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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16화 (116/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16)

얼마 전, 주말.

은광고 거주 구역 교직원 사택.

주말이지만 오후 늦게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김신록.

최근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국회의원이 늘어 주말에도 쉴 날이 없었다.

‘국정 감사 시기도 아닌데, 이건 좀 심하군.’

국회의원뿐 아니라 지방 의회의원도 개별적으로 학교 운영 자료를 요구해 왔다.

본회의나 상임 위원회의 의결을 통해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게 적법한 절차지만, 이를 무시한 의원들이 한둘이 아니라 행정 업무는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환몽 게이트에 연루된 이사와 교사가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특히 성국언 군. 절차를 지키고 있긴 하지만, 빈도가 높아.’

김신록이 옛날에 다른 얼굴, 다른 이름으로 가르친 학생이자 현재 국회의원에 재임 중인 성국언.

그는 환몽 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정기적으로 은광고 운영 자료를 요구해 왔었다.

‘사건이 터지니 더 집요하게 확인하고 있어. 잡일 외주업체 선정 과정부터 예산 운영과 집행……. 연도별, 분기별 학생 통계까지. 뭘 찾고 있는 걸까.’

그 바람에 행정 업무량이 줄 생각을 안 했다.

얼마 전엔 교무부장인 제갈재걸의 많은 업무량에 불만을 품은 2학년 0반 학생들이 쳐들어왔었다.

2학년 0반 학생들은 농땡이를 치며 업무를 미루던 교사 몇 명을 잡아내 제갈재걸 앞에 끌고 오기까지 했다.

김신록이 고문을 맡은 지익회에서는 그를 배려해 원래 적은 업무량을 더 줄여 주기도 했다.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지.’

김신록이 생각에 잠겨 걷고 있을 때,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신록아.”

용제건이 김신록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용제건 선생님!”

“일하다 왔어?”

“네. 일이 밀려 있어서요. 이제야 끝났네요.”

삐릭.

김신록이 지문 인식 타입의 도어록을 해제하며 붙임성 좋게 말했다.

용제건이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주말에도 교사 흉내 낼 거야? 얼굴은 안 답답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본 김신록.

기척이 없다고 확신한 후에야 표정을 바꾸고 문 안으로 용제건을 끌고 들어갔다.

“하하하! 아, 그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하는 표정. 볼 때마다 웃겨.”

용제건은 안으로 끌려가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후예라는 사실을 숨기는 김신록과 달리 진족임을 드러내고 사는 용제건.

김신록의 오랜 악우(惡友) 용제건은 가끔 이런 식으로 김신록을 놀려 먹곤 했었다.

“학교에는 왜 왔어. 일도 안 하는 주제에.”

“일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거 알잖아. 황호 이사장 씨가 정한 내 업무 범위는 제한되어 있으니까.”

용제건이 권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자리에 앉는 사이, 김신록은 얼굴에 걸린 스킬을 해제했다.

그러자 김신록의 이목구비가 뚜렷해지고, 눈과 머리카락에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본모습이 훨씬 나은데. 숨기고 사는 거 아깝지 않아?”

“시끄러워.”

까칠하게 말하면서도 김신록은 찻잔을 두 개 꺼냈다.

준비하는 차는 시후 용정차.

호포천의 찬물로 재배한 용차호수로, 용제건이 즐겨 마시는 차였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김신록을 보며 용제건이 웃었다.

‘성정은 아버지 젊을 때와 똑같아. 얼굴은 아버지와도 닮았지만, 그래도 어머니 쪽을 더 닮았어.’

김신록의 진짜 얼굴만 봐도 적호와 비탄의 웅녀, 둘의 아들이라는 게 티가 났다.

그러니 더욱 얼굴을 감추고 사는 거겠지만.

“이거나 마시고 가라.”

“잘 마실게.”

용정차의 짙고 맑은 향과 비취 같은 색.

용제건은 만족한 얼굴로 차 맛을 음미하다 물었다.

“적호 씨한테 무슨 일 있었어?”

“그건 왜.”

“무슨 일 있었구나. 다치기라도 했었나 보네.”

“…….”

“너와 황호 씨가 동시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시기가 있었잖아. 그러다 갑자기 안정됐고.”

김신록이 입을 다물고 찻잔을 기울였다.

‘거기에 더해 비탄의 웅녀가 붉은 드레스를 입고 움직였으니까.’

용제건은 이 단서에 관해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쾌유를 축하드린다고 전해 줘.”

“대체 넌 어떻게 그걸 다 짐작해 내는 거야.”

“이젠 괜찮은가 보네. 다행이다.”

“아, 진짜.”

늘 대화 상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하는 용제건.

김신록은 울컥한 기분이 들어 용정차로 속을 달랬다.

“네 목숨의 은인, 무명의 초신성 말인데.”

용제건이 운을 떼자 김신록이 즉각 답했다.

“조의신 군은 호족의 은인이야. 괴롭히면 호족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김신록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반은 조의신 걱정이고, 남은 반은 용제건 걱정인 것 같았다.

“네 목숨의 은인이면, 내 은인이기도 하잖아. 괴롭히지는 않을 거야.”

조의신 얘기를 꺼낸 건 김신록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는지, 용제건은 금방 화제를 바꿨다.

아마 지금 하는 얘기가 본론인 듯했다.

“신록아, 당분간 은광고 밖으로 나가지 마.”

김신록은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학생을 인솔해야 하는 행사도 있어서 안 돼.”

“음…… 어떡할까. 난 계약상 외부 행사는 동석하지 못하는데.”

“왜?”

용제건은 은광고 밖으로 나갈 때마다 느끼는 ‘눈’을 떠올렸다.

공간이나 시선에 극도로 민감한 자가 희미하게 느낄 법한 시선.

용제건은 창밖 너머를 보며 말했다.

“누가 보고 있어서.”

*    *    *

“안녕하세요.”

용제건이 인사를 받고는 방금 내가 훈련하던 시뮬레이션 룸 안으로 들어갔다.

‘저 표정은 그거잖아.’

용제건이 황홀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도 몇 번 봤고, 이 세계에 와서도 본 그 표정.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의신아. 네가 들어가기 전에 여기에는 아무 기척도 없었는데, 지금은 너 말고도 다른 아이들의 기척도 느껴져.”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은 것 같다.

혹시 다른 아이들이 들을까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용제건은 안심하라는 듯 손가락을 튀겼다.

딱.

손가락이 부딪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주변의 소음이 들려왔다.

그동안 체스대회에서 체스 테이블과 관객석의 소리를 차단했던 것처럼 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나오기 전부터 공간술을 발동하고 있었구나.’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준비성이 좋았다.

“얘기 좀 할까.”

감도, 추리력도 지나치게 좋아서 문제지만.

*    *    *

중앙 구역 총동아리회관.

체스 소모임 부실.

이미 해가 져서 부 활동 시간이 끝나서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체스로 가득하네.’

직접 만든 듯한 묘수풀이 애플리케이션이 가동 중인 홀로그램.

나무, 아크릴, 크리스털, 이계 금속 등등 여러 소재로 된 체스 피스.

소모임 학생들이 연구 중인 듯한 기보들.

체스 게임 초반부의 ‘북 무브’를 모아 둔 체스 오프닝 백과사전.

그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이름표가 붙은 체스보드 케이스였다.

1―0 사월세음.

1―0 한이.

수강생 전원에게 개인 체스보드를 준비해 줬나 보다.

초보자 강습을 받기로 한 우리 반 아이들의 이름.

두 사람의 이름을 보니 차게 식었던 손에 조금은 온기가 돌아온 것 같았다.

‘여기까지 데리고 올 필요가 있나.’

공간술을 발동해 부실을 감싸던 용제건이 내 속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은광고에서 내게 허락된 공간 중에 황호 이사장 씨도 들여다보지 못하는 곳은 여기뿐이라서.”

말을 마친 용제건이 내 손에 시선을 줬다.

“체스대회에 우승해서 트라우마는 극복한 줄 알았는데, 아직인가 보구나.”

딱.

용제건이 손가락을 한 번 튀기자, 부실이 옥색으로 덮였다.

공간으로 결계를 짜 그 위에 색을 입힌 모양이다.

‘내 배경을 조사하고, 체스대회에서 내가 체스를 두는 걸 가까이에서 보면 트라우마의 유무를 알아챘겠지.’

모든 시합을 관전하고, 시합장 전체를 자신의 공간술로 덮은 용제건이다.

체스를 둘 때마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긴다는 걸 눈치채도 이상하진 않았다.

“네가 신록이를 구한 이후로 계속 신경이 쓰였어.”

“김신록 선생님과 아시는 사이인가요?”

“그래. 신록이는 내 친구야.”

용제건이 김신록과 친구 사이였나.

둘 다 수명도 길고, 용족과 호족은 교류가 있으니 두 사람이 알고 지낸 건가.

“본론부터 말하면, 나는 의신이 네 정체를 알고 있어. 요즘은 까마귀 가면을 쓰고 다니고 있지? 적벽괴도.”

각오는 했지만 ‘그 단어’가 나오다니.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주변이 더워진 것 같았다.

하복을 입고 올 걸 그랬다.

내일부터 하복을 입자.

그렇게 현실 도피를 해도 용제건은 ‘그 단어’를 사용해 말을 계속했다.

“추리의 대부분은 준열이가 해 줬지만. 준열이는 나만큼 공간과 기척에 예민하지 못해서, 적벽괴도를 찾아낼 단서가 부족했을 거야.”

용제건은 자신의 추리 과정을 설명해 줬다.

염준열과 흡사한 외모, 광림을 소유한 ‘그 단어’의 인물.

어느 날부터 그 인물을 찾는 것을 중단하고 훈련에 열중하는 염준열.

“준열이가 그렇게 쉽게 적벽괴도를 포기할 리가 없잖아? 우리 우수한 준열이가 적벽괴도를 찾아내 스승으로 모시기 시작한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말하는 용제건의 목소리에서 염준열 부심이 묻어났다.

청룡이나 염방열만큼 티는 안 내지만 용제건도 염준열빠인 모양이다.

“그 스승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 이상했지만.”

“그런데 왜 제가 그…… 염준열 선배님의 스승이라는 거죠?”

차마 ‘그 단어’를 사용할 수 없어서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

“조각 난 단서를 여러 개 합쳐 봤어. 시작은 갑자기 준열이가 시구를 하겠다던 날에 벌어진 잠실 야구장 사건이야.”

염준열이 시구한 날 벌어진 잠실 야구장 사건.

그 사건과 이어져 발생한 선상 파티.

마지막으로 환몽 경매와 엮인 1학년 0반.

“이 세 가지와 모두 엮인 건 의신이와 효돈이. 두 사람뿐이지만, 환몽 경매가 벌어지던 시점에 효돈이는 파이트 클럽에 있었잖아?”

그래도 간접적인 단서뿐.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그렇게 반박하기 전에, 용제건이 아이템 카드를 하나 꺼내 들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단서가 된 건 이거야. 예전에 거래했던 진족이 대가로 준 거지. 선상 파티 날,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테니 이걸 이용해 갑판을 지켜보라고 했어. 이건 쓰고 남은 카드고.”

아이템 카드 테두리를 보니 UR급이었다.

‘부재자의 기척’.

처음 보는 이름의 소모품 아이템이었다.

“UR급이긴 하지만, 나만 한 기척 감지 능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인 아이템이야. 나는 선상 파티 날, 이 아이템을 이용해 갑판 위에 내 감각을 이어 두고 있었어.”

UR급 아이템을 써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다니.

용제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의신이 네 기척이 혜지에서 승현이로, 승현이 다음에는 경구로 변했어. 그러다 다시 의신이로 돌아왔지.”

용제건은 내가 사용한 ‘플레이어의 궤적’의 순서를 정확하게 말했다.

그날, 나는 빠른 이동을 위해 오혜지의 ‘월하의 위태천(韋馱天)’을 사용했다.

그 후, 갈래를 막기 위해 박승현의 ‘군사가 지휘하는 진군가(進軍歌)’와 곽경구의 ‘100초의 은총’을 차례로 사용했었다.

“혜지는 키모폴레이아에 있긴 했지만, 그 시각엔 이계에 공격대로 들어가 있던 상태였지. 승현이와 경구는 주말 내내 기숙사에 있었고.”

용제건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네 광림이지? 환몽 경매 날, 그리고 준열이와 훈련하는 동안은 준열이로 변한 거고. 방금 시뮬레이션 룸에 남은 기척들도 아마 그 광림 탓일 거야.”

이래서야 변명할 길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그 보답했다는 진족은 누구죠?”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적호를 걱정하는 그 진족이야.”

적호를 걱정하는 진족.

호족은 아닐 테니, 비탄의 웅녀를 말하는 걸 거다.

비탄의 웅녀의 행보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제 정체를 용족에 알리실 건가요?”

내 질문에 용제건이 고개를 저었다.

“네 정체를 밝히고 다닐 생각은 없어. 준열이한테도. 그 대신.”

용제건의 눈이 빛났다.

아마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추리를 하고 수고를 들여 내 정체를 캐 왔을 거다.

“다음에는 나도 끼워 줘. 꼭.”

반쯤은 짐작했지만, 역시나 그랬구나.

용제건의 새로운 유희에 적벽괴도 관찰 및 행동 함께하기가 추가된 모양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용제건은 아주 상쾌하고, 황홀해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면 앞으로 잘 부탁해, 적벽괴도.”

‘그 단어’로 부르는 건 그만뒀으면 좋겠다.

*    *    *

용제건과 헤어져 기숙사실로 향하는 내 기분은 미묘했다.

‘용제건과 같이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용족의 수장 청룡과도 비견되는 실력을 가진 용제건.

그와 함께 움직인다면 둘 수 있는 수가 큰 폭으로 늘어날 거다.

‘아직 발생하려면 멀었지만 ‘용궁 붕괴’, ‘용왕신의 무녀’ 시나리오……. 용제건이 있다면 스토리를 비틀거나 아예 없던 일로 할 수 있을 거야.’

광림도, 스킬도 우수한 데다 흥미만 품으면 비상한 추리력과 인내심을 발휘하는 용제건이다.

‘용제건이라면 알아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나를 알아내다니.’

적벽괴도 = 조의신.

이 사실을 알아낸 건 현재 용제건뿐이다.

‘까마귀 가면이 나라는 걸 아는 존재는 황지호, 적호, 옥토연, 홍규빈…… 아, 그리고 맹효돈도 알고 있구나.’

다 내가 직접 밝히거나 까마귀 가면을 쓴 모습을 보여 줘 알게 된 건데.

조의신과 접점이 거의 없었던 용제건이 알아내 버렸다.

‘아니, 백호군도 있었지.’

생일빵 사건 때 까마귀 가면을 쓰고 광림으로 외양을 바꾼 상태였던 나.

갑자기 나타난 백호군은 나를 보고 ‘조의신’이라고 불렀었다.

‘백호군에게는 마침 볼일이 있었는데.’

나는 아직 메시지 발신, 수신 이력이 없는 백호군의 디바이스 코드를 불러왔다.

‘뜬금없이 말해도 될까.’

백호군 성격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불필요한 인사로 시간을 잡아먹는 걸 싫어할 거다.

나는 본론부터 던졌다.

[나] 상보심금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도와줘.

백호군의 광림은 무기를 소환하는 것.

게임 속에서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애도인 백아(白牙)와 교감하는 듯한 장면도 있었다.

뭔가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백호군] 알았다.

[백호군] 대신 조건이 있다.

대답은 바로 왔다.

조건을 건 게 의외였지만.

[백호군] 나와 체스를 둬라.

생각지도 못한 조건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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