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07)
황명호 대저택.
창문 하나가 소리 없이 열렸다.
저택의 주인, 황호의 부재를 틈타 해제된 결계 속에서 적호가 나타났다.
적호는 창밖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적연을 발동해 소리 없이 착지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스킬 발동과 동시에 몸이 시큰거렸다.
‘아직 완치되지는 않았지만, 몸도 움직이고 스킬도 발동 가능해. 본격적인 전투는 어렵겠지만, 황호를 보조하는 정도는 괜찮을 거다.’
황호는 적호가 작전에 참여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적호는 황호의 말을 따르는 체했지만, 기회를 엿봐 합류할 생각이었다.
‘상보심금파의 갈래…… 고통에 익숙한 나도 참기 힘들었다. 여차하면 내가 방패 역할을 하는 게 좋겠지.’
친우인 황호나, 은인인 조의신이 그 고통을 맛보게 되는 건 싫었다.
물론 달토끼가 당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왕!
미로정원으로 향하던 적호 앞에 신수가 나타났다.
견족의 모습을 빌린 앙증맞은 생김새는 여전했지만, 날이 갈수록 신력을 더해 가는 신수 올무.
신수가 가로막으면 일이 번잡해질 수도 있었다.
적호는 신수에게 정중히 청했다.
“신수, 부디 모르는 척해 주시겠습니까?”
왕왕!
신수는 단호히 짖었다.
적호는 백호처럼 신수의 의사를 능숙하게 읽어 내지 못했지만, 신수가 반대하는 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신수도 다친 적호가 밖으로 나가는 걸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적호는 신수를 회유하기로 했다.
“제가 가는 건 황호에게도, 조의신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신수는 황호와는 사이가 미묘하지만, 조의신을 아주 잘 따른다.
조의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이면 신수도 납득할 거다.
……끄응.
예상대로 신수가 망설이기 시작했다.
신수가 주저하는 사이에 적호는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그 앞을 백호가 막아섰다.
“…….”
말없이 서 있는 백호.
그는 적호를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게 해 주십시오, 백호. 당신도 황호와 조의신을 걱정하지 않습니까.”
“다친 네가 가면 짐이 된다.”
“제 스킬을 쓰면 짐은 되지 않을 겁니다. 큰 도움은 되지 못하더라도, 저는―”
말꼬리를 흐리는 적호.
백호는 여전히 싸늘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둘은 계속 네 걱정을 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네가 가면 마음의 짐이 된다.”
백호의 말에 적호는 잠깐 흔들렸지만, 그런 둘을 위해 합류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졌다.
“전 가겠습니다. 힘으로 저를 막으실 생각입니까?”
“…….”
“힘으로는 당신에게 견줄 수 없지만, 당신은 은광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몸입니다.”
신역의 수인인 백호는 은광구 밖으로 나가면 강력한 페널티를 받는다.
그걸 감수하며 밖으로 나가면 능력치가 떨어져 적호를 붙잡기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은광구 밖으로 나가면, 백호는 따라올 수 없어.’
스으으―!
통증을 참고, 이능파를 끌어올리는 적호.
적연 스킬을 발동하기 직전, 백호가 한마디 했다.
“네가 저택 밖으로 나가면 그 아이를 부르겠다.”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게 되묻는 적호의 머릿속엔 제 아들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적호는 어느새 스킬 발동도 멈추고 굳어 있었다.
“너와 닮은 그 아이 말이다.”
적호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적호가 어디에 갔는지 알게 되면, 그 말썽꾸러기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자리에 올 게 뻔했다.
웅족이 올지도 모르는 위험한 자리에 아들을 불러낼 수는 없었다.
“백호, 당신은 가고 싶지 않습니까?”
백호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답변을 했다.
“들어와라, 적호. 체스라도 두지.”
백호와 체스.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적호가 조금 놀랐을 때.
왕왕!
신수가 어서 가자며 적호의 주위를 빙글빙글 뛰어다니다 백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저택 현관을 향해 가는 백호와 신수.
적호는 머뭇거리다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 * *
주오 그룹과 TC 그룹이 개최하는 합동 선상 파티.
선상 파티가 개최되는 크루즈선 ‘키모폴레이아’는 TC 그룹 소유.
그리고 현재 배가 향하는 목적지인 주오 아일랜드는 주오 그룹 소유의 섬이었다.
‘주오 그룹이 무인도를 입찰해 리조트를 세우고, VIP 전용 숙박지로 쓰고 있다고 했지.’
예전에 있던 세계, 한국이 실제로 관리, 통제 능력을 가지고 통치하는 실효 지배 중인 영토의 내부.
그 영토 안에는 섬이 3,358곳이 있었다.
그중 유인도는 482개.
무인도는 2,876개.
그 무인도 중, 1,270개의 섬이 사유지에 해당했고, 그러한 무인도는 거래가 가능했었다.
‘그래도 사는 사람은 없었지만.’
개발 제한이 걸려 있거나.
환경부 지정 특정 도서에 해당하거나.
용도 지정상 절대보전과 준보전에 해당하는 등.
예전 세계의 한국에선 기껏 섬을 사도 집 하나 세우기 어려운 데다, 향후 시세차익을 통한 이득도 기대할 수 없어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계 충돌이 일어난 이 세계는 달랐다.
‘정부와 플레이어 협회의 예산에는 한계가 있어. 인구가 적거나 아예 없는 지역에도 이계는 발생하는데, 인력 배치가 어려우니 자본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지.’
정부는 해양수산부와 환경부, 이계부를 중심으로 무인도서의 보전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정비했다.
그 결과, 몇 개의 조건을 덧붙여 무인도의 개발을 허용하기로 했다.
대표적인 조건은 하루 10시간 이상 상주하는 프로 플레이어 팀을 고용하고, 해당 지역 내 이계 발생 시 적극적으로 지원에 응할 것.
이렇게 섬 규제가 풀려 무인도의 개발이 가능해지자, 몇몇 기업과 갑부들은 무인도 입찰에 나섰다.
지금 키모폴레이아가 향하는 주오 아일랜드도 그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배가 그 남해안 쪽에 있는 주오 아일랜드 리조트에 간다는 거냐?”
주수혁의 설명을 듣던 맹효돈이 되물었다.
“요약하면 그래. 갈라 디너, 달맞이 칵테일파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항해할 예정이니까 도착하는 건 아침이야.”
“그러냐. 항해하는 기분은 전혀 안 나는데.”
맹효돈은 스위트룸을 둘러보며 말했다.
말이 선실이지 거실과 다이닝 룸, 침실이 분리된 이곳.
바닥 전체에 깔린 푹신한 미세 원사 러그와 전동 리클라이너 소파.
벽에는 초고화질 스크린과 개인 금고, 우리에게 배정된 개별 버틀러를 부르기 위한 전용 벨도 설치되어 있었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면, 맹효돈 말대로 항해한다기보다는 호텔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을 거다.
‘학생인 우리한테 오션뷰 스위트룸이라니. 주오와 TC에서 신경 써 줬구나.’
주수혁의 친구인 데다 잠실 야구장 사건에서 대활약한 플레이어니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 방을 쓰기로 한 건 나랑 부반장이랑, 그…… 장남욱이란 잔소리 많은 사관학교 놈 셋이던데. 너는 어느 방이냐?”
“음…… 가족들이 같이 왔으니까, 그쪽에 배정됐는데, 거기 갈 생각은 없어. 인사는 배에 타기 전에 마쳤으니까 너희랑 같이 계속 놀래.”
주수혁과 도원우, 도시후는 각자 가족과 함께 선실이 배정되었나 보다.
‘주수혁이 그쪽에 갈 생각이 없다고? 옷을 버리기 전에 미리 인사를 다 마치고 온 거구나.’
타이틀 히어로는 역시 용의주도했다.
일정에 관해 얘기하던 중, 벨소리가 들렸다.
딩동―!
디바이스와 연동된 인터폰 앱을 실행하니, 홀로그램으로 사관학교의 수석과 차석인 도시후와 장남욱, 그리고 은광고의 학생회장 도원우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 왔다, 열어 줘!]
화면 너머로 도시후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승인 버튼을 누르자, 곧 외부와 이어진 자동문이 열렸다.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지! 오랜만이다!”
“안녕, 의신아, 수혁아, 효돈아. 다들 여기서 보게 돼서 기쁘다. 잠깐, 효돈이 너 타이가 조금 어긋나 있는데, 거울 보고 다시 매고 오는 게 어떻겠니.”
턱시도를 빼입은 세 사람이 등장했다.
도시후와 장남욱이 평소처럼 인사를 마쳤지만, 도원우는 문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막 도착한 셋 중에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이자 연장자답게 턱시도가 가장 잘 어울렸지만, 제일 추한 눈을 하고 있었다.
“……안녕.”
도시후와 장남욱은 인사에 이어 나한테 체스대회 우승 축하 인사도 전했다.
도원우는 다시 추하게 머뭇거리다 축하 인사를 했다.
그날 그 자리에 유상희가 날 응원하러 왔고, 그녀가 응원한 내가 또 우승했으니 몹시 거슬리나 보다.
“……축하한다.”
도원우는 추한 눈을 하고 있지만, 축하 인사를 해 줬으니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원우 형, 인사는 다 마치셨어요? 학생회 업무 때문에 늦게 오셨다고 들었는데.”
“그래, 바로 가 봐야 해. 그런데 시후가…….”
“단체 사진 찍고 싶어서 끌고 왔어. 이렇게 빼입고 모이기 힘들잖아.”
도원우는 바쁜 와중에 도시후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여기까지 왔나 보다.
“그럼 찍는다!”
도시후의 주도로, 바다가 훤히 보이는 전면 유리창을 배경으로 찍은 우리 여섯 명의 사진.
도시후와 주수혁은 자연스러웠지만, 장남욱과 맹효돈은 뻣뻣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까진 나쁘지 않았지만, 도원우가 내 쪽으로 추한 시선을 보내는 게 찍히는 바람에 세 번은 더 다시 찍어야 했다.
“원우 형…….”
“그럼 난 가 볼게.”
도시후가 짠한 눈으로 바라보는 걸 무시하고 가 버린 도원우.
도원우가 사라지자 출항을 알리는 아나운스와 함께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출항한다!”
장남욱과 맹효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달려갔다.
“이거 창문은 안 열리냐.”
“아, 디바이스로 제어할 수 있을 거야. 잠깐만.”
장남욱이 홀로그램을 켜니, 크루즈 십의 맵과 함께 스위트룸 제어 앱이 떴다.
곧 창문 너머 풍경이 서서히 움직이고, 두 사람은 환성을 지르며 바닷바람을 맞았다.
둘 다 항해를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 * *
“안내는 내가 할게. 몇 번 와 봐서 기억하고 있어.”
주수혁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 다섯은 배 구경을 시작했다.
가장 좋은 조망의 최상층 라운지.
오션뷰 바와 레스토랑, 천연 잔디가 깔린 덱 위의 카페.
실외 수영장과 일광욕장, 스파.
오락실과 아트 갤러리, 도서관, 영화관.
그 외에도 위치에 따라, 다른 경치를 즐길 수 있도록 여러 곳에 라운지와 카페가 설치되어 있었다.
장남욱과 맹효돈은 크루즈 십의 맵을 체크하며 계속 감탄사를 터뜨렸다.
한편, 우리 중에 항해를 즐기지 못하는 이가 한 명 있었다.
“죽을 것 같아…….”
새파래진 얼굴의 도시후.
도시후는 뱃멀미를 하나 보다.
플레이어는 신체 능력이 우수하다 보니 멀미를 겪는 일도 적은데, 가끔 이런 예외가 있긴 했다.
대체로 지적 능력이 우수한 플레이어 중에 짱돌 맹효돈 같은 예외가 있는 것처럼.
“선내에 의료 시설도 있는데, 멀미약 받으러 가자!”
“아니, 먹는 멀미약은 방향 감각이 없어지고, 붙이는 타입은 동공이 확장되잖아. 그 상태로 전기술을 쓰면 눈 버려. 멀미약은 치명적이야.”
장남욱의 걱정에도 도시후가 고개를 저었다.
도시후의 지금 꼴을 보니 뱃멀미 자체도 충분히 치명적인 것 같은데.
“시후가 선상 파티를 엄청나게 기대하길래 뱃멀미는 극복한 줄 알았는데.”
“하하하, 너희랑 놀러 가는 건 기대하고 있었어.”
주수혁의 말에 아직 웃는 도시후.
여유가 있나 보다.
그때, 도시후가 뭔가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토 나오는 토요일!”
설마 저걸 말장난이라고 친 건가.
아무도 웃지 않자 도시후는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 나는 전용 메뉴를 열어 ‘주변 지도 열기’ 기능을 한번 사용했다.
미니맵은 대부분 채워져 있었다.
‘이쯤 돌아봤으면 됐나.’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갈라 디너가 시작될 때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까 쉬자. 우리 방으로 갈까?”
“그러자.”
“……응.”
힘없이 걷는 도시후를 주수혁과 장남욱이 양옆에서 부축했다.
도시후는 그 와중에도 허무한 말장난을 시도하다, 무반응에 시무룩해하는 걸 반복했다.
아직 기운이 남아 있나 보다.
그런 도시후를 보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원우가 어른들께 인사 다니는데 왜 도시후는 가지 않는 거지? 도시후도 늦게 도착했는데.’
뱃멀미 때문에 그런 건가.
* * *
갈라 디너 시간까지 쉬던 우리는 시간이 되자 중앙 메인 다이닝 홀로 이동했다.
3층 복층으로 된 거대한 다이닝 홀, 그 입구엔 키모폴레이아의 선장과 주요 선원들이 서 있었다.
“자, 가자.”
우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입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