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14)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대처할 수 있게끔 플레이어의 궤적을 발동하고 기다릴 때.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라 점멸하기 시작했다.
‘아이템창 부분이 빛나고 있잖아.’
아이템창을 열자 정렬된 목록 중 번쩍이는 아이템명이 하나 보였다.
상보심금파.
돈족의 수장, 저강렵에게서 빼앗아 온 쇠스랑이었다.
‘설마 운명력이 노리는 건…….’
상보심금파 카드를 꺼내 실체화한 순간.
상보심금파의 아홉 개의 이빨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파앗!
강한 빛에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주변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
상보심금파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장소 같았다.
차이점이 하나 있었지만.
‘저건 뭐지?’
흐릿한 그림자가 눈앞에서 실체를 갖춰 가기 시작했다.
코끝까지 가리는 머리쓰개를 한 그림자.
도복에 새겨진 태극음양도.
손에 들고 있는 불진(拂塵).
그리고 이 상황.
정보를 모아 보니 그림자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도덕천존, 태상노군?”
내 말이 맞는지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팔괘로를 사용해 상보심금파를 만든 존재.
그 태상노군이 내게 할 말이 있나 보다.
‘존재감이 흐릿해.’
‘무명의 운명’을 건넨 하얀 그림자는 황지호의 해석을 이용했다.
아케아도 유상희의 광림을 빌렸고.
그나마도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지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붓고 사라진 게 다였다.
‘상보심금파라는 매개가 있긴 한데…….’
운명력 발동만으로는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건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황지호가 태상노군은 저강렵으로부터 상보심금파를 거두려 했다고 했었지.’
태상노군이 나를 찾아온 이유를 짐작해 물어보았다.
“상보심금파를 거두기 위해 오셨습니까?”
태상노군이 고개를 저었다.
상보심금파 때문에 찾아온 건 맞는 것 같은데.
“제가 해야 하는 일이 있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태상노군.
그는 불진을 들어 올려 상보심금파를 한 번, 내 귀를 한 번 번갈아 가리켰다.
상보심금파, 귀.
그 동작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파앗!
그사이에 시간제한이 끝났는지, 나는 다시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운명력의 발동은 끝났지만, 상보심금파를 들고 계속 생각에 잠겼다.
‘태상노군은 내가 상보심금파의 목소리를 듣길 바라는 것 같은데.’
상보심금파를 들고 기다려 봤다.
하지만 반응이 없다.
단순한 무기인 것 같다.
‘설마 그 상황을 재현해야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걸까.’
상보심금파의 목소리가 들린 건, 갈래가 발동한 이빨이 내 배를 꿰뚫은 순간이었다.
‘곽경구의 광림 ‘100초의 은총’을 발동한 채로 찌르면 되겠지.’
실행에 옮길까 고민하던 중.
녹족의 영약이 가득한 금분 종이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자해는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 * *
월요일 아침.
훈련, 식사를 모두 마친 후.
영약인지 사약인지 모를 액체가 들어간 파우치를 중탕하고 있자니,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 맛없는 걸 주중 첫날부터 먹어야 하나.’
지퍼식 일회용 파우치를 개봉해 내용물을 비우며 다시 맛의 심연을 엿보았다.
지옥의 늪을 떠 마시면 이런 기분이 들까.
‘앞으로 일주일.’
호족의 수장이 준 녹족의 영약.
몸에 좋지 않을 리가 없는데, 맛이 실종된 탓에 상태 이상에 걸릴 것 같다.
기분 전환을 할 겸, 홀로그램을 전개해 신문 기사를 읽으며 등교했다.
‘선상 파티 사건이 기사로 떴구나.’
올해 두 번째인 전조 없는 이계 현상.
강력한 자연 이능파의 방출.
그로 인한 기록 기기의 고장 현상.
플레이어 협회가 내린 특정 해로 사용 금지 권고.
대중이 패닉을 일으킬 만한 헤드라인이 곳곳에 보였다.
댓글을 확인하니, SR급 이상의 이계를 사전에 잡아내지 못한 협회를 까는 사람도 많았다.
‘협회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는 정도라면, 이런 댓글이 있는 편이 나아.’
협회 측이 ‘이계 부르기’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 흑막을 방심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또 더 주목받고 있는 기사도 있고…….’
포털 1면을 차지한 주오 그룹과 TC 그룹의 공동 프로젝트 발표.
흑막이 일으킨 사건 탓에 묻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건 덕에 더 크게 주목받게 된 것 같다.
공격대로 들어간 플레이어 한 명이 경상을 입은 걸 제외하면 일반인 피해자도 없는 덕일까.
댓글 대부분이 공동 프로젝트의 응원과 키모폴레이아의 무사 귀항을 축하하는 내용이었다.
‘긍정적인 소식 쪽이 더 주목을 받아서 다행이야. 홍규빈이 보도 방침을 잘 조정한 덕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이건 좀 의외네.’
은광고의 유명 학생 플레이어, ‘강철의 쐐기’ 도원우.
잠실 야구장에 이어 선상 파티에서도 공격대로 활약한 그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곳에 달린 댓글들이 매우 의외였다.
[왜 우리 학교는 이런 학생회장이 없음???]
[은광고로 전학 가고 싶다……. 난 못 가니까 원우가 전학 와 줘 ㅠㅠ…….]
[만화를 찢고 나옴. 진심;;; 얼굴, 공부, 이능, 배경, 성격 다 잘난 만화 속 명문고 학생회장 그 자체. 몇 번 파 봤는데 미담만 나옴ㅎ.]
[엄친아라는 개념이 인간화한 무언가임. 다 가지고 태어남.]
[↑엄마 친구 중에 재벌이 없으므로 무효.]
[TC 그룹 소문 들어 보면 완전 개판인데. 얘는 왜 이럼?]
[↑읍읍읍! (대충 고소 각도기 재자는 내용)]
‘추하다는 말이 한 줄도 없잖아!’
게임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접할 때도 추함을 느끼지 못하긴 했다.
‘유상희 앞에서도 저 이미지를 유지하면 좀 호감도가 오를 텐데.’
타이틀 히어로인 주수혁도 안다인 앞에서는 몇 번 망가지는 판이니, 힘들겠지만.
* * *
1학년 0반 교실.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먼저 등교해서 기다리던 황지호가 내 쪽으로 척척 걸어왔다.
무표정으로 몇 초 동안 나를 보던 황지호가 흡족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먹었군.”
그 정신 나간 맛의 영약을 먹었나 안 먹었나 검사한 건가 보다.
‘안 먹고 오면 올무한테 이르겠지.’
고통스러워도 참고 먹어야겠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맛의 지옥 생각에 침통해져 있을 때였다.
“기사 봤어. 정말 고생 많았어, 얘들아!”
“이번엔 유리랑 미리 얘기하고 나눠서 준비했어.”
“의신이한테 저번 주 내내 얻어먹은 것도 마음에 걸렸고…….”
김유리와 권레나가 간식을 만들어 왔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지나치게 착했다.
두 사람이 준비한 메뉴는 망고 롤샌드위치와 참외청.
제철 과일을 활용한 메뉴 선택이었다.
아침에 맛본 그 망할 맛 때문인지,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자연 이능파 방출 현상 때문에 영상 기록이 없다고 했지. 어떻게 싸웠는지 궁금한데.”
“응, 나도. 효돈이가 싸우는 장면은 통쾌하고, 의신이가 마법 쓰는 건 신기해. 에너미와 직접 싸우는 장면은 참고도 되고!”
“이전에 싸운 적도 있어?”
“아, 그린이는 못 봤죠. 잠실 야구장 사건 영상 보여 드릴게요!”
어쩌다 보니 나와 맹효돈이 활약했던 사건의 영상 감상회 시간이 되어 버렸다.
영상 감상회가 끝난 뒤에는 스테일메이트에서 하는 초보자를 위한 체스 강습으로 화제가 바뀌었다.
다음 화제는 맹효돈이 받을 이명 예측.
또 그다음은 서문 수제 빵집 ‘MITRON’의 신작 케이크.
함근형 선생님이 와서 다과회에 합류하고, 수업이 시작하기 직전까지 우리는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시간.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디바이스에 쌓이고 밀린 메시지에 답변을 하던 중.
눈에 띄는 메시지가 하나 보였다.
‘검토해 본 결과 이상이 없다고? 그 탄래중에? 이게 무슨 소리야.’
맹효돈이 졸업한 탄래중학교 민원 답변, 처리 결과 안내.
거기에는 어처구니없는 답변과 기계가 작성한 듯한 매크로 문구만이 적혀 있었다.
‘뭔가 있네.’
이상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검토해 보지 않고 답변을 줬거나 검토해 봤지만 처리할 생각이 없거나.
자료를 보완해 다시 민원을 넣는 방법이 있겠지만, 별로 좋은 수는 아니다.
오히려 동일 내용의 민원을 보냈다는 이유로 ‘반복 민원으로 종결’, ‘악성 민원’ 딱지를 받을 수도 있다.
우선 민원 답변을 한 처리기관 정보, 담당자와 연락처를 메모해 뒀다.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길까.’
마침 지익회장 성시완이 이번 사건 기사를 보고 안부 메시지를 보내왔다.
걱정해 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답변을 한 후, 성시완의 사촌 형인 국회의원, 국언무쌍 성국언이 언제 시간이 되는지 물어봤다.
[성시완] 국언이 형한테 물어볼게!
저쪽에서 먼저 식사를 하자고 했으니, 잘하면 이번 주에 볼 수 있을 거다.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한 사람은 거의 다 메시지를 보내왔네.’
심지어 맹효돈의 중학교 담임도 어떻게 안 건지 괜찮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또 권제인과 재러드 리에게도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답인사도 하고 ‘인터뷰하러 방문할 때 반 아이들과 함께 가도 되나요?’라고 물으니 전화가 걸려 왔다.
[언제 방문을? 환영해! 내일? 오늘!]
재러드 리가 이상한 한국어를 사용하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치를 보니 반 아이들 말고도 권레나가 속한 현악부의 부원들도 다 데려왔으면 하는 것 같았다.
‘권레나의 친구들이 궁금했나 보다.’
그래서 호연관 공연 당일에 스태프로 온 영원의 호수 팀원 중에 간부급이 유난히 많았던 걸까.
현악부는 어렵겠지만, 반 아이들과 일정을 맞춰 본 후 연락하겠다고 답했다.
‘내일 물어봐야지.’
1학년 0반 아이들이 다 같이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메시지에도 답변하던 중.
구질구질해 보이는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옥토연] 은인아, 괜찮아?
[옥토연] 호랑이 놈한테 물어봤는데 은인 상태가 어떤지 안 알려 줌!ㅠㅠ
[옥토연] 은인아, 은인아
[옥토연] 은인아……ㅡㅡ
[옥토연] ……자니?
[옥토연] 자냐고!
메시지의 내용이나 양을 보니 별로 답변하기가 싫어졌다.
그래도 내 걱정도 해 주고, 월궁계도도 잘 써 줬으니 대충 괜찮다, 고맙다는 내용의 답변을 보냈다.
그렇게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른 메시지에도 답변을 다 해 줬다.
유상훈이 단체 메시지 방에 올린 기사 링크와 ‘?’에는 장남욱이 알아서 길게 답변을 다 해 놔서 생략했지만.
* * *
방과 후, 신문부.
신문부의 부장이 입을 열었다.
“지난주는 총체적 난국이었어.”
지난주, 거주 구역에서 사고를 쳤다는 3학년 0반.
그 바람에 취재하려던 신문부도 거주 구역을 담당하는 지익회도 휘말린 모양이었다.
“또 공중 정원으로 낚시를 해서 우리는 허탕 칠 뻔했는데……. 어느 유명한 1학년이 생각지도 못한 사건을 쳐서 일이 묘해졌어.”
어느 유명한 1학년?
그 말에 갑자기 부원들이 다 나를 쳐다봤다.
“빵셔틀로 유명한 흡연가.”
“수상한 1학년 0반 부반장의 빵셔틀.”
방윤섭 얘기였구나.
내 빵셔틀, 방윤섭이 뭔가 했나 보다.
방윤섭은 주수혁과 맹효돈의 집요한 추적 탓에 강제 금연을 하게 되어 괴로웠나 보다.
“흡연 중독이 무서운 것 같아.”
“집념이 느껴져.”
“그놈은 몰래 담배 피우다 수혁이한테 매번 잡히던데. 독하다, 독해.”
신문부원이 해 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천익산 깊숙이 들어가 몰래 담배를 피우기로 한 방윤섭.
하필 그는 3학년 0반의 아지트 근처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 결과, 천익산 전체에 적용 중인 연기 감지 시스템에 걸려 비상경보가 울렸다.
‘지맥이 파헤쳐진 것 때문에 호족이 엄청 민감해져 있었지. 그 넓은 지역에 연기 감지 시스템을 적용했나 보구나.’
문새론이 먼 곳을 보며 말했다.
“경보가 울리자마자 소화 아이템 들고 수십 명이 몰려들어 왔대. 그 근처에서 작당질하던 3학년 0반도 담배를 피운 방윤섭도 엄청나게 혼났나 봐.”
아마 그 몰려들었다는 누군가는 황명재단에 속한 호족일 것 같다.
“졸지에 아지트가 털린 3학년 0반이 방황하는 후배를 갱생시키는 데에 힘썼대. 그 과정이 좀 험했지만.”
“그러다 방윤섭이 지익회에 살려 달라 SOS를 보내고.”
“지익회장이 와서 수습은 됐는데. 개판이었지. 하하하.”
들으면 들을수록 총체적 난국이 따로 없었다.
결국, 3학년 0반이 복수할 예정인 우주의 기운 취재는 망했다.
대신 신문부는 화재 예방, 청소년 금연 캠페인에 관해 기사를 쓰게 되었다.
내게 배정받은 분량을 정리한 후에도 나는 홀로그램을 노려봤다.
“조의신, 뭐 하냐.”
“빵 고르는데.”
나는 서울 곳곳에 흩어진 맛집 제과점에서 메뉴를 골라 목록을 정리해 방윤섭에게 보냈다.
답변으로 쌍욕이 날아와 경기도에 있는 맛집을 하나 더 추가해 줬더니 조용해졌다.
내일 아침은 빵 파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 * *
최근 기분이 좋아 보였던 서족의 수장, 꾀돌이.
그는 은광고 교내 체스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조의신을 보고 이런 게 좋다며 아주 많이 신나 있었다.
하지만 귀가한 그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얘기해 보고 싶은데. 신역 밖으로 잘 안 나와. 그나마 나올 땐 계속 누가 옆에 있어.”
꾀돌이가 기분이 좋을 때 사용하는 존댓말도 어느샌가 쓰지 않고 있었다.
“푸른 바이올리니스트의 친척인 그 아이와도 얘기하고 싶은데.”
“푸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친척이 있었습니까?”
“그래. 걔가 나한테 조사 맡길 때 알아냈어. 빨리 직접 만나고 싶은데, 학교 밖으로 나오질 않아. 요새는 교내에서 바이올린 연습만 하고 있다고!”
꾀돌이의 표정이 점점 어둡게 변해 가, 부하들이 긴장했다.
“그리고 누가 호족 주변을 계속 지켜보고 있어. 덕분에 은광구에 갈 때마다 기분 나빠.”
“수장님 말고 누가 또 그런 짓을……?”
“마족 중에 관음증 걸린 정신병자 집단이 있는데, 걔들이겠지.”
수장님이 하실 소리는 아닌데.
부하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엿보는 걸 좋아하는 주제에 그 반대는 극히 혐오하는 꾀돌이.
그의 동족 혐오는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거 없애는 방법이나 생각해 볼까.”
꾀돌이가 그렇게 중얼거리곤 개인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부하들은 당분간 꾀돌이 근처에 접근하지 말자고 다짐한 후,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