
의문이 남긴 했지만, 의욕이 넘치는 문새론의 취재 계획을 들으며 부활동 시간을 보냈다.
* * *
저녁 훈련을 마치고 내 방.
제일 먼저 한 건 디바이스 메시지 확인이었다.
발신자 목록을 살펴봤지만, 오늘도 민그린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다른 메시지나 확인하자.’
제일 위에 있는 건 주수혁과 맹효돈이 있는 단체 채팅방이었다.
[주수혁] 윤섭이가 오늘 전자 담배를 피우다 걸렸어. 자기 삼촌 거 몰래 가져왔나 봐. 전자 담배도 담배니까 빵 사 오게 시킴!
[맹효돈] 저번보다 빨라진 거 같은데 여전히 느려
[주수혁] 도망치려는 거 효돈이가 잡았었어!
메시지를 전부 확인해보니 전자 담배를 몰래 피우던 내 빵셔틀이 맹효돈과 주수혁에 의해 잡힌 모양이다.
다음 메시지는 지익회장 성시완에게서 온 거다.
[성시완] 의신아, 스승의 날 오후 늦게 시간 돼?
[성시완] 졸업한 사촌 형이 담임쌤 뵈러 오신다는데, 무명의 초신성과 만나 보고 싶나 봐. 괜찮으면 잠깐 얼굴 좀 보여줘 ㅎㅎ 저녁밥 살게!
성시완의 사촌 형?
누군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다고 답변을 보냈다.
마지막은 황지호한테서 온 메시지였다.
[황지호] 내일 석촌호수에 간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