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무박 2일 (2)
가장 먼저 움직인 건 황지호였다.
“적호!”
파아앗!
황지호가 힘을 개방해 적호에게 달려갔다.
황지호는 금색의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순간이동했다고 해도 믿을 법한 속도였다.
“어떻게 된 거냐, 무슨 일이 있었어!”
황지호가 적호의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출혈의 근원지는 복부였다.
적연으로 부상을 숨기고 지혈도 하고 있던 모양이다.
피가 현관을 적시던 광경을 떠올리면 환부를 보지 않아도 중상이란 건 짐작이 갔다.
‘저 정도로 다치고도 돈족으로부터 탈출해서 여기까지 온 건가!’
황지호나 백호군이 반응하지 않은 걸 보면 추격자도 없는 것 같다.
파아아―!
출혈이 있던 복부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피가 멎었다.
상처가 아문 게 아니라, 그저 피가 멈췄을 뿐이었다.
치유 이능을 쓴 게 아니라, 황지호가 마력으로 지혈한 것 같다.
“또 다친 곳은 없나. 이상이 있는 곳을 말해라, 적호.”
적호가 서 있지 못할 정도로 크게 다친 탓일까.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숨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 흔적은 돈족 측에 남기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십······.”
“누가 그걸 걱정해!”
황지호의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번 건은 적호가 잘못했다.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황지호를 올려다보던 적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호, 만일의 경우가 생긴다면 그 아이를······. 계약은······.”
계약?
그건 무슨 소리인가.
말은 하고 있지만, 부상으로 인해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제 안위를 챙기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오는 말은 대부분 5천 살 넘은 그 아이, 그 후예 김신록 얘기였다.
‘그만 쉬었으면 좋겠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 황지호가 이를 갈았다.
“지금 네 입에선 쓸데없는 소리만 나오는군.”
황지호가 손가락으로 적호의 미간을 짚었다.
황금색 빛의 입자가 황지호의 손끝에서 뻗어나갔다.
팟!
적호는 저항하듯 붉은 눈을 가늘게 떠 붉은 이능파를 뿜었다.
하지만 적호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적호가 뿜던 붉은 이능파는 황지호의 손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파아아······.
“자라, 멍청한 놈.”
힘없이 늘어진 적호를 한 손으로 받아 든 황지호가 한숨을 쉬었다.
적호의 미간을 짚었던 황지호의 손끝이 붉게 변해 있었다.
“돈족의 움직임을 잡아낸 후 입은 부상이다. 들으나 마나 돈족의 덫에 걸린 거겠지.”
그대로 적호를 옮길 생각인 듯, 황지호가 황금빛의 입자로 적호를 감싸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잠깐. 네가 한 건 응급처치잖아.”
“그래, 내 힘으로 상처를 틀어막았을 뿐이야.”
왜 치료를 안 하는 걸까.
황지호에게 치유 이능이 없더라도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 세계에는 회복 아이템이 존재하니까.
“상비 중인 회복 아이템이 없어? SR급밖에 없지만 우선 응급처치용으로 내 걸······.”
“소용없다.”
황지호가 딱딱한 목소리로 내 말을 중단시켰다.
SR급 회복 아이템이면 이 정도의 부상을 단번에 낫게 하지 못하더라도 안 쓰는 것보단 훨씬 나을 텐데.
“적호에게는 회복 아이템이 통하지 않아.”
“왜?”
처음 듣는 정보다.
“먼 옛날에 적호의 후예, 김신록이 사고를 친 적이 있어. 대죄를 짓고 붉은 형틀에 묶여 있던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결과적으로 적호가 김신록을 감싸기 위해 천신에게 제약을 하나 더 걸어 달라 청했고, 천신이 허락했다.”
김신록이 사고를 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신경 쓰이지만, 지금은 적호를 회복시키는 게 우선이다.
머릿속에 이전에 적호의 스테이터스 창을 확인했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천신의 진노 외에도 추가로 걸려 있던 상태 이상이 있었어.’
눈을 감고 있는 적호를 보며 전용 메뉴를 열었다.
〈‘적호’의 인물 정보를 열람합니다.〉
[이름] 적호
[칭호] 전설계 호족(虎族)
[가호] 없음
[광림] (비활성화 중)
[상태] 천신의 진노 ― 스킬과 광림 일부 봉인, 전 능력치와 스킬 레벨 대폭 하락, 예견된 지옥 ― (일부 로드에 실패했습니다.), 중상, 기절
‘천신의 진노’는 백호군과 동일한 상태 이상이다.
백호군은 게임 속에서 회복 아이템 사용에 제한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 이 ‘예견된 지옥’이라는 상태 이상이 문제가 된 걸 거다.
‘예견된 지옥······. 단서가 없어. ‘일부 로드에 실패했습니다’ 메시지도 그대로고. 지금 이 상태 이상을 해제하고 회복 아이템을 쓰는 건 어려워.’
회복 아이템을 사용하는 건 포기했다.
차선책으로 떠오른 건 스킬이었다.
“그러면 치유 이능을 쓰는 건? 호족 중에 치유 스킬 가진 진족은 없어?”
“있지만, 통하지 않아. ‘예견된 지옥’은 천신이 적호의 동의를 받아 직접 제약을 건 거다. 인간이나 진족의 스킬은 통하지 않아.”
스킬이 통하지 않는다면, 남은 건 하나다.
“그러면 상위 존재의 권능을 빌려 치유계 광림을 쓰는 자를 부르자.”
“그건 나도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치유계 스킬도 드물지만, 치유계 광림은 더 드물어. 이 세계에 동일한 광림은 없어. 상위 존재가 가호가 아닌 광림의 형태로 힘을 빌려주는 건 단 한 명뿐. 힘을 받은 자가 죽거나 힘을 버릴 때까지 변하지 않아.”
그건 나도 아는데.
내가 뭐라 하기 전에 황지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조력을 구하기 쉽지 않을 거다. 지금 황명 그룹이 섭외할 수 있는 건 삼황오제 중 농업, 의약, 약초의 신인 ‘염제 신농’의 광림을 쓰는 중국인 플레이어인데, 연락이…….”
“진정해라, 황지호.”
학교 운영을 방만하게 하다 보니 은광고에 어떤 플레이어가 있는지 파악을 못 하고 있나.
그게 아니면 적호가 중상을 입은 걸 눈앞에 둔 탓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 학교에 있어. 광림 쓸 때, 판아케아······ 아니, 아케아의 힘을 빌리는 플레이어야. 내가 연락할게.”
게임 속에서는 그 귀한 가호와 광림을 버리지만, 지금은 여전히 치유 이능을 갈고닦는 중인 우수한 플레이어다.
황지호가 맥이 풀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황지호도 내가 말하는 인물이 누군지 떠올린 것 같다.
“그랬었지, 있었던 것 같아. 있었지. 멍청한 놈은 나였군.”
그리스 신화 속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현대에서도 그가 사용했던 뱀이 감긴 지팡이가 의학의 상징으로 쓰일 만큼 인지도가 있는 그 신.
아스클레피오스는 에피오네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 딸 다섯을 보았다.
이 여덟 명의 자식들은 전원 의술과 관련된 신이 되었다.
그 다섯 명의 딸 중의 하나가 ‘판아케아’다.
‘이 세계관에선 ‘모든’을 의미하는 ‘판’이라는 이름을 잃고 아케아로 불리고 있지만, 치유의 신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어.’
우리 학교에서 그 아케아의 가호를 받고, 힘을 빌려 광림을 사용하는 인물이 있었다.
현재 은광고 3학년, 학생회 소속 서기.
치유광풍(治癒狂風) 유상희.
“연락한다.”
“그래.”
황지호가 거절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확인 차원에서 물어봤다.
디바이스로 유상희에게 메시지를 보내니 얼마 안 있어 답변이 왔다.
“아직 안 자고 계셨어. 학교로 와 주실 수 있대. 에어 택시는 내가 보낼게.”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마침 깨어 있던 유상희가 바로 승낙해 줬다.
유상희를 황명호 대저택으로 부르는 것도 적호를 멀리 이동시키는 것도 피하고 싶어 학교로 부르기로 했다.
“학교 어디에서 만날까.”
“은휘관에서. 정문에 에어 셔틀과 내 비서를 대기시키마. 바로 가자.”
* * *
조의신과 황호가 중상을 입은 적호를 데리고 저택을 나선 후.
백호와 신수는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백호는 저 둘을 따라가도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이 상황에서 은호의 후예들만 저택에 남겨 두고 자리를 비울 수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끄응······.
백호는 그 당연한 상황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적호가 남긴 핏자국을 응시했다.
왕, 왕왕!
움직이지 않는 백호 주변에서 신수가 주의를 끌려 하고 있었다.
머리를 바지 자락에 가져가 비비고, 무릎을 향해 폴짝폴짝 뛰어 보지만 백호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왕!
신수가 신력을 담아 짖었을 때.
백호가 그제야 신수를 내려다봤다.
백호의 주의를 끌자, 신력을 쓴 게 없었던 일인 것처럼 신수는 다시 애교를 부려 왔다.
백호가 신수를 쓰다듬어 주기 위해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
계속 쥐고 있던 주먹 안.
힘을 지나치게 준 탓에 피부가 찢겨 엉망이었다.
* * *
은휘관, 응접실.
문이 열리고 두 명이 등장했다.
한 명은 예전에 이사장실에서 만우절 사건에 본, 가면을 쓴 것처럼 미소 짓는 비서.
한 명은 유상희였다.
“안녕하세요, 유상희 선배님. 혹시 주무시던 중이셨나요?”
“안녕, 의신아. 사관학교 교류전하고 미술계 동아리 분쟁 조절 문제 때문에 학생회 일이 많았어. 밤샘할 생각이었으니까 괜찮아.”
바쁜 중에 불러낸 꼴이 되었다.
자려고 할 때 부르는 것보다 더 안 좋은 거 아닌가.
“바쁘신 중에 죄송합니다, 선배님.”
“죄송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그동안 너한테 진 빚이 얼마나 많은데. 드디어 갚을 기회가 온 것 같아서 기뻐.”
유상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네가 의신이랑 같은 반인 지호 맞지? 안녕.”
“안녕하세요.”
황지호가 예의를 갖춰 말하고 있다니.
평소에 함근형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걸 보긴 했지만, 새삼 위화감을 느꼈다.
“그래, 지호야. 네 뒤에 있는 분을 치료하면 될까?”
유상희가 의식을 잃은 채 응접실 소파 위에 누워 있는 적호를 보며 말했다.
황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사례는 필요 없어. 의신이랑 의신이 반 친구가 하는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한밤중에 학교의 이사장실로 불러내 중상을 입은 자를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는 지금 이 자리.
이상하게 여길 법도 한데 유상희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내 광림은 조금 과정이 거친데······ 이사장실이 엉망이 될지도 몰라. 여기서 써도 괜찮을까?”
“제가 결계를 치겠습니다. 여기서 해 주세요.”
“황명호 이사장님도 결계술에 능하다고 들었는데······ 친척도 마찬가지인가 보네. 1학년인데도 굉장하구나. 그럼 부탁할게.”
친척이 아니라 본인이다.
“결계를 치겠습니다.”
황지호는 힘을 개방하지 않은 상태로, 간단한 결계를 만들어 냈다.
머리카락과 눈은 여전히 진갈색이었지만, 이능파의 색은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파앗!
황지호가 유상희와 적호를 감싼 결계를 발동시킨 것을 확인한 후.
유상희가 광림을 전개했다.
사아아―!
바람결처럼 흐르는 이능파가 유상희의 주변을 감돌기 시작했다.
이능파의 흐름이 유상희의 긴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밀어 올렸다.
광림이 온전히 발동해 아케아의 권능이 유상희의 몸에 내려왔다.
동시에 유상희 주변을 감도는 이능파의 압력이 거세져, 마치 폭풍이라도 부는 것 같았다.
‘치유광풍이라는 이명이 붙은 건 광림 때문이었구나.’
황지호가 감탄을 터뜨리는 게 들렸다.
“멋지군.”
유상희가 쏜 빛의 입자가 가득한 바람이 적호를 감쌌을 때였다.
〈스킬 ‘운명력’이 발동했습니다.〉
운명력 발동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보였다.
적호가 입은 중상과 유상희의 광림에 정신을 뺏겨 집중력이 흐트러진 상태다.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지금 여기서 운명력이라고? 플레이어의 궤적을 발동시켜야 하나. 발동시킨다면 어떤 캐릭터를 써야…….’
결국, 내 판단은 조금 늦은 것 같다.
“잠깐!”
황지호가 뭐라 외쳤지만, 그 전에 유상희의 바람이 두 갈래로 나뉘어 쏘아졌다.
하나는 적호를 향해.
그리고 하나는 내 쪽으로.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