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13)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규정 집행부 사무실.
사전에 ‘전조 없는 이계 현상’의 대략의 출현 시간과 위치를 제보받은 협회 플레이어들.
그들은 주말에도 출근해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제보를 확보한 인물, 며칠째 야근 중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멀끔한 차림을 한 홍규빈이 물었다.
“선배님. ‘전조 없는 이계 현상’의 관측 결과는 어떻죠?”
사용 가능한 리소스들을 모두 동원해 이계를 관측하고자 한 위성 관리팀.
그러나 위성 관리팀의 팀장 임지화가 팀원들로부터 받은 모든 보고서를 읽고선 고개를 저었다.
“실패야. 아무것도 못 찾았어.”
“아…….”
“누구 하나는 성공할 줄 알았는데.”
“울고 싶네요.”
“우리 퇴근 언제 해?”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나왔다.
임지화는 언더블라우스의 소매를 높이 걷어 올리며 물었다.
“호족의 수장이 제보해 준 ‘이능독’ 쪽은 어떻게 됐지? 관측됐어?”
“전혀요. ‘그 프로젝트’에서 끌어온 리소스로도 소용없었어요. 위성이 전혀 잡아내지 못하고 있어요.”
중앙 스크린에 키모폴레이아 위에서 관측된 힘의 흐름이 수치화되어 전개되었다.
모든 직원이 초조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봤지만, 이능독을 나타내는 수치는 찾을 수 없었다.
까마귀 가면이 사용한 SSR+++급 아이템의 발동으로 이능독이 사라지기 전후의 차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전조 없는 이계 현상, 이능독, 거기에 돈족의 수장까지……. 이거 완전 노답이네.”
“그 저팔계가 인류를 배신했다는 게 충격적이네요.”
“서유기에서도 완전 발암캐였잖아. 본색이 드러난 거네.”
“천봉원수에서 잘릴 때부터 엿 같았어. 서왕모 님이 개최한 반도대회(蟠桃大會)에서 월궁의 항아 님을 덮치려다가 돼지가 된 거 아냐.”
팀원들은 분노한 목소리로 저강렵을 깠다.
팀원들이 늘어져 있는 가운데, 임지화가 홍규빈에게 조용히 물었다.
“돈족의 수장을 격파한 저 까마귀 가면…… 진족이야? 아니면 후예?”
“제보자의 신상은 밝힐 수 없습니다.”
“으으음, 궁금한데. 어쩔 수 없지.”
까마귀 가면이 무명의 초신성 조의신이라는 걸 아는 건 협회 내에서도 세 명이었다.
홍규빈과 그의 부하 윤 대리와 정 사원.
홍규빈의 감으로는, 조의신의 정체를 많은 이가 알게 되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예지 스킬이 발동한 건 아니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홍규빈은 조의신이 제공하는 정보를 철저하게 관리했다.
최근 홍규빈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홍보 2팀의 팀장이 주변을 캐는 것 같아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의신아, 넌 대체 어디까지 알고, 어떻게 알고 움직이는 거니.’
이 세계는 천천히 새로운 위협과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대응책도 준비되고 있었다.
‘호족과 토족이 제안한 기술 제휴도 아마 의신이와 관련이 있겠지.’
그 바람에 야근이 끝나질 않지만.
“그러면 보도 방침을 정하죠.”
홍규빈은 다시 홀로그램 화면과 마주했다.
* * *
황명호 대저택 내부.
황지호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러 놓고 어서 오란 인사도 하지 않는 황지호.
‘실패할 가능성이 큰 작전을 말없이 실행해서 화가 났나.’
그래도 리스크에 비해 리턴이 훨씬 큰 작전이었는데.
응접실로 이동할 때까지 변명을 생각해 두는 게 좋겠다.
‘그 전에 우리 올무와 인사해야지.’
올무가 밝게 짖으며 내게 달려드는 걸 기다렸지만,
올무는 내가 선물한 매트 위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올무야?”
꼬리를 살랑이며 나를 올려다보는 올무.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꼬리를 빠르게 살랑이는 게, 내가 온 걸 기뻐하는 눈치인 올무.
하지만 우리 올무는 내 쪽으로 달려오지도, 안아 달라고 신호를 보내지도 않았다.
“자, 올무야.”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어 봤다.
끄응…….
올무가 내 손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헛것을 본 게 아닌가 해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지만, 여전히 올무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건 꿈일 거다.
나는 꿈을 꾸지 않는데, 왜 백일몽을 보는 걸까.
현실 도피를 하고 있을 때, 황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신수에게 전해 뒀지. 신수가 그렇게 슬퍼하고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원흉은 황지호였나 보다.
“신수는 네가 입은 부상을 고려해 귀찮게 굴지 않을 거다. 잘됐구나.”
“부상은 다 나았는데.”
“네 이능파가 평소보다 불안정해. 힘을 꽤 소모했잖아. 이건 신수도 느끼고 있겠지.”
우리 착한 올무가 나를 걱정해서 이러는가 보다.
올무의 깊은 뜻을 생각하니 기특하면서도 쓸쓸함이 사무쳤다.
어떻게 하면 올무를 안심시킬 수 있을까.
반쯤 공황 상태에 빠진 내 시야에 백호군이 나타났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라면, 나와 올무 사이를 잘 중재해 줄지도 몰라!’
그 기대는 금방 무너졌다.
“…….”
왕왕!
백호군이 손을 뻗자 냉큼 안기는 올무.
백호군은 올무를 안아 들고 응접실로 향했다.
충격적인 광경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서호, 이호와 재호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그 셋과 만나지 못할 겁니다. 이동하죠, 조의신.”
적호의 말에 충격은 더 커졌다.
오늘은 은호 삼 남매의 인사도, 올무의 애교도 없다.
그럼 나는 왜 여기에 온 건가.
회의를 느끼며 응접실에 발을 들였다.
‘전부 건강식이네.’
오늘의 차는 백단향 꿀차.
다과는 들깨가 통으로 들어간 현미강정.
그러나 내 앞에는 기묘한 색을 띠는 액체가 약탕기에 담겨 놓여 있었다.
옹기그릇도 있는 게 따라서 마시라는 모양이다.
‘먹고 죽으라는 건가. 왜 사약 같은 게 내 앞에 있지?’
약탕기에서 은근히 풍기는 향도 ‘맛이 없음’을 전력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올무가 킁킁거리다 작게 재채기를 하곤 백호군 품으로 파고들 정도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말해.”
내가 앉자마자 황지호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백단향은 화병을 다스리는 데에 효과가 있다지만 저놈한테는 안 통하는지 목소리에 노기가 실려 있었다.
‘변명은 안 하는 게 좋겠다.’
간결하게 내가 세운 작전의 상세를 설명했다.
차를 소리 없이 삼키며 내 말을 경청하는 호족 셋과 신수 하나.
내가 말을 모두 마치자, 황지호가 입을 열었다.
“아주 잘 알았다.”
“뭐를.”
“네가 조금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
그런 건 아니다.
빨리 사과하기로 했다.
“리스크가 있는 작전을 사전에 협의 없이 실행해서 미안해.”
“……조의신.”
황지호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입을 다물었다.
적호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황호는 더 화를 낼 겁니다.”
“적호, 그건 네가 할 소리가 아닌데.”
황지호가 노려보자 겸연쩍어하며 웃는 적호.
내가 적호 같은 실수를 한 건가.
하지만 적호와 나는 처지가 전혀 다른데.
“조의신, 너는 후예들을 구한 은인이다. 그리고 짧지만 교류를 쌓았어. 인간 중에 호족과 이만큼 가까운 이는 얼마 없어.”
황지호가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가락을 내린 후, 나를 봤다.
“네 몸을 아껴라.”
황지호가 겉치레로 저런 말을 하는 중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그래도 뭐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대답하지 않는 나를 보던 황지호가 턱짓했다.
“녹족(鹿族)에 의뢰해 만든 영약이다. 먹어라.”
녹족은 게임 상점에서 비밀 상점을 운영하던 사슴 일족을 말하는 것 같다.
게임 속에서 쓸데없이 복잡하고 귀찮고 긴 퀘스트를 해결하면 비밀 상점을 이용할 수 있었다.
황지호는 이미 연줄이 있는 모양이지만.
“인간인 조의신이 이 맛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안심해. 인간용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으니까.”
화면 밖에서 볼 땐 그냥 비싸고 좋은 영약 아이템이었는데.
냄새도 그렇고, 적호가 말하는 것도 그렇고.
이 녹족의 영약은 더럽게 맛없나 보다.
‘내 걱정 해서 준비해 준 거구나.’
고통에 익숙한 나라면 이 맛없음도 감당할 수 있겠지.
“고마워. 잘 마실게.”
그렇게 말하고 한 입 삼켰을 때.
나는 맛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맛이 이래! 독약인가!’
나도 모르게 뱉을 뻔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황지호가 나를 맛으로 죽이려 하는 것 같다.
왕왕!
응접실에서 죽 조용히 있던 올무가 처음으로 짖었다.
계속 마시라는 뜻 같다.
“다 마시면 다시 놀아 줄래?”
끄응…….
올무가 고민하는 것 같다.
이걸 다 마셔도 올무의 슬픔과 화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이 괴랄한 독극물을 전부 마시고 다음 수를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전부 마실게.”
왕……!
올무가 조금은 밝게 짖고 꼬리를 흔들었다.
올무 생각을 하니 이 맛없음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말 잘했다, 조의신.”
쾅!
황지호가 테이블 위에 금분이 들어간 종이 쇼핑백을 올려놨다.
일회용 파우치 안에 녹족의 영약과 같은 색의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네가 한 말대로 ‘전부’ 마셔라.”
그 전부라는 게 이거 한 잔이 아니었나!
경악하는 내게 황지호가 후속타를 날렸다.
“일주일 동안 매일 거르지 말고 먹도록. 신수와 한 약속을 어길 생각은 아니겠지?”
일주일 동안 사약을 먹게 생겼다.
굳은 내 모습을 보고 황지호가 만족한 얼굴로 웃었다.
망할 놈.
이후 향후의 대응에 관해 얘기하려 했지만, 들어가서 쉬라는 말을 들었다.
지쳐 있는 건 사실이고, 세상 맛없는 영약을 먹었더니 말할 기운이 나지 않긴 했다.
손에는 사약이 가득한 쇼핑백이 들려 있고, 올무가 나와 놀아 주지 않으니 더 기운이 떨어졌다.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기숙사 귀갓길 산책에 어울리던 백호군이 불쑥 말했다.
백호군도 나를 걱정했나 보다.
맥락 없이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문 백호군.
헤어질 때, 한마디 덧붙였다.
“다음에 볼 때는 신수도 기분을 풀 거다.”
그 말에 조금 기운이 났다.
‘황명호 대저택을 다녀오면, 매번 기숙사실이 넓어 보이네.’
내 기숙사 방.
아주 오랜만에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선상 파티에 황명호 대저택.
‘싸울 때를 제외하면 혼자 있을 시간이 없었지.’
그런 잡생각은 시스템 음을 듣자 금방 끝났다.
‹스킬 ‘운명력’이 발동했습니다.›
* * *
같은 시각.
지익회관 레크리에이션 룸.
박승현과 체육복 차림의 학생이 체스를 두고 있었다.
내일부터 스테일메이트에서 열릴 초보자 체스 강습에 참여하기 전, 예습하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응한 박승현.
간단한 오프닝을 하며 행마법부터 설명하던 때였다.
“그래. 폰은 바로 앞에 있는 말은 잡을 수 없어.”
박승현의 설명에 첨언을 하며 용제건이 등장했다.
“어, 용쌤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용쌤은 출퇴근하신다고 들었는데…… 아, 신록 쌤 뵈러 오셨나요?”
“하하, 오늘은 그냥 다른 볼일이 있어서.”
용제건은 박승현에게 물었다.
“승현아. 어제 계속 기숙사에 있었니?”
“네. 낮에는 지익회관 독서실에서 숙제했어요.”
“숙제하고 게임했음요. 화면 분할 모드로 같이 밤새워서 엔딩까지 달렸는데요.”
“그렇구나.”
박승현의 대답을 들은 용제건이 표정을 기묘하게 바꿨다.
많은 은광고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깬다’, ‘잘생긴 얼굴 그따위로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표현하는 용제건 특유의 황홀한 표정이었다.
“대답해 줘서 고마워. 그럼 가 볼게. 체스 강습 때 보자.”
용제건이 레크리에이션 룸을 나서려 하자, 여기저기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붙잡았다.
“좀 더 놀다 가시지. 어디 가세요?”
“또 물어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기숙사에요?”
용제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경구가 주말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해.”
용제건은 학생회에 속한 2학년 곽경구를 찾는 듯했다.
2학년 학생들이 곽경구의 위치를 말해 주자 용제건은 감사 인사를 하곤 홀연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