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00화 (100/925)

26. 체스 플레이어 (6)

권제인은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린 후, 그 이상 울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나의 양부모가 어떤 자들인지도 알겠구나.”

비가 쏟아지던 날.

은광구의 유일한 마천루, 황명타워 옥상에서 나한테 빌던 중년 부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의 사회적 평판과 인망은 완벽했어. 딸을 하나 키우고 있기도 했고, 플레이어로서의 실적도 나쁘지 않았고. 특히, 재러드 리의 친척이라는 점을 크게 사서 신뢰했었어.”

환몽 리스트에 나와 있던 아주 점잖게 찍힌 두 사람의 사진이 생각났다.

그 사진만 보면 환몽 게이트에 엮여 온갖 추잡한 일에 손을 댔다곤 생각하기 어려울 거다.

반성하고 있다며, 다른 방법으로 속죄하게 해 달라며 호소하는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개새끼들은 사람 눈을 속이기 위해 멀쩡한 꼴을 한 경우가 많았다.

“레나가 은광고에 들어갔기도 했고, 가끔 보내 준 사진에선 늘 좋은 옷을 입고 있었어. 그래서 의심하지 못했어.”

권제인의 푸른 눈에 분노와 슬픔이 잠깐 떠오르다 사라졌다.

“하지만 레나는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어. 좋은 옷을 입힐 때는 환몽 경매장 같은 곳에 끌려갈 때였고. 의무적인 공교육 기관의 교육을 제외하면, 레나가 다른 교육을 받은 흔적도 없었어.”

그러면 권제인이 보낸 300억은 어떻게 된 걸까.

최편득의 VIP 클럽 회원이었던 그들이었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유흥비, 도박비로 날렸을 거라고 추측되었다.

“예전에 우리를 도와준 영물의 힘을 빌려서 그자들을 조사하고 심문했어. 왜 이렇게 레나에게 잔인하게 굴었는지 알고 싶었으니까.”

우리를 도와준 영물?

영원의 호수를 도와준 영물이라면 이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다.

황지호가 은휘관에서 권제인과 나눈 이야기를 전해 줬을 때, 웅족을 심문할 때 도움을 줘 정보를 잡아냈다고 언급했었다.

“그자들은 재러드에게 아주 깊은 열등감을 품고 있었어. 레나가 재러드의 사생아라고 생각했나 봐. 심하게 대한 게 들통나도 어차피 레나의 존재 자체가 재러드의 약점이니, 돈을 받아 내는 데도 문제가 없을 거라 여겼다고 말했어.”

재러드 리는 어린 나이에 세계 10대 길드 중 하나인 ‘세 기사의 맹세’에 들어간 천재다.

현재는 권제인의 서포트에 전념 중인 금발의 명예 한국인 정도로 취급받고 있었지만, 우수한 플레이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권레나의 양부모는 그런 재러드 리에게 열등감이 있었고, 이를 권레나에게 풀고 있었나 보다.

“심문 과정에서 그자들이 소유한 메인 PC도 압수해서 백업 자료를 살펴보던 중에······ 레나에게 보낸 메시지들도 전부 읽어 봤어.”

권제인은 그 온갖 폭언이 담긴 메시지 이력을 전부 확인해 본 건가.

나는 고작 하루치밖에 확인하지 않았는데도 머리에 열이 올랐는데.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권제인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그녀의 푸른 눈에 다시 물기가 차올랐다.

‘권제인은 권레나를 지키려 했던 거겠지.’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후, 권제인에게 남은 가족이라곤 어린 권레나뿐이다.

접족이 그녀를 이용해 뭔가를 하려는 것도 알았을 테니, 차마 옆에 둘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신뢰하는 팀 메이트, 재러드 리의 한국 친척에게 권레나를 맡기고, 영국에서 나비를 찾는 데에 전념했나 보다.

최근 10년간, 영국 외의 지역의 권제인 콘서트가 눈에 띄게 줄어든 이유는 그 탓일 것이다.

그렇게 영국에서 활동하면서도 영국 귀화 권유를 거절한 이유도, 아마 권레나일 거고.

“처음에 환몽 게이트 사건이 터졌을 때, 조금 알아보긴 했어. 하지만 한국의 범죄자 인권 보호 시스템 때문에 합법적으로 접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어. 불법으로 돌아다니는 환몽 리스트에는 그자들의 이름이 없어서 안심했는데.”

권레나의 양부모가 환몽 리스트에 오른 건 최편득의 생일 파티 이후다.

그 이전에 확인했다면 찾을 수 없었을 거다.

한국에선 범죄자의 신상을 철저하게 보호하니까.

“그 애가······ 레나가 입학 첫날에 그런 선택을 하다니.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권제인은 입을 다물었다.

수많은 관객 앞에 흔들림 없이 서 있던 푸른 눈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지금은 너무나도 불안정하게 보였다.

‘그것에 대해 말해도 될까.’

권레나의 동의 없이 권제인에게 그 사실을 전해도 되는지 조금 고민했다.

권레나의 성품, 게임 속 행적.

권제인의 상황.

두 사람의 관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정리해 나갔다.

‘게임 속에서 영원의 호수는 끝까지 배경으로만 등장했어. 본편에 등장하지 않은 건 권레나가 사망한 이후에 조사하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탓이 아닐까. 아직 살아 있는 그 아이를 보고도 이런데······ 게임 속에선 권제인이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을 거야.’

이대로라면 권제인은 죄책감에 무너질 거다.

권제인은 권레나의 하나밖에 없는 진짜 가족이자, 존경하는 바이올리니스트다.

권레나를 위해서라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두 사람을 위해 말하는 게 좋겠다.’

나중에 권레나에게 원망을 듣더라도 이 사실을 전해야겠다.

“권레나는 입학 첫날 그 사건이 있고 난 이후, 한동안 등교를 거부하고 기숙사 방에 있었어요.”

권레나에게 리본을 돌려준 그날.

달빛 아래에서 환하게 웃으며 내게 그 사실을 말해 준 그 아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아이가 등교하게 된 계기는 수업 종으로 나왔던 ‘for LENA’였어요.”

그 뒤로도 권레나가 내게 해 준 이야기와 내가 목격한 일들을 전했다.

플레이어 이능이 발현되기 전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 하던 권레나.

함근형과 현악부 고문의 도움을 받아 현악부에 들어가고,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것.

권제인의 내한 공연 티켓팅을 위해 권레나가 반 아이들에게 도와 달라고 청한 것.

티켓팅에 실패해, 일일 스태프 소개를 받기 전까지 매일 잠을 줄여 가며 취소표를 찾아 헤매던 것.

공연 앙코르곡, ‘for LENA’를 듣고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던 권레나.

‘귀향(Homecoming)’의 코드를 완벽하게 따 권제인이 선물한 이능 바이올린으로 선보인 피치카토.

영물의 조사로는 알기 어려웠을 그 아이의 이야기를 모두 전했다.

“그 아이에겐 아직 ‘침묵맹세’가 둘이나 걸려 있는 상태예요. 혀를 영구히 제거하지 않고 맹세를 해제하기 위해서는 SSR급 해주 아이템이 두 개 필요하겠죠.”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를 댔다.

입학 첫날 확인한 권레나의 상태창에는 침묵맹세가 두 개나 걸려 있었다.

이를 해제하는 방법을 계속 고민해 왔었다.

“황명재단 측에서 해주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선배님이 말씀하시면 받아들일지도 모릅니다.”

이능 바이올린을 떠넘긴 것처럼, 권제인이 밀어붙이면 받아 줄 것 같다.

“신문부의 인터뷰에 응해 주셨죠. 인터뷰 때, 권레나와 함께 가자고 권해 볼게요. 그때 건강한 모습으로 뵈어요.”

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권제인은 따라 일어나지 않았다.

“고마워, 의신아.”

대신 잠긴 목소리로 하는 인사가 작게 들렸다.

*    *    *

조의신을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팀 빌딩으로 돌아온 후.

재러드 리는 기운 없는 얼굴로 생각했다.

‘결국, 아무것도 먹지 않았구나.’

리무진 안에서 조의신에게 운을 떼 봤지만, 먹는 걸 보지 못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석촌호수 사건 이후, 권레나의 양부모가 환몽 게이트에 연루되었다는 게 밝혀지고 점점 권제인의 식사량이 줄었다.

영물의 조사가 끝나 조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게 된 권제인은 실의에 빠졌다.

재러드 리는 제 피가 섞인 친척들을 떠올리니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 개새끼들의 처리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제인이가 더 중요해.’

어떻게 해야 권제인에게 한 끼라도 먹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푸른 바이올린이 양각된 이계 금속의 문이 열렸다.

권제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방 밖으로 나오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라, 재러드는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건 권제인이었다.

“······미안.”

그 말을 들은 재러드 리는 즉시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제인아아아! 제발, 그만 사과해 줘! 나는, 제인이 네가 사과할 때마다 아주 그냥······.”

“아니, 그게 아니야.”

권제인이 재러드 리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권제인은 손은 그대로 한 채로,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재러드 리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블루베리 젤리 그릇을 떨어뜨렸는데. 더 없어?”

재러드 리는 얼어붙어 있던 피가 일시에 끓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물론이지! 제인아, 더 먹고 싶은 거 더 없니!”

“딱히······. 몸에 조금 힘이 없는데, 회복 아이템을 쓰고 싶어.”

권제인의 말에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영원의 호수 팀 메이트들이 환성을 질렀다.

“드디어 권제인 님이 식사를······! 회복 아이템 사용을······!”

“팀 닥터 모셔 와!”

“블루베리 디저트 전문 업체를 수배할게.”

“우선 베리류 푸딩과 젤리는 전부 사들이죠.”

재러드 리가 포털로 뛰어들기 전, 권제인을 향해 외쳤다.

“제인아, 기다리고 있어! 마음 바꾸면 안 돼!”

“응.”

권제인의 대답을 들은 재러드 리가 밝게 웃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팀 메이트들을 뒤로하고 권제인은 방 안으로 돌아왔다.

권제인은 푸른 바이올린을 들어 올려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하는 곡은 ‘for LENA’.

감미로운 바이올린의 선율이 방 안을 채워 갔다.

그 방 한구석.

권제인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며 누군가 중얼거렸다.

“역시 전, 이런 게 아주 좋아요.”

*    *    *

다음 날, 아침.

디바이스에 재러드 리가 메시지를 잔뜩 보내온 게 눈에 들어왔다.

‘흥분하면 한국어 실력이 떨어지나.’

이상한 한국어로 대충 고맙다, 뭐 필요한 건 없냐, 팀 빌딩으로 자주 놀러 와라,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권제인이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권레나는 언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될까.’

이건 권제인이 직접 해야 할 일이다.

내가 전하는 건 정말 주제넘은 짓일 거다.

‘지지부진하면 등을 떠미는 것 정도는 해야지.’

죽기 전까지 계속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플레이어블 캐릭터 이레나.

언젠가 권레나가 되어서 진짜 가족인 권제인과 행복하게 지냈으면 한다.

“응원 문구는 이대로 할까?”

“응! 이대로가 제일 좋은 거 같아.”

1학년 0반 교실.

아무것도 모르는 권레나가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게 보였다.

오늘 아침 수다의 주제도 내 체스대회 응원인가 보다.

〈‘이레나’의 인물 정보를 열람합니다.〉

권레나의 진짜 이름에 확신을 얻었으니 변동이 있나 해서 상태창을 확인해 봤다.

하지만 아직 ‘이레나’로 등록되어 있었다.

호적상 여전히 ‘이레나’고 이 세계의 사람들 대다수가 그렇게 인식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신문부 인터뷰에 같이 가자는 말을 어떻게 꺼낼까.’

반 아이들과 다 같이 영원의 호수 팀 빌딩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권제인도, 영원의 호수 팀원들도 조카네 반 친구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궁금할 테니까.

권제인과 재러드 리에게 물어봐 허락을 받고, 반 아이들에게 권해 봐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할 때.

황지호가 말을 걸어왔다.

“너,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에 어디 갔다 왔냐?”

황지호가 눈동자에 황금빛이 스치다 사라졌다.

“어쩐지 좀 거슬리는 진족 놈의 기척이 아주 희미하게 느껴지는데.”

좀 거슬리는 진족 놈?

그 수식어는 이전에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황지호는 이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 홍규빈은 좀 거슬리는 진족 놈의 가호를 받아서 몇 번 관찰해 본 적이 있어. 그 녀석이 플레이어가 된 계기가 재밌기도 하고.

“혹시 홍규빈 팀장님께 가호 내렸다는 진족 말하는 거야?”

“그래.”

황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제인이 좀 안정되고 나면 물어볼까.’

물어볼 건 하나 더 있었다.

내가 가진 ‘무명의 운명’과 흡사한 설명문을 가진 이능 바이올린.

그 아이템을 만든, 전 세계에 하나뿐인 이능 바이올린 장인.

그 장인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 전에 넘어야 할 산이 있지만.’

오늘은 체스대회의 마지막 날이자, 선상 파티 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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