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0화 (80/925)

22. 수중 이계 공략 (4)

석촌호수 아래.

얼어붙은 미궁의 끝.

게임 속에서 나비령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나비의 날개 문양을 새긴 망사 망토가 희미하게 보였다.

망토 밑에 입은 드레스 자락이 그림자의 형태로 팔랑거리고 있었다.

[후후, 어서 와. 인간도 있는데 부상자가 한 명도 없네. 이능독 때문에 고생하진 않았어?]

목소리의 지문, 성문(聲紋) 분석을 경계하고 있는 걸까.

나비령의 음성은 기계로 변조된 상태였다.

“그때 나를 꿈과 현실의 경계에 가둔 나비가 맞아.”

권제인의 말에 영원의 호수 팀원 두 사람이 험악한 얼굴을 했다.

나비령의 흐릿한 잔영이 권제인을 바라봤다.

[오랜만이야, 권제인.]

나비령은 마치 옛 친구에게 인사라도 하는 양 다정한 말투였다.

권제인은 무표정이었지만, 목소리가 조금 딱딱해진 걸 보니 그리 반가운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나비를 찾아내면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었어.”

[질문이 따라 얼마든지 답변해 줄 수 있어.]

권제인의 무심해 보이던 푸른 눈동자에 평소보다 격앙된 감정이 비쳤다.

“그날, 왜 나를 가두는 수고를 하면서 우리 팀을 분단시킨 거지? 좌표만 말해 줬어도 영원의 호수는 맨체스터에서 대이계 공략에 나섰을 거야. 아니, 애초에 영국협회를 노린 진족의 습격을 예고해 줬다면 그런 비극은…….”

[그거야 당연히.]

나비령은 권제인이 말을 마치기 전에 답변하기 시작했다.

[‘그분’께 내 진의가 드러날 위험을 최소화하고, 권제인, 당신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그런 거야.]

나비령의 얼굴은 새까만 노이즈로 인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웃고 있을 것 같았다.

권제인이 되물었다.

“내 생존 확률?”

[그래. 생각해 봐. 그때 당신의 가족들과 팀 메이트의 희생이 없었다면, 당신이 무사히 여기에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비령이 무슨 생각으로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때 그런 짓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권제인도 나비령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살아남더라도 다시는 바이올린을 켤 수 없는 몸이 됐을지도 몰라. 당신 정도의 플레이어, 바이올리니스트는 쉽게 나오지 않아. 그때 죽은 사람들은 우수한 편이었지만 얼마든지 대체할 만한 인력이 존재해.]

“대체라니······!”

[아직도 당신을 뛰어넘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없고, 지금 영원의 호수는 새 팀 메이트를 맞이해 문제없이 잘 운영되고 있잖아?]

권제인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렸다.

“내 어머니, 오빠, 친구······ 그분들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당신에게 있어선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나나 이 세계에 있어선 달라.]

권제인의 전신에서 푸른 이능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권제인이 폭주한다!’

재러드 리가 규정집행부의 임의동행에 응하고, 지인이 환몽 리스트에 올라간 걸 안 직후다.

거기에 가족과 친구들이 희생된 원인이 자신과 관련됐다는 말을 들었으니, 이성이 사라질 법했다.

“제인아, 진정해! 저건 실체가 아니야.”

“지금은 재러드도 없는데······!”

권제인은 팀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능파를 억누르는 것도 벅차 보였다.

“어쩔 수 없군.”

30대의 황호가 한 손가락을 들어 권제인의 이마를 눌렀다.

우웅―!

황호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빛이 푸른 이능파를 묶기 시작했다.

한순간 보스 에리어가 빛으로 물든 후, 권제인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

“제인아!”

영원의 호수 팀원이 권제인을 받아 든 걸 확인한 황호가 손을 거뒀다.

“힘을 억누르고 기절시켰다. 24시간 이상 이능 못 쓰게 해.”

권제인의 이마를 짚었던 황호의 손가락은 푸르게 변색되어 있었다.

황호는 색이 변한 손가락을 한번 흘끗 보고는 나비령을 노려봤다.

나비령은 쓰러진 권제인을 보고도, 황호의 시선을 받고도 밝은 어조로 말을 걸었다.

[호족의 수장, 당신의 태만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후후,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 같긴 하지만. 고생 좀 했으면 좋겠어.]

“무슨 생각이냐,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죽여 주마. 접족.”

불쾌해하는 황호를 향해 나비령은 양팔을 활짝 펴 보이며 말했다.

[나비의 날갯짓은 폭풍을 부를 수도 있다고 하잖아?]

“그래서 넌 폭풍을 부를 생각이냐?”

[아니, 그 반대야.]

나비령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미물에 불과한 나의 날갯짓이 ‘그분’이 부를 폭풍을 막을 수 있는지 궁금해. 한번 막아 보고 싶어.]

나비령이 게임 속에서 보인 의문의 행보는 다 저 생각에서 비롯되었나 보다.

‘저 말만 들으면 나비령은 선역인 것 같긴 한데, 뭔가 달라.’

나비령을 단순히 도움을 주는 캐릭터, 선한 NPC라고 하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내가 나비령의 행적을 떠올리며 그녀의 진의를 가늠하고 있는 동안, 황호의 말이 이어졌다.

“‘그분’이 부를 폭풍을 막겠다고? 그러면 그분이라는 놈의 정체와 폭풍이 뭔지 말해.”

[싫어. 당신들에게는 말할 수 없어. 지금 당신들에게 필요 이상의 정보를 줘 봤자, 폭풍을 막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방해만 되고 내 입장만 위태로워지겠지.]

“말장난하자는 거냐.”

[장난이 아니야. 당신들에게는 소중한 게 많잖아? 그 소중한 것과 폭풍을 막는 최선책이 선택지로 주어진다고 생각해 봐. 당신들은 최선의 방법을 택하지 않을 거잖아. 그 태도는 폭풍을 막는 데 방해가 될 거야.]

그 말에 확신했다.

‘나비령과 내 최종 목표는 같을지도 모르지만, 같은 길을 갈 일은 없을 거다.’

‘그분’이 부를 폭풍이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짐작이 갔다.

나비령의 말대로 그녀가 오로지 그 폭풍만을 막기 위해 행동했다면, 그녀의 행보는 전부 납득이 갔다.

무고한 이들이 죽어 가도 나비령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던 거다.

“마치 너한텐 소중한 게 없다는 말투로군.”

황호의 말에, 나비령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더 짙게 묻어나기 시작했다.

[응, 없어. 그리고 어차피 ‘그분’이 부를 폭풍이 닥치고 나면 그 소중한 걸 지켜 낸 의미가 없어질 텐데?]

“중요한 정보를 줄 생각이 없는 것 같군. 네 배신을 웅족에 알릴 수도 있다.”

[그래? 그런 짓을 한다면 나는 죽고, 당신들은 중요한 정보원을 하나 잃겠지.]

황호의 협박에도 나비령은 흔들리지 않았다.

황호가 입을 다물자, 나비령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질의응답 시간은 여기서 끝낼게. 이제 본론에 들어가도 될까? 지금 당신들이 있는 이곳은 ‘동결형 이계’라고 해.]

나비령은 내가 게임을 통해 알고 있던 정보를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장과 어느 진족 사이에 이루어진 거래.

이계 동결화 스킬.

동결형 이계가 지닌 냉기와 이능독.

몇 년 전 있었던 석촌호수 사건의 전모.

[내가 전하고 싶은 건 여기까지야. 전해도 문제가 없는 정보가 있으면 또 메시지를 보낼게.]

“더 내놓을 정보가 없으면 꺼져.”

나비령은 황호의 말에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작별 인사를 하기 전 우리 파티를 확인하듯 돌아봤다.

짜증이 나 있는 황호.

팀원에게 몸을 기댄 채로 혼절해 있는 권제인.

분노에 찬 눈으로 나비령을 바라보는 영원의 호수 팀원 둘.

그리고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나.

나비령의 시선이 멈췄다.

[어머,]

화아악―!

나비의 비늘 가루가 내 앞에 쏟아졌다.

현재 나비령은 물리적인 간섭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반사적으로 방어막을 펼치려던 황호가 인상을 쓰면서도 나비령을 내버려 뒀다.

가루의 움직임이 멎자, 나비령의 흐릿한 형체가 내 눈앞에 있었다.

[······응? 인간이잖아?]

그럼 대체 무엇으로 보였단 말인가.

[직접 관찰해 보고 싶은데. 호족의 수장이 곁에 두는 인간이니? 이쪽으로 오지 않을래? 저 게으름뱅이 우두머리보다는 훨씬 잘 대해 줄게.]

“꺼져.”

황호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나비령을 대하는 태도가 옥토연을 대할 때와 비슷해진 것 같다.

‘나비령이 가진 정보가 탐나기는 하는데······.’

그러나 황호가 나한테 잘해 주고 말고와는 상관없이, 나는 나비령의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쪽 생각에 별로 동의하지 않아. 싫어.”

나비령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이상한데. 당신한테 소중한 게 있어?]

대체 날 어떻게 봤길래, 초면에 이런 소리를 해 대는 건가.

그래도 이번 질문에는 큰 고민 없이 답할 수 있었다.

“많은데.”

내 대답에 나비령이 웃기 시작했다.

[후후후, 하하하하!]

내 대답이 그렇게 웃겼나?

나비령의 목소리가 변조된 탓에 기계가 웃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괴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별로 좋지 않던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나도 황호처럼 나비령에게 꺼지라고 해야 하나.

[좋은 걸 봤으니까, 힌트를 줄게.]

실컷 웃은 나비령의 실루엣이 점점 흐리게 변해 갔다.

힌트를 남기고 꺼질 생각인 것 같다.

[‘그분’은, 이 세계에서 천신을 가장 증오하는 존재야.]

그 말을 마친 나비령의 잔영은 가루 한 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    *    *

권제인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지만, 공격대 파티는 무사히 이계 공략을 마치고 나왔다.

수비대 쪽에서도 에너미가 등장하긴 했지만 쉽게 제압되었다고 한다.

옥토연이 대놓고 놀아 호족의 분노를 산 모양이지만.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인이가 안정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가 봐.”

황호의 손짓에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권제인은 지상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눈을 뜨지 못해, 팀원의 등에 업힌 채로 퇴장하였다.

“플레이어 협회가 놀지는 않은 것 같군. 기록에 남지 않았어.”

홀로그램으로 협회 웹페이지를 확인하던 황호가 말했다.

호족들과 상의할 안건이 있다는 황호와는 헤어져, 나는 학교로 돌아가기로 했다.

옥토연이 사라지기 전, 디바이스 코드를 받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마지막 마무리를 할까.”

황호가 권제인의 이능파를 받아 푸르게 변한 손가락을 튀겼다.

그러자 호수 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솨아아아―!

황호는 한 손으로는 호수 물을 움직이고, 반대편 손으로는 땅의 움직임을 제어했다.

쿠구구구―!

순식간에 석촌 호수는 본모습을 되찾았다.

그렇게 석촌 호수, 수중 이계 공략이 종료되었다.

“조의신, 나비가 너한테 보인 이상 반응에 관해 얘기하고 싶은데······ 뭐, 주말에 얼마든지 시간이 있겠지.”

황호와 헤어지기 전, 그가 다른 호족들의 귀를 피해 그런 말을 남겼다.

얘기하고 싶다 해도 난 할 말이 없는데.

나비령이 왜 내게 반응하고 그런 말을 하는지 짐작가는 바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생각보다 좋은 방향으로 끝났어.’

내가 알릴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동결형 이계, 이계 동결화 스킬의 존재가 호족들과 플레이어 협회에 알려졌다.

복선 몇 개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 셈이다.

그리고 이번 공략은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의 미래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거다.

‘이곳의 공략 기록은 남지 않았어. 주수혁이 그 마족의 눈에 들 일도 사라졌겠지.’

주수혁은 이 동결형 이계 공략의 최대 공헌자가 된 바람에 홍역을 치렀다.

주수혁이 내가 모르는 사건에 휘말리지 않는 한, 마족으로 고통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 사건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른 걸 먼저 생각할 때야.’

이번 주 금요일은 반 아이들과 함께 스승의 날 이벤트를 준비하고, 주말은 황명호 대저택에서 보내야 한다.

‘애들 선물은 뭐로 할까.’

후보 몇 개를 두고 고심하며, 모습을 숨긴 채로 학교로 향했다.

*    *    *

“내 이계가 공략되었다.”

“어디 있는 거?”

“석촌호수. 호족의 기운을 느꼈어.”

어둠 속.

각자 제자리에서 눈을 감고 현세와 이어진 제3의 눈으로 인간계를 관음하던 마족(魔族)들이 차례로 눈을 떴다.

“플레이어SAT-K에 공략 기록이 없어.”

“호족은 협회와 사이가 좋아. 호족이 개입했다면 정보 조작이 있을 법하다.”

“호족이 왜?”

“황명 그룹 총수가 석촌호수 옆 유원지에 관심이 있어 보였는데. 둘러보다 발견한 건가.”

“은호의 후예에게 테마파크를 선물할 생각일지도 모르겠군.”

“어떻게 할 거냐. ‘그자’에게 보고할 건가.”

공략된 동결형 이계의 주인 되는 마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자’에게 보고하지 마. 우리는 어차피 그자에게 충성을 바치지도 않는데, 이런 걸 보고할 이유가 있나?”

“없지.”

“없어.”

마족 하나가 손뼉을 한 번 치자 어둠 사이로 희미한 화면 하나가 떠올랐다.

미궁 사이를 걷는 셋이 보이는 화면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심하게 낀 노이즈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투사해 낸 화면이 고작 이것뿐인가?”

“이상하게 노이즈가 심해. 누구인지 확인해 볼까. 하나는 영원의 호수의 팀 마스터. 하나는 황호. 남은 하나는······ 뭐지?”

“까마귀 가면이네.”

“까마귀 가면은 재수 없는 마왕이 생각나서 싫은데.”

석촌호수 동호의 이계 미궁.

그곳의 주인이었던 마족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까마귀 가면을 쓴 자가 신경 쓰여.”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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