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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9화 (89/925)

24. 무박 2일 (3)

아케아의 권능이 실린 바람이 나를 덮쳤다.

콰아아―!

바람 속에 가득한 빛의 입자 탓에 눈이 부셔 반사적으로 눈을 감쌌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점점 시야가 왜곡되고, 소음은 심해졌다.

서너 번 눈을 감았다 뜨자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휘이이―!

나는 어두운 공간 안에 있었다.

소음도 멎어 바람 소리만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뒤, 은은한 후광을 두른 누군가가 있었다.

얼굴은 베일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엷게 미소 지은 입술이 우아했다.

‘기시감이 느껴지는데.’

만우절, ‘부(富)와 생명의 무게’를 사용했을 때 만난 거대 천칭 위에 서 있던 순백의 곰 가죽을 덮어쓴 자.

그 상위 존재와 마주쳤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안녕.]

다정하면서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그래, 내 사제의 은인은 예의 바른 아이로구나.]

그 누군가는 내 인사에 흡족해했다.

나를 사제의 은인이라고 칭할 상위 존재, 그리고 이 상황을 고려하면 저자가 누군지 짐작이 갔다.

‘유상희에게 가호를 내린 아케아인가.’

만병통치약을 의미하는 ‘Panacea’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던 치유의 여신 아케아.

운명력의 발동과 유상희의 광림 사용이 맞물려 아케아와 이어진 모양이다.

베일 너머로 나를 관찰하던 아케아가 말했다.

[이상해. 치유해야 할 곳이 보이지 않아.]

“네?”

[내 감이 잘못된 걸까? 당신이 아파 보여서 내 사제의 힘을 좀 많이 빌렸는데, 헛수고가 된 것 같아. 어쩌지?]

어쩌라고,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런 걸 나한테 물어 봤자 답이 나올 리가 없다.

적호나 잘 치료해 줬으면 좋겠다.

[아, 전해 달라고 부탁받은 말이 있어. ‘거스름돈’은 유효기간이 있으니까 빨리 써 달래.]

거스름돈?

그 단어를 들으니 바로 떠오르는 아이템이 하나 있었다.

“혹시, 그 말을 한 자는······.”

[호흡에 문제가 생기면, 지체 없이 내 사제를 찾아오렴.]

이전에 황호의 고서 해석을 통해 ‘무명의 운명’을 건넨 하얀 그림자도 그렇고, 이 세계엔 제 할 말만 던지고 사라지는 존재들이 많은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직후,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조의신!”

콰아아―!

거센 바람 소리에 섞여 황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온 건가.’

이사장실.

바람에 휘감긴 유상희와 적호, 그리고 내 근처까지 다가온 황지호가 보였다.

“정신이 들었군. 광림에 휘말린 후, 넌 5초가량 선 채로 정신을 잃었다.”

황지호의 말에 의하면 신체는 여기에 남은 상태로, 정신만 아케아와 연결되었던 모양이다.

‘그게 고작 5초밖에 안 됐나.’

짧은 대화였지만 5초 정도일 리가 없는데.

정신만 이어진 상태라면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느낄 수도 있나 보다.

“무슨 일이 있었지?”

황지호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직 유상희는 적호를 치료 중이니, 나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상위 존재 아케아가 말을 걸어왔어. 아파 보였대.”

내 말에 황지호의 얼굴이 굳었다.

“너 어디 아프냐?”

“아니. 치유할 곳이 없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나도 몰라.”

황지호는 굳은 얼굴을 푸는 대신, 미덥지 않아 하는 표정으로 날 봤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을 뿐이다.

스으으―!

그때, 결계 안을 메우던 빛과 바람이 잦아들었다.

불안정한 시야 너머로 적호를 보던 황지호가 안심한 얼굴을 했다.

“끝났나 보군.”

광풍이 완전히 멎은 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유상희가 숨을 한번 내쉬고 나를 돌아봤다.

“의신아, 별일 없었니. 아케아 님이 이런 식으로 개입해 온 적은 없었는데, 미안해.”

유상희도 이상을 감지했었구나.

적호를 치료하느라 대처하진 못한 것 같지만.

“괜찮아요. 유상희 선배님의 광림은 치유 계열이잖아요. 그냥 상위 존재에게 건강검진받은 거나 마찬가지죠. 상태는 어땠나요?”

이사장실 안의 모든 시선이 적호를 향했다.

적호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지만, 얼굴색이 확연히 좋아졌다.

“이분의 몸 안이 아홉 갈래로 찢겨 있었어. 그 상태로 강력한 이능을 계속 써서 이능파의 흐름도 불안정해진 것 같고. 이분이 진족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거야.”

황지호가 험악한 얼굴로 적호를 노려봤다.

그렇게 다치고 온 적호가 했던 소리가 떠올라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다.

‘유상희에게 적호가 진족이라는 건 발각된 것 같네.’

상위 존재의 힘을 빌려 치유를 시도했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또 이분의 몸엔 이미 다른 상위 존재의 기척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아케아 님의 신력을 담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지금부터는 진족의 자체 치유력에 의존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다른 상위 존재라는 건 천신을 말하는 거겠지.

천신이 건 제약을 두 개나 짊어진 적호다.

다른 상위 존재의 힘을 빌려 단숨에 완쾌시키는 건 어렵나 보다.

“감사합니다. 낫는 데는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습니까.”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까. 예전에 다른 진족을 치유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그때도 그 정도 걸렸으니까.”

황지호의 질문에 조금 고민하던 유상희가 답했다.

유상희는 다른 진족을 치유했던 적이 있었나.

‘일주일이라. 그 정도로 다치고도 전치 1주로 끝난 거면 다행인 건가.’

고른 숨을 내쉬는 적호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유상희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의신아, 무슨 일이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또 불러 줘. 나도, 우리 집 상멍청이도 네가 하는 부탁이면 기쁜 마음으로 들어줄 거야.”

그 상멍청이는 유상훈을 말하는 것 같다.

이번엔 어쩔 수 없었지만, 가능하면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은데.

나는 말을 돌릴 겸, 감사 인사를 했다.

“오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상희 선배님.”

“아니야, 정말 한 게 별로 없는걸. 그리고 상희 누나라고 불러. 아직 내가 어렵니?”

유상희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유상희는 후배 중에서도 정말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누나라고 부르게 한다.

친하지도 않은 놈이 그 호칭을 써 봤자 들은 척도 안 하는 게 유상희다.

‘······어렵다.’

유상희의 호의는 기껍지만, 아직 고등학생에게 형, 누나 소리를 하기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몹시 어색한 데다 양심이 아팠다.

하지만 이 늦은 시각에 여기까지 와서 적호를 치료해 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부탁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아니에요, 상희, 누나.”

“응!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 줘.”

노력은 해 보겠지만, 항상 누나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유상희는 황지호와 디바이스 코드 교환을 마친 후, 계속 대기 중이던 비서와 함께 이사장실을 나섰다.

그대로 비서가 집까지 배웅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사장실에 남은 건 나, 황지호, 적호, 셋이다.

“그럼 적호가 가져온 정보를 확인해 볼까.”

황지호는 적호가 안정된 후, 여유를 찾았다.

황지호가 적호의 이마를 짚어 붉게 변했던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힘을 개방했다.

파앗!

황지호의 주변이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손끝에서 피어오른 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황지호가 맹수 같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붉은 연기를 주시했다.

“유상희가 적호의 속이 아홉 갈래로 찢겨 있다고 해서 짐작은 했지만······ 적호는 상보심금파(上寶沁金耙)에 당한 게 확실하다.”

원시천존, 영보천존과 함께 천존 중 삼청으로 꼽히는 도덕천존.

태상노군이라고도 불리는 도덕천존에게는 금단도 녹인다는 팔괘로가 있었다.

그 팔괘로 안에서 오로지 천계의 수군대장, 천봉원수였던 저강렵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가 아홉 개의 이빨을 가진 쇠스랑, 상보심금파였다.

“돈족의 수장에게 당한 거구나.”

“잘 아는군. 현세에서 쓰는 이름은 저강렵. 법명은 저오능인 그 돼지 새끼에게 과분한 병기가 상보심금파다.”

저강렵은 저오능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지만, 저팔계로 널리 알려진 돈족의 수장이다.

12지 동맹 회담에서 ‘[나는나는저팔계]’라는 대화명을 쓰던 그 진족이다.

“적호가 그들의 다음 타깃을 알아냈군.”

적호의 이능이 담긴 붉은 연기가 어지러이 움직였다.

“전조 없는 이계 현상, 맨체스터, 웅족, 그리고 웅족과 손을 잡은 돈족.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전부 이어지는데.”

붉은 연기가 황금빛에 묻혀 완전히 사라지자 황지호가 금색의 눈을 번뜩이며 나를 바라봤다.

“적호가 잡은 단서는 잠실야구장 사건과 이어질 것 같군.”

황지호가 무엇을 알아낸 건지 몰라도, 힘을 개방한 상태로 저런 눈을 하니 눈에서 빔이 나오는 것 같다.

“돈족은 다음 주말에 있을 선상 파티를 노릴 모양이다. 이어지는 단서는 주오 그룹과 TC 그룹의 차기 총수. 잠실야구장 사건과 선상 파티, 모두 차기 총수가 참석하니까.”

‘그분’은 두 그룹의 차기 총수를 다시 노릴 셈인가.

“뭐, 그건 조의신 네가 더 잘 알겠지만. 이래도 아직 우연이라고 우길 생각이냐?”

나는 당당하게 답했다.

“우연이야.”

황지호는 조금도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잠실야구장 사건에 휘말린 건 내가 의도한 바였지만, 현재 시점에서 선상 파티와 엮인 건 우연이다.

‘선상 파티, 게임에서 있었던 주요 이벤트 중에 비슷한 게 있었어.’

앞으로 일어날 사건과 게임 스토리에 있던 기믹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대응책은 얼마든지 있다.

“실토하게 하는 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를 찾은 다음에 할까.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황지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적호를 이렇게 만든 돼지 새끼의 속을 아홉 갈래로, 아니, 그 이상으로 찢어 주겠다.”

*    *    *

황명호의 대저택으로 돌아가니, 백호군과 올무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적호가 남겼던 핏자국은 백호군이 정리한 건지 사라진 상태였다.

‘둘이 계속 이 자리에서 기다린 건가.’

백호군이 싸늘해 보이는 얼굴과 어조로 물어 왔다.

품에 올무를 안고 있어 조금도 위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황호. 적호는?”

“무사해. 일주일 정도 정양하면 괜찮아질 거다.”

황지호가 마력으로 휘감아 허공에 띄우고 있는 적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적호를 바라보던 백호군의 눈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평소보다 그 싸늘함이 덜했다.

왕왕······!

올무도 적호를 걱정하고 있었는지 애교 넘치는 소리로 짖었다.

“자기는 글렀군. 적호를 옮기고 오마. 조의신, 백호, 응접실에서 기다려라.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하자.”

황지호의 제안에 나와 백호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지호가 준비한 차는 5월경에 수확한 세컨드 플러시 다르질링이었고, 다과는 체리아몬드 티라미수였다.

응접실에서 이번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며 티타임을 갖다 보니, 일출 시각을 넘겨 버렸다.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이틀째가 되었다.

*    *    *

일요일 저녁.

“정말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조의신 형!”

“의신이 오빠, 또 오세요!”

“기다릴게요!”

은호의 후예가 배웅 나왔다.

적호가 다쳐서 이 저택에서 정양 중인 건 이 셋에겐 비밀로 하기로 했다.

끄응······.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올무는 나와 함께하기 위해 리드를 고르려 했다.

내가 리드를 많이 선물한 탓에 고르기 어려워 헤매는 것 같았다.

결국, 고민하던 올무가 나한테 골라 달라며 애교를 부려 댔다.

우리 올무가 부탁했으니 당연히 골라 줘야 했다.

왕왕!

새하얀 가죽 리드를 골라 직접 채워 주니 올무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밤샘으로 누적된 피로가 날아갔다.

올무와 같이 걸으니 피로는 물론이고 모든 근심도 날아가려 했지만, 애써 생각을 이어 갔다.

‘하룻밤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적호의 부상.

아케아의 권능에 섞여 발동된 운명력.

아케아가 언급한 유효기간이 있는 거스름돈, 호흡.

돈족의 수장, 저팔계 저강렵.

돈족의 다음 타깃인 선상 파티.

주오 그룹과 TC 그룹의 차기 총수.

생각해야 할 게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두 가지야.’

첫째, 황지호의 반응.

적호의 부상을 보고 스스로 멍청하다고 할 만큼 황지호는 동요했었다.

저강렵을 떠올리며 섬뜩한 살기를 품기도 했다.

‘황지호는 진심으로 적호를 걱정하고, 복수심에 불탔는데.’

이게 황지호의 본의라면, 왜 게임 속에선 적호가 죽었을 때도 방관한 건가.

‘세상사에 무관심했더라도, 저렇게 끔찍하게 여기는 친우가 죽었는데 아무것도 안 한다고? 이상해.’

황지호의 등장이 잦아지는 건 주수혁이 2학년이 됐을 때.

주수혁과 같이 2학년 0반이 되어 관찰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즉, 적호가 죽은 다음 해에 있었던 일이다.

‘여전히 학교나 그룹, 호족의 운영은 던져두더라도 복수만큼은 시도했을 거야. 주수혁을 관찰하기 시작한 계기가 흥미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라.’

적호가 주인공 일행, 주수혁과 어울렸다는 건 약간의 조사만으로도 알 수 있을 거다.

주수혁에게 흥미도 느꼈겠지만, 분신 중 하나를 보내 적호의 복수를 위한 단서를 잡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가정한다면 또 이상한 게 남는다.

‘주수혁과 합류한 황지호가 왜 어느 순간부터 등장하지 않게 되었을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생각을 계속 이어 갔다.

‘또 이건 스토리와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마음에 걸려.’

두 번째로 신경 쓰이는 것.

그걸 풀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궁금한 게 있어.”

올무의 리드를 쥐고 걷던 백호군이 나를 내려다봤다.

“김신록 선생님이 옛날에 쳤다는 사고에 대해서 듣고 싶어.”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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