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91화 (91/925)

25. 스테일메이트 (1)

아침에 김유리로부터 디바이스 메시지가 도착했다.

[김유리] 종합 게시판 보니까 미술부, 동양화 소모임 사람들이랑 네 팬들이 찾아올 거 같아······.

[김유리] 사람 몰릴지도 모르니까 우리 반 애들이랑 같이 들어가자!

[김유리] 정말 미안해, 그린아ㅠ▽ㅠ 게시판에 글 올릴 때 조심했어야 하는데······ 나 때문에 악플도 받고 등교도 힘들어지고······.

어제 반장인 김유리가 은광고 웹커뮤니티 종합 게시판에 스승의 날 후기 글을 올렸다.

민그린은 그 글에서 있었던 키보드 배틀에 휘말렸다.

‘유리 잘못이 아닌데. 원래 인터넷상엔 이상한 사람들이 많잖아.’

민그린이 작품 활동을 할 때는 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 쓰레기들이 많았었다.

이번엔 민그린이 민그린을 표절했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으니, 별로 타격을 입지 않았다.

민그린은 괜찮다고 답변을 보냈다.

[김유리] 진짜 미안······ 사과의 의미로 베이글칩이랑 메이플 밀크티 가져갈게. 애들이랑 같이 먹자!

[김유리] 그럼 정문에서 봐 〉▽〈♡

홀로그램을 끄고 민그린은 등교할 준비를 했다.

후드 점퍼에 AR 글래스를 쓰고.

민그린의 이능과 신체 능력을 감당할 수 있는 플레이어 슈즈를 신고.

만반의 준비를 끝낸 민그린이 호흡을 하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민그린의 앞, 눈 밑이 새까만 송대석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무슨 일이야?”

송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그린과 송대석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소꿉친구였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민그린은 송대석이 왜 왔는지 짐작해 냈다.

‘대석이가 배웅 나와 줬구나.’

방 밖으로도 잘 나오지 않는 송대석이 여기까지 와 줬다.

햇빛을 받지 않아 시허옇게 질린 얼굴의 송대석이 민그린을 보고 있었다.

민그린은 머뭇거리다 물어봤다.

“학교에 같이 안 갈래? 우리 반 애들 다 착해. 담임도 함근형 선생님인데.”

송대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 고갯짓을 본 민그린의 어깨가 축 처졌다.

자신이 먼저 용기를 내서 등교하면 송대석도 같이 학교에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민그린이었다.

‘내 힘으로는 안 되는구나······.’

민그린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가장해 말했다.

“나 반 애들이랑 같이 듣는 오전 공통수업만 끝내고 올 거야. 오후에 놀러 갈게.”

“알았어.”

송대석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도 송대석은 방 안에서 혼자 위성 관측 자료나 지켜보고 있을 거다.

민그린이 그림에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송대석은 플레이어 위성에 빠져 있었다.

어두운 방에서 모니터를 지켜볼 송대석의 뒷모습을 생각하니 민그린은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다녀올게.”

“잘 갔다 와.”

송대석과 헤어진 후, 민그린은 인적이 드문 등굣길 루트를 골라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도 머릿속에는 소꿉친구 걱정이 가득했다.

*    *    *

월요일 아침.

1학년 0반 스승의 날 후기 글이 민그린 화백 사건으로 폭발한 다음 날.

김유리가 만일을 대비해 정문에 모여서 함께 이동하자고 제안해, 반 아이들 모두가 승낙했다.

평소에는 거주 구역에서 바로 1학년 건물로 이동했지만, 오늘은 정문 쪽으로 향했다.

‘너무 일찍 나왔나.’

은광고 정문 시계탑 앞.

시계탑이 가리키는 시각을 보니 약속한 시간까지 많이 남아 있었다.

기다리면서 뭐라도 할까.

‘탄래중학교 건으로 민원을 넣자.’

탄래중학교는 시설이 심하게 낙후되어 있었다.

교사진과 학부모회는 훌륭한 수상 실적을 가진 맹효돈과 그의 중3 담임을 박대했다.

객관적으로 의심쩍게 보이는 데다 주관적으로도 내 개인적인 감정이 아주 강하게 실릴 수밖에 없었다.

게임 속에선 맹효돈이 중학생 시절에 당한 일들을 종종 묘사해 주곤 했었다.

플마고는 그런 식으로 깊은 빡침을 부르는 고구마는 잔뜩 처먹였지만, 국민망겜답게 사이다 같은 건 주지 않았다.

‘기왕 하는 거 철저하게 해 볼까.’

교육청 홈페이지 중 재정공개 게시판을 열었다.

그곳에 올라온 탄래중 본예산서와 추가경정예산서의 세출명세서, 그리고 결산서를 체크하며 민원 글을 작성해 갈 때였다.

터벅터벅.

생기 없는 발소리와 함께 천익산 쪽에서 좀비 떼가 출몰했다.

‘저건 또 뭐야!’

잘 보니 좀비들은 은광고 춘추복이나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옷은 교복이었지만, 퀭한 얼굴에 흙투성이, 만신창이 꼴로 저러니 그냥 거지나 부랑자, 혹은 좀비로 보였다.

명찰 색을 보니 3학년이었다.

등교하던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3학년 선배들 같은데.”

“헐, 왜 거지꼴을 하고 있음?”

“······저거 3학년 0반이네.”

“담임이랑 승부한다던 미친놈들?”

스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3학년 0반 학생들은 등교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들은 정문 시계탑 앞에 섰다.

“월요일부터 왜 저럼?”

“넌 왜 동영상 찍고 있냐.”

“일단 찍어 둬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음.”

“뭐야? 대체 뭔데?”

3학년 0반에서 가장 상거지 꼴을 한 학생이 맨 앞으로 튀어나왔다.

상거지가 아이템 카드를 사용했다.

피유웅―!

상거지가 쓴 아이템은 하늘로 쏘아진 이능 신호탄이었다.

신호탄을 쏜 상거지는 이능파를 뿜어 빛무리를 글자 모양으로 다듬었다.

정교한 이능파 제어 솜씨에 놀랐지만, 완성되는 글자를 보니 그저 황당하기만 했다.

[항] 3학년 0반의 패배 [복]

뭘 하나 했더니 정문 시계탑 앞에서 한다던 항복 선언이었다.

‘항복도 저렇게 튀게 하고 싶었나!’

표정을 보니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긴 했다.

그런데도 저렇게 눈에 띄는 방식으로 항복을 선언하는 게 굉장했다.

은광고 문제아 집단 0반, 그 최고 학년 3학년 0반다운 패기였다.

“의신아, 안녕! 와, 임연화 선생님이 이겼구나.”

“안녕하세요! 비행 중에 이능 신호탄이 보여서 서둘러 왔어요.”

“부반장 일찍 왔네.”

3학년 0반의 기행에 정신이 팔린 사이, 우리 반 아이들이 도착했다.

“저 선배들 뭐 하는 거냐.”

“종합 게시판 볼까?”

3학년 0반이 ‘중간 항복 후기’라고 올린 사진들과 개요를 반 아이들과 함께 열람했다.

[스승의 날 기념, 3학년 0반 vs 임연화 선생님 리벤지 매치]

[종목: 페인트볼 게임]

[장소: 천익산 내 일부 지정 지역]

“페인트볼 게임?”

“서로한테 페인트탄을 쏘면서 승패를 가리는 게임이야. 서바이벌 게임이라고 하기도 해. 개별 룰이 다양하긴 한데, 보통 페인트탄이 급소에 맞으면 아웃되는 방식일걸.”

“그냥 페인트가 묻으면 아웃인가 봐. 읽어 보니까 무기는 총으로 한정하지 않았어.”

“쓸 만한 스킬이나 광림이 없으면 총이 제일 편할 것 같긴 한데······.”

그들은 천익산에서 산책로를 벗어난 지점을 중심으로 결계를 쳤다고 한다.

그 안에서 서바이벌, 페인트볼 게임을 한 모양이었다.

“임연화 선생님이 3학년 0반 선배들을 혼자서 다 아웃시킨 거야? 대박.”

“카드화가 가능한 아이템도 안 쓰고? 금요일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3박 4일 동안 어떻게 그 안에서 싸운 거지.”

중간중간에 사진도 있었다.

3학년 0반이 사전에 승리의 순간을 기록한답시고 필드 여기저기에 기록 기기를 깔아 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기록 기기엔 굴욕과 패배의 순간만 찍히게 되었다.

“······와.”

“이분 진족의 이해 담당 선생님 맞지? 어, 음.”

수많은 사진 중 베스트 컷은 다음과 같았다.

주변을 경계하며 걷는 0반 학생.

그 뒤, 얼굴에 위장 크림을 바르고 맨발로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임연화.

입에 페인트가 발린 나이프를 문 임연화가 곧 사냥할 학생을 조용히 지켜보는 장면이었다.

‘페인트탄을 쏘면 소리가 나니까 그걸 막으려고 칼을 쓴 건가.’

임연화는 혼자서 3학년 0반 아이들을 전부 사냥했다.

그나마 저 상거지 꼴을 한 반장이 끝까지 버텼지만, 마지막 1대1 싸움, 단기접전에서 결국 패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중간 항복 후기? 그럼 최종 항복 후기도 있나? 애초에 항복에 후기가 어딨어.’

대체 최종 항복 후기엔 뭐가 올라오는 건가.

“어, 다른 글도 있어.”

“임연화 선생님 후기라는데?”

종합 게시판의 다른 글을 보니, 학생 중 누군가가 임연화의 SNS에서 퍼 온 글이 있었다.

[우리 반 애들이랑 잘 놀았당ㅋㅋㅋ

약속대로 카네이션이나 가져와!

귀여운 것들~^0^ㅋ

#스승의날후기 #우주의기운을받은게그거냐 #너희들은나한테안돼 #그래도많이성장했네]

임연화는 어디서 찍은 건지 3학년 0반의 항복 선언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 올렸다.

좀비가 된 저들과 달리 임연화는 매우 멀쩡해 보였다.

3박 4일 동안 야산에서 일대다로 서바이벌 게임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다.

‘그래도 임연화 눈엔 저놈들이 귀여운가 보구나.’

3학년 0반을 혼자서 압도하는 교사의 배포와 또라이 기질은 남달랐다.

그때 또 예상치 못한 사태가 터졌다.

“재밌겠다.”

“그치? 0반 선배님들 정말 재밌게 노신다!”

한이와 이레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어······ 이거 우리 반에서도 할 수 있냐?”

사월세음과 맹효돈이 헛소리를 했다.

그 뒤에서 황지호가 조금씩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부럽다. 우리도 서바이벌 페인트볼 게임…….”

“민그린 왔다.”

행동력이 강한 김유리가 돌이킬 수 없는 발언을 하기 전에 말을 끊었다.

다행히, 진짜로 민그린이 저편에서 사람 눈을 피해 그늘 사이로 뛰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화제가 바뀌었다.

‘그래도 우리 반 애들이 하고 싶다면 해야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NPC가 원한다면 해야지.

일단 말을 돌렸지만, 한 번 더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계획을 짜야겠다.

저번에 2학년 0반 단체복 소풍 건도 그렇고, 우리 반도 0반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어? 아무도 없네.”

“그 난리를 쳤는데. 이상하다.”

1학년 0반 쪽 출입구.

그 주변은 평소대로 한산했다.

미술계 동아리와 민그린의 팬들이 댓글로 그리 난리를 친 게 어제인데.

“왔구나.”

우리 여덟 명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함근형 선생님이 말을 걸어왔다.

게시판 건을 확인한 함근형이 미리 와서 다 처리했나 보다.

함근형은 흉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얼굴을 보면 웬만한 이들은 그냥 알아서 길 거다.

“안녕하세요! 함근형 선생님이 정리해 주셨구나······ 감사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김유리가 밝게 말하고, 아이들 사이에 파묻혀 숨어 있던 민그린이 인사했다.

우리 여덟 명을 바라보던 함근형이 물었다.

“너희 민그린을 마중 간 거니?”

“네! 어제 게시판 일도 있고 해서요.”

“······그래.”

함근형은 민그린 극성팬들을 내모느라 평소보다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함근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드럽게 변했다.

“함근형 선생님, 과자랑 홍차 가져왔어요. 같이 먹어요!”

김유리가 쇼핑백을 들어 보이며 웃자, 함근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일찍 교실에 모인 1학년 0반은 그대로 모닝 티타임을 가졌다.

*    *    *

신문부 활동까지 마친 방과 후.

학교에서 지급한 디바이스는 교실 사물함에 넣어 두고 폐쇄 구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내 제자가 성장해 주겠지.’

염준열은 ‘이능 삼키기’가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어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데다 그동안 열심히 이미지트레이닝을 했으니 저번보다는 나아질 거다.

구교사의 교실 책상 위에 앉아 염준열을 기다렸다.

딩동.

동기화한 디바이스로 메시지가 왔다.

신문부장한테 온 메시지다.

[긴급 소집, 5분 내로 올 수 있는 신문부원 전원 부실로 모일 것.]

신문부에 무슨 일이 있나?

신경 쓰이긴 하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내 제자와 한 약속을 저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부원 중엔 황지호가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잘 처리해 줄 거다.

“스승님! 늦어서 죄송해요!”

홀로그램을 끈 순간, 염준열이 등장했다.

염준열은 변명하지 않았지만, 마진승이 그에게 시비 걸었다는 얘기는 건너 들었다.

“오래 안 기다렸으니까 괜찮아. 학생회 일 바쁘다고 들었는데, 내가 네 시간 뺏는 거 아니야?”

“학생회 일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수업 시간을 줄인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세요.”

염준열이 내 말에 당황하며 말했다.

행여 내 입에서 수업 시간을 줄인다는 소리가 나올까 봐 걱정하는 것 같다.

대화 주제를 바꾸고 싶은 듯, 주머니에서 투명한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조금 늦었지만 카네이션이에요! 제 불꽃으로 만들었어요.”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인 상자 안에 카네이션 모양으로 만든 불꽃이 들어 있었다.

어버이날은 은호의 후예에게, 스승의 날엔 염준열에게 카네이션을 받게 되다니.

뭔가 속이 간지러워지는 느낌이다.

“고마워. 그래도 오늘 수업은 가볍게 하고 끝내자.”

“네······?”

염준열이 기운 없는 목소리를 냈지만, 내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너 이번 주에 체스대회에 나갈 예정이잖아.”

대진 결과에 따라서 염준열과는 라이벌로 만나게 될 거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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