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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90화 (90/925)

24. 무박 2일 (4)

적호는 대죄를 짓고 붉은 형틀에 묶여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적호는 김신록을 감싸기 위해 ‘예견된 지옥’이라는 상태 이상을 짊어지게 되었다.

김신록이 대체 어떤 사고를 쳤는지 신경 쓰였다.

백호군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설마,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사고를 쳤나.’

백호군은 과묵했지만 이렇게 뜸을 들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말하기 곤란한 거면 안 해도 돼.”

“곤란하지 않다.”

말해도 상관없는 건가.

그러면 백호군이 왜 저러고 있지.

“그 아이가 친 사고 중,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백호군은 김신록을 ‘그 아이’라고 부르는구나.

둘 다 나이가 5천 살 이상이고, 몇십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텐데.

나이를 먹어도 후예는 아이로 보이나 보다.

“가능하면 전부 듣고 싶은데.”

“전부 말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생각보다 김신록이 사고를 많이 쳤나 보다.

“조금 오래 걸려도 괜찮아.”

“간결하게 정리해도 며칠은 걸린다.”

······생각보다 김신록이 사고를 훨씬, 더 많이 쳤나 보다.

대체 어떤 사고들을 쳤는지 궁금하지만, 일단 하나만 듣기로 했다.

“적호가 천신에게 제약이 걸리게 된 계기가 된 사건에 대해 듣고 싶어.”

“알았다.”

백호군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적호와 비탄의 웅녀, 둘의 짧은 결혼 생활 끝에 남은 후예.

당시에는 김신록의 처분을 두고 호족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적호가 자진하여 붉은 형틀에 묶이고 그의 친우들인 신화계 호족, 백호, 황호, 청호 이 셋이 김신록을 감싸 호족의 후예로 받아들여졌다 한다.

‘그때는 아직 청호가 남아 있었구나.’

김신록은 자신을 진족이라 믿으며 자랐다.

김신록은 호족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고뭉치였지만, 웬만한 호족 이상으로 총명한 천재였다.

신화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계’가 낮은 호족보다 훨씬 우수했다.

“적호가 어렸을 때와 몹시 닮았었지. 영리하고 대담한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김신록은 힘을 자각하며 자신이 진족이 아닌 후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김신록은 단기간에 자신의 부모의 정체도, 적호가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했다.

김신록은 붉은 형틀을 찾아내 적호의 참상을 봤다.

적호의 몸에 가득한 저주와 상처를 본 김신록이 사고를 쳤다.

“김신록은 호족의 신보(神寶)를 적호에게 사용했다.”

호족의 신보?

설정집에 설명문으로만 존재하던 아이템이 하나 떠올랐다.

설마 하는 마음에 물어봤다.

“그거 신역에서 천 년에 한 번 정도 만들어진다는 UR급 이상의 아이템 아니야?”

“그래. 최근 2천 년 동안은 나오지 않고 있다.”

김신록은 내 생각보다 더 큰 사고를 쳤다.

“적호는 신보로 낫고 강화된 몸을 다시 붉은 형틀에 묶은 후, 무거운 제약을 천신께 청하여 김신록을 감쌌다.”

적호가 그렇게까지 하니 호족도 더는 김신록을 책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김신록이 한 행위는 적호에게 더 무거운 벌을 짊어지게 한 셈이었다.

‘김신록······.’

김신록이 보였던 인간미 없던 표정과 음산한 모습이 생각났다.

백호군이 말한 사고뭉치, 총명한 아이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김신록이 변한 건 그런 사건들이 계기가 아닐까.

‘김신록은 적호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적호 님’이라고 딱딱하게 부르고 있었어.’

배경을 고려하면 서로 선을 긋고 사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김신록이 신보까지 훔친 걸 생각하면 아버지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닐 것 같다.

‘적호는 김신록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기본적으로 나는 이 세계에선 플레이어블 캐릭터 편이었다.

둘 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아닐 때는, 심정적으로 가까운 쪽을 고를 수밖에 없다.

아버지였던 적은 없지만, 아들이었던 적은 있던 나로선 김신록의 손을 들어 주고 싶었다.

‘김신록 선생님께 연락하자.’

적호가 금구령을 내리긴 했지만, 그 대상은 황지호뿐이었다.

곧장 디바이스 메시지를 작성해 김신록에게 보냈다.

“조의신, 그 표정은······.”

전송을 완료했을 때, 백호군이 말을 걸었다.

설마 내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나한테 수상해 보인다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

백호군이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은 하는 백호군이 뭐라 하지 못할 만큼 수상한 건가!’

충격적이다.

끄응······.

어느 사이에 나와 백호군이 멈춰 서 있었나 보다.

걷지 않을 거면 안아 달라고 올무가 무릎에 기대 왔다.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올무는 안아 들기로 했다.

충격받은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    *    *

내 기숙사 방.

황명호의 대저택에 비하면 좁아터진 방인데, 이상하게 넓어 보였다.

새삼 내가 혼자인 게 실감이 났다.

잡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디바이스를 가동해 홀로그램을 전개했다.

제일 먼저 확인한 건 김신록과의 메시지창이다.

‘김신록에게 보낸 메시지는 기독 처리가 됐어.’

김신록은 적호가 중상을 입었다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진 않을 예정이다.

다른 메시지창도 확인해 보았다.

‘메시지가 가장 많이 쌓여 있는 건 장남욱하고 유상훈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이네.’

내 예상대로 주말 사이 장성들과 오찬 시간을 가진 장남욱은 넋이 나가 있었다.

[장남욱] 별이 참 많았다······.

[유상훈] ?

[장남욱] 앞에도, 옆에도 다 별이었어······.

[유상훈] 미쳤음?

장성이 몇 명이나 참석했는지 궁금해졌지만, 멘탈이 박살 난 장남욱을 위해 묻지 않기로 했다.

다음으로 확인한 건 은광고 웹 커뮤니티의 종합 잡담 게시판이었다.

‘2학년, 3학년 0반의 스승의 날 후기가 궁금한데.’

종합 게시판에는 스승의 날 후기가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0반 선배들의 후기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글이 눈에 띄었다.

‘뭐야, 이 댓글이 많이 달린 글은······ 우리 반 후기잖아!’

무수한 스승의 날 후기 중, 댓글이 가장 많이 달린 글은 우리 1학년 0반 후기였다.

작성자는 1학년 0반의 능력자 반장, 김유리다.

‘김유리가 후기를 썼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댓글이 많지.’

글을 확인해 보니 우리 반 아이들이 고른 꽃바구니, 다과들의 사진들이 보였다.

신경 써서 준비하긴 했지만 다른 반들의 기상천외한 이벤트에 비하면 평범한데.

‘너무 평범해서 화제가 된 건가. 그래도 이상한데.’

스크롤을 더 내리니, 답이 보였다.

‘아, 이거 때문이구나.’

후기에 첨부된 사진 중에는 민그린이 그린 야생 카네이션 그림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지금은 1학년 0반 교실 벽에 장식된 그 그림의 사진이 올라가 있었다.

댓글은 거의 민그린의 카네이션 그림에 관한 내용이었다.

[헐, 잘 그렸다.]

[낯선 그림이 홍경복 화백님 뺨을 후리네ㄷㄷㄷ]

[1학년 0반 엄청 착하게 노네······ 병맛 후기를 기대하고 누른 내가 부끄럽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그림이 칭찬받는 걸 보니 뿌듯했다.

그러나 칭찬이 이어지는 건 잠시뿐이었다.

최신 댓글엔 그림 좀 안다는 사람들이 몰려와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이거 신동 민그린 화백님의 스멜이 확 나는데요.]

[민그린이랑 화풍이 똑같은데? 필압이나 붓놀림 다 따라 했네. 차라리 복사를 하지 그랬냐.]

[민그린 화백 개인 사정으로 활동 안 한 지는 꽤 됐지만, 동양화 좀 아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모사하신 거면 밝히고 하세요.]

[민그린 그림 어설프게 따라 해 놨네]

[민 화백 그림을 제가 좀 잘 압니다만, 저 그림은 너무 어설퍼서 모작이라 하기도 좀 ㅋ;]

[왜 모사작을 지들이 그린 거처럼 해 놓음? 1학년 싹수가 노랗네ㅉㅉ]

비난이 쏟아지는 와중, 실드를 쳐 주는 은광고생, 졸업생, 교직원들이 존재하긴 했다.

곧 실드를 치는 이들과 지적꾼들 사이에서 키보드 배틀이 벌어졌다.

[그냥 1학년 애들이 선생님께 카네이션 그려 준 거 갖고 그렇게까지 말해야 함? 선비들 지적질 오진다;]

[뭐 말만 하면 선비로 몰고 가네ㅉㅉ 이래서 우리나라가 안 되는 것임.]

[교사 중 한 명입니다. 얌전한 1학년 0반 학생들에게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3학년 0반 놈들 졸업할 때까지만 좀 잘 부탁드립니다. 추천 누르고 가요.]

[지익회 소속임. 올해 1학년 0반 핵착함. 1학년 시설 중에 박살 난 거 하나도 없음. 지익회 역사상 처음 있는 기적임. 얘들이 악플받고 비뚤어지면 책임질 거임? 기숙사 박살 나면 늬들부터 찾아서 조질 거임.]

[미친, 꼴랑 기숙사 박살 날까 봐 모사충을 내버려 둔다고? 나 때는 말이야······]

[저 꼰대들 졸업생이거나 곧 계약 끝날 비정규직이다에 한 표. 지들은 이제 상관없다고 0반이 흑화하건 말건 상관없나 봄.]

[지적충들 왜 저리 불탐?ㅋㅋㅋ 몸에 화가 많으시군여. 플레이어 영구제명이라도 당함? 은광고 졸업생 중에도 환몽 벌레가 있던데. Hoxy······]

[아니, 님들아. 그냥 스승의 날에 카네이션 그린 거 갖고 왜 지랄들임?]

그 외 수백 개의 댓글로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표절이고 뭐고 민그린 본인이 그린 건데.’

미술계에 한 획을 그은 천재가 플레이어 특목고에, 그것도 0반에 있을 거라고 상상하긴 어렵긴 할 거다.

한참 댓글을 내리던 중, ‘글 작성자’ 표시가 된 댓글이 보였다.

[허락받고 밝혀요! 카네이션 그림은 민그린 화백님 작품 맞고 그린이는 우리 반이에요^▽^♡]

김유리가 단 댓글에 분위기가 일변했다.

[?]

[헐······.]

[설마 했던 본인 등판 ㅋㅋㅋㅋ]

[왜 민그린 화백이 거기서 나옴?]

[일침충들 아닥행ㅋㅋㅋ]

[이래서 댓글을 달 때는 신중해야 하는구나ㅋ 모사가 어쩌고 하던 놈들 쪽팔려서 잠은 자겠냐.]

[(대충 속 시원하다는 내용)]

[민그린보다 어설픈 모사작 표절충 운운하며 비평하시던 자칭 존문가 빌런 찾습니다.]

김유리의 인증으로 미친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쓸데없는 사항으로 싸우는 놈들이 있었다.

[미술부 부장입니다. 쪽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동양화 소모임 부장입니다. 위 댓글은 씹고 저한테 쪽지 주세요!]

[↑↑지금 님 디바이스로 메시지 보냈다. 확인해라ㅗㅗ]

[↑↑↑싫어ㅗㅗㅗ]

미술부와 동양화 소모임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다시 새 댓글이 수십 개 달리면서 분위기는 개판이 되었지만, 그들만의 리그에 사람들은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다음 주에 우리 반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니, 김유리와 미리 상의해 두는 게 좋겠네.’

유상희가 미술계 동아리 분쟁 조절로 고생 중인 것 같던데.

댓글 창을 보니 어떤 상태인지 대충 헤아릴 수 있었다.

종합 게시판을 닫았을 때, 이번엔 신문부 신입 부원 단체 메시지방에 새 메시지가 올라왔다.

[문새론] 나 지금 제갈 쌤이랑 협회 와 있어.

[문새론] 2학년 0반 취재 자료 다 파기해야 할지도 몰라 ㅠㅠ

[문새론] 일단 내가 대화방에 올린 자료들은 내릴게. 다운받은 사람들 있으면 지워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대체 2학년 0반은 뭘 한 거냐!

협회가 개입할 정도면 사고를 크게 친 모양이다.

‘3학년 0반도 신경 쓰이는데.’

스승의 날 전날에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보낸 관심종자들이 후기를 안 올릴 리가 없다.

‘벌칙을 공개 항복 선언으로 할 정도면 눈에 띄는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후기를 안 올리지.’

정문 시계탑 앞에서 항복 선언하는 임연화나 3학년 0반이 목격되었다는 글도 없다.

설마,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도 승부가 진행 중인 건가!’

지금은 일요일 밤.

승부를 시작한 건 아마 스승의 날이었던 금요일.

지금도 3학년 0반과 임연화는 어딘가에서 2박 3일, 아니 무박 3일 동안 승부를 벌이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곧 월요일이 되니 하루 더 추가되겠네.’

내일쯤 후기가 올라올 걸 기대해 보자.

이제 몇 시간 있으면 월요일이 되고 다시 한 주가 시작된다.

‘준비할 게 많아.’

주말에는 돈족과 엮인 선상 파티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 대비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중요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 옆, 사 두고 포장조차 뜯지 않은 체스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다음 주, 교내 체스대회가 열린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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