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97화 (97/925)

26. 체스 플레이어 (3)

체스대회 하루 전.

1학년 0반 교실.

반장 김유리의 제안으로 1학년 0반 학생들은 평소보다 1시간 일찍 등교했다.

부반장 조의신을 제외하고.

“그러면 내일 의신이가 나가는 스테일메이트 배 체스대회 응원 준비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전자칠판 앞에 선 김유리가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회의 제목을 썼다.

“부반장이 체스대회 나가냐.”

“말해 주지 않아서 전혀 몰랐어요!”

기숙사에서 같은 층에 있는 맹효돈, 사월세음도 조의신의 출전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호야, 넌 들은 거 없어?”

“없는데.”

이레나의 물음에 황지호가 눈을 반짝거리며 답했다.

그 얼굴을 본 이레나는 ‘어쩐지 지호는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지만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넌 직접 들은 거야?”

한이가 묻자 김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개인적으로 알았어. 의신이랑 1/4분기 학생 대표 회의에 참가했을 때, 음······ 어쩌다가 체스대회 일정을 스크랩하는 걸 봤어. 혹시나 해서 스테일메이트 웹 페이지에 뜬 대진표를 보니까 의신이 이름이 있더라!”

“그러고 보니 걔가 초기에 자기 몫으로 설정한 필터도 체스 피스였어.”

민그린이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걔 유명한 체스 플레이어였던 거 같은데.”

“응? 와, 이거 진짜야!”

민그린이 띄운 홀로그램을 확인한 김유리가 전자칠판 위로 화면을 투사했다.

홀로그램에는 조의신의 국내외 체스대회 수상 이력이 가득 나와 있었다.

“와······ 이게 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 탄 상이군요.”

“쩐다. 왜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대회에 안 나가지?”

“정식 플레이어가 돼서 그런 걸 거예요. 정식 플레이어는 스포츠 대회 참가가 제한되니까요.”

“체스도 스포츠야?”

“체스하고 브리지는 IOC에서 스포츠로 인정했다고 들었어요. 체스, 바둑, 장기는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이기도 하고요.”

“별게 다 스포츠네. 그럼 대회 영상도 있냐?”

“네! 의신이 영상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사월세음이 홀로그램을 전개해 맹효돈에게 보여 주면서 국제마인드스포츠협회(IMSA)와 체커 얘기도 꺼내며 재잘거렸다.

두 사람이 갑자기 스포츠 얘기로 열을 올리자 화제를 바꾸기 위해 이레나가 말을 꺼냈다.

“응원 구호라도 정할까?”

“스테일메이트의 고문이 공간술로 관객석과 시합장을 격리할 거다. 소리는 차단될 거야.”

“공간술? 아, 용제건 선생님이 체스 소모임 고문이셨구나. 생각해 보니 큰 소리를 내는 건 체스 두는 데 방해가 되겠지.”

황지호의 답변에 이레나가 아쉬워하는 얼굴을 했다.

응원에 관해선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최종적으로는 ‘몰래 가서 조용히 응원하다가 조의신을 놀라게 해 주자’로 의견이 모였다.

“그럼 모이는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홀로그램으로 띄울 응원 문구를 정할까.”

“난 사람 많은 데는 안 돼······. 오후에는 약속도 있고. 미안. 대신 그림이라도 그릴게.”

“그러면 응원 문구용 홀로그램에 그린이 그림을 넣을까? 뭐 그릴 거야?”

“체스 피스랑 걔 초상화 그릴 생각이야.”

“그럼 현수막 크기로 홀로그램을 전개하고, 오른쪽 여백에는 그린이 그림을 넣을게.”

김유리가 전자칠판에 초안을 띄웠다.

곧 1학년 0반 소속 학생들이 각자 응원 문구 후보를 제시하고, 투표를 거쳐 문구 내용과 글씨체, 크기, 색 까지 전부 정했다.

회의가 끝날 때쯤엔 조의신이 평소에 등교할 시각에 가까워져 있었다.

“맞다, 가장 중요한 거를 잊었어! 지호야!”

“의신이한테 말하면 안 돼!”

“하하하하, 그래.”

김유리와 이레나가 이번 기획의 가장 불안한 요소, 현재 1학년 0반에서 최고의 돌아이로 꼽히는 황지호에게 주의를 줬다.

하지만 점심시간 복도에서 황지호가 조의신을 따라다니며 ‘내가 말 안 하는 게 있는데, 안 궁금해?’라고 들이대는 상황을 한이가 목격했다.

“황지호.”

조의신이 먼저 교실에 들어가자 한이가 질색한 얼굴로 황지호를 노려봤다.

“말 안 했어. 궁금해서 안달 나게 만들고 입 다물려 했는데······ 저놈은 아예 궁금해하지를 않네.”

“그런 기분 나쁜 생각을 했어?”

“신랄하네, 하하하!”

뭐가 좋은지 또 처웃는 황지호를 보며 한이는 더욱 질색한 얼굴을 했다.

*    *    *

그리고 체스대회 당일.

부 활동을 마친 시각.

1학년 0반 아이들 앞에 나타난 황지호는 아주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끝까지 안 궁금해하더군.”

“저 새끼 끝까지 입방정 떨려고 했나 보네.”

“의신이가 철벽을 쳐서 다행이네요.”

맹효돈과 사월세음이 질색한 얼굴로 핀잔을 줬다.

김유리는 안심한 얼굴로 앞장섰다.

“그럼 이동하자!”

총동아리회관, 제3체육관.

용제건의 오프닝 쇼가 끝난 후, 시작된 체스대회 첫 번째 라운드.

1학년 0반 아이들은 박스석을 하나를 차지하고 다 같이 앉아 홀로그램을 띄웠다.

“다른 테이블 쪽은 다 시작했는데 의신이는 왜 안 두지?”

“마진승 선배가 체스 클락의 버튼을 안 누르셔서 조금 늦게 시작하긴 했는데······ 왜 안 두는 걸까요.”

한참 뜸을 들이던 조의신이 폰을 전진시켰다.

“오, 둔다.”

몇 수 두던 조의신이 처음으로 웃었다.

그가 웃는 걸 본 1학년 0반 아이들이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웃는 게 별로 안 수상한데.”

“어디 안 좋은가 봐.”

“그렇네. 컨디션이 별로인가.”

“하하하, 하하하하!”

황지호 혼자 빵 터져서 처웃기 시작한 가운데, 조의신과 마진승 두 사람이 일어나 악수를 하기 시작했다.

“응, 끝났어? 악수하는데?”

“의신이가 이겼어! 겨우 4수밖에 안 뒀는데. 저거 어떻게 한 거야?”

“아, 스테일메이트 측에서 해설을 붙여 줬어요! 스콜라 메이트라고 하네요.”

스테일메이트 웹 페이지에서는 실시간으로 대전 결과가 올라와 있었다.

조의신은 첫수를 두는 데 시간을 꽤 소모했는데도, 4수 만에 체크메이트를 해 참가자 중 가장 먼저 승리한 선수가 되었다.

다들 감탄하던 중, 이레나가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아, 이러다가 의신이가 우리 못 보고 끝나는 거 아닐까?”

“그러고 보니 그렇네.”

“의신이가 놀라는 얼굴 보고 싶었는데!”

1학년 0반 아이들은 응원 문구를 더 눈에 띄게 만들자며, 홀로그램의 크기를 키우고, 좀 더 밝게 보이도록 출력을 올렸다.

그리고 시작된 두 번째 라운드.

조의신 대 연가람.

조의신은 첫 시합보다는 빠르게 뒀다.

하지만 수를 둘수록 체스 피스를 움직이는 손이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왜 안 두는 거냐.”

“다음 수를 생각하는 중인가 봐.”

“너무 오래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관객석용 홀로그램 위.

조의신의 이름 옆에 뜬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숫자가 0이 되면 시간패 처리될 거야.”

한이의 말에 몇몇 아이들이 일어나서 응원하기 시작했다.

“힘내요, 의신아!”

“의신이 파이팅!”

“부반장 뭐해! 빨리 둬라!”

하지만 용제건의 공간술로 차단된 관객석의 소리는 조의신에게 닿지 않았다.

그때.

“······!”

황지호가 벌떡 일어나 전방을 주시했다.

“황지호······?”

황지호의 옆에 앉아 있던 한이가 불러 봤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김유리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의신이가 여기 봤다!”

“와와! 놀란 것 같네요!”

“의신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빨리 둬!”

“목소리는 안 들릴 거니까, 손 흔들자!”

“부반장, 빨리 안 두고 뭐 해!”

*    *    *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드는 김유리.

뭔가 열심히 외치고 있는 이레나와 맹효돈.

비행 스킬이 발동한 건지 반쯤 떠 있는 상태로 손짓을 하는 사월세음.

작게 손을 들어 보이는 한이.

서서 이쪽을 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의미심장하게 웃는 황지호.

그리고 1학년 0반 아이들이 있는 박스석을 가득 메운 번쩍거리는 홀로그램과 문구들이 보였다.

[수상해도 괜찮아!]

[1학년 0반의 수상한 부반장 조의신을 응원합니다^▽^♡]

홀로그램 한편엔 민그린의 그림을 투사한 체스 피스와 내 초상화도 있었다.

‘황지호가 말한 게 이거였나.’

그러고 보니 어제와 오늘, 우리 반 아이들이 다 나보다 일찍 등교했었다.

나 몰래 내 응원을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수상해도 괜찮다니, 정말 수상해 보이나 보네.’

그렇게 생각했을 때.

흑백으로 변했던 세상에 다시 색이 돌아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홀로그램 위의 응원 문구가 초마다 색을 바꾸며 번쩍거렸다.

다시 시선을 돌려 체스보드를 내려다보니, 64칸의 정사각형과 체스 피스들이 똑똑히 보였다.

드디어 다음 수가 떠올랐다.

삣.

턴을 넘기고, 체스 클락 버튼을 눌렀다.

남은 시간은 1분 남짓.

곧 체스 버전의 초읽기, 피셔 룰이 적용될 거다.

여전히 두통은 심했지만,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체크.”

내가 체크메이트를 선언한 건 운명력이 발동되고 8수 뒤.

연가람은 처음으로 조금 표정을 무너뜨리고 흑의 킹을 직접 쓰러뜨린 후, 악수를 청해 왔다.

두 번째 라운드도 내 승리로 끝났다.

*    *    *

“정말 조마조마했어!”

“맞아!”

“일부러 그런 거냐? 첫 시합은 일찍 끝냈으니 두 번째 시합은 천천히 끝내려고?”

“수상하게 웃지 않아서 걱정했어요!”

“수고했어, 의신아!”

“응! 정말 고생 많았어, 의신아!”

시합이 끝나고 우리 반 애들을 찾아갔다.

말하는 내용은 걱정했다는 투정 반, 고생했다, 잘했다는 칭찬이 반이었다.

아이들이 말하는 걸 듣고 있으니 점점 두통도 사라지고, 차게 식어 있던 손에 다시 온기가 돌아왔다.

“고마워.”

아이들은 꽤 늦은 시간까지 응원하기 위해 남아 줬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저녁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사양했지만, 내가 끝까지 고집을 부려 학교 앞에서 다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고깃집에 가고 싶었는데, 이건 김유리가 반대했다.

“고깃집은 의신이가 우승하면 가는 거로 하자!”

“그래. 우승하면 상금으로 고깃집에서 밥 사.”

“맞아요, 오늘은 다른 거 먹어요!”

다수결로 정해진 곳은 은광구 내의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시즌 한정 세트 메뉴를 먹고 싶다는 의견이 많았다.

각자의 세트 메뉴에 들어가 있던 오지치즈 프렌치 포테이토를 테이블 한가운데에 합쳐서 쌓아 놓고 나눠 먹으며 아이들이 웃고 떠들었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소고기를 먹이기 위해서라도 꼭 우승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    *

우리는 패스트 푸드점이 문을 닫기 직전까지 얘기를 나누다 해산했다.

기숙사 멤버들끼리 학교로 향하기 전.

황지호가 나를 잡고 물었다.

“조의신, 너 시합 중에 관객석 쪽을 봤을 때, 뭔가 못 느꼈어?”

1학년 0반 아이들 쪽을 봤을 때라면······.

운명력이 발동했을 때였다.

‘설마 황지호가 뭔가 느꼈나.’

황지호의 눈앞에서 운명력이 발동한 건 세 번.

첫 번째는 중앙도서관 지하서고에서 발견한, 상위 존재의 기척이 남은 고서의 해석을 접했을 때.

두 번째는 유상희의 광림으로 아케아의 권능을 빌려 적호를 치유했을 때.

그리고 오늘.

앞선 두 번의 경우, 강력한 힘이 동시에 작용했었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모르겠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운명력에 대해선 아직도 잘 모르겠으니까.

황지호는 미심쩍어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더 캐묻지 않았다.

“그래. 오늘 고생 많았다. 쉬어.”

이 세계에서 조의신의 이력은 초상 우주에 의한 정보 조작 덕인지, 내 실제 이력과 비슷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나를 조사했던 황지호라면 체스에 대한 내 트라우마를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응원 와 줘서 고맙다. 황지호.”

이 말에 황지호가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몸을 홱 돌려 가 버렸다.

이번에는 엉뚱한 방향이 아니라 황명호 대저택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총동아리회관 부지 내 제3체육관.

체스 피스 모양의 공간 블록들의 사이.

용제건은 홀로 1층에 서 있었다.

‘이쯤이었지.’

용제건은 1학년 0반 학생들이 있던 박스석을 올려다봤다.

‘그 기척은 뭐였을까.’

용제건의 힘이 가득한 이 공간 속에 섞여 든 이질적인 기척이 있었다.

아주 희미했지만, 용제건의 눈에 섬광이 보였다.

‘황호 이사장씨의 어린 분신도 느낀 것 같았어.’

용제건은 비어 있는 체스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리고 무명의 초신성도.’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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