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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02화 (102/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02)

용제건의 시합 개시 신호를 들은 곽경구의 눈이 체스보드를 향했다.

삑.

후수(後手)인 내가 체스 클락을 누르자, 사전에 곽경구는 체스 오프닝을 생각해 뒀는지 바로 폰을 움직였다.

e2의 백의 폰이 e4로 움직이는 킹 폰 오프닝.

여기서 e7의 흑의 폰을 e5로 움직인다면 오픈 게임이 되고, 다른 수를 두면 세미 오픈 게임이 된다.

‘앞선 경기와는 다른 패턴으로 둬 볼까.’

g8의 흑의 나이트를 f6로 이동시켰다.

곽경구가 체스보드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니 감이 잡혔다.

‘나를 연구한 모양이네.’

내가 둔 수, 체스 오프닝은 알레힌 디펜스(Alekhine's Defense).

e4, d4, e5, d5, 중앙의 네 칸 중 두 칸의 장악이 승리로 이어진다는 고전 체스 이론을 반박하며 등장한, 센터 폰을 상대에게 내주는 하이퍼모더니즘 오프닝 중 하나.

백의 폰들이 중앙을 차지하도록 허용하는 대신, 이쪽은 폰을 먼저 사냥하겠다는 계산이 깔린 수다.

‘스콜라 메이트를 제외하면, 여태까지 내가 뒀던 오프닝 중 가장 공격적인 수야. 생각했던 것과 다른 패턴으로 가니 조금 고민되나 보군.’

그 짧은 시간에 나를 연구하고 오다니.

게임에서 본 대로 성실한 캐릭터였다.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다음 수를 생각하는 진중한 얼굴에서 무(武)를 갈고닦는 이 특유의 굳은 성정이 느껴졌다.

‘한때 비뚤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데.’

게임 시작 전 시점.

현재 이 세계의 기준으로 작년 초.

열일곱이 된 곽경구는 처음 광림을 사용하고 절망했다.

곽경구가 얻은 광림, ‘100초의 은총’은 말 그대로 하루 사용 가능한 시간이 100초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능력은 신체 강화 계열이지만, 공격력 상승과는 거리가 멀어. 천재 검사로 꼽히는 아버지와 주수혁 사이에서 스킬로도 밀리던 곽경구는 크게 좌절했겠지.’

곽경구의 비행은 짧고 굵었다.

예비 고1이었지만 웬만한 예비역보다 더 삭은 얼굴을 이용해 술을 사들인 곽경구.

곽경구는 꼬우면 자신을 파문하라며 도장 앞에서 소주병으로 젠가를 쌓을 기세로 처마셨다.

그 결과, 곽경구는 아버지인 곽 사범에게 소주병으로 처맞았다.

몇 개의 소주병이 시원하게 터져 나갔지만, 상처 하나 없는 곽경구.

플레이어의 신체는 지나치게 튼튼한 데다 거기에 더해 신체를 강화하는 광림, ‘100초의 은총’을 발동한 덕이었다.

[아, 시바. 이 거지 같은 광림은 소주병으로 처맞을 때밖에 못 써먹겠네!]

곽경구의 술주정을 듣고 곽 사범은 소주병으로 아들을 패는 걸 멈췄다.

대신 100초간의 광림 제한 시간이 끝날 때를 기다린 후, 곽경구를 도장 안으로 끌고 가 대련을 청해 1시간 넘게 쌍검 스킬로 쥐어 팼다.

그렇게 처맞고도 은광고 입학 전까지 정신을 못 차리던 곽경구.

그러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곽경구는 자신의 사제인 주수혁에게 감화되어 마음을 고쳐먹고 수련에 임하기 시작했다.

‘주수혁 본인은 모르겠지만, 게임이 시작되기 전부터 많은 사람을 구해 왔어.’

삑.

곽경구가 다음 수를 두고 체스 클락의 버튼을 눌렀다.

이제는 내 차례다.

‘내 대련이 곽경구의 정신 수련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곽경구는 새사람이 되었다.

플레이어SAT―K로부터 이명 ‘헌드레드 세컨드’를 받을 정도로.

‘곽경구는 잠재력이 큰 캐릭터 중 하나야.’

100초간 단순히 방어력을 강화하기만 하는 줄 알았던 곽경구의 광림 100초의 은총.

그의 광림은 정신력에 따라서 신체 재생 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것으로 밝혀져, 사기캐 반열에 들어갔다.

지금의 곽경구는 아직 성장 중인 단계겠지만.

‘초반 육성이 까다롭지만, 키우고 나면 편했어. 게임에서도 기믹을 해제할 때 가장 큰 도움을 주던 캐릭터였지.’

육성이 전부 끝나면 방어력과 재생 능력이 크게 올라가, 사실상 하루 100초간 무적 모드, 초회복 모드에 들어가는 곽경구.

불구덩이 속에 감춰진 결계의 핵, 함정 속에 놓인 주요 아이템 등을 회수할 때 추천 캐릭터로 꼽혔다.

‘그래도 하루 가용 시간은 100초뿐. 쏟아지는 공격 속에서도 침착하게, 빨리 활로를 찾아내는 사고 회로가 필요해.’

삑.

난 다음 수를 두고 체스 클락의 버튼을 눌러 턴을 넘겼다.

오프닝에 이어 계속 공격적인 수를 두고 있었다.

여전히 두통이 심하긴 했지만, 오늘 컨디션은 최고다.

이런 공격적인 수도 실수 없이 둘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계속 방어 태세로 나가면 곽경구는 금방 체크메이트 당할 텐데.’

백의 폰에게 중앙을 내줬지만 내 체스 피스는 백의 기물의 숨통을 죄어 가고 있었다.

한 수, 한 수.

턴이 이어졌지만, 곽경구는 쉽게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사이 내 체스 피스는 서서히 백의 킹을 잡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기권합니다.”

곽경구가 손을 들고 기권을 선언했다.

‘포기가 빠른데…….’

곽경구의 기권 선언과 동시에 경기는 내 승리로 종료되었다.

곽경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해 왔다.

주저하다 손을 마주 잡으니 곽경구가 일자로 다문 입술을 살짝 위로 휘며 말했다.

“왜냐고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이네.”

곽경구는 체스보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빠르면 4수, 늦어도 8수 내에는 무슨 수를 놔도 내 킹이 잡히니까.”

분한 표정 반, 홀가분한 표정 반.

어쩐지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광림을 내세워 주수혁의 방패를 자처하다 100초가 지나 버려 최후를 맞이했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다.

“제가 백의 체스 피스를 움직여도 될까요?”

“그래.”

곽경구의 진영이던 백의 체스 피스 중, 거의 움직이지 않았던 백의 퀸.

백의 퀸을 잡아 흑의 체스 피스 가운데에 위치시켰다.

“이건!”

한 수에 형세가 역전되었다.

백의 퀸은 흑의 킹과 퀸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체크메이트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몇 수는 내가 방어전에 임해야 할 국면이 되었다.

곽경구의 말대로 8수 안에 내가 체크를 선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게 안 보였다니…….”

곽경구는 경악한 얼굴을 하다 이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패배를 인정하고 편안해 보이던 얼굴보다 이 표정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    *    *

제3체육관, B블록 대기실.

아직 염준열과 박승현의 대국이 끝나지 않아, 스테일메이트의 스태프가 나를 대기실로 안내했다.

혼자 남은 나는 회복 아이템 카드를 하나 꺼내 사용했다.

카드가 사라졌을 때 신체의 고통이 잠시 사라졌지만, 금세 재발했다.

‘이 두통은 회복 아이템을 써도 없어지질 않네.’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뇌를 자극해 두통과 이명 증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신체적인 문제니까 회복 아이템으로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빗나갔다.

‘혹시 이능파 때문인가. 나도 모르게 불안정한 이능파를 뿜어서 신체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닐까.’

이능파의 조절은 회복 아이템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본인이 제어하거나 다른 플레이어가 강제로 억누르는 수밖에 없다.

황지호가 권제인과 적호에게 한 것처럼.

똑똑―!

노크 소리에 생각을 멈췄다.

스테일메이트의 스태프가 다음 경기를 알리러 온 건가.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박승현이었다.

박승현의 얼굴을 본 순간 직감했다.

‘졌구나.’

체스 기사로 살면서 셀 수 없이 봤던 표정.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미안, 졌어. 결승에선 못 볼 것 같아.”

박승현은 기가 죽은 얼굴로 말했다.

시간을 보니 두 사람 모두 제한 시간을 거의 다 써 가며 둔 것 같았다.

기보는 보지 않았지만, 박승현의 지친 얼굴도 그렇고 접전을 치렀다는 건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게 뭐 사과할 일이야. 다음에 같이 두자.”

“그래…….”

의기소침해 있는 박승현.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을 때.

쾅―!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학교 체육복을 입은 놈이 머리를 쑥 밀어 넣고 대기실 안을 보다 박승현을 발견하자 말을 걸어왔다.

“야! 여기서 뭐해. 가자. 밥이나 먹자. 내가 살게.”

“나 결승 보고 가고 싶은데.”

“비쩍 곯아서는 뭐래. 스테일메이트에서 생중계해 주니까 밥 먹으면서 보자. 내가 살게.”

잘 보니 만우절에 기숙사 로비에서 만난 놈이었다.

대화 내용을 들으니 박승현과 지금도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네가 응원하러 왔으니까 내가 사야…….”

“됐어, 인마.”

체육복 입은 놈은 박승현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질질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박승현의 성격을 생각하면, 저런 놈이 옆에서 챙겨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너도 잘 두고. 1학년 대표니까 잘해.”

“아, 의신아! 응원하고 있을게!”

그리고 두 사람과 엇갈리며 스테일메이트의 스태프가 결승전 개시를 알리러 왔다.

박승현과 이야기하는 사이, 두통과 이명이 조금 가라앉았다.

체스대회장.

A블록 대기실 쪽에서는 염준열이, B블록 대기실 쪽에서는 내가 걸어 나갔다.

우리가 체스 테이블에 마주 선 순간, 관객석에서 환성이 쏟아졌다.

와아아아!

용제건이 공간술을 해제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봤을 때, 체육관 내부의 조명이 일시에 꺼졌다.

파앗!

어느 사이엔가 형성된 붉은색의 빛을 뿜는 수백 수천 개의 작은 공간.

공간은 블록처럼 맞물려 일시에 용의 모양으로 바뀌었다.

‘마치 홍룡 같다!’

홍룡처럼 변한 붉은 공간들은 하늘을 유영하듯 움직이며 관객석을 비추었다.

관객으로 온 학생들이 탄성을 지르며 용을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공간으로 만든 홍룡이 뿜는 빛으로 관객들의 얼굴이 보였다.

‘학생회에서 단체로 왔구나!’

학생회장 도원우, 학생부회장 지명수, 서기 유상희.

그리고 방금 나와 대국했던 곽경구.

거기에 더해 안다인도 보였다.

‘눈이 마주쳤네.’

아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와중, 도원우가 나와 염준열에게 추한 시선을 골고루 보냈다.

유상희는 나와 염준열을 모두 응원하고 있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다.

도원우의 그 추하고 못마땅한 얼굴을 본 유상희가 한 소리 하고, 지명수는 옆에서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보였다.

학생회는 여전한가 보다.

‘염준열 팬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공간술의 홍룡은 형형색색의 피켓을 들고 홀로그램을 띄운 염준열의 팬들을 하나씩 비추다 사라졌다.

염준열이 웃으며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자 체스대회장을 메운 함성이 몇 배는 커졌다.

‘우리 반 애들이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관객석 한 면을 돈 공간의 홍룡이 사라졌을 때.

이번엔 체육관 곳곳에서 새하얀 빛을 띤 공간이 떠올랐다.

마치 은하수처럼 어두운 체육관 천장을 수놓은 별 모양의 공간들.

그중 가장 크고 밝게 빛나는 공간이 체육관을 돌기 시작했다.

‘무명의 초신성을 표현한 거구나!’

초신성을 표현한 공간이 처음 비춘 것은 2학년 0반 학생들이었다.

이해는 안 가지만, 어쨌든 나를 응원하러 온 것 같았다.

금찬솔, 왕찬솔, 연가람, 그 외에 2학년 0반 학생들 전원이 홀로그램을 들고 있었다.

대충 ‘수상하다, 수상해라’라는 내용이었다.

‘수상하다는 말은 빠지지를 않는구나.’

다음으로 비춘 건 선도부.

작년의 챔피언이었던 천동하, 그리고 나와 대전한 오혜지, 마진승을 비롯한 선도부 학생들은 대부분 중립인 것 같았다.

그중, 주수혁이 나를 응원하는 홀로그램을 펴 들고 있었다.

‘나중에 고맙다고 메시지 보내야겠네.’

초신성이 돌고 돌아 마지막으로 멈춘 건 1학년 0반 아이들 위였다.

오늘 그 수상한 홀로그램의 문구는 변하지 않았지만, 더 크고 화려해져 있었다.

유료 폰트와 홀로그램 애플리케이션을 새로 구매한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언제 그렸는지, 민그린이 그린 내 옆얼굴 초상화가 하나 더 추가되어 있었다.

“잘해라, 부반장!”

“소고기 먹게 해 줘, 의신아!”

“수상해 주세요!”

용제건의 화려한 공간 쇼로 환성이 쏟아지는 와중.

우리 반 아이들이 하는 말은 이상하게 또렷하게 들려왔다.

공간술의 홍룡과 초신성이 체육관을 완주한 후.

백과 흑을 정한 나와 염준열을 향해 용제건이 선언했다.

“스테일메이트 배 체스대회, 최종 라운드를 시작합니다. 대국을 시작해 주십시오.”

내가 백, 염준열이 흑.

후수인 염준열이 체스 클락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최종 대국이 시작되었다.

*    *    *

“좋아, 거래에 응할게. 비탄의 웅녀.”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로 온몸을 감싼 마족이 흔쾌히 대답했다.

7대 죄악의 마신 인비디우스의 인장이 새겨진 로브가 마족이 뿜는 이능파로 검게 물들고 있었다.

이 거래가 몹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후후, 그래. 잘됐구나.”

붉은 드레스를 입은 비탄의 웅녀가 살짝 몸을 기울이며 답했다.

“더 필요한 거 있어? 환희와 증오의 곰들한테 비밀로 하는 조건을 추가하는 대신, 서비스해 줄게.”

마족의 기꺼운 목소리에 비탄의 웅녀가 잠깐 생각에 잠기다,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눈으로 찾아 줬으면 하는 게 있어.”

마족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간 비탄의 웅녀.

그녀는 어느 이름을 하나 소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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