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출석률 50% (1)
스승의 날까지 앞으로 하루.
은광고 각각의 학급, 동아리, 소모임은 담당 교사를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물론 사이가 좋지 않은 사제 간도 있어 예의상 학교 앞 노점상에서 파는 카네이션이라도 사 주자, 라는 선에서 끝난 곳도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 대부분은 정성껏 카네이션을 고르고 이벤트를 준비했다.
‘우리 반은 간단히 다과회만 하고 끝날 것 같은데.’
이대로 가면 별다른 이벤트는 없겠지만, 우리 반 아이들이 며칠 동안 직접 발로 뛰며 고른 카네이션과 다과다.
함근형이라면 그 수고를 알아줄 거다.
‘······어쩌면 급훈 ‘정시 등교’에 어울리는 선물을 할 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걸을 때, 다른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0반 애들이 또 뭔가 하는 거 같은데.”
“작년에 모아이 쩔었다.”
“그 뭐냐, 호러 하우스? 귀신의 집? 그거 다시 만들어서 돈 받고 입장하게 해 줬으면 좋겠다. 궁금함.”
“솔직히 3학년 0반 애들이 만든 것보다 그 강한 담임이 강화한 버전이 신경 쓰임.”
등굣길.
스승의 날 전날이라서 그런지, 학생들의 대화 주제도 비슷비슷했다.
그중에서도 0반의 행보가 주요 대화 주제였다.
“2학년 0반 일주일 내내 이계 공략 다니는 중이라는데.”
“걔들은 대체 뭘 하려는 거냐.”
“신문부 1학년 문새론이 몰래 따라가다가 걸림. 유인당해서 걔들 반장네 에어 호텔 스위트룸에 공략 끝날 때까지 갇혔다고 함.”
“그게 뭐야, 나도 거기에 감금되고 싶다.”
2학년 0반의 전설과 문새론의 취재 실패 기록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거 같다.
딩동―!
1학년 0반 교실에 도착하기 전, 디바이스 메시지 착신 알림음이 울렸다.
‘아침부터 학생회 공문을 보내?’
도착한 건 학생회 공문이었다.
나한테만 온 게 아닌지 여기저기서 홀로그램창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하는 게 보였다.
[안전한 스승의 날 이벤트 진행을 위한 가이드라인]
‘안전한 스승의 날······? 스승의 날에 뭐 위험할 게 있나.’
대충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역대 0반들이 저지른 사건들 소개.
관련 교칙과 처벌 내용.
‘제발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자’라는 완곡한 메시지를 담은 공문이다.
‘사실상 0반 저격 공문이잖아!’
그것도 2학년 0반과 3학년 0반.
2학년 0반이야 대놓고 악동질을 하고 있으니 학생회가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최근 3학년 0반은 얌전해졌다고 하지만 1, 2학년 때 남긴 행적을 고려하면 결코 방심할 대상이 아니었다.
현재 3학년 학생회 임원들은 그 난장판을 몇 년간 지켜봤으니 긴장할 법도 했다.
“야, 저게 뭐야!”
“헐.”
피유우웅―!
폭죽이 쏘아지는 소리에 등교하던 학생들 몇몇이 위를 바라봤다.
하늘 위로 여러 개의 이능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저거 이능 폭죽이네.”
“저걸 쏴서 뭘 하려고?”
“아직 14일인데 뭐 스승의 날 이벤트를 벌써 시작해!”
“어디서 이능파를 쏘는 것 같은데······ 어, 글자네.”
이능파의 흐름 탓에, 모든 학생들의 이목이 학생회에서 보낸 가이드라인을 떠나 하늘로 향했다.
‘학생회 공문이 좀 늦은 거 같은데. 공문이 더 일찍 왔어도 달라진 건 없겠지만.’
하늘에 다홍색으로 거대한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눈에 잘 띄라고 하늘의 색과 보색 관계에 있는 다홍색을 고른 모양이다.
[도전장]
“미친, 무슨 또 도전장이야.”
“저 세 글자만 봐도 0반 느낌이 난다.”
“뭔 또 도전이야.”
글씨는 계속 이어졌다.
[3학년 0반 일동은 임연화 담임선생님께 스승의 날 리벤지 매치를 제안함. 지는 쪽이 정문 시계탑 앞에서 항복 선언하기. 콜?]
저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저 도전장이라는 글을 읽은 등교하던 학생들이 말을 잃고 하늘을 바라봤다.
‘작년에 3학년 0반은 스승의 날 때, 귀신의 집을 만들어서 임연화를 놀라게 하려다 역관광당했다고 했었지. 1년 동안 복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나!’
3학년 0반이 우주의 기운을 탐색하며 얌전하게 지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나?
이 정신 나간 공개 도전장도 그렇고 3학년 0반은 매우 맛이 간 듯했다.
피유우웅―!
“야, 아직 끝난 거 아닌가 봐!”
“뭐야. 저기서 또 뭔 말을 하려고.”
이번에 떠오른 글씨는 다홍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다.
[콜!]
“임연화 선생님이 보낸 거 같은데.”
“진짜냐? 사칭 아님?”
“연화 쌤 본인이 한 거 맞음. 지금 SNS로 인증샷 찍어서 올렸어.”
저건 3학년 0반 담임 임연화가 보낸 답장인가 보다.
‘맛이 간 건 담임도 마찬가지구나!’
스승의 날, 임연화 vs 3학년 0반의 대결이 확정되었다.
종합 게시판을 통해 3학년 0반의 반장이 밝힌 바에 의하면, 외부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고 진검 승부를 하기 위해 대결 방법, 장소, 시간은 공개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후기를 기다리자.’
종합 게시판에 올라온 글 몇 개를 스크랩해 두고 우리 반 교실로 향했다.
* * *
1학년 0반 교실.
오늘은 내가 가장 늦게 등교했다.
“의신아, 안녕!”
“안녕.”
나보다 먼저 와 있던 아이들이 인사해 왔다.
어제 날을 지새우면서 쇼핑했다고 들었는데 다들 멀쩡해 보였다.
“새벽에 계속 꽃시장 돌았는데, 예쁜 꽃 많더라! 진짜 재밌었어.”
“카네이션도 종류가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 파스텔 톤 카네이션 중에 터키석색이랑 코랄핑크색 카네이션이 예쁘더라.”
“꽃말 때문에 다른 색 못 사는 게 아쉬워······.”
“대신 꽃장식에 더 신경 쓰자. 꽃다발이랑 꽃바구니 중에 어떤 것으로 골라야 할지 아직도 고민돼.”
김유리와 이레나의 얘기를 들어 보니 카네이션 담당 그룹은 매일같이 새벽 꽃시장을 순회하고 있는데도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다.
‘내일이 스승의 날이니까 방과 후에 또 꽃시장 가겠구나.’
잠도 못 잤을 텐데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 없었다.
한편, 두 사람과 동행했던 맹효돈은 영혼 없는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꽃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맹효돈 눈엔 다 그게 그거로 보였을 거다.
맹효돈이 밖에서 기다린다거나, 커피라도 사 오겠다고 말하고 빠져나오는 요령을 부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김유리와 이레나가 가자는 데로 따라가 멍하니 있을 게 눈에 선했다.
“괜찮냐.”
“······어.”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정신적으로 지친 모습이었다.
“바꿔 줄까. 우린 오늘 음식 정하고, 내일 아침 서문 쪽 수제 빵집에 예약해 둔 거 찾아오면 끝이야.”
케이크라는 말에 맹효돈의 빠져나갔던 영혼이 되돌아왔다.
잠깐 망설이던 맹효돈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래?”
맹효돈은 또 새벽 꽃시장에서 영혼을 버리고 오겠구나.
나는 사월세음과 한이가 보내 준 카탈로그를 홀로그램에 전개하며 말했다.
아직 예약이 가능한 조각 케이크와 와플, 도넛, 번, 브라우니, 타르트 등의 목록이었다.
이 불쌍한 맹효돈의 영혼을 위해 메뉴 선택권을 양보하기로 했다.
“먹고 싶은 거 골라.”
“오, 내가 골라도 되냐?”
“나 아직 하나도 안 골라서 괜찮아.”
다크 초콜릿이 들어간 호두 초코 브라우니.
베샤멜소스를 바른 크로크무슈.
맹효돈은 두 메뉴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을 했다.
지나치게 고민이 길어지는 것 같아 황지호 몫의 선택권도 맹효돈한테 넘겨서 두 메뉴 다 사기로 했다.
* * *
방과 후에도 스승의 날 준비로 바빴다.
신문부에서도 고문인 제갈재걸을 위해 이벤트를 준비하자는 말이 나왔다.
“제갈 쌤한테 카네이션 드리고 싶긴 해. 그런데 2학년 0반의 용자들이 작년에 각각 꽃을 준비해 오는 바람에! 제갈 쌤이 카네이션을 수십 송이 달고 다녀야 하셨고······ 보기에 좀 그랬지. 올해는 다른 걸 준비하려고.”
신문부 부장은 잡지 초안을 보여 줬다.
제갈재걸의 플레이어로서의 활약상과 여태까지 언론과 했던 인터뷰 등을 정리한 내용이었다.
‘이건 나도 갖고 싶은데.’
과제가 많았던 1학년 대신 2, 3학년이 제갈재걸 특집 잡지를 90% 이상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신입 부원은 제갈재걸에게 남기는 간단한 코멘트를 작성한 후, 부 활동을 마쳤다.
* * *
저녁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내 기숙사 방.
훈련을 받는 사이,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잔뜩 도착해 있었다.
소파에 걸터앉아 가장 오래된 메시지부터 순서대로 확인했다.
[체스대회 일정 알림]
체스 소모임 스테일메이트에서 보낸 알림 메시지였다.
메시지에 의하면, 체스대회 일정은 다음 주였다.
‘하기 싫은 일정은 빨리 돌아오는 거 같네.’
······지금이라도 취소 신청을 하면 안 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대진표를 보니 아는 이름이 몇 개 보였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많잖아!’
졌으면 졌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 앞에서 부전패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었다.
‘······가자.’
다음 주, 체스대회 참가가 확정되었다.
다음 메시지.
[주오 그룹, TC 그룹 합동 선상 파티 초대장]
이 메시지는 플레이어 협회를 경유해서 온 초대장이었다.
어린이날 잠실야구장 사건으로 그때 활약한 플레이어들에게 개인적으로 보답을 하고 싶다는 의사가 밝혀져 있었다.
‘저번에 장남욱이 이야기한 그건가.’
유상훈과 장남욱, 셋이 만나서 놀았을 때 곧 파티가 열릴 것 같으니 주말을 비워 두라고 했었던 것 같다.
게임에서는 없었던 이벤트지만, 비슷한 이벤트가 존재했었다.
‘선상 파티라······. 좋은 예감은 안 드는데.’
이날은 반드시 예정을 비워 둬야겠다.
다음 메시지는 장남욱과 유상훈이 있는 단체 채팅방에서 올라온 거다.
[장남욱] 스승의 날 준비하기 힘들다!
[유상훈] ?
[장남욱] 시후가 장난으로 한 소리 같은데, 일이 커졌어 ㅠㅠ
[유상훈] ?
[장남욱] ㅁ;ㅣ아넣;;ㅣㅓㅏ
[장남욱] 329닡ㅊㅋㅍㄴㅁㅇ;리ㅓㅏ
갑자기 화면에 올라오는 글씨가 뭉개졌다.
장남욱이 평소에 오타를 한 글자도 내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이상하다.
잠시 후, 장남욱이 괴상한 글자를 치는 걸 멈추었다.
[나] ?
[유상훈] 뭐냐
[장남욱] 남욱이는 지금 자리 비웠어 ㅎㅎ
디바이스는 몸에 착용하고 다니는 게 보통인데 자리를 비우고 말고가 어디 있나.
‘저번에 장남욱이 도시후의 광림에 걸려서 디바이스를 빼앗겼는데.’
도시후의 광림은 공격형인지는 미묘하고 포획형이라고 했었다.
장남욱의 룸메이트 도시후가 또 광림을 이용해 무슨 짓을 한 것 같다.
[유상훈] 저거 도시후네
[나] 장남욱 어디 감?
[장남욱] 남욱이는 정보유출혐의로 걸려서, 일단 격리 중!
[유상훈] ㅡㅡ
사정은 모르겠지만 사관학교 수석인 도시후가 뭔가 스승의 날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남욱은 거기에 휘말렸고, 덤으로 이상한 혐의에 걸려 끌려간 것 같다.
‘사관학교 놈들이 뭘 할지 하나도 안 궁금한데······.’
장남욱이 고생하는 중인 것 같지만 사관학교도 사제 사이가 좋아 보이니 다행이다.
다음으로 확인한 건 홍규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홍규빈] 의신아, 재러드 리는 무혐의로 결론 났다.
갑자기 그 문제로 훅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홍규빈] 공개해도 문제가 없는 범위에서만 설명하면, 재러드 리가 송금한 대상, 한국인 플레이어는 재러드 리와 국적은 다르지만, 먼 친척이었어. 그 플레이어는 지금 영구 제명된 상태긴 하지만.
재러드 리의 국적은 영국이다.
환몽 리스트에 오른 재러드 리 친척의 국적은 한국이다.
그리고 그 친척이란 인물들은 환몽 게이트에 연루되어 플레이어 협회로부터 영구 제명된 상태다.
메시지를 확인하며 머릿속에서 정보를 하나씩 정리했다.
[홍규빈] 조금 마음에 걸렸던 건 송금된 자금의 출처가 권제인의 사재였다는 점이야.
[홍규빈] 권제인의 동의하에 있었던 일인 모양이야. 재러드 리의 친척을 원조하고 싶었다고.
[홍규빈] 재러드 리와, 권제인에게서 정보공개 동의를 받아 두 사람의 모든 메시지 이력을 검토해 봤는데, 송금한 것 이외에는 어떤 교류도 없었다. 정말 돈만 보냈을 뿐이었어. 영원의 호수가 환몽 게이트로 이득을 본 일도 없었고.
그날 홍규빈이 했던 말에 의하면 10년간 송금한 금액은 한화로 300억 이상이라 한다.
게다가 송금한 대상은 한국인, 그것도 플레이어다.
권제인의 사재로 아무 교류도, 대가도 없이 지원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데.’
권제인이 한국에 와서 보인 묘한 행동과 발언을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나]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홍규빈] 그래,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나] 네, 그럴게요.
[홍규빈] 그럼 다시 난 일하러 갈게······ ㅠㅠ
아직 일하는 중이었나 보다.
나비령의 메시지를 들은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동결형 이계에 관해 협회에 알린 모양이니, 홍규빈처럼 급이 높은 플레이어는 바쁠 거다.
마지막 메시지.
발신자는 ‘(알 수 없음)’이 떴다.
‘혹시 이건······!’
이 메시지를 보낸 건 내가 며칠 동안 기다리던 상대였다.
[(알 수 없음)] 야.
[(알 수 없음)] 스승의 날 하루만 등교하면 되지?
메시지를 보낸 건 민그린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