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01)
진족 중에서도 마족(魔族).
그들은 다른 진족과 달리 우두머리를 뽑지 않았고, 무리 짓지도 않았다.
그런 마족들 사이에 예외가 세 가지 있었다.
첫째, 같은 상위 존재, 마신을 섬기는 사제들.
둘째, 수많은 마족을 소멸시켜 힘을 증명한 ‘마왕’의 숭배자들.
셋째, 같은 주제의 마도 연구에 심취한 자들.
이 마족 집단은 세 번째 케이스에 해당했다.
“저강렵이 접촉해 왔다.”
그들 중, 외부와의 접촉을 담당하는 마족이 어둠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마족들이 현세와 이어진 제3의 눈을 닫았다.
각자 독자적으로 제작한 마법진에서 몸을 일으킨 마족들.
그들의 주변엔 가지각색의 이능파와 마력이 넘실거렸다.
“저강렵? 돈족의 수장 저팔계를 말하는 거야?”
“그래. ‘그자’를 경유하여 거래를 청해 왔다.”
“거래? 무엇을 요구해 왔지?”
저강렵의 거래에 대해 간략히 설명이 끝나자, 마족들이 물었다.
“조금 까다롭겠는데. 못할 건 아니지만.”
“대가는?”
물 흘러가듯 막힘없이 말을 하던 마족이 한 템포 늦게 답했다.
“……곧 있을 주오와 TC의 선상 파티의 관전을 허락하겠다고 하는군.”
아공간 곳곳에서 ‘하!’ 하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족들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를 움직이는데 고작?”
“허락? 오만하군. 마음에 들지 않아. 신역이 아닌 이상 우리의 눈을 피할 곳이 없거늘.”
“그래. 사전에 장소를 알고 준비만 해 두면 설령 상위 존재가 방해해도 다소 투사가 가능한데.”
마족들의 대화 주제는 어느 사이인가 저강렵의 험담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강렵은 ‘깨달은 자’로부터 정단사자(淨檀使者)로 임명받지 않았나. 덕을 쌓아 성불을 노려도 모자랄 판에, 애초에 왜 현세에 와 있는 건가.”
“저강렵은 이계 충돌 후 타락해 버렸잖아. ‘그자’의 손을 잡으며 많은 깨달음을 버렸지.”
“천상에서 8만 수군을 거느리고 은하수를 누비던 천봉원수가 그 꼴이라니.”
“정단사자에서 잘리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군.”
저강렵이 제안한 거래를 전하던 이가 결정타를 찍었다.
“저강렵은 건방지게도 우리 중 한 명을 지목했지. 가장 뛰어난 자가 협력하길 바란다더군.”
마족들이 뿜는 이능파와 마력의 파장이 그들의 감정을 반영해 우글거렸다.
“우리의 위아래를 그 돼지가 가늠한단 말인가.”
“누구를 지목했는지 궁금한데.”
불길한 색과 형태로 변한 이능파 사이, 마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7대 죄악의 마신의 일각, 인비디우스 님. 그분의 사제를 지목해 왔다.”
7대 죄악의 마신인 인비디우스의 열렬한 사제.
그런 주제에 사제들의 모임을 뛰쳐나와 동결형 이계 마도 연구에 끼어들어 혁혁한 공을 세운 괴상한 마족.
그 마족을 떠올린 이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수긍했다.
“……뭐, 그 녀석이라면.”
“우리 중 가장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
“흥.”
대화의 주제는 인비디우스의 사제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 그 녀석은 어디에 갔지? 보이지 않는데.”
“최근 ‘까마귀 가면’이 신경 쓰인다며 현세에 자주 들락날락하더니만. 또 현세에 간 건가.”
“그러고 보니 요새 통 못 봤군.”
그러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 마족이 답했다.
인비디우스가 아닌, 다른 마신의 사제였다.
‘괴상한 마족끼리 친하게 지내는군’, 이라고 생각하며 마족들은 그 사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녀석은 현세에 갔어요. 마침 처리할 일도 있으니까요.”
“처리할 일?”
“진웅팔선과 거래를 하기로 했어요.”
진웅팔선이라는 말에 몇몇 마족들이 질문을 던졌다.
“진웅팔선이라……. 실성한 쪽? 실성하지 않은 쪽?”
“실성하지 않은 쪽요.”
“누구지? 환희의 곰이라면 내가 직접 만나고 싶어. 얼마 전에 재미있는 술식을 짜낸 것 같은데.”
마신의 사제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거래를 청해 온 건 비탄의 웅녀예요.”
* * *
“어제 어디에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을 생각인가. 꽤 오랜 시간 그 진족 놈과 같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에 잠겨 있는 내게 황지호가 물었다.
좀 거슬리는 진족.
홍규빈에게 가호를 내린 진족.
어젯밤 내가 그 진족과 같이 있었던 시간이 좀 길었던 모양이다.
‘기척이 남을 정도로 오래 있었다고?’
지난밤 황지호와 헤어진 이후 내가 길게 있던 공간은 세 곳.
은광고 결계 안.
재러드 리와 함께 탄 에어 스테이지형 리무진.
영원의 호수 팀 빌딩, 그중 권제인의 방 안.
‘나비령의 메시지 건으로 결계가 더 강화된 은광고는 아닐 거고…… 아마 권제인의 방 안에 있었겠지.’
나중에 권제인에게 물어볼 생각이지만, 황지호에게도 물어보는 게 좋겠다.
“어제 권제인 선배님 뵙고 왔는데.”
“권제인……. 그 녀석은 푸른 바이올리니스트에게도 마수를 뻗쳤나.”
황지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거슬린다고 하더니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진족인가 보다.
“그 녀석은 어떤 진족이야?”
“너도 마법진 너머로 만나 봤던 녀석이야.”
마법진 너머로 만난 진족?
12지 회담을 말하는 거구나.
설마 그 초등학생 같은 대화명을 달고 있던 12지의 수장 중 하나인가.
“그 진족은 자칭 꾀돌이, 서족(鼠族)의 수장이다.”
권제인과 홍규빈 주변에 거물급 진족, 서족의 수장이 붙어 있었나 보다.
‘둘 다 고생이 많구나.’
옆에 황지호를 둔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 * *
점심시간.
점심으로는 가장 빨리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메뉴를 골랐다.
생강, 양파와 함께 조린 닭 다리살.
국수장국으로 맛을 낸 소스에 익힌 달걀.
마지막으로 살짝 익힌 팽이버섯을 얹은 닭고기 팽이버섯 덮밥이었다.
‘대게, 홍합, 낙지, 새우가 들어간 해물찜 먹고 싶었는데…….’
미식가 맹효돈이 알면 멍청한 선택을 했다고 까이겠지.
해물찜은 메뉴가 나오는 데도, 먹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려서 선택할 수 없었다.
점심시간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오늘도 응원 메시지가 많네.’
점심을 먹고, 인적이 없는 산책로를 찾았다.
벤치에 앉아 디바이스를 가동하니, 아침에 확인하지 못한 체스대회 응원 메시지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짧게 감사 인사를 하며 메시지 이력을 밑으로 내리다, 내가 찾던 이름을 발견했다.
[나] 안녕하세요, 홍규빈 팀장님.
[나]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 바쁘신가요?
홍규빈은 생각보다 빨리 답장해 줬다.
[홍규빈] 그래, 의신아. 지금 점심시간이라 괜찮아^^!
[홍규빈] 무슨 일 있니?
평소에도 자주 안부를 물어 왔지만, 요즘 들어 별일 없냐는 물음이 더욱 잦아진 홍규빈.
어쩐지 홍규빈의 그 행동이 지금 내가 하려던 질문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나] 자칭 꾀돌이라는 서족에 대해 알고 계세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규빈은 폭풍같이 메시지를 날려 댔다.
[홍규빈] 그놈이 결국 너한테도 들이댔어? ^^;;;;;;
[홍규빈] 무시해. 엮이면 골치 아파져!
[홍규빈] 가호 받아 달라고 징징거릴 때도 짜증 났는데, 가호 받고 나니까 더 짜증 나게 굴어. 심심하면 툭 튀어나와서 저는 이런 게 좋다느니, 싫다느니! 이걸 조사해 달라! 저걸 좀 알아봐 달라!
[홍규빈] 절대 엮이면 안 된다! 내 인생에서 가장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리는 진족이야!
그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리는’이라는 수식어는 2학년 0반 금찬왕찬 콤비가 홍규빈한테 쓰던 건데.
가호를 주고받은 진족과 플레이어는 서로 닮나 보다.
[홍규빈] 특히, 그 꾀돌이 놈이 안 쓰던 존댓말 쓰면서 살살 웃고는 ‘전, 이런 거 아주 좋아해요’라고 말할 때!
[홍규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렴. 은광고 결계 안으로 튀어! 알았지?
예지 스킬 때문에 홍규빈한테 귀찮게 구는 그 진족, 서족의 수장 꾀돌이.
아직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질척거림과 구질구질함의 대명사 홍규빈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경계해야겠다.
[나] 네, 감사합니다.
[홍규빈] 잠깐, 의신아. 그러고 보니 ‘꾀돌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들었니? 벌써 엮인 건 아니지? ㅠㅠ;;?
엮였다 하기에는 아직 미묘한 상황이다.
어디에서 ‘꾀돌이’라는 칭호를 들었는지 말하는 건 곤란하고.
어떻게 둘러댈까.
어차피 일하느라 바쁠 텐데 그냥 무시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의신 학생.”
기척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불쑥 말을 걸었다.
맑고 청량한 목소리지만, 갑자기 들려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청훤 선생님.”
말을 걸어온 상대는 에너미학개론의 담당 교사이자 한이의 은사인 공청훤.
수업 시간, 잠깐 칠판에서 눈을 떼고 교과서를 읽는 중에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무서운 교사다.
버릇처럼 상시 기척을 죽이고 사나 보다.
“저번 수업에 또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어요.”
스승의 날, 맹효돈의 모교인 탄래중학교에 가느라 공청훤의 수업을 빼먹었다.
그것 때문에 찾아왔나 보다.
이 넓은 은광고 안에서 어떻게 찾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의신 학생, 건의 사항이 있으면 들을게요.”
공청훤은 너그러워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은광고에 들어와 여태까지 땡땡이친 수업이 전부 공청훤의 수업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공청훤에게 불만이 있어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합리적 의심이긴 하다.
게다가 저번엔 무려 스승의 날에 땡땡이를 쳤으니까.
“……죄송해요.”
“다음에는 빠지기 전에 연락해 주세요.”
공청훤은 조금 씁쓸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신 학생은 체스대회에 출전 중이죠.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들었는데…… 대회를 준비하러 가실 건가요?”
또 땡땡이칠 거냐고 간접적으로 묻는 거구나.
처음부터 오늘 수업은 들으러 갈 생각이었다.
“아뇨, 수업 듣고 싶어요.”
내 대답에 공청훤이 기뻐했다.
“오늘은 수업에 나올 예정인가요?”
“네.”
역시나, 저번처럼 오늘도 땡땡이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잡으러 온 모양이었다.
‘이상하게 변명이 안 나오네.’
말과 표정, 전부 부드러운데 어쩐지 압도되는 기분이다.
“마침 수업종이 울렸네요. 그러면 교실로 같이 이동하죠.”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수업종은 빈의 외곽 도시, 하일리겐슈타트의 숲을 배경으로 한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Pastorale)’.
그중 ‘천둥, 폭풍우’라는 표제를 단 4악장.
숲에 비바람, 번개가 몰아치는 광경과 달아나는 동물들을 묘사한 교향곡이었다.
‘방송부원들은 식곤증을 덜어 주려는 의도로 이런 선곡을 한 것 같긴 한데.’
저번에 나온 에드바르드 그리그의 ‘산속 마왕의 궁전에서’도 그렇고.
공청훤에게 붙잡혔을 땐 긴박한 느낌의 수업종이 나오는 것 같다.
불량아가 수업 직전에 잡혀 들어온 꼴이 됐지만, 오늘도 공청훤의 에너미학개론은 들은 보람이 있는 훌륭한 수업이었다.
* * *
방과 후, 신문부실.
“3학년 0반이 공중 정원을 띄웠어!”
“대체 그건 어떤 원리로 띄우는 거야.”
3학년 0반이 우주의 기운에 복수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바로 행동하지 않고, 방과 후까지 참고 기다린 건 아마 담임한테 항복해서 수업을 꼬박꼬박 듣기로 한 탓일 거다.
“이번엔 꼭 꼬리를 잡았으면 좋겠다! 그 미친 자들의 머릿속을 파헤쳐 주겠어!”
3학년 0반을 취재하다 몇 번이나 물먹은 문새론이 의욕을 불태웠다.
취재 계획을 세우던 신문부원들.
그러다 문새론을 필두로 나를 휙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수상한 1학년 0반의 부반장 응원은 못 가지만, 마음으로 응원할게!”
“그래, 수상해도 괜찮으니까 힘내.”
드디어 신문부에서도 수상하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우리 반 아이들이 만든 응원 문구와 민그린이 그린 내 초상화의 홀로그램.
이게 종합 게시판에 화제가 되어 돌아다니더니, 신문부 사람도 다 봤나 보다.
민그린 화백의 유명세 덕에 쓸데없이 크게 퍼졌다.
“하하하하! 드디어 신문부에도 퍼졌군!”
황지호는 뭐가 좋은지 빵 터졌다.
어쨌든 신문부원들의 응원을 받으며 부 활동을 마치고 체스대회장으로 향했다.
* * *
총동아리회관, 제3체육관.
이틀간 토너먼트로 네 경기를 치른 결과.
추첨으로 정한 시드를 포함해 약 60여 명이었던 체스 플레이어는 넷으로 줄어 있었다.
‘남은 사람은 전부 플레이어블 캐릭터! 열심히 하자.’
A블록은 염준열, 박승현.
B블록은 곽경구, 나.
‘3학년이 없는 게 의외네.’
준결승전, 내 상대는 2학년 학생회 소속 곽경구.
염준열의 친구이자, 주수혁과 같은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사형이기도 했다.
주수혁처럼 쌍검을 잡는 플레이어답게 악수를 하는 손바닥이 쇠처럼 단단했다.
‘은광고 안에서는 주수혁 다음가는 쌍검 플레이어답구나.’
코인을 던진 결과.
곽경구가 백, 내가 흑을 잡게 되었다.
“대국을 시작해 주십시오.”
용제건의 목소리가 체스대회장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