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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12화 (112/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12)

‘진족……?’

붉은 드레스를 입은 진족은 망사 베일을 쓰고 있어 보이는 것은 입술과 턱선뿐이었다.

그뿐인데도, 진홍색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뉘, 뉘시오!”

안하무인, 방약무인한 저강렵이 저도 모르게 말을 높였다.

그녀는 답하지 않고 한 발씩 저강렵에게 다가왔다.

“크흠, 보다시피 지금 이 몸은 좀 곤란한 상태라오. 나를 도우면 보상을 해 주겠소!”

“보상?”

은쟁반 위로 홍옥을 굴리면 이러한 소리가 날까.

그녀의 짧은 한마디에 저강렵은 침을 꿀꺽 삼키곤 말했다.

“그, 그렇소! 나는 영물 중의 영물, 저…….”

저강렵이 이름을 밝히려 하자 그녀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이능파를 머금은 그녀의 손가락이 저강렵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스치고 가자, 입술이 딱 달라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이게 무슨……!’

저강렵이 몸속의 이능파를 끌어올려 저항하려 했지만, 갈래로 인해 폭주하는 이능파를 진정시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지혈해 둔 복부로 향했다.

손끝으로 상처를 매만지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홉 갈래가 아니네.”

그녀의 단정한 손톱이 붉고 길게 변해 갔다.

‘자, 잠깐. 아홉 갈래라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저강렵은 도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톱이 스치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홉 갈래로 찢겨 있어도 새로 찢을 생각이었지만.”

촤아악!

그녀의 손이 저강렵의 배를 헤집기 시작했다.

저강렵은 입술이 봉해진 탓에 소리도 못 지르고 격통 속에 몸부림쳤다.

촤악! 퍽! 촤아악!

정확하게 아홉 번의 난도질이 끝나자, 그녀가 손을 뽑아냈다.

사전에 이능파로 몸을 감싸고 있던 건지 그녀의 새하얀 손끝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대체…… 왜!’

저강렵은 기절도 못 하고 벌벌 떨었지만, 그녀는 저강렵의 디바이스를 부수며 웃었다.

“이 섬은 지금 좌표 조작이 되어 있어. 당신이 부하에게 보냈던 좌표는 여기와 한참 떨어진 무인도야. 후후후, 당신의 부하가 얼마 만에 여기로 찾아와 줄까.”

저강렵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진족은 자체 회복 능력이 있지만, 저강렵의 손상 정도는 심각했고 주변에는 마땅한 에너지원도 없었다.

부하가 픽업해 주길 기대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한반도에 있는 섬은 3천 개가 넘는다.

부하들이 저강렵을 찾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몸 상태만 만전이었으면, 아니 그 고물 쇠스랑만 있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진 않았을 텐데!’

저강렵은 몸을 꿈틀거리며 그녀에게 애원해 보려 했지만, 그녀는 입꼬리를 당기며 기쁘게 웃기만 했다.

달이 위치를 크게 바꿀 때까지 굼적거리는 저강렵을 지켜본 후에야 그녀는 만족하고 발을 돌렸다.

“후후후.”

소리를 낮춰 웃곤 바닷바람에 붉은 드레스 자락을 휘휘 날리며 걷는 그녀.

바다를 박차고 섬을 몇 개 건넜을 때.

그녀는 기척을 느끼곤 발걸음을 멈췄다.

“관전을 허락해 줘서 고마워, 비탄의 웅녀.”

비탄의 웅녀에게 말을 걸어온 건 7대 죄악의 마신 인비디우스의 사제였다.

마족의 로브에도, 이마에도 새긴 인비디우스의 인장이 눈에 띄었다.

“돼지는 당신과도 거래했다고 들었는데. 돕지 않아도 괜찮겠어?”

“저강렵이 제안한 오만한 거래는 끝났어. 내가 직접 뽑아낸 이능독은 잘 넘겨줬으니까, 그 이상 해 줄 의리는 없어.”

비탄의 웅녀는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툴툴거리는 인비디우스의 사제를 바라봤다.

저강렵을 좌표 조작이 된 섬으로 유도하고, 그 위치를 비탄의 웅녀에게 알린 인비디우스의 사제.

오늘 있었던 거래를 전부 성사시킨 것치고 마족은 무척 불만스러워 보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 있었어?”

최근 인간계를 관음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는 마족들.

그들이 거래의 대가로 받은 건 ‘관전의 허가’였다.

비탄의 웅녀의 말에 마족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 상위 존재 때문에 그래! 당신과 친한 ‘지우는 곰탱이’가 가린 거지! 어느 순간부터 갑판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어. 까마귀 가면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못 봤다고!”

마족의 몸에서 불규칙하게 이능파가 뿜어져 나와, 로브가 회색으로 바뀌었다.

“근처에 12지의 수장이 둘이나 있는 바람에 ‘제3의 눈’의 출력을 올릴 수도 없었고! 돼지와 한 거래는 완전 실패야. 까마귀 가면을 관찰할 수 있던 건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지만.”

가만히 듣고 있는 비탄의 웅녀를 향해 마족이 물었다.

“비탄의 웅녀, 어떻게 오늘 저강렵이 당하리라는 걸 알았어? 또 왜 저강렵을 그렇게 만든 거야?”

마족의 질문에 비탄의 웅녀가 붉은 드레스 자락 끝을 움켜쥐며 답했다.

“‘그’가 다칠 때마다 언제, 어디에서, 왜 다쳤는지 알려 주기로 약속하신 상위 존재가 있어.”

“그?”

“계시를 받고 어떻게 움직일까, 고민하던 중에 상위 존재께서 귀띔을 해 주셨지.”

까마귀 가면이 이번에 사용하려 했던 아이템이 상위 존재와 이어져 있던 덕분에 비탄의 웅녀는 계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적호의 목숨을 두고 자신과 약속을 나눈 적벽괴도, 까마귀 가면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 까마귀 가면 대신 붉은 눈을 한 반려가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가 받은 고통을 돌려주고 싶었어. 그를 괴롭히는 건 천신과 나, 둘만으로도 충분해.”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의 대화가 끊겼다.

마족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비탄의 웅녀가 작별을 고했다.

“그럼 나는 가 볼게, 사제 씨.”

마족은 아직 비탄의 웅녀에게 궁금한 게 많았지만, 더 물으면 그녀와 인연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질문을 아끼기로 했다.

파아아.

비탄의 웅녀가 신은 붉은 구두의 굽이 수면을 밟자 그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정체를 감추는 드레스도 바다를 넘는 구두도 전부 그녀가 만든 거라고 했지. 굉장해!’

진웅팔선 최고의 아이템 제작자의 작품답다며 마족이 속으로 감탄했다.

그녀가 착용한 아이템을 떠올리다, 마족은 문득 생각했다.

‘비탄의 웅녀는 붉은색이 아주 잘 어울려. 그렇게 색이 잘 받는데, 왜 평소에는 입지 않는 걸까.’

다음에 만날 때도 비탄의 웅녀가 붉은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마족은 오늘 본 구경거리를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오늘 감상한 볼거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느 인간의 활약상이었다.

‘까마귀 가면…….’

인간에 불과한 까마귀 가면이 무슨 조화인지 저강렵을 잡고, 상보심금파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자신을 비롯해 수많은 마족이 지켜봤다.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들뜬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까마귀 가면을 노리는 녀석들이 많아지겠네, 어쩌지!”

*    *    *

까마귀 가면과 음성 변조기, 넝마가 된 옷을 아이템창에 넣은 후.

느루에서 맞춘 턱시도로 갈아입고 후미를 향하며 플레이어SAT―K가 공개한 이계 공략 정보를 확인했다.

‘최대 공헌자가 강철의 쐐기 도원우?’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최대 공헌자가 되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조금 마음에 걸렸다.

‘주수혁의 스승과 사형, 곽 사범과 주수겸이 공격대로 들어갔을 테니 공헌도 올리기가 어려웠을 텐데.’

특히 주수혁의 육촌 형이자 사형이기도 한 주수겸.

게임 속에서 주수혁이 전력을 다해 대련하는 상대 중 하나로 꼽히곤 했었다.

내 의문은 배의 후미에 도착하자마자 풀렸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찮아.”

“피가 그렇게 났는데 어디가 괜찮은 건데요!”

드레스 끝단이 찢어져 있는 오혜지.

턱시도 셔츠가 피로 젖어 있는 주수겸.

주수겸을 살피는 키모폴레이아의 선의.

저들을 보니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이계 공략 중에 오혜지를 감싸다가 주수겸이 다친 거구나.’

오혜지가 움직이기 불편한 미묘한 길이의 티 랭스 드레스를 입은 탓에 실수했나 보다.

‘주수혁하고 맹효돈은 어디 갔지.’

주수혁은 보이지 않았지만, 맹효돈은 금방 찾았다.

“그러니까 단전을 지나가는 기의 흐름을 따라서 정제된 이능파를 이동시키고…….”

맹효돈이 웬 한복 차림의 도인에게 붙잡혀 있었다.

맹효돈은 유보 갑판 한구석에서 영혼 없는 얼굴로 한복 도인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저 꼴을 보니 맹효돈은 길 가다 ‘도를 아십니까’에 붙잡히면 호구처럼 다 들어 줄 것 같다.

“야.”

도인이 잠깐 말을 멈춘 틈을 노려 말을 거니, 맹효돈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쪽으로 도망쳤다.

“부반장! 뭐 하다가 이제 왔냐.”

맹효돈은 이계 공략 내내 나타나지 않은 내게 불평을 하면서도 반가워했다.

한복 도인의 강의가 아주 지겨웠나 보다.

“아, 진짜 주수혁 지인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도망쳤을…… 억.”

휙!

“잠깐, 어딜 가! 얘기는 다 듣고 가야지!”

한복 도인이 포기하지 않고 쫓아와 맹효돈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맹효돈을 따라붙는 발놀림이 보통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맹효돈이 질린 얼굴을 할 때.

“탁 형, 학생한테 무슨 볼일이십니까.”

“아니, 그러니까, 저…….”

“이계 공략을 막 마친 학생입니다. 할 얘기가 있더라도 천천히 하셔야죠.”

“너는 쓸 만한 제자 놈이 많으니까 여유가 있겠지!”

“네, 네. 나중에 얘기합시다. 학생들은 들어가 봐도 돼. 뒤처리는 우리가 할게.”

상황을 진정시킨 건 주수혁의 스승 곽 사범이었다.

‘곽 사범의 친구라는 게 이 도인이었나.’

탁씨가 연상인 것 같은데, 어째 곽 사범이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한복 도인 탁씨가 계속 아쉬워하는 눈으로 맹효돈을 바라봤지만, 곽 사범이 막는 사이 우리는 선실로 향하기로 했다.

“앞으로 저런 사람한테 붙잡히면 ‘도 안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튀어.”

“그게 뭔 소리야.”

맹효돈에게 잡상인과 사이비의 집요함에 대해서 일러 주는 사이, 주수혁이 합류했다.

주수혁은 사촌 여동생인 주수리를 만나고 왔다 했다.

“수리가 이번 일로 조금 놀란 것 같아서 달래 주고 왔어.”

게임 속 주수리는 야구장 사건으로 악플에 시달려서 항상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주수혁이 하는 얘기를 들어 보니 평범한 응석받이 친척 동생으로 자라는 중인 것 같다.

선실 근처로 다가가니, 복도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장남욱과 도시후가 보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의신이 너는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무명의 초신성이 토벌에 참여했다는 메시지가 안 올라와서 걱정했어. 무사해서 다행이다.”

“고생했어, 얘들아.”

우리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시작하는 장남욱.

뱃멀미가 가라앉았는지 한결 나아진 얼굴색을 한 도시후.

둘의 환영을 받으며 선실로 돌아왔다.

“그럼 전조 현상 없는 이계가 또 나타난 거네.”

각자 소파에 자리 잡은 우리 다섯.

주수혁과 맹효돈이 이계 공략 수비대로서 대활약을 했지만, 다들 마냥 좋아하지는 못했다.

“옛날에는 아예 위성이 없던 시절도 있었는데, 결국 잘해 왔잖아. 어떻게든 되겠지. 하하하!”

“이 새끼 말 들으니까 더 안심이 안 된다.”

“플레이어 협회도 조사 중이라니까 조만간 대책이 나오겠지.”

이 자리에서 말할 수는 없지만, 대책은 확실하게 준비 중이었다.

‘옥토연은 이번 사건으로 흑막의 ‘이계 부르기’를 또 가까이에서 관찰했어. 정밀도가 올라갔겠지. 협회와 기술 제휴만 되면 흑막의 수는 완전히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때, 디바이스로 선장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배 움직이는데. 이거 어디로 가는 거야?”

“회항 공지 떴다. 인천항으로 돌아간대.”

“전조 없는 이계에, 자연 이능파 방출 현상까지 겪었으니 어쩔 수 없지. 주오 아일랜드에 못 가게 돼서 아쉽다.”

“또 배가 움직이고, 흔들리겠구나.”

도시후는 벌써 뱃멀미가 오는지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도시후는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못했지만, 남은 넷은 인천항에 도착할 때까지 밤새 얘기를 나눴다.

주요 화제는 주수혁과 맹효돈의 에너미 소탕기.

둘은 광림을 실컷 써 가며 에너미를 제압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역시 근거리 공격 타입 사기캐 투 톱답네.’

전혀 활약하지 못한 장남욱은 씁쓸해하면서도 중간에 질문도 해 가며 열심히 경청했다.

경험담을 듣는 것도 장남욱의 성장에 도움이 될 거다.

‘장남욱은 여러 장성들 앞에서 작은 실수 한번 없이 매스게임을 지휘했어. 에너미에 대한 두려움만 떨쳐 내면 좋은 플레이어가 될 거야.’

대화 주제가 ‘왜 조의신은 나타나지 않았나’로 바뀌었을 때는 둘러대느라 고생했지만, 밤바다를 항해하며 밤을 지새우는 건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인천항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날이 밝았다.

협회의 요청에 따라 공략에 참여한 플레이어들은 협회로, 나머지는 귀가하게 되었다.

“다음에 주오 아일랜드는 꼭 가자. 내가 초대할게.”

“여름 방학 때 다 같이 가자! 이 멤버에 플러스알파로!”

“시후야, 또 배 타고 가야 할 텐데 괜찮겠어?”

땅을 밟자 도시후는 기운이 나는지, 파리한 얼굴로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저 태평한 놈의 약점은 뱃멀미뿐일지도 모르겠다.

‘에어 택시를 탈까.’

맹효돈은 협회에 갈 예정이라, 학교로 가는 건 나 혼자였다.

아이들과 인사를 마치고 에어 택시 정류장으로 향할 때.

“기다렸습니다.”

에어 리무진 앞.

가면을 쓴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황명호의 비서가 서 있었다.

“황호 님께서 저택으로 모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기 싫다.

얘기할 게 많긴 했다.

그러나 아직 생각도 정리되지 않았고 이능을 크게 쓴 탓에 지쳐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한숨도 안 잔 상태고, 황지호는 마지막에 헤어질 때 빡쳐 있었다.

‘내일 보면 안 되나.’

어떻게 약속을 미룰까 고민할 때.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은 비서가 한마디 덧붙였다.

“신수가 기다리는 중이라 합니다.”

“가죠.”

나는 바로 에어 리무진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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