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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17화 (117/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17)

‘나와 체스를 두자고?’

뜬금없는 조건이었다.

사실 백호군이 체스를 둔다는 것도 대국을 신청해 오는 것도 전부 예상외였다.

‘내가 교내 체스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국해 보고 싶어졌나.’

그것도 어딘가 백호군답지 않았다.

‘아직 나는 멀었구나!’

플마고의 썩고 고인물, 석유를 자칭하는 주제에 메인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앞으로 더 정진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알았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딩동.

백호군의 답장은 바로 도착했다.

메시지에는 좌표가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가 볼까.’

*    *    *

은광고 조경 구역.

청랑호 주변 호수길의 절반 이상은 중앙 구역에 해당했지만, 일부는 조경 구역에 속했다.

접근성이 나쁘고 편의 시설과도 먼 이곳.

에어보드 위에서 보이는 조경 구역에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파삭.

에어보드가 정지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누군가가 나타났다.

흑발에 옥스퍼드 셔츠 차림을 한 백호군.

언뜻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따라와라.”

그 말만을 하고 백호군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조용한 조경 구역 호수길.

나와 백호군이 호수 안개를 헤치며 걷는 소리가 울렸다.

‘이게 그 청랑호 괴담에 등장하는 호수 안개구나.’

계절, 날씨, 기온과 상관없이 항상 일부 구역에 안개가 끼어 있는 청랑호.

그 때문에 각종 괴담이 성행했지만, 호수 안개의 정체는 백호군이 친 ‘벽사(辟邪)의 결계’였다.

‘왜 하고많은 결계 중에 귀신을 퇴치한다는 벽사의 결계인지 모르겠지만.’

삿된 기운을 막고 마(魔)를 퇴치한다는 의미의 벽사.

예로부터 청룡과 더불어 벽사의 영물이라고도 꼽히는 백호가 직접 친 결계라면 다른 의미도 있을 법했다.

‘청랑호 괴담과 관계가 있는 걸까.’

잡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안개는 더 짙어졌다.

백호군의 뒷모습도 흐릿해졌을 때.

파아앗!

백호군의 손에서 파운참뢰(破雲斬雷)의 백아가 소환되었다.

광림을 사용하며 힘을 개방했는지 머리카락이 점점 하얗게 물들었다.

서걱.

백호군이 파운참뢰의 백아를 휘두르자 안개 사이로 문이 하나 드러났다.

문을 제외한 공간은 안개에 묻힌 탓에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문 위의 현판은 눈에 보였다.

은련관(銀練館).

은광고 내부에 있는 백호군 전용 공간이었다.

‘은련관에 오게 되다니.’

게임 내에서도 백호군이 홀로 수련을 할 때나 등장하던 장소여서 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끼익.

은련관의 새하얀 나무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 문을 열었다.

돔처럼 된 천장에 이능으로 구현한 별 하늘이 펼쳐졌다.

‘서방칠수(西方七宿)구나.’

동아시아의 별자리, 이십팔수.

그중 서방 백호 7수에 속하는 일곱 개의 별자리.

규수(奎宿), 루수(婁宿), 위수(胃宿), 묘수(昴宿), 필수(畢宿), 자수(觜宿), 삼수(參宿).

일곱 개의 별자리가 그리는 백호의 모습에는 날개가 있어, 지상의 호랑이와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딱 한 번 저 모습을 했었는데.’

엔딩 직전.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보였던 일곱 별자리와 유성군.

하늘을 등지고 날던 백호군의 본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조의신, 무기를 들어라.”

파아아―!

내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 백호군이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출력을 올렸잖아!’

백호군의 애도 백아의 빛이 더해졌다.

벽사의 결계를 깨고 은련관에 들어올 때보다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고 있는 백아.

백아의 끝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다른 이의 힘을 빌리면 안 된다.”

백호군은 ‘플레이어의 궤적’의 정체를 꿰뚫어 보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백호군의 말을 따라 광림을 발동하지 않은 채로, 아이템창에서 상보심금파를 꺼내 쥐었다.

‹스킬 ‘만물 사용’이 발동했습니다.›

사아아!

상보심금파를 쥐는 것과 동시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고가 따라가기 전에 나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카아앙―!

백아와 상보심금파의 칼날이 맞부딪쳤다.

상보심금파를 쥔 양손이 저릿저릿했다.

백호군은 한 손으로 백아를 쥐고 있었다.

‘한 손으로 휘두른 게 이건가!’

내 종합 능력치 레벨은 순조롭게 상승해 현재 20 .

만물 사용의 레벨은 4 .

반면, 백호군의 종합 능력치 레벨은 55 .

검술 레벨은 10 .

백호군이 나름 핸디캡을 안는다고 한 손으로 대검을 들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집중해라.”

백호군이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너는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이 많겠지.”

카앙!

백호군이 아주 가볍게 팔을 휘둘렀지만, 나는 무기와 함께 멀리 날아갔다.

자칫하면 상보심금파를 놓치거나 그대로 구를 뻔했다.

‘레벨 차가 너무 커. 상대가 안 돼!’

어떤 수를 둬야 할지 생각해 봤지만, 광림 사용이 제한되니 사용할 수 있는 패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아직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무명의 운명’ 아이템 정도가 떠올랐지만, 지금 상황에선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광림은 하루 사용이 제한되어 있어.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지도 몰라. 광림이 봉인된 상태로 강적을 만나면 이렇게나 무력하구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이렇게나 강하다.

부심이 차올랐지만, 지금은 그 마음보다 분한 마음이 더 컸다.

백호군은 나를 부추기듯 한마디 덧붙였다.

“그것들을 전부 이루기에는 힘이 부족해 보이는군.”

백호군이 다시 백아를 휘둘렀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고 상보심금파에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카아앙!

손바닥이 타오르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지잉, 하고 울리는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백호군의 백아가 다시 나를 향했다.

한 번, 두 번.

백아에서 날아오는 풍압 탓에 시야가 일그러졌다.

‘지금 하는 이 대련이 무기의 목소리를 듣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되는 거지.’

고찰하기도 전에 다시 검격이 쏟아졌다.

백호군이 나를 해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광림이든 아이템이든 써서 도망쳤을 거다.

카앙! 카아앙―!

백호군의 공격 패턴을 읽어 다소 대응 속도를 올렸지만, 일방적인 공방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힌트라도 달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묘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기의 목소리를 듣게 도와 달라 청한 나지만, 대련 중에 도움을 구하는 건 지는 기분이 들었다.

‘체스를 제외하면 져도 되는 싸움의 승패에 집착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렇게 고민하며 백호군의 백아를 막아 내고 있을 때.

‘어?’

백호군의 싸늘했던 얼굴에 온기가 차오른 것처럼 보였다.

파팟!

백호군이 먼저 백아를 물리고 몇 걸음 뒤로 뛰었다.

여전히 백아를 겨눈 채로 백호군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이명’을 받게 된 계기를 떠올려라.”

내 이명?

‘그 단어’를 말하는 건 아닐 테니, ‘무명의 초신성’ 쪽일 거다.

‘무명의 초신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계기…….’

입학 실기 시험 13조.

어두운 체육관.

웅족의 권속인 에너미.

장남욱과 유상훈과 했던 팀플레이.

에너미를 가까이에서 대면할 때 느꼈던 공포.

상황을 종료시킨 보잘것없는 희귀도의 무기.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번뜩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숙련도!’

이 세계에서 무기의 형태로 존재하는 아이템엔 숙련도라는 개념이 있다.

숙련도가 100%가 되면 희귀도가 상승하고, 특수한 효과가 추가로 붙곤 했다.

‘무기의 소유자가 바뀌면 숙련도는 리셋돼. 저강렵이 쌓은 숙련도는 상당히 높았겠지만, 나는 0이나 다름없는 상태야!’

그리고 숙련도를 높이는 가장 빠른 방법은 레벨 차이가 큰 적을 상대하는 것.

리스크가 커지지만, 얻는 숙련도도 커진다.

“답을 찾은 것 같군.”

백호군이 왜 이렇게 매섭게 백아를 휘두르는지 알 것 같았다.

적당히 하면 숙련도는 아주 더디게 올랐을 테니까.

‘숙련도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어. 만물 사용 스킬과 숙련도는 별개의 문제인데.’

만물 사용 스킬만으로 숙련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실기 시험 날에 그 고생을 할 일도 없었다.

‘그게 됐으면, 그날 죽거나 크게 다치는 걸 각오하고 에너미한테 뛰어들 필요가 없었겠지.’

그날 나는 광림이 봉인된 상태였지만, 만물 사용 스킬은 쓸 수 있었으니까.

답을 얻으니 상보심금파를 쥔 손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기세를 올려 백호군에게 일섬을 날렸다.

카아앙!

백호군이 처음으로 방어 자세에 들어갔다.

“그래, 고마워.”

이렇게 말없이 몰아붙이는 것도, 결국 힌트를 내주는 것도 백호군다웠다.

체스에 관해선 아직 이해가 안 갔지만.

백호군과 대련을 마치고 돌아온 기숙사 방.

갱신된 상보심금파의 정보를 열람하니, 제법 숙련도가 올라 있었다.

내가 체력적으로 한계에 달할 때까지 백호군이 백아를 거두지 않은 덕이다.

‘그 말은 조금 욱했는데.’

대련을 마쳤으니 체스를 두겠다고 제안했었다.

그러나 백호군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지금은 너와 대국을 해도 의미가 없다.

‘체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웬만한 체스 기사보다는 나을 텐데.’

대련에서 일방적으로 당한 것도 그렇고.

분하다.

상보심금파의 숙련도 향상을 돕고, 무기의 목소리에 관해 조언해 준 건 고맙지만 분했다.

‘백호군과 대국을 하기 전까지 체스 연습해야지.’

그렇게 나한테 대국 신청을 한 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다 잠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하복을 입고 등교한 첫날.

‘어제 주수혁과 안다인이 하복을 입어서 그런가. 하복 입은 애들 수가 확 늘었네.’

등굣길의 풍경은 크게 바뀌어 있었다.

주수혁과 안다인에게 팬심, 대항심을 품는 이들이 많으니 내 추측이 크게 틀린 건 아닐 거다.

디바이스를 가동해 주요 신문 기사를 읽으며 교실로 향했다.

1학년 구역의 중앙 건물에 가까워지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뭐지?’

1학년 0반 쪽 출입구.

평소보다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인파 사이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학생의 기운이 맑고 깨끗하고, 정순한 이능파가 흐르고 있어서…….”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다.

주수혁의 스승, 곽 사범의 친구라는 탁 도인이었다.

수업에서도 몇 번 들었던 이능파 활용에 관한 이론에 대해 말하고 있는 탁 도인.

하지만 말하는 모양새는 사이비 종교를 포교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부반장이 뭐라 대답하라고 했더라…….”

이건 확실히 아는 목소리였다.

짱돌 맹효돈 선생.

아침부터 이상한 소동에 휘말린 모양이었다.

“아, 맞다!”

탁 도인의 말을 영혼이 사라진 표정으로 듣던 맹효돈이 한마디 했다.

“도 안 믿습니다.”

맹효돈이 내 충고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    *    *

콰쾅!

나비령의 보고를 듣던 이가 이능파를 뿜었다.

“그 망할 돼지 새끼는 어디에서 뭘 하는 거야!”

알 수 없는 이유로 실패한 암살 계획.

인과 관계를 확인하기도 전에 사라진 저강렵.

그의 분노와 혼란은 극에 달했다.

“그분이 내려 주신 임무에 실패하고, 모습을 감춰!”

한편, 신체를 현실의 경계에서 거둬 이능파와 가구의 파편을 피한 나비령.

그의 폭주가 멈추자 나비령이 다시 모습을 실체화해 달콤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모습을 감추기 전, 부하에게 연락한 흔적이 있는데, 이상해.”

“흥! 꽁무니를 빼는 데에는 도가 튼 돼지 새끼야. 부하 하나가 네 손에 들어간 걸 알고 모습을 감췄을지도 모르겠군.”

초조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비령이 옷자락으로 입가를 가렸다.

가려지지 않은 나비령의 얼굴에는 근심이 어려 있었지만, 옷깃 뒤의 입술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한 번 더 확인해 볼게.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

나비령의 공손한 태도와 목소리에 기분이 다소 누그러진 그가 물었다.

“‘그분’이 네게 내린 명령은 어떻게 되고 있지?”

나비령은 곱게 웃으며, 아주 기뻐하는 목소리로 답했다.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어.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잘 해낼게. ‘제물’ 쪽은 어때? 내가 도울 일이 있어?”

“내 쪽도 문제없어. 넌 돼지나 찾아.”

그렇게 말한 그는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나비령이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를 지우며 눈을 내리깔았다.

“후후, 제물이라…….”

나비령은 그렇게 중얼거리곤 한참을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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