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37)
잘 보이지 않는 산령을 빤히 들여다볼 때.
“조의신, 안광 스킬을 사용해라.”
그렇게 말하는 백호군의 눈에 이능파가 감돌고 있었다.
산령을 보기 위해서는 안광을 써야 하는 건가.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우웅—.
시야가 바뀌고 머리와 눈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데.’
백호군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로 나를 향해 온갖 제스처를 하는 산령.
살려 달라는 뜻인 것 같다.
“놔줘. 쟤 때문에 쓰러진 거 아니야.”
“…….”
백호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온기 없는 표정을 짓다가 손을 놨다.
그러자 산령이 허둥지둥 달려와 내 뒤로 숨었다.
백호군과 황지호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나 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인간에게 해를 주는 산령이라 판단되면 즉시 내 손으로 소멸시키겠다.”
황지호가 그렇게 말하자 혼비백산한 산령이 내 뒤에서 벌벌 떠는 게 느껴졌다.
‘신역에 학생을 꾀어내는 산령이 있으면 거슬릴 만도 하지.’
죄 없는 산령이 소멸하기 전에 지난 심야에 있었던 일을 간략히 말했다.
내 요약은 다음과 같았다.
야밤에 천익산을 산책하고 있었다.
빛을 발하는 천단수를 발견했다.
손을 올렸더니 갑자기 천단수에서 이능파가 터져 나와 기절했다.
가만히 듣던 황지호가 물었다.
“천단수에서?”
“그래.”
“우리가 밤에 느꼈던 그 힘의 흐름이 천단수에서 흘러나온 건가.”
“하여튼 산령 탓은 아니야. 내가 천단수를 만질 때 산령은 떨어져 있었어.”
산령이 내 말에 동의를 표하듯 뒤에서 폴짝폴짝 뛰어 댔다.
황지호가 산령과 나를 의심스러워하는 눈으로 보면서도 말했다.
“……산령이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없긴 하지. 산령은 모르겠지만, 천단수의 힘이 인간을 해할 리도 없고.”
“그래. 얘 너무 괴롭히지 마.”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산령은 어제 천단수 근처에서 내가 단서를 잡도록 도와줬었다.
‘초상우주와 산령이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산령은 호족들의 살기가 사라져 기운을 차렸는지 허공에 떠올라서 내 주위를 느리게 돌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개판인 천익산의 산령이라 그런지 기운이 넘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그 시각에 천익산을 오른 거냐.”
이 질문에는 답변하기 어려웠다.
성국언이 괴담 조사를 맡기며 내게 당부했던 말을 떠올렸다.
—진족이나 후예를 이용…… 아니, 힘을 빌리는 건 상관없지만, 그들이 이 괴담에 주목하게 해선 안 돼.
괴담에 대해서 말하면 백호군은 그렇다 쳐도 황지호는 좋다고 조사를 시작할 거다.
성국언이 말했던 그 조건을 어기게 되는 셈이다.
“그냥.”
황지호가 아주 불쾌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천단수는 우리의 신화에 남은 신목이기도 해. 아주 철저하게 조사해 주지.”
내가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우리가 천단수 앞에 쓰러져 있는 너를 발견하고 얼마 안 되어서 3학년 0반 놈들이 몰려왔더군. 천단수 근처에 있던 조잡한 함정을 설치한 건 그놈들 같은데…… 이 녀석들도 조사해 봐야겠어.”
내 예상대로 얼마 안 있어 3학년 0반 선배들이 몰려왔었나 보다.
그런데 ‘3학년 0반’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산령이 움찔거리다 빠르게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혹시 3학년 0반이 우주의 기운 운운한 건…….’
초상우주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이 산령이 장난질을 친 것 아닌가.
산령이 있던 천단수를 중심으로 3학년 0반이 설치한 온갖 함정이 널려 있던 것도 그렇고.
합리적 의심을 담아 산령을 쳐다보자 산령은 갑자기 창밖을 내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천단수와 3학년 0반의 조사와 더불어 당분간 산령을 감시하겠다.”
“산령을 감시한다고?”
아직 황지호는 산령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 모양이다.
“빠른 속도로 지맥이 살아나고 있으니 산령도 곧 실체를 완전히 갖추고 의사소통도 할 수 있게 될 거다. 그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어.”
산령이 갑자기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실체가 없으니 빛무리가 물리적으로 접촉하지는 않았지만.
‘싫으니까 말려 달라는 의사 표현인 것 같은데…….’
내가 여기서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 정말 산령에게 홀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
끄응…….
내 옆에 잠들어 있던 천사가 눈을 떴다.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천국에 왔던 거다.
크르르……!
갑자기 야수가 사냥감을 향해 낼 법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산령이 화들짝 놀라 내 옷자락을 놓고 양호실 구석으로 도망쳤다.
‘방금 들린 이 울음소리는 뭐지?’
우리 귀여운 올무가 이런 소리를 낼 리가 없으니 산령이 낸 소리거나, 내가 환청을 들은 게 분명하다.
“올무야?”
왕!
올무가 귀엽게 짖으며 내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역시 방금 내가 들은 건 환청이었다.
“조의신…… 방금 네 낮은 지능을 기반으로 한 사고의 흐름이 대놓고 보인 것 알고 있냐?”
황지호가 질린 얼굴로 뭐라고 말하긴 했지만, 올무가 내 품에 머리를 기대 오자 아무래도 좋아졌다.
내가 기절한 사이 올무가 많이 걱정했는지 내 심장 쪽에 귀를 가져가기도 하고 품 안에 파고들기도 하면서 애교를 부렸다.
딩동.
그때, 디바이스 메시지 수신음이 들렸다.
수업과 부 활동을 빠진 탓에 반 아이들과 동아리 사람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가장 최근에 도착한 건 김유리한테서 온 메시지였다.
[김유리] 의신아! 무슨 일 있었어? 어디 아픈 건 아니야?
[김유리] 오늘은 지호도 나오지 않았는데…….
[김유리] ……계속 등교할 거지? ㅠ▽ㅠ?
당연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부탁하는데 계속 등교해야지.
답하기 전에 계속 메시지가 올라왔다.
[김유리] 오늘 스터디 모임은 나올 거야? 내일부터 주말 시작하니까 빡세게 달리려고 간식 잔뜩 준비했는데……. 〉▽〈;;
갑자기 반 아이들이 둘이나 빠지니 외로웠나 보다.
[나] 황지호도 데리고 갈게.
[김유리] 알았어! 기다릴게! ^▽^♡
디바이스 메시지를 입력하는 내 손에 올무가 기대 왔다.
홀로그램은 그만 쳐다보고 더 쓰다듬어 달라는 뜻 같다.
그렇게 올무의 뜻을 해석하기 전에 내 손은 이미 올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지만.
‘아쉽지만 가 봐야지.’
반쯤 일으켰던 몸을 움직여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어디 갈 생각이지?”
“스터디 모임.”
“……지금 그 몸으로?”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잖아.”
만약 이상이 있었다면 지금쯤 회복 아이템을 쓰거나 링거를 맞고 있었을 테니까.
내 예상이 맞는 듯 황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가자. 반 애들도 너 오는 거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올무와 작별하려 했지만.
왕왕!
“올무야, 미안해. 다음에 더 같이 놀자.”
올무를 양호실 침대 위에 내려놓기 전에 올무가 팔에 매달렸다.
팔을 꼭 끌어안고 올무가 나를 올려다봤다.
끄응…….
“혹시 같이 가자는 거야?”
왕!
신수인 올무를 반 아이들한테 보여 줘도 되나.
어차피 백호군과 산책할 때는 대놓고 돌아다니는 데다 누가 보더라도 그저 귀여운 천사로만 보일 테니 괜찮겠지만.
김유리에게 올무를 데리고 가도 되냐고 물어보니, 꼭 보고 싶다며 데려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 가자! 우리 반 애들 소개해 줄게!”
왕왕!
올무가 밝게 짖고는 양호실 침대 구석에 있던 리드를 물고 채워 달라며 왔다.
올무는 천재임이 틀림없었고 학계에서 연구된다면 정설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 * *
산령은 백호군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끌려가고 나와 올무, 황지호는 김유리의 집으로 향했다.
우리 반 친구를 만나는 게 기대되는지 김유리의 집에 들어서기 전 올무는 앞발로 털을 가다듬으며 몸단장을 했다.
그렇게 준비하지 않아도 올무는 언제나 완벽한데.
“귀엽다!”
“귀여워요……! 이름이 뭐죠?”
“목걸이에 ‘올무’라고 쓰여 있어.”
“올무 사진 찍어도 돼? SNS에 올리고 싶어……!”
꼬리를 살랑이며 아이들을 올려다보는 올무.
올무를 본 아이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의신이가 학교 안 온 이유를 알 것 같아.”
“맞아요! 올무가 붙잡으면 학교는 하루 정도 쉬고 싶어질 거예요.”
갑자기 올무를 데려와서 그런지 내가 수업을 빼먹은 이유를 올무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기숙사는 애완동물 반입 금지 아냐?”
“그렇네. 혹시 맡길 곳을 찾고 있는 거야?”
“아니. 올무는 황지호네 집에서 사는 중이야.”
이 말에는 애들이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다.
“올무는 의신이랑 더 친해 보이는데요.”
“맞아. 당연히 의신이가 키우는 줄 알았어.”
“쟤는 황지호 근처에도 안 가는데.”
황지호가 그 말에 미묘한 얼굴을 했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었다.
올무랑 친해 보인다는 반 아이들의 인증을 받으니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오늘 간식은 수제 무염 치즈에 파프리카를 섞어 만들었어. 좀 싱겁겠지만 강아지가 먹어도 괜찮은 메뉴로 준비하느라…… 아, 지금 건조기로 닭가슴살 육포도 만드는 중이야!”
능력자 김유리는 그사이에 올무 몫의 간식도 준비한 모양이다.
아이들이 올무와 노는 사이 김유리를 도와 그릇과 컵을 세팅할 때.
김유리가 디바이스를 확인하고 놀란 얼굴을 했다.
“와, 다인이가 엄청 빨리 좋아요 누르고 갔어.”
“올무 사진에?”
“응! 댓글도 달았어. 사진 있으면 많이 올려 달래.”
솜뭉치를 아꼈던 안다인 다운 모습이었다.
“사진 보내 줄까?”
“……와! 옷 예쁜 거 많이 입고 찍었네!”
김유리에게 올무 패션쇼 사진들을 전송해 주니 아주 기뻐하며 SNS 계정에 올렸다.
지금 안다인이 직접 올무를 귀여워해 주는 건 어렵겠지만, 사진으로라도 마음을 달랬으면 좋겠다.
“의신이 얼굴이…….”
“부반장 개 멍청해 보이네.”
“애니멀 테라피 효과인가 봐요. 음, 좀 많이 긴장이 풀린 것 같네요!”
“하하하! 그냥 지능이 낮아진 거다.”
올무와 놀아 주던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간식을 먹고 쪽지 시험 테스트를 치른 후, 김유리의 집을 나섰다.
내일이 주말이라 그런지 한이와 권레나는 자고 갈 예정이라 했다.
‘다음에는 저 자리에 민그린도 있으면 좋겠다.’
저녁 먹을 시간에 가까워지자 송대석이 나타나 민그린을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한다.
‘오늘은 평소와 다른 루트네.’
평소 올무가 산책 겸 나를 배웅하는 것과 달리, 황명호 대저택까지 내가 올무를 배웅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올무도, 황지호도 내가 하루 자고 가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초상우주, 산령, 안광, 천익산, 괴담.
생각해 두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거기에다 주말에 가야 할 곳도 생겼어.’
내가 기절한 사이에 도착했던 메시지를 보며 생각했다.
[민그린] 야.
[민그린] 이번 주말에 바빠?
다음 메시지는 조금 긴 틈을 두다 발송되어 있었다.
[민그린] 사부님 뵈러 가는 거 도와줄 수 있어?
민그린이 홍경복 화백을 만나러 갈 결심이 선 것 같았다.
‘홍경복은 지금 출신지였던 홍천의 산골에 있다고 했지.’
당연히 도와줄 수 있다고 답변을 했을 때.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성시완] 의신아, 주말에 할아버지 서재 같이 조사하자고 한 거 기억나? 시간 돼?
[성시완] 우리 집이 멀어서 주말 아니면 좀 어려울 거야…….
성시완과 계이담이 주말에 귀가해서 한다는 그 조사 말인가.
왜 바로 조사하지 않나 했는데 집이 멀어서 그랬나 보다.
[나] 어딘데요?
[성시완] 강원도 홍천! 에어 버스 타면 금방이긴 한데 할아버지 서재가 있는 별장은 좀 산골에 있어서.
홍경복 화백과 마찬가지로 전 한국 지부장도 홍천 출신이었나.
이번 주말은 홍천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