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03)
우승을 목표로 두겠다던 염준열.
그 각오에 걸맞게 염준열은 강했다.
FIDE에서 관리하는 Elo 레이팅 상위 랭커, 그랜드 마스터 정도는 아니지만, 몇 단계 아래인 내셔널 마스터나 FIDE 마스터 사이의 수준은 되지 않을까.
‘직관적으로 두는 수는 피하는 게 좋겠어. 시간을 들여서라도 한 수 한 수 더 신중하게 두자.’
체스 클락으로 보이는 내 제한 시간을 확인하며 체스 피스를 움직였다.
준결승까지의 대국은 제한 시간이 30분 주어졌었다.
제한 시간이 15분 이하인 블리츠(Blitz)보다는 여유가 있는 래피드플레이 체스(Rapidplay Chess)였지만, 결승전은 달랐다.
‘이 룰을 정한 건 용제건일 것 같은데.’
최종 라운드는 제한 시간이 1시간이 넘어가는 스탠더드(Standard)로 진행되었다.
각 체스 플레이어에 주어진 시간은 90분.
거기에 주고받는 수가 늘어날수록 제한 시간이 상승하는 피셔 모드가 적용되고 있었다.
결승전 직전에 보여 준 공간 쇼도 그렇고, 무대를 멋지게 만들고 시간도 충분히 줄 테니 모든 역량을 보여 달라는 용제건의 뜻 같다.
‘체스를 둘수록 두통이 심해지고, 손이 식는 내게는 불리한 룰이야.’
그렇다고 그걸 겉으로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삑.
평정을 가장하며 체스 피스를 움직인 후, 체스 클락의 버튼을 눌렀다.
염준열의 시선이 잠깐 내 손끝에 닿았다 떨어졌다.
불을 다루는 염준열은 열기, 온도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이 정도 거리라면 내 손이 악수했을 때에 비해 차게 식어 있다는 걸 눈치챘을 거다.
성격상 후배를 걱정할 염준열이지만, 내 손을 한 번 본 이후로 다시 흔들림 없이 다음 수를 두었다.
‘그래, 지금은 체스 플레이어로서 상대해 줘야지. 후배 걱정은 반상(盤上) 아래에서 하면 돼.’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체스 플레이어로서의 마음가짐도 훌륭했다.
‘나도 최선을 다해야 해.’
두통 탓에 수읽기를 멈추고, 직관에 손을 맡겨 얕은 수를 두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점점 식어 가는 손끝으로 체스 피스를 옮기는 게 고역으로 느껴졌다.
오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는데, 상대가 강한 데다 대국이 길어지니 상태가 무너지는 것 같다.
‘최고의 수는 아니더라도, 최선의 수를 두어 나가자.’
염준열이 그동안 두었던 수.
현재 대국 국면.
남아 있는 체스 피스들의 행마법.
하나하나 조합해 신중하게 다음 수를 두었다.
삑.
삑.
체스 클락의 버튼을 누르며 턴을 넘길수록 점점 제한 시간은 줄어들고, 국면은 변해 갔다.
‘승기가 보이기 시작했어.’
체스 게임의 국면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초반부, 이론으로 정립된 1,300여 개의 표준적인 수를 두는 메인라인, 혹은 독창적인 수를 두는 노블티로 전개되는 오프닝.
중반부, 활발하게 대국이 벌어지는 미들 게임.
종반부, 주요 전투가 끝나 소수의 체스 피스만 남은 엔드 게임.
‘곧 킹을 제외한 기물 점수는 13점 이하로 떨어진다. 엔드 게임 페이즈로 접어들 거야.’
엔드 게임에 가까워지자 패색이 짙어진 염준열.
염준열도 그걸 눈치챘는지 수를 두는 템포가 점점 느려졌다.
체스보드를 주시하던 염준열이 갑자기 각오를 굳힌 얼굴을 하고, 내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수를 뒀다.
‘분위기가 바뀌었어?’
남은 체스 피스도 얼마 없지만, 기권할 의사는 전혀 보이지 않는 염준열.
엔드 게임에 이르러 갑자기 바뀌는 패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염준열은 이기는 걸 포기했지만, 질 생각도 없는 거야!’
체스가 바둑과 장기 같은 마인드 스포츠와 가장 큰 차이점은 ‘한 수 쉬기’가 없다는 거다.
체스에서는 자신의 턴이 오면 체스 피스를 무조건 하나 움직여야 한다.
그 수로 인해 체스 피스를 잃고, 국면이 역전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게 체스의 매력이라고 생각했고, 거기에 끌려서 체스를 시작했는데.’
문제는 한 수도 쉴 수 없으므로, 체스 피스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의 처리가 곤란하게 된다는 점이다.
체스 피스를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첫째, 체스 피스의 모든 진로가 막혀서 움직일 수 없는 경우.
둘째, 현재는 체크 당하는 상황이 아니지만, 내가 수를 둠으로써 체크가 되어 버리는 경우.
두 번째의 경우, 억지로 움직이면 사실상 킹의 자살수가 되지만 체스에서 킹의 자살수는 금지되어 있으니 모순이 발생한다.
‘그 매력적인 룰 때문에 모순이 생기고 ‘스테일메이트’가 필요해졌어.’
반드시 자기 턴에 수를 둬야 하는 체스에서 룰적으로 체스 피스를 움직일 수 없게 될 때, 스테일메이트가 되며 무승부로 경기가 끝난다.
한쪽은 킹밖에 남지 않았고, 상대는 킹, 퀸, 비숍…… 아무리 체스 피스가 남아 있더라도 말이다.
‘염준열은 승리를 포기하고, 스테일메이트를 노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거군.’
염준열의 의사를 파악한 순간.
대국 시작 후 처음으로 수상하게 웃을 수 있었다.
내가 웃는 걸 본 염준열이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바라봤다.
삑.
체스 클락의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문득 이 세계에 오기 전, 내 대학 후배 천성헌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의신이 형, 형이 체스 기사 시절 때 별명 있었다면서요.
천성헌과 친해진 후, 가끔 천성헌이 체스에 관해 얘기하곤 했다.
천성헌은 내가 체스 기사로서 복귀하거나 취미로라도 체스를 뒀으면 하는 눈치였다.
매번 못 들은 척 흘려들었지만.
―‘스테일메이트리스(Stalemateless)’. 맞죠?
한때 그런 쓸데없이 긴 별명이 붙긴 했었다.
스테일메이트를 극혐하는 10대 꼬마라고.
―여태까지 형이 둔 기보를 보니까 스테일메이트가 하나도 없어요. 형이 졌던 대국 중에는 스테일메이트로 몰고 갈 수 있는 것도 있던데……. 형은 스테일메이트 싫어해요?
난 스테일메이트를 당하는 것도, 스테일메이트로 몰아가는 것도 싫어했다.
체스의 최고의 매력은 자기 차례가 온다면 반드시 수를 둬야 한다는 것.
하지만 체크도 아닌 상황에서 수를 둘 수 없게 되어 버리고, 결과적으로 미적지근한 무승부로 끝나 버리다니.
참으로 끔찍한 룰이었다.
―어, 싫어.
―……스테일메이트리스답네요.
―엔드 게임이 다가올 때면 늘 스테일메이트부터 경계했어. 그리고 스테일메이트를 걸어오려는 놈이 있으면…….
그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수상하다는 그 표정이었을 거다.
―박살을 내 줬어.
“체크.”
스테일메이트의 파훼법을 가장 독하게 익혔던 나다.
스테일메이트를 걸어오려는 체스 플레이어의 킹을 잡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곧 내 체크메이트 선언에 이어 염준열의 흑의 킹이 쓰러졌다.
와아아아아―!
펑! 퍼펑!
킹이 쓰러진 순간, 용제건의 공간술이 해제된 모양이다.
염준열의 팬들이 아쉬워하는 탄식도 들렸지만, 더 큰 함성과 폭죽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2학년 0반 학생들이 홍룡 팬클럽이 있는 곳에 집중적으로 이능 폭죽을 터뜨려 소리를 묻히게 한 탓도 있을 거다.
“의신아, 멋진 대국이었어. 마지막에 내 의도를 읽은 거지?”
자리에서 일어난 염준열이 악수를 청해 왔다.
나는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염술을 쓰는 염준열의 손은 다른 이들에 비해 조금 체온이 높은 것 같았다.
상대적으로 내 손이 차가운 탓도 있겠지만.
“손이 차다. 얼굴에서는 전혀 티가 안 났는데. 내가 잘못 안 줄 알았어.”
예상한 대로 눈치채고 걱정했었나 보다.
역시 내 제자는 배려심이 깊은 착한 학생이었다.
“내가 스테일메이트를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네가 웃었잖아? 그때, 어딘지 내 스승님과 닮아 보였어.”
내가 웃는 걸 보고 반응한 건 그냥 수상해 보여서가 아니었나.
염준열의 스승으로서 만날 때는 늘 염준열의 모습에다 까마귀 가면을 썼는데.
대체 어디가 닮아 보였던 걸까.
* * *
그 자리에서 상패와 상금을 받아, ‘수상한 부반장 조의신’은 무사히 수상을 마쳤다.
관객들을 위해 공간술을 사용해 클로징 쇼를 한 용제건.
용제건은 내가 반 아이들과 합류하기 전, 디바이스 코드를 건네며 말했다.
“두고 싶을 때, 언제든지 부실을 찾아오거나 연락하렴.”
그렇게 말하며 용제건은 잘생긴 얼굴을 이상한 모양으로 바꾸고 웃었다.
저 표정은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아직 유저들이 좀 남아 있던 시절, 용쌤의 팬들도 ‘이건 좀 아닌 듯’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특유의 황홀해하는 표정이었다.
‘염준열의 디바이스 코드도 받았으니…… 주소록에 진족과 후예가 늘었구나.’
아직 내 체스 트라우마는 전부 극복하지 못했다.
이걸 털어 내기 위해서라도 체스를 계속 둘 필요가 있으니, 가끔 둘에게 대국을 신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수상한 의신이가 수상했어! 축하해!”
“하하하하! 그래, 조의신. 지금도 수상하다!”
반 아이들과 약속한 곳에 도착하니, 김유리와 황지호가 환영해 줬다.
김유리가 하는 말은 순수한 축하 인사로 들려 마냥 기쁜데, 처웃으며 말하는 황지호의 말은 좀 거슬렸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NPC의 차이일까? 아니면 그냥 황지호가 하는 말이라서 그런 걸까.’
둘 다일 가능성이 크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응원하러 온 황지호에게 고마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축하해, 의신아!”
“축하드려요!”
“축하한다.”
다른 아이들도 차례차례 축하 인사를 해 왔다.
“고마워.”
우승한 나보다 더 기뻐해 주는 걸 보니,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감사의 말이 나왔다.
“소고기 먹으러 가자. 예약해 뒀어.”
이 말에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네? 승패가 정해지기 전부터 예약해 두신 거예요?”
“부반장, 이길 걸 알고 예약한 거냐!”
“하하, 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어떻게 하긴, 져도 너희 소고기 먹이려고 그랬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예약한 고깃집을 향해 걸어갔다.
고깃집에 도착할 즈음에는 두통이 씻은 듯 사라지고, 손에도 온기가 돌아와 있었다.
* * *
한편, 조의신보다 먼저 체스대회장을 빠져나간 염준열.
염준열은 미리 준비한 정장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겠네.’
붉은 사자와 용족은 내일 있을 선상 파티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오늘 주오와 TC 그룹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만찬을 하기로 했다.
체스대회도 있으니 만찬을 빠지고 대신 선상 파티에 참석할까 고민했지만 용족도, 붉은 사자 팀원들도, 가족들도 전부 반대했다.
‘스승님도 반대하셨으니까 어쩔 수 없어. 얌전히 만찬에 가자.’
만찬 장소는 TC 그룹 소유인 에어 호텔 ‘스노우 앤 에어’ 최상층.
홀 입구에서 염준열을 기다리는 이들이 보였다.
“준열아, 왔니.”
염준열이 결승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들.
용족, 인간 가릴 것 없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염준열이 졌다는 믿기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이기 벅찬 그들.
하지만 자신들의 격한 반응에 염준열이 상처를 받을까 봐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염준열도 태연한 척하기로 했다.
“네, 다녀왔어요.”
용족의 수장, 청룡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곤 물었다.
“용제건은?”
“오늘은 체스대회 정리도 해야 하고, 스테일메이트 스태프와 뒤풀이도 가느라 오기 어렵대요.”
어색하지만, 서로를 위하는 미묘한 분위기 속.
잠실 야구장에 있던 각 그룹의 차기 총수 일가와 인사를 나누며 만찬이 시작됐다.
‘음, 맛이 안 느껴지네.’
전복소스 상어꼬리지느러미찜.
소흥황주로 고아 낸 불도장.
그 외의 메뉴들도 전부 맛있게 보이는데, 막상 먹으니 이상하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력으로 노렸던 우승도, 차선책으로 택한 스테일메이트도 후배 조의신 때문에 완전히 무너진 탓일까.
‘스승님께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충격이 컸던 건지, 자꾸 웃고 있는 조의신의 모습과 스승님이 겹쳐서 떠올랐다.
‘안 되겠다. 바람이라도 쐬고 오자.’
염준열은 적당히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
몇 명은 대놓고 걱정스러워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무언으로 이루어진 격렬한 커뮤니케이션 끝에 지금은 염준열을 혼자 두자는 결론이 났다.
그렇게 혼자가 된 염준열.
에어 호텔 라운지에서 탁 트인 야경을 봐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오늘은 한 층 다 빌린 건가. 호텔 라운지에 아무도 없네.’
창밖을 내려다보며 조의신과의 체스 대국을 머릿속으로 복기하고 있을 때.
“안녕.”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방금까지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진족이다.’
진명을 가진 진족과 후예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진족 중 어느 종족인 것까진 알 수 없었지만.
“후후, 역시 그 아이보다 미숙해 보이는구나.”
그 아이?
누구를 말하는 걸까.
한창 패배의 쓴맛을 보고 있는데 미숙하네 어쩌네 하니 조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얘기하고 싶은데, 따라와 주겠느냐?”
진족 여성이 고혹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염준열은 별 고민 없이 단호하게 답변했다.
“안 돼요. 제 스승님께서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당부하셔서요.”
염준열은 스승의 말을 잘 따르는 착한 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