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스테일메이트 (2)
은광고등학교 체스 소모임, ‘스테일메이트(stalemate)’.
스테일메이트의 고문은 용제건이다.
염준열은 용제건의 영향을 받아 체스를 두고 있었다.
“스승님! 제가 스테일메이트에서 주최하는 체스대회에 나가는 걸 알고 계셨군요.”
내 말을 들은 염준열이 활짝 웃었다.
“사실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했는데. 스승님이 지켜봐 주신다면 우승을 목표로 둘게요!”
지켜봐 주는 정도가 아니라 대회 당일 체스보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응원할게.”
“네! 수업 강도가 내려가는 건 아쉽지만요. 그 대신 체스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내면 스승님도 저를 더 인정해 주실 거죠?”
의욕이 넘쳐 보이는 염준열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니 더 밝게 웃었다.
저렇게 웃는 걸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스킬을 다 전수해 주고 싶어졌지만, 그 전에 물어봐야 할 게 있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뭐든지 말씀하세요, 스승님!”
“이번 주말에 주오 그룹과 TC 그룹에서 여는 선상 파티에 너도 갈 거야?”
곧 주오 그룹, TC 그룹 합동 선상 파티가 열린다.
협회를 경유해서 온 초대장에는 어린이날 잠실야구장 사건에 활약한 플레이어들을 초대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염준열도, 붉은 사자도 해당해. 용족도 부를 수 있을 거야.’
선상 파티는 바다나 강 위에서 개최한다.
거기에 돈족의 수장, 저강렵은 천계의 수군을 통솔하던 장군이었다.
염방열, 염준열처럼 화염술이나 불 계열 광림의 힘은 물 위의 저강렵을 상대론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여전히 붉은 사자와 용족은 위협적이야.’
용제건의 공간술처럼 다른 속성 계열의 스킬, 광림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염씨 부자만 있으면 모를까, 그들을 다 부른 상황에서 사건을 일으키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흑막은 이들을 선상 파티에서 떼어 놓기 위해 움직였을 거다.
“처음엔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저희는 금요일 밤에 그쪽 일가와 따로 만찬을 가지는 거로 대체됐어요. 팀원분들 일정 조정도 힘들고, 제가 물 위에 장시간 있는 걸 꺼리는 분도 있어서요.”
선상 파티에는 염준열도, 붉은 사자와 용족도 오지 않는다.
돈족이 일을 결행하기로 마음먹은 건 이들이 선상 파티 대신 금요일 밤 만찬에 참석하겠다고 답변을 준 이후일 거다.
“그걸 제안한 게 누군지 알아?”
붉은 사자와 용족을 선상 파티에서 떼어 놓자고 제안한 자.
그자는 흑막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까진 잘······. 주오 쪽에선 구단 상징이 용인 것도 있고 해서 선상 파티에 꼭 부르고 싶어 했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 제안을 하신 분은 TC 쪽일 거예요.”
TC 그룹인가.
현재 4대그룹 중 가장 의심스러운 곳을 꼽는다면 TC였는데.
‘더 의심스러워졌어.’
게임 속 야구장 사건을 계기로 차기 그룹 총수가 일선에서 물러난 후.
TC 그룹은 주오가 암살, 테러의 주범으로 몰려도 입을 다물었다.
또 4대그룹 암투 시나리오에서 현 TC 그룹 총수의 종손인 도시후가 암살당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저도 선상 파티에 가는 게 좋을까요?”
“아니야. 오지 마.”
“이번 일에 저는 도움이 안 되나 보네요.”
염준열이 의기소침한 얼굴을 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사실이다.
염준열과 저강렵의 상성은 최악이다.
만약 염준열을 따라 붉은 사자와 용족이 선상 파티에 온다면, 돈족은 계획을 취소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적호가 중상을 입어 가며 잡아낸 정보가 무용지물이 될 거야.’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 말을 돌렸다.
“저번에 네가 안 왔으면 다치는 사람이 나왔을 거야. 고마워. 그래도 이번에는 쉬고 있어.”
“······네.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꼭 불러 주세요.”
염준열은 고맙다는 말에 얼굴을 폈지만, 여전히 섭섭해 보였다.
내 제자가 사람을 너무 잘 따르는 것 같아 걱정되기 시작했다.
“금요일 만찬에서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아버지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염준열은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 얼굴도 잠깐, 바로 기뻐했다.
“스승님도 아버지처럼 저를 아껴 주시는 것 같아 기뻐요!”
그 답변을 들으니 더 걱정됐다.
염준열을 과보호하는 염방열과 용족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 * *
염준열과 수련을 마친 후.
‘무색인(無色人) 전무영’의 광림 ‘그림자 없는 시간’을 이용해 폐쇄 구역을 빠져나온 후, 1학년 0반 교실로 향했다.
‘결국 손바닥 크기의 불꽃도 삼키지 못했네.’
오늘도 염준열은 ‘이능 삼키기’에 실패했다.
‘그래도 저번보다는 훨씬 나아졌어. 아주 아깝게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한 때도 있었으니까.’
제자의 성장이 기대된다.
머릿속으로 염준열 전용 이능 삼키기 훈련 커리큘럼을 짜며 1학년 0반 교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이제 왔군, 조의신.”
1학년 0반 교실.
황지호가 있었다.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황지호가 눈을 반짝이며 훌쩍 뛰어내렸다.
“여기서 뭐 해.”
살짝 놀랐지만, 평정을 가장했다.
황지호는 말없이 척척 내 앞으로 걸어왔다.
황지호가 눈을 빛내며 내 얼굴을 지척에서 관찰하기 시작했다.
‘뭘 보는 거지. 귀?’
황지호가 고개를 움직이며 내 양쪽 귀를 확인했다.
왜 귀를 보는 거지?
‘어, 이건 좀 안 좋은 상황인데.’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이어링을 착용 중이군.”
망했다.
“조의신, 최근 네가 내 메시지를 무시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신문부 부장의 메시지까지 무시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지. 그래서 ‘비상시’인가 해서 위치 추적을 해 봤다.”
망할 놈.
역시 위치 추적을 한 거구나.
이사장의 권력이 오늘도 이렇게 남용되고 있었다.
황지호의 표정을 보니 그동안 메시지 읽씹, 안읽씹을 한 걸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5천 살이나 먹은 주제에 마음이 좁다.
“학교에서 지급한 디바이스의 위치는 이 교실 안, 정확하게는 네 사물함 안이더군. 그러니 지금 착용한 이어링 타입의 웨어러블 디바이스는 네가 개인적으로 구매한 것이겠지.”
성가신 놈에게 디바이스를 두 개 쓰고 있다는 게 걸렸다.
“그러면 네 위치와 디바이스의 위치가 항상 일치했던 건 아닌 셈인가. 좋은 단서를 얻었군.”
설마 만우절 말고도 위치 추적한 적이 또 있는 건가.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내 정체를 캐고 있었나 보다.
“용의 기운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어. 조의신, 너 뭐 하다 온 거냐.”
황지호가 용의 기척을 읽어 냈다.
후예인 염준열도 용의 기척을 띠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진족에 비해선 약할 텐데.
‘염준열이 준 불꽃 카네이션을 아이템창에 넣고 오길 잘했네.’
교복 주머니에 넣었더라면 바로 걸렸을지도 모른다.
수련을 마치고 올 때마다 주의해야겠다.
“그냥 좀.”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넌 여기서 뭐 하는데.”
“이사장 쪽으로 흥미로운 얘기가 들어와서. 오늘 신문부에서 있었던 일과 함께 네게 얘기하려 했어. 메시지를 무시하길래 찾고 있었지.”
앞으로 메시지를 무시하면 찾아올 생각인 건가!
미묘한 얼굴을 하는 나를 보며 황지호가 몹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할 얘기는 뭔데.”
“오늘 2학년 0반이 신문부에 쳐들어왔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신문부 부장이 부원을 소집한 이유는 2학년 0반의 습격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신문부가 스승의 날에 ‘제갈재걸 특집 잡지’를 제작한 건 알지? 스승의 날에 전자판은 제갈재걸에게 전했는데, 그 인쇄본은 오늘 완성됐어. 2학년 0반이 그 잡지를 노리고 습격해 왔다.”
2학년 0반이 또.
그냥 달라고 하면 될 걸 왜 습격해 온단 말인가.
“부장 선배한테 말하면 또 찍어 줬을 텐데.”
“그들은 2쇄가 아니라 ‘초판 1쇄’를 원한다더군. 초판 1쇄를 내주는 걸 거절하자 습격해 왔어.”
초판 1쇄 때문에 습격해 온 거구나.
제갈재걸의 열혈팬다운 모습이다.
‘광팬, 덕후라면 초판에 집착하는 건 어쩔 수 없나.’
수요만 있고 공급이 없는 경우가 허다한, 냉혹한 초판의 세계.
오로지 초판이라는 이유로 프리미엄이 붙어 돌아다니는 책도 많다.
하물며, 신문부에서 제갈재걸 선생님께 선물하고 부원들에게 배포할 용도로 만든 초희귀 한정 잡지다.
제갈재걸의 광팬들이 그 희귀본의 초판 1쇄가 욕심나는 건 당연할 거다.
“습격이라기보단 도전해 왔다는 표현이 옳을까. 신문부와 2학년 0반이 대결해서 신문부가 승리하면 에어 호텔 ‘이카로스’의 숙박권을 주고, 패배하면 제갈재걸 특집 잡지 초판본을 가져가겠다고 선언했다.”
안 봐도 뻔하다.
말이 승부지,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방법으로 말썽을 부렸을 게 분명하다.
3학년인 신문부 부장도 그걸 잘 알 테니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승부를 받아들였을 거다.
“대결은 총동아리회관 안의 공용 체육관에서 치렀어. 각자 대표를 세 명씩 뽑아서 이능 태그 매치를 하기로 했다. 우리 쪽에선 신문부 부장, 부부장, 그리고 내가 뽑혔지. 부장은 처음엔 문새론을 추천했지만, 이 현장을 취재하고 싶다며 거절해서 부부장이 대신 나가게 된 거다.”
종군 기자가 되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문새론이다.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서도 문새론의 전투 능력은 나쁘지 않았으니, 1학년이지만 부장의 추천을 받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2학년 0반엔 흥미가 있어서 성의껏 상대해 주기로 했다. 제법 잘 싸웠지만, 나한테는 안 됐어.”
하하하! 하고 처웃으며 2학년 0반 놈들을 성의껏 쓰러뜨릴 황지호가 눈에 선했다.
그 이후로 이어진 황지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황지호는 첫 타자로 나가서 2학년 0반을 압도했다.
황지호가 2학년 0반의 부반장 왕찬솔까지 쓰러뜨려 완승하자, 반장 금찬솔이 제안해 왔다.
‘초판 1쇄를 한 권이라도 주면, 이카로스의 스위트룸을 성수기에 제공하겠다.’
그 말을 들은 황지호가 자기 몫의 초판 1쇄를 내주고, 이카로스 스위트룸 숙박권을 얻어 왔다.
2학년 0반은 황지호 몫이었던 잡지 한 권을 두고 배틀 로열을 치르는 중이라 한다.
“돈이 있어도 사전에 예약을 안 하면, 성수기에 에어 호텔 스위트룸은 잡기 힘들지. 여름방학 때 신문부 합숙은 이카로스의 스위트룸에서 하게 될 거다. 시간 비워 놔.”
“난 못 갈 수도 있는데.”
“왜.”
여름방학에 있을 이벤트들을 처리해야 하니까.
현재 시점에선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으니, 미리 계획을 짜기 어려웠다.
우리 반 아이의 미래와 크게 관련이 된 이벤트라 반드시 참가해야 했다.
“그건 그렇고, 이사장 쪽으로 들어왔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뭐야.”
대놓고 말을 돌리니 황지호가 불만스러워하다 답변했다.
“2학년 0반은 얼마 전 이계 지배에 성공했다.”
이계 지배.
이능파로 이계에 간섭하여 그 이계와 소속 에너미를 복종시키는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
예상조차 하지 못한 단어가 나왔다.
“이계 하나를 ‘가든’으로 만들어 제갈재걸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더군.”
2학년 0반이 준비한 스승의 날 선물은 무려 이계, ‘가든’이었나 보다.
* * *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규정집행부 사무실.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벙커에 가까운 형태의 이곳.
최근 중대한 안건을 다루게 된 홍규빈은 보안 유지를 위해 홍보팀 사무실 대신 이곳을 이용하고 있었다.
“규빈아, 어제 몇 시간 잤니.”
홍규빈의 규정집행부 선배이기도 한, 이계 공략 지원실 위성 관리팀 팀장 임지화가 초췌한 얼굴로 물었다.
완벽한 차림새를 하고 있지만, 핏발 선 눈을 한 홍규빈이 답했다.
“2시간 잤습니다.”
“······부럽네. 부서 이동하고 싶다.”
한숨도 못 잔 임지화는 말버릇처럼 굳어진 ‘부서 이동’을 외쳤다.
“선배님은 ‘그 프로젝트’ 발안자십니다. 부서 이동이 어렵습니다.”
“나도 알아! 안다고······.”
임지화는 수십 개의 홀로그램을 노려보며 비틀거렸다.
“이계 지배에서 파생된, 플레이어SAT-K가 감지할 수 없는 동결화 이계, 말소된 좌표들······ 그것도 머리가 아픈데 은광고······.”
임지화의 홀로그램에는 협회에 등록된 은광고 2학년 0반 소속 플레이어들의 명단이 띄워져 있었다.
“진족도 아닌 인간이, 그것도 열여덟 살 먹은 학생들이 ‘이계 지배’에 성공하다니······. 처음엔 플레이어SAT-K의 공략 기록에 오류가 발생한 줄 알고 놀랐어. 하하하.”
공식적인 기록상 인간이 이계 지배에 성공해서 가든을 만든 건 처음이다.
임지화의 힘없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홍규빈이 덧붙였다.
“그 아이들이 쓴 방법을 진족도 활용할 수 있게 되면 이계 지배가 용이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동결형 이계가 늘지도 모르죠.”
홍규빈의 말을 끝으로 벙커 안이 조용해졌다.
그 중대성을 알기에, 협회는 은광고의 협력을 받아 2학년 0반 학생의 이계 지배 기록을 완전히 지웠다.
‘그 학생들이 찾아낸 이계 지배 이론을 이용할 방법은 없을까.’
홍규빈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딩동.
개인 회선으로 도착한 메시지의 알람음이 들렸다.
확인해 보니, 멋대로 홍규빈에게 가호를 내려 귀찮게 구는 진족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확인한 홍규빈의 얼굴이 굳었다.
‘은광고 1학년 0반 학생들을 조사해 달라는 건가.’
그 진족이 지정한 학생 중 한 명은 홍규빈과 제법 친분이 있었다.
‘······의신이를 조사해 달라고?’
진족이 조사를 요구한 학생 중 한 명은 무명의 초신성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