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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15화 (115/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15)

아침.

녹족의 영약을 중탕하고 있으니 온갖 근심이 밀려들어 왔다.

곧 지옥의 맛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에 우울해졌다.

‘오늘은 이 맛에 익숙해질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했지만, 오늘도 끝없는 맛의 구렁에 허덕여야 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새로운 맛없음이었다.

‘혀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국소 마취가 가능한 스킬이나 아이템이 있나 고민하던 중.

딩동.

디바이스 메시지 알림음이 들렸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누구지.

미리 보기 메시지만 확인하고 점심에 답변을 주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미리 보기를 탭 했을 때.

[은이호] 의신이 오빠, 신수가 기운이 없어요…….

곧바로 메시지창을 열었다.

[은서호] 식사도 거르고, 백호 님이 산책하러 가자고 권해도 응하지 않아요.

설마 우리 올무가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황지호 그 망할 놈은 나한테 줄 영약이 있으면 올무나 챙겨 줬으면 좋겠다.

맛은 개선한 버전으로.

‘잠깐, 내 건 인간용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신수용도 있지 않을까. 오늘 학교에 가서 황지호한테 부탁해서 녹족을 소개해 달라고 해야겠다. 황지호가 안 해 주면 적호나 백호군한테 말해서…….’

내 생각은 다음에 도착한 메시지로 인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은이호] 황호 님은 ‘조의신 때문이다’라고 하셨어요.

뭐, 나 때문에?

그래. 올무가 나 때문에 슬퍼하고 화를 냈다고 했었지.

죄책감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은이호] 의신이 오빠가 보고 싶어서 그러나 봐요!

[은서호] 놀러 오세요, 형!

은호의 후예들은 올무가 나한테 화난 걸 모르니 저렇게 답해 주는 걸 거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나를 철저하게 외면하던 올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올무의 애교를 보지도 못하고 올무를 한 번도 쓰다듬지 못했다.

‘이 양심 없는 맛의 영약을 전부 먹기 전까지는 안 만나는 게 좋겠지.’

당장 땡땡이를 치고서라도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참았다.

[은재호] (사진)

막내 은재호가 첨부한 사진은 여러 장이었다.

사진을 확인하니 내가 저번에 사 준 은신처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올무가 보였다.

여러 은신처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지 사진마다 들어가 있는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내가 사 준 선물을 사용 중인 걸 보니, 백호군 말대로 다음에 볼 때는 기분을 풀어 줄지도 모르겠다.

‘약, 열심히 먹어야겠다.’

은호의 삼 남매에게는 시간이 나면 가겠다는 모호한 말로 얼버무렸다.

사진은 전부 저장하고 등굣길에 나섰다.

*    *    *

계절이 여름에 가까워지니 등굣길 정경이 바뀌어 갔다.

꽃이 져 녹음이 우거진 산책로.

하복을 입은 학생이 가끔 보이기 시작했다.

‘하복을 입은 애들이 늘었네.’

은광고의 교복 규정은 매우 느슨해 4월부터 하복을 입고 다니는 학생이 보여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1년 내내 하복을 입거나 혹은 체육복만 입고 다녀도 상관없었다.

심지어 이전 버전의 교복을 입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구교복은 신청을 해야 배부해 주지만.’

하얀색을 기조로 하는 구교복.

그에 대비되어 검은색 셔츠에 진회색 재킷이 눈에 띄는 신교복.

극과 극을 달리는 구교복과 신교복을 섞어 입는 학생도 많았다.

‘여름에 검은색 셔츠를 입으면 덥고, 밝은 색 하의는 부담스러우니까.’

여름이 되면 하복으로 상의는 구교복, 하의는 신교복을 섞어 입는 학생이 늘어났다.

하복은 그 매치가 은광고 정식 교복인 줄 아는 사람들도 많을 정도였다.

그때, 저 멀리에서 하복 상의는 구교복, 하의는 신교복으로 입은 학생이 보였다.

주수혁이었다.

“의신아, 안녕.”

주수혁은 아침부터 좋은 일이 있었는지 매우 상쾌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안녕. 하복 입었네.”

“응. 오늘부터 입으려고.”

“나도 내일부터 입을까.”

잡담을 나누며 주수혁과 같이 학교로 향할 때.

위화감을 느꼈다.

‘주수혁은 통학생이야. 교문 쪽에서 왔으면 이쪽 길로 오진 않을 텐데.’

결정적으로 주수혁에게서 희미하지만 탄 냄새가 났다.

주수혁이 학교에 일찍 와서 뭔가 하고 온 모양이다.

“어디서 탄 냄새 나는데.”

“……아, 아직 냄새가 다 안 빠졌나 보네. 섬유 탈취제 준비해 올걸. 혜지 누나는 준비해 왔는데, 누나 거는 개인적으로 조합한 향이라 빌리기가 좀 그랬어.”

“대체 뭐 하다 온 거야.”

주수혁은 자초지종을 설명해 줬다.

오혜지와 강제로 옷을 맞추게 된 주수혁.

이 옷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중, 비슷한 고민을 하는 오혜지가 주수혁의 턱시도를 발견해 두 사람이 상의하게 되었다 한다.

‘주수혁이 그날 무인 우편함으로 선도부실에 턱시도를 보냈어. 두 사람은 선도부 소속이었지. 그래서 발견됐나.’

오혜지와 상의한 결과, 둘은 그 옷들을 전부 불태우기로 했다고 한다.

아침부터 두 사람은 폐쇄 구역에 방치된 소각로에서 아이템 카드를 이용해 일을 치렀다.

“나는 이번에 맞춘 옷만 태웠는데, 혜지 누나는 집에 있는 샌드핑크색 의류랑 티 랭스 드레스를 다 들고 오셨어. 하하하!”

그렇게 말하는 주수혁의 표정은 매우 산뜻해서, 아침부터 샌드핑크 화형식을 치르고 온 놈 같지 않았다.

“혜지 누나가 이계 공략하던 중에 드레스가 어디에 걸렸나 봐. 그때 에너미가 스킬 날리는 걸 수겸이 형이 막아 주다 다쳤는데…… 그 일 때문에 그날 입었던 티 랭스 드레스도 싫어졌다고 하네.”

그날 갑판 상황을 보고 짐작은 갔지만, 역시 그랬구나.

“사촌 형님은 괜찮으셔?”

“응. 바로 회복 아이템 써도 후유증이 남지 않을 정도여서 문제없었어. 혜지 누나는 아직도 걱정 중인 것 같지만.”

주수겸이 그 정도의 부상에 어찌 될 플레이어가 아닌데.

내 착한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걱정이 많은가 보다.

“탄 냄새 빠지게 천천히 걷자.”

“그래!”

주수혁과 이야기를 하며 걷던 중.

주수혁이 갑자기 멈춰 서곤 뒤를 돌아봤다.

나도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려 뒤쪽을 봤을 때였다.

‘안다인이잖아.’

주수혁의 몇 걸음 뒤.

하복을 입은 안다인이 서 있었다.

마치 주수혁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상의는 구교복, 하의는 신교복을 입고 있었다.

‘이게 주인공 보정인가.’

나를 비롯해 아직 춘추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은 가운데.

두 사람이 하복 조합을 똑같이 맞추고 마주 서 있었다.

순정 만화의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첫 만남 같은 광경이었다.

“얍! 주 반장님, 수상한 조의신이! 안녕!”

안다인의 옆에 서 있던 문새론이 불쑥 인사해 왔다.

두 사람이 같이 등교하고 있었나 보다.

“……어, 안녕.”

주수혁이 당황해서 말을 조금 더듬는 가운데, 나도 간결하게 인사에 답했다.

문새론은 주수혁을 한 번, 안다인을 한 번 보더니 나를 향해 눈을 한번 찡긋거렸다.

‘눈치껏 빠지자는 거구나.’

두 사람이 유치원생급 썸을 타는 걸 알고 밀어주는 중인 문새론.

나는 문새론과 같은 신문부라는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저번에 보내 준 인터뷰 사전 조사 자료 중에 물어볼 게 있는데.”

“오! 나도, 나도! 다인아, 주 반장이랑 같이 먼저 등교해. 나 쟤랑 얘기 좀 하고 갈게.”

“그럼 나중에 보자.”

물 흐르듯 대화하고 퇴장하려는 나와 문새론.

주수혁이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어! 잠깐…….”

주수혁이 나와 문새론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는 헛소리를 하기 전에 여지를 주지 않고 잽싸게 자리를 떴다.

1학년 건물 반대편 산책로로 향하며 나와 문새론은 조용히 하이파이브 했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을 때.

하복을 입은 주수혁과 안다인이 나란히 걷고 있는 게 보였다.

좋은 걸 보고, 좋은 일을 하고 만족한 나와 문새론.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눈치껏 도와주자며 다짐을 하고는 각자의 교실로 이동했다.

“조의신, 에너미 같은 새끼.”

1학년 0반 교실 앞.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방윤섭이 있었다.

“꼴이 왜 그래.”

“너 때문이잖아! 아오, 진짜! 터키식 야채 치뵤렉은 아침 한정품이라서 뛰느라 개고생했다고, 개자식아아아!”

한두 개 정도는 메시지를 보냈으면 빼 줬을 텐데.

이걸 말하면 방윤섭이 더 빡칠 것 같으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고생했어. 먹을래?”

“안 먹어!”

방윤섭이 씩씩거리며 빵으로 가득한 봉투를 넘기고 사라졌다.

공짜 빵을 마다해?

화가 많이 난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 복도에서 바나나맛 팩우유를 마시던 맹효돈이 말했다.

“저 새끼, 제 몫은 따로 사 뒀던데. 등교할 때 보니까 빵 봉투가 하나 더 있었어.”

방윤섭. 제 돈 주고 따로 샀단 말인가.

맛있는 빵만 골라서 사 오게 했더니 방윤섭도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침부터 여러 빵 종류를 늘어놓고 다과회를 하게 된 1학년 0반.

그 자리에서 권제인의 인터뷰를 맡게 되었고 반 아이들이 같이 와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고 얘기를 꺼냈다.

“영원의 호수 팀 빌딩이면 서서울 호수공원 쪽에 있는 거기 말하는 거야? 거긴 공개가 안 된 곳인데……!”

예상대로 권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뜬 모습을 보였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꼭 가 보고 싶어!”

“저도요!”

“나도 가고 싶어!”

그때 호연관에서 스태프를 했던 아이들은 모두 손을 들었다.

한이도, 맹효돈도 곧 가고 싶다 답했지만 민그린은 말꼬리를 흐렸다.

“주말에 가는 거지? 사람도 많을 것 같고, 주말엔 약속이 있어서 못 가.”

주말에도 송대석을 보러 가나 보다.

표정을 보니 가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선생님, 시간 되세요?”

영원의 호수 팀원들은 권레나의 담임 선생님도 궁금해할 거다.

함근형 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주말에는 출장이 잡혔다.”

“네? 어디로 가세요?”

“해외로 가시는 거면 선물 사 주세요!”

“홍천 쪽에서 파견 요청이 왔다. 그래도 주말 사이에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결과적으로, 1학년 0반에서는 함근형과 민그린을 제외한 아이들이 가게 되었다.

“영원의 호수 팀 빌딩 구경해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황지호도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영원의 호수 팀 빌딩에 그 서족이 있으면 황지호가 감지해 줄 거다.

잘됐다고 생각하고 수업 준비를 하려던 순간.

문득 황지호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이 중요한 걸 잊어버릴 뻔하다니!’

아침에 사건이 많았던 탓이다.

그렇게 속으로 변명했다.

“물어볼 게 있어.”

“말해 봐.”

황지호도 나처럼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나는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녹족이 신수용 영약을 파는지 궁금해.”

“조의신, 이제는 신수가 눈앞에 없어도 지능이 떨어지는구나.”

황지호가 질린 얼굴을 하면서도 알아봐 주겠다고 답했다.

그 답변을 들으니 저 망할 놈이 좀 착해 보였다.

*    *    *

방과 후.

지익회관 시뮬레이터 룸.

평소에 시뮬레이터를 사용해 훈련할 때는 블라인드를 치지 않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블라인드를 치면 오히려 눈에 띄지만…… 상보심금파를 보여 줄 수는 없지.’

상보심금파를 실체화하자 시스템 음이 들렸다.

‹스킬 ‘만물 사용’이 발동했습니다.›

가볍게 가상 에너미를 향해 상보심금파를 휘둘러 봤지만, 여전히 무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광림으로 종합 능력치 레벨이 높은 캐릭터로 변해 가며 상보심금파를 써 봐도 마찬가지였다.

갈래를 쓰는 방법도 고려해 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선상에서 저강렵에게 갈래를 세 번이나 썼을 때도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어.’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적어도 여름 방학이 되기 전에 상보심금파를 잘 다룰 수 있게 되고 싶은데.’

여름 방학 때 우리 반 아이들이 겪을 사건들이 떠올랐다.

그전까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피스를 늘리고 싶었다.

운명력이 발동하면서까지 태상노군이 내게 준 퀘스트다.

클리어해서 보상을 받아 두는 게 좋겠지.

‘도움을 청해 볼까.’

상보심금파에 관해 밝힐 수 있는 상대.

무기의 목소리를 들을 법한 달인.

하나하나 조건을 대 보니 머릿속에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훈련이 끝나면 연락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시뮬레이터 룸을 나설 때.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 의신아.”

유희계 용족.

여의주에서 태어난 용왕신의 총아(寵兒).

현재는 은광고의 괴짜 교사.

용제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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