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스테일메이트 (3)
적벽괴도와 ‘이능 삼키기’ 훈련을 마친 후.
기록 기기에 잡히지 않게 폐쇄 구역을 빠져나온 염준열은 존경하는 스승, 적벽괴도에게 칭찬을 받아 기분이 고양되어 있었다.
‘오늘은 저번보다 나아졌어. 이미지트레이닝이 효과가 있었던 거야.’
아주 잠깐이었지만 적벽괴도의 화염술로 생성된 불꽃이 자신의 이능파에 따라 움직이려 했었다.
그걸 감지한 적벽괴도가 염준열에게 칭찬의 말을 던져 줘 무척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체력과 정신력이 좀 소모되더라도, 조금만 더 하면 성공할 것 같았는데.’
염준열은 조금 더 수업하자고 졸랐지만, 스승인 적벽괴도는 들어주지 않았다.
체스는 수 싸움이었지만, 적벽괴도의 말대로 체력이 떨어지면 집중력이 무너져 악수(惡手)로 이어지기 쉽긴 했다.
‘스승님은 체스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걸까.’
폐쇄 구역이라 해도 은광고등학교의 교내다.
그렇다면 적벽괴도는 은광고의 방어 결계에 등록된 누군가일 가능성이 컸다.
은광고 소속, 체스를 잘 아는 분.
스승님의 정체에 관한 단서가 늘었다.
‘스테일메이트에서 주최하는 체스대회에 출전 가능한 건 은광고의 교직원과 학생들이야. 어쩌면 스승님도 출전하시는 건 아닐까. 설령 기사로서 나오시지 않아도 체스에 관심이 많아 보이셨으니, 관객으로 오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적벽괴도는 체스대회 당일, 대회장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더 열심히 체스를 둬야 할 이유가 늘었어!’
염준열이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준열아, 늦었구나.”
용제건의 목소리로 염준열의 생각이 중단되었다.
“용제건 선생님, 기다려 주신 거예요?”
“오늘 진승이가 시비를 걸었다고 들어서. 이번에도 진승이가 겁도 없이 네 역린을 건드렸던데.”
염준열의 역린, 이명 소홍룡(少紅龍).
신사적인 염준열을 도발하고자 그 이명을 불러 대며 어그로를 끄는 이들이 간혹 있었다.
최근 마진승이 그 어그로꾼의 대표 주자였다.
“진승이도 귀여운 제자지만, 밉살스러운 구석이 있어. 학교 친구가 싫어하는 말을 쓰면 안 되지. 대련을 걸어오면 봐주지 마.”
“하하하, 봐준 적 없어요. 오늘은 자꾸 쫓아오려 하길래 화염술로 감옥을 만들어서 가두고 왔어요.”
“우리 준열이는 다정하구나. 그러니까 청룡도, 염방열도 널 걱정하는 거야. 앞으로는 대련할 때는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된다는 뜻에서 구륜근을 찢어 놓으렴. 쫓아오면 전후방십자인대를 파열시키고.”
“진승이가 또 제 역린을 건드리면 생각해 볼게요!”
회복 아이템 카드를 쓰면 쉽게 낫는 부상 수준이라 하나, 용족과 그 후예는 살벌한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둘이 은광고 교문 밖으로 나갔다.
은광고 부지 밖으로 나가자 용제건이 아주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진승이와 헤어진 후 누구와 만나고 왔니. 준열아, 네 기척만 느껴지고 있지만 어쩐지 누가 있었을 것 같아.”
용제건은 기척 감지 스킬 레벨도 높지만, 감도 뛰어났다.
용제건이 그 좋은 감으로 뭔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염준열이었지만,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그냥 훈련하다 왔어요.”
“누구와?”
사실을 다 말하지 않더라도 염준열은 늘 자신을 아껴 주는 용제건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하는 염준열을 보던 용제건이 작게 웃었다.
“이름을 대기 어려운 자와 함께 훈련한 거니?”
용제건은 같은 용족도 보면 정색한다는, 특유의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돌아가서 체스나 둘까. 가자, 준열아.”
* * *
‘2학년 0반을 취재한 문새론도, 신문부의 고문이자 2학년 0반의 담임인 제갈재걸이 협회에 불려 갈 만한 일이네.’
문새론은 2학년 0반의 방해 때문에 계속 취재에 실패했던 것 같지만, 협회에 불려 간 걸 보니 중요한 광경을 목격한 것 같았다.
황지호는 눈을 반짝거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지배에 성공한 이계의 공략 난이도는 N-. 그 난이도의 이계 지배나 클리어는 큰 의미가 없긴 하지만, 인간이 이계 지배라니. 놀라운 일이지.”
공략 난이도가 낮은 이계라 하지만 여전히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없던 전개, 설정이다.
제갈재걸이 학교에 남으면서 그 천재 악동들이 이 세계의 고정관념을 하나 깨 버렸다.
“2학년 0반 중 누가 성공한 거야?”
“그건 답변하기 미묘해.”
미묘해?
황지호의 설명이 이어졌다.
“2학년 0반이 전원 성공한 거다. 반장 금찬솔을 주체로 하여 이능파를 링크시켜서 이계를 제어했다더군.”
이능파를 링크시킨다니.
상상하기 어려웠다.
황지호가 권제인이나 적호를 제압할 때 이능파를 억누르던 순간을 떠올렸다.
황지호는 손가락 끝에 그 둘의 이능파를 억눌렀다 나중에는 방출시켰었다.
즉, 이능파는 섞이지 않고 뭉쳐 있었던 셈이다.
그런 이능파가 엮이고, 섞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데.
“플레이어SAT-K는 서너 번의 재연산, 토벌 과정의 전후 관계 분석 끝에 금찬솔이 이계를 지배했다고 판단했지만, 다소 혼선이 있었지. 위성의 연산 오류를 의심한 협회가 조사를 시작해 개입하고, 은광고에 협력을 요청해서 알게 된 거다.”
주말 동안 그런 일이 있었구나.
홍규빈과 임지화가 야근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지문과 다름없는 각양각색의 이능파를 하나로 링크시켰다는 게 흥미로워. 2학년 0반이 이능파 링크, 이계 지배 연구를 하겠다면 아낌없이 지원할 생각이야.”
황지호는 몹시 즐거워 보였다.
‘이능파 링크, 인간에 의한 이계 지배라······.’
조사해야 할 게 하나 더 늘었다.
* * *
저녁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내 기숙사 방.
소파에 앉아 황지호에게 받은 내 몫의 제갈재걸 특집 잡지 초판 1쇄를 들여다봤다.
‘그냥 파는 잡지 같다.’
잡지의 표지는 은광고 진학 홍보 자료를 만들며 찍었다는 제갈재걸의 화보 사진이었다.
제갈재걸 사진 위를 타이포그래피가 멋들어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제갈재걸이 가진 스킬, ‘언령’을 염두에 둬서 배열한 활자의 나열과 디자인이 돋보였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비닐 래핑된 잡지 안에 든 부록들이었다.
‘이걸 제갈재걸을 위해 만든 건지, 팬들을 위해 만든 건지 구별이 안 되는데.’
제갈재걸의 데뷔 이후의 연도별 베스트 컷이 정리된 포토북.
주요 인터뷰가 수록된 홀로그램 칩.
포토 스티커 세트에 포스터, 하드커버 잡지 보관함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웬만한 유명 아이돌, 스타 플레이어들의 시즌 그리팅급의 훌륭한 구성이다.
‘신문부도 2학년 0반 못지않은 제갈재걸 처돌이구나!’
그 처돌이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스승의 날 한정 제갈재걸 특집 잡지와 부록이다.
2학년 0반이 성수기에 에어 호텔의 스위트룸을 내주면서까지 하나라도 달라고 애걸복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딩동.
아직 래핑되어 있는 잡지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메시지가 도착했다.
주수혁과 맹효돈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이었다.
[주수혁] 의신아, 효돈아! 내일 방과 후에 시간 돼?
[맹효돈] 왜
[주수혁] 저번 주에 같이 턱시도 보러 가기로 했잖아ㅎㅎ 내일 가자!
[맹효돈] 아 난 됨
스승의 날 탄래중을 다녀오던 길에 선상 파티에서 입을 복장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 같이 보러 가기로 했었다.
모레부터 체스대회니, 앞으로의 일정을 고려하면 거절해야 했다.
하지만.
[나] 나도 갈게.
아직 한 번도 펴지 않은 체스보드, 쥐어 보지도 않은 체스 피스가 떠오르는 걸 모르는 척했다.
[주수혁] 그러면 내일 부 활동 끝나고 정문에서 봐! 저녁 맛난 거 먹자ㅎㅎㅎ
[맹효돈] 어
메시지창을 연 김에, 밀린 메시지를 확인해 갔다.
처음은 장남욱과 유상훈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
‘이제 장남욱은 정신을 차렸네.’
장남욱은 계급장 위를 수놓은 별들을 보고 주말 내내 넋을 놓았다가 겨우 제 페이스를 찾았다.
유상훈은 장남욱이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맞물리지 않는 대화를 보다 창을 닫았다.
다음 메시지는 간결한 안부 인사를 남긴 박승현이 보낸 것이었다.
그다음은 AR글래스 전용 마커에 설정했던 가상 시각 정보를 아이들 초상화로 바꿨다는 민그린의 메시지였다.
우리 반 아이들의 초상화들을 사진으로 찍어 내게 보내 줬다.
[민그린] 네가 준 아이템, 처음으로 써 봤어.
[민그린] (사진)
‘인어의 숨결이 담긴 물방울’을 도료로 쓰면 색이 바래지 않는다.
색이 바래지 않을 우리 반 아이들의 초상화들을 감상하고, 디바이스에 사진으로 찍은 그림들을 저장했다.
다음 메시지는 식사 약속을 잡자는 성시완과 성국언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또 보자고?’
성국언이 1학년 학생을 상대할 이유가 있나.
일단 알았다고 하고는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은재호] (사진)
[은이호] 이번에도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죠? ㅠㅠ
[은서호] 열심히 했는데, 잘 안 되네요······.
사진에는 은호의 후예 삼 남매가 만든 요리가 찍혀 있었다.
요리라고 추측한 건 일단 정체불명의 물체가 그릇에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이걸 황지호와 백호군이 먹게 되는 건가!’
진족의 위는 인간보다 튼튼하니 괜찮을 거다, 아마도.
[은재호] 신수는 숨었어요, 먹기 싫은가 봐요.
막내 은재호가 사진 한 장을 더 보내 줬다.
사진에는 하얀 꼬리만 보였다.
올무의 몸체는 무언가에 덮여 있었다.
‘저건 내가 사 준 매트잖아!’
올무는 바닥에 까는 매트 밑으로 기어 들어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왜 나는 올무가 숨고 싶을 때를 대비해서 은신처나 덮는 이불, 담요를 사지 않은 걸까!’
똑똑한 우리 올무와 비교하면 내가 얼마나 멍청한지 다시금 느꼈다.
다음에 똑똑한 우리 올무를 만났을 때 줘야 할 선물을 공들여 정했다.
그렇게 밀린 메시지를 모두 확인했다.
‘이젠 그 녀석들에게 메시지를 보낼 차례다.’
몇 주간 갱신 없이 방치되어 있던 메시지방에 들어갔다.
[나] 안녕하세요, 선배님. 지금 바쁘세요?
답 메시지는 생각보다 빨리 날아왔다.
[금찬솔] 신문부 꺼져
[왕찬솔] 바쁨 껒여
황지호한테 털린 걸 왜 나한테 푸는 것인가.
대화명과 둘이 설정한 대표 사진을 보니, 황지호가 하나 넘긴 초판 1쇄는 둘이 공동 소유하기로 한 것 같다.
2학년 0반 내에서 치른 배틀 로열에서 두 사람이 연합해 우승까지 간 모양이다.
[나] 잠깐 뵙고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왕찬솔] 우린 비싸
[금찬솔] 우린 비싸2
금찬왕찬 콤비가 아무리 비싸게 굴어도, 단숨에 저렴하게 만들 아이템이 있었다.
[나] (사진)
[나] 안 필요하세요?
나는 메시지방에 아직 래핑된 상태인 내 몫의 제갈재걸 특집 잡지 초판 1쇄를 찍은 사진을 올렸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희귀 아이템을 내주는 건 속이 쓰리지만, 이 세계의 미래를 위해서 감수하기로 했다.
내가 보낸 메시지가 기독 처리가 되기 무섭게 초 단위로 다음 메시지가 날아왔다.
[왕찬솔]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배님!
[금찬솔] 사랑합니다, 후배님!
[왕찬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후배님!
[금찬솔] 우리는 하나도 안 바쁩니다. 빨리 만나요, 후배님!
[왕찬솔] 지금 뵙고 싶습니다, 당장 뵙고 싶다, 보고 싶다, 후배님!
어마어마한 태세 전환을 보았다.
* * *
심야, 은광구에 있는 황명호의 대저택.
황호가 손수 한 올, 한 올 실을 자아내듯 엮어 내듯 짜낸 마력으로 구성한 황금 담장.
허락 없이 발을 들인 자를 미혹하여 아공간의 미아로 만드는 미로 정원.
지금 누군가 호족의 수장이 친 결계를 하나하나 파훼하여 황금 담장과 미로 정원을 통과해 오고 있었다.
스으으―!
침입자는 낮게 울리는 바람 소리에 섞여 모든 장애물을 통과했다.
그는 마침내 대저택 앞에 도착했다.
침입자가 대저택의 창문을 하나 택해 결계를 해제하려 할 때.
“너와 숨바꼭질을 하는 건 오랜만이군.”
10대 청소년의 모습을 한 호족의 수장이 침입자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침입자가 몸을 날려 자리를 뜨려 했으나, 이미 발목에는 황호가 채운 마력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당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침입자를 보고 황호가 눈을 빛내며 웃었다.
“네가 이런 장난을 치는 건 오랜만에 보는구나, 김신록.”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