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체스 플레이어 (4)
기숙사 아이들과 잡담하느라 천천히 걸어온 탓일까.
내 기숙사 방에 도착하니 조금 늦은 시각이었다.
‘민그린이 없는 게 아쉽네.’
응원을 위해 민그린은 내 초상화를 그려 줬다.
민그린에게도 저녁을 사 주고 싶었다.
기왕이면 아직 등교하지 않은 여덟 명한테도.
‘아직은 어렵겠지.’
디바이스를 가동해 보니 미독 메시지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우선 민그린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나] 초상화 잘 봤어, 고마워.
[나] 먹고 싶은 거 있어? 내일 사 갈게.
기독 처리가 되지 않는 걸 보니, 아주 일찍 잠들었거나, 지금 메시지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인가 보다.
답변이 없으면 그냥 서문 수제 빵집, ‘MITRON’에서 케이크나 쿠키를 사야겠다.
민그린의 메시지방을 빠져나와 미독 메시지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장남욱과 유상훈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이었다.
[유상훈] (링크)
[유상훈] ㅊㅋ
[장남욱] 무슨 링크야? 체스대회 대진 결과표네.
[장남욱] 아, 의신이가 출전 중이구나! 오늘 이긴 거 축하해!
유상훈이 올린 링크는 스테일메이트에서 올린 오늘 대진 결과표였다.
1, 2차전 승리를 축하하는 모양인데, 유상훈이 알고 있다는 게 의외였다.
[나] ㄱㅅ 어떻게 알았어?
유상훈이 조금 뜸을 들이다 답변했다.
[유상훈] 유상희 씨
유상훈은 유상희를 그렇게 부르는구나.
‘상희 누나’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보인 반응을 생각하면 이상하지는 않았다.
[장남욱] 상희 누나한테 들은 거야? 상희 누나도 체스에 관심 있었어?
[유상훈] ㄴ 학생회 후배 응원
[장남욱] 응?
[장남욱] 아, 상희 누나는 체스에 별 관심은 없지만, 학생회 후배를 응원하러 체스대회에 갔다가 의신이가 나간 걸 알게 됐다는 뜻이구나.
[유상훈] ㅇ
[장남욱] ······상훈아, 귀찮더라도 좀 알기 쉽게 풀어 써 주라. 무슨 말인지 계속 생각했어.
[유상훈] ㅇ
[장남욱] ······됐다.
장남욱은 유상훈의 짧은 메시지를 알아먹는 능력이 향상된 것 같다.
그렇게 꼬박꼬박 다 알아들으니까 유상훈도 더 메시지를 짧게 치는 것 같은데.
내가 이 점을 지적해도 장남욱은 성실하게 유상훈의 메시지를 번역하려 들 테니, 가만히 있기로 했다.
‘유상희도 체스대회장에 왔었구나.’
유상희가 응원하러 왔다는 학생회 후배는 아마 염준열일 거다.
내 제자 염준열은 1, 2차전을 여유 있게 통과했다.
유상희는 염준열을 응원하러 왔다가 나를 봤나 보다.
메시지 이력을 확인해 보니, 유상희에게서 온 응원과 축하의 메시지도 있었다.
‘적호 일로 도움을 받은 것도 그렇고······ 유상희한테는 뭔가 선물하고 싶은데.’
거창한 선물은 유상희가 사양할 것 같으니, 부담이 가지 않을 만한 선물을 생각해 봐야겠다.
다음은 금찬솔과 왕찬솔이 보낸 메시지였다.
[금찬솔] 수상한 후배님이 이기셨네! 추카염.
[왕찬솔] 축.
수상한 후배라니, 설마 우리 반 아이들이 띄운 응원 문구를 본 건가.
금찬왕찬 콤비는 연가람을 응원하러 왔었나 보다.
[왕찬솔] 올해는 천동하 그 괴물이 안 나와서 가람 갑이 우승할 줄 알았는데.
[금찬솔] 우리 가람 갑 이기고 올라간 거니까 이기셔야 함!
[왕찬솔] 그래! 후배님이 지면 가람 갑이 약한 것처럼 보이잖아. 우승해라!
[금찬솔] 1등 수상해라! 수상한 후배님아!
작년 우승자는 천동하였나.
천동하는 현재 2학년 선도부인 플레이어블 캐릭터다.
게임 속에서 묘사된 것처럼 전설을 쓰고 있나 보다.
체스대회 작년 챔피언인 줄은 몰랐지만.
[나] 응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왕찬솔] ? 응원한 적 없는데?
[금찬솔] ? 뭔소리임, 응원 아닌데??
[왕찬솔] 이게 어딜 봐서 응원임? 하여튼 지면 혼난다, 후배님아!
메시지를 다시 읽어 봐도 응원으로 보이는데.
버럭거리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다음 메시지를 읽었다.
박승현이 보낸 메시지였다.
[박승현] 나도 살아남았어.
[박승현] 대진표를 보니, 우리는 결승 아니면 못 만나네······
[박승현] 결승에서 보자.
박승현도 2차전을 무사히 돌파한 모양이다.
나도 결승에서 만나자며, 건투를 비는 말을 남겼다.
다음은 은호의 후예 삼 남매가 있는 단체 메시지방에서 올라온 메시지였다.
[은이호] 의신이 오빠! 체스대회 2차전 통과 축하드려요!
[은서호] 황호 님께 들었어요, 축하합니다!
[은재호] 축하해요, 형.
황지호가 집에 가서 내 출전 사실을 전했나 보다.
그런데 단순한 축하 인사치고는 메시지가 많이 쌓여 있는 것 같은데.
최신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스크롤을 움직였다.
[은서호] 저희도 체스 배우기로 했어요.
[은이호] 오늘은 디바이스로 홀로그램 체스를 뒀어요!
[은서호] 황호 님이 실물로 된 체스 세트를 사 주시기로 했어요. 나무랑 이계 금속으로 된 체스 세트 중에 고민하니까, 둘 다 사 주신다고 하셨어요!
[은재호] (사진)
은호의 후예 삼 남매가 체스를 배울 예정인가 보다.
막내 은재호가 보낸 사진들에는 무언가를 설명하는 황지호, 디바이스를 조작해 홀로그램 체스를 두는 은서호와 은이호가 찍혀 있었다.
‘내 동생들도 내가 체스 두는 걸 보면서 옆에서 저렇게 둘이서 대전했는데.’
사진을 저장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게 뭐야!’
아주 많이 의외인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에는 체스 대전을 하는 황지호와 백호군이 찍혀 있었다.
사진에 찍힌 대국 상황을 보니 백중지세였다.
프로 체스 기사끼리의 싸움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전개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은이호] 백호 님이 체스를 엄청나게 잘 두세요!
[은서호] 황호 님도 깜짝 놀라셨어요. 백호 님이 체스 둘 줄 아는 걸 모르셨대요.
[은재호] (사진)
황지호는 그렇다 쳐도 백호군이 체스를 두는 건 의외였다.
백호군은 과묵한 무인의 이미지다.
예부터 무인이 정신을 단련하기 위해 마인드 스포츠를 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백호군이 바둑이나 장기가 아닌 체스를 두다니.
[은서호] 아슬아슬하게 백호 님이 이기셨어요.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못하는 게 없었다.
예전에 추가해 둔 백호군의 디바이스 코드로 축하 인사를 보낼까 말까 고민하던 중.
메시지 방에 올라온 동영상 파일을 발견했다.
‘동영상?’
동영상을 재생하니, 황지호가 떨떠름하면서도 눈을 반짝거리는 기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킹을 쓰러뜨리는 게 보였다.
백호군이 체크메이트를 하고, 황지호가 패배를 시인하는 순간인가 보다.
[왕왕!]
킹을 쓰러뜨리자 화면 저편에서 올무가 나타났다.
똑똑한 우리 올무가 경기가 언제 끝나는지 알고 있나 보다.
올무는 승자인 백호군에게 달려가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백호군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작은 몸을 이리저리 굴리는 게 보이다 영상이 끝났다.
‘우리 올무는 누가 이겼는지도 아는 건가!’
올무의 영특함에 다시금 감탄했다.
[은이호] 이 영상이 끝난 다음에도 신수가 백호 님의 승리 기념으로 계속 재롱을 부렸어요!
우리 올무의 승리 기념 재롱!
그런 것도 있다니!
나도 이기면 올무의 재롱을 볼 수 있을까.
이번 체스대회에서 우승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꼭 이겨야겠다.
[은서호] 신수가 체스보드 근처를 계속 맴돌던데, 혹시 체스를 두고 싶은 걸까요?
[은재호] 두고 싶었나 봐요.
[은재호] (사진)
막내 은재호가 보낸 사진엔 체스보드 홀로그램을 뚫어져라 보는 올무가 찍혀 있었다.
그래, 우리 올무가 두고 싶다면 당연히 둬야지.
나는 잠들기 직전까지 올무용 체스를 사기 위해 온갖 쇼핑몰을 다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 대신 유아용 체스 세트를 사면서, 내 무능함에 탄식하다 잠에 빠졌다.
* * *
다음 날.
아침에 디바이스를 확인해 보니 민그린이 ‘아무거나’라고 답변을 보내 줬다.
‘아무거나가 제일 고르기 까다로운데.’
아침 훈련을 일찍 마치고, MITRON에 들렀다.
고심 끝에 고른 메뉴는 보스턴 스타일로 구워 낸 크림치즈 케이크와 골드 키위와 청매실 타르트였다.
청매실 타르트는 신맛이 강해 단맛 애호가 한이는 한 입도 먹지 않았지만, 다른 메뉴는 전부 호평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파티시에가 직접 계산을 했네.’
요즘 그 파티시에 플레이어가 한가한가 보다.
* * *
방과 후.
신문부실.
오늘도 체스 시합이 두 번 예정되어 있었지만, 평소대로 부 활동을 했다.
“여유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군.”
문새론이 넘겨준 권제인의 자료를 읽고 있는 나를 보고 황지호가 그렇게 평가했다.
‘여유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권제인과의 인터뷰도 중요하니까 그런 건데.’
문새론이 넘겨준 권제인의 자료는 약 천 페이지 이상이었다.
50페이지 정도 되는 요약본도 있었지만, 천 페이지를 전부 읽기로 했다.
‘이능 바이올린에 대한 설명도 있네.’
이능 바이올린의 설명은 운명력으로 건네받은 아이템, ‘무명의 운명’과 매우 흡사했다.
문새론은 어떻게 캐낸 건지 권제인이 가진 이능 바이올린에 대한 자료도 가져왔다.
‘권제인이 소유하고 있는 이능 바이올린은 수십 개. 무대용 이능 바이올린은 열 개.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바이올린을 켜는 거구나.’
이능 바이올린은 카드화가 가능하니까, 백 개도 거뜬히 들고 다닐 수 있으니 별문제는 없을 거다.
추가 자료로 푸른 바이올린이 가득한 방을 배경으로 권제인을 찍은 자료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명인 ‘푸른 바이올리니스트’답게, 무대 위에서는 UR급의 푸른 이능 바이올린만을 켠다, 라.’
자료를 계속 읽어 갔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조금 빨랐던 탓일까.
홀로그램의 화면 전환 속도를 본 황지호가 눈을 반짝거리며 이쪽을 봤다.
좀 눈에 띄긴 하지만 빨리 조사를 마치고 싶었다.
‘이건······.’
권제인에 관련된 온갖 정보를 모아 둔 천 페이지.
그 안에는 권제인의 호연관 내한 공연 때의 스태프 목록도 나와 있었다.
스태프 목록 마지막 페이지에는, 나와 사월세음, 이레나, 김유리, 네 명의 이름과 학교명이 적혀 있었다.
급하게 뽑힌 스태프라 그런 걸까, 그 외에는 다른 정보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다음 페이지는 권제인의 신곡, ‘귀향(Homecoming)’의 정보가 실려 있었다.
귀향의 악보를 마지막으로, 천 페이지의 자료는 끝이 났다.
‘혹시 내가 느꼈던 그 위화감은······ 그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권제인의 발언, 행동.
영원의 호수가 연관된 사건들.
내가 이 세계에서 겪은 경험들.
그리고 이 자료들.
하나하나 조합해 보니 위화감의 정체가 분명해졌다.
‘그랬구나······. 그래서 권제인은 그렇게 행동한 거야.’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이상하군.”
“뭐가.”
황지호는 천 페이지를 나보다 더 빨리 읽어 버린 후,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황지호가 불길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뭔가 알아낸 얼굴인데, 수상하게 웃질 않아서.”
그야, 웃을 일이 아니니까 웃을 수가 없었다.
* * *
부 활동을 마친 후.
이상하게 여기는 황지호를 떼어 두고 체스대회장, 선수용 출입구로 향했다.
오늘도 대전은 두 번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의 응원 덕일까.
시험 삼아 홀로그램으로 체스보드를 전개해 봐도 색이 사라지거나 시야가 왜곡되는 현상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두통이 심하지만 버틸 수 있어.’
첫 상대는 게임에도 등장하지 않았고, 이 세계에서도 접점이 없던 1학년 학생이었다.
20수 이내로 쓰러뜨리고 다음 라운드로 향했다.
두 번째 상대는 선도부장 오혜지였다.
“체크.”
오혜지가 놀란 얼굴로 체스보드를 내려다보다 킹을 쓰러뜨렸다.
악수를 나누던 중에 오혜지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승이 말대로 손이 좀 차가워졌긴 한데······ 이 정도면 괜찮겠네.”
“네?”
“내 후배가 널 걱정했어. 4수 만에 너한테 진 주제에, 참 호구 돋지?”
마진승이 내 걱정을 했나 보다.
오혜지도 그렇고 마진승도 그렇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다 착하다.
그때 나한테 여유가 있었다면 스콜라 메이트가 아니라, 그의 체스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만한 대국을 해 줬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체스대회 둘째 날을 마쳤다.
* * *
1학년 0반, 내 응원단이 정한 오늘의 저녁 메뉴는 분식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아이들이 내일은 소고기를 먹게 해 달라고 말했다.
‘내일 지더라도 소고기를 먹이고 싶은데.’
일단 예약부터 해 놓고, 취소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서 어떻게든 끌고 가 먹여야겠다.
홀로그램을 전개하여 고깃집 예약을 하고, 선금까지 결제해 뒀다.
계획은 완벽하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람에게 연락해 볼까.’
산책하며 내일 마지막 경기를 준비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기숙사 아이들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중앙 구역 산책로를 걸으며,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은 금방 통화에 응했다.
“안녕하세요,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그래, 의신아.]
나는 상대에게 내 디바이스 코드를 알려 준 적이 없는데, 마치 내 전화인 걸 안 것 같은 반응이다.
‘나를 조사한 걸까. 디바이스 코드 정도는 금방 알아냈겠지.’
어떤 방식으로 조사를 한 건지 신경 쓰였지만, 먼저 용건부터 말했다.
“직접 뵙고 얘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권제인 선배님.”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