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38)
상위 존재인 7대 죄악의 마신 중 하나, 탐욕의 아바리티아.
그 마신을 섬기는 사제인 마족(魔族)의 연구실.
공간을 왜곡시켜 만든 온실 안은 이능파와 독기로 가득했다.
이곳을 방문한 마족이 질린 표정으로 외쳤다.
“아, 환기 좀 시켜! 이러다 죽겠다!”
아바리티아의 사제를 찾아온 마족은 인비디우스의 사제였다.
연구실에서 홀로 제3의 눈을 사용해 현세를 지켜보던 아바리티아의 사제.
그는 눈의 연결을 끊고 담담히 말했다.
“마신님이 하사하신 로브를 입고 있으면 안 죽어요.”
“그건 그렇긴 한데, 기분은 안 좋잖아.”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죠? 요새 까마귀 가면을 쫓느라 바빴잖아요. 아, 까마귀 가면은 저도 관심이 있으니 정보가 있으면 뱉고 꺼져요.”
아바리티아의 사제는 신경이 곤두서 보였다.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저 새끼 또 지랄이네.’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청객인 제 처지를 고려해 성실히 답했다.
“예의 ‘그자’가 저강렵 수색을 의뢰하려고 해서. 그 의뢰를 받으면 비탄의 웅녀와 척을 지게 된단 말이야. 난 그자보다 그녀가 마음에 드니까 거절했는데 끈질겨. 숨으려고 여기 온 거야. 네 연구실에는 아무도 안 오잖아?”
“저강렵…….”
돈족의 수장이 언급되자 그가 아주 불쾌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도 저강렵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
“저강렵 본인에게는 없어요. 문제는 그가 소개한 인간 놈들이에요.”
“인간? 저강렵이 너한테 인간도 소개했어?”
“네. 제가 직접 제작한 ‘저주의 씨앗’의 시험대로서요.”
아바라티아의 사제가 마신의 인장이 새겨진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손을 움직였다.
그가 허공에 이능파를 쏘자 어두웠던 온실 저편이 환해지며 거대한 나무 하나가 보였다.
왜곡된 공간에 뿌리를 박고 있는 나무의 한 면은 자주색, 다른 면은 감청색이었다.
‘언제 봐도 괴상하군. 저놈의 취미는 이해할 수 없어!’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
솨아아…….
자주색 잎사귀가 빛을 머금은 이능파를 삼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적, 우드득!
마족의 이능파는 기괴한 포식 현상 끝에 모두 사라졌으나, 대신 자주색 잎이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그 빛 덕에 잎사귀 근처에 매달린 열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지각색의 형태의 열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열매가 있었다.
“아, 이거 전에 연구 중이라고 했던 거 기억나. ‘양심의 얼룩’이라는 저주의 씨앗을 품은 과실이지?”
“네. 죄를 지은 자가 티끌만 한 양심이 남아 있으면 점점 그 얼룩이 번져 눈과 귀를 장악해 정신을 공격하고 인간을 고립시키죠.”
“그거 완벽한 악인에게는 무용지물이잖아. 인간 중에는 양심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들도 많다고!”
“알아요. 그래서 이 ‘양심의 얼룩’은 더 가치가 있죠.”
로브 사이로 보이는 아바라티아의 사제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었다.
“선한 자를 정신적으로 조종하는 건 어려워요. 출처가 불분명한 재물이나 타인의 희생을 대가로 한 명예로는 낚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대신 선한 자는 자신이 저지른 죄와 실수의 무게에 무너지기 아주 쉽죠. 완벽한 인간은 극히 드물어요. 이 저주는 그런 선한 자들의 약점을 노려 무너뜨리죠.”
“그래. 이게 유용한 저주의 씨앗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게 저강렵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 질문에 그의 입술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인간 중에 아주 희귀하고 거슬리고 불쾌한 이능을 가진 플레이어가 있어요. 저강렵이 그 이능술사를 노리는 인간들에게 이 ‘양심의 얼룩’을 내어 달라고 했죠.”
“이계 충돌 이후 그런 능력이 많아져서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모르시겠습니까? 우리 마족과 상극인 능력, ‘언령’말이에요.”
‘언령’이라는 단어를 들은 인비디우스의 사제도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저강렵이 소개한 인간들은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유명한 언령술사를 노리고 계략을 짰어요.”
“혹시 상위 존재 토트가 가호를 내린 남옥시인(藍玉詩人) 말하는 거야? ……그 언령술사의 능력도, 가호도 성가시긴 해. 그 계략은 어떻게 됐어?”
“네, 맞아요. 그 계략의 결과만 말하자면, 귀한 씨앗들만 소모되고 끝났어요.”
“그것참, 아쉽게 됐네. 언령술사 본인을 직접 노리는 건 어때?”
“그 언령술사를 아끼는 인간과 진족이 많아서 힘들어요. 아직 우리가 수면 위로 나설 때가 아니잖아요? 우리 마도 연구 단체가 드러날 수도 있어요. 씨앗을 넘길 때도 제 정체를 숨기느라 고생했어요.”
두 마족은 ‘언령’이 많이 거슬렸는지 마기와 이능파를 우글거리며 짜증을 표현했다.
독기와 마기와 이능파가 섞여 엉망이 된 온실 안,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화제를 바꾸기 위해 말을 꺼냈다.
“네 태도는 그렇다 쳐도, 재미있는 정보를 알려 줬으니 나도 정보를 하나 풀까.”
“까마귀 가면에 대한 정보인가요?”
“아니. ‘진짜 까마귀’에 대한 정보야.”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손바닥을 펴 검은 이능파로 까마귀의 형체를 만들었다.
“그 까마귀 마왕이 움직였어.”
“방관과 침묵의 마왕이?”
“그래. 그 재수 없는 마왕 놈.”
퍽!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손을 움켜쥐자 이능파로 구현한 까마귀가 으스러졌다.
“시델렌티움이 직접 가호를 내린 인간이 있는 거 알아? 그 인간이 호족의 신역 근처에서 움직이고 있어.”
* * *
토요일 오전.
아침부터 디바이스 메시지방을 터뜨릴 기세로 메시지를 날리는 놈이 있었다.
[장남욱]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밤새워서 고민했는데 답이 안 나온다. 대체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 혼자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아.
대충 ‘나는 고민 중이다’라고 요약하면 끝일 메시지가 수백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유상훈] ?
반면 아침에 일어나 메시지를 확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상훈은 아주 경제적으로 ‘?’하나만을 찍어 끝냈다.
[장남욱] ……얘기를 들어 줄 생각이구나. 고맙다 ㅠㅠ.
[유상훈] ?
[장남욱] 그래. 빨리 말할게.
장남욱이 최근 유상훈의 메시지를 전부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는 아무리 봐도 ‘이 새끼가 지금 뭐래?’로 해석될 것 같은데.
[장남욱]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나랑 시후가 싸웠고, 시후는 무단 외박 중이야.
지금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군사관학교는 교칙이 엄격할 테니 무단 외박은 좀 큰일일 텐데.
그런데 장남욱과 도시후가 싸울만한 일이 있었나?
……생각해 보니 아주 많았다.
은광고에 왔다면 0반에 들어와도 문제가 없었을 법한 도시후의 행보를 고려하면 그랬다.
그의 주요 장난질 대상은 장남욱이었으니까.
‘그래도 장남욱은 매번 참아 주고 사과하면 바로 봐줬는데.’
장남욱의 메시지가 계속 이어졌다.
[장남욱] 사관학교는 은광고보다 커리큘럼이 빠른 거 알지?
[유상훈] ㅇ
[장남욱] 우리 학교는 다음 주까지 2학기에 들을 수업을 정해야 해. 그런데 시후가 해군 쪽 커리큘럼을 듣겠다고 해서 말리다가 싸웠어.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군인들은 ‘특수 능력을 가진 소수’라는 특성상 다른 육해공의 군부대와 협력 작전을 펼칠 때가 많았다.
플레이어 군사관학교에서는 그 협력 작전의 연습을 위해 육해공 사관학교의 커리큘럼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총톤수 5만 톤짜리 여객선에서도 뱃멀미로 죽어 나갔으면서 해군 커리큘럼이라고? 미쳤네.’
당연히 장남욱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을 거다.
[장남욱] 시후는 뱃멀미가 심해. 해상 실습 중에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르잖아?
[장남욱] 교수님, 조교님, 선배님들, 반 생도들도 다 말리는데도 들은 척도 안 했어…….
[장남욱] 처음에는 지켜보기만 하다가 나도 말렸는데 그러다 싸우게 됐어.
[장남욱] 시후는 싸우다가 어젯밤에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디바이스도 꺼져 있고, 집에도 연락해 봤는데 안 돌아갔다는데.
[유상훈] ?
[장남욱] 이유는 몰라……. 우선 내가 대리로 외박계는 제출해 놨어. 문제가 되면 나도 혼나겠지만.
장남욱의 군사관학교 입학 과정.
키모폴레이아에서 도시후가 했던 말.
얘기를 들어보니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장남욱도 주변의 반대를 뿌리치고 사관학교로 갔지. 도시후도 그랬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둘이었으니 도시후는 일방적으로 동질감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그런 상황에서 장남욱도 다른 사람과 같은 반응을 보이니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터졌던 건지도 모르겠다.
우선 도시후의 행방을 알 가능성이 크면서도 믿을 만한 사람의 이름을 하나 댔다.
[나] 도원우 선배님한테 연락드려 봤어?
[장남욱] 아! 원우 형이면 아실지도 모르겠네. 선상 파티 때 디바이스 코드 교환해 둘걸……. 연락처를 몰라.
나도 도원우의 연락처는 몰랐지만, 이 메시지방에 알만한 사람이 있었다.
[나] 유상훈은 알고 있을 듯.
[유상훈] ㅡㅡ
[장남욱] 맞다! 상훈이랑 원우 형은 예전부터 알고 지냈다 했지? 물어봐 줘
유상훈은 도원우를 극혐하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건 가족 단위로 알고 지내는 소꿉친구다.
유상훈이 싫다고 하면 유상희한테 연락해 볼까…….
[유상훈] ㅇ…….
저 ‘……’에서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장남욱] 고맙다!
도원우도 모른다고 하면 그때 다른 대책을 세워 봐야지.
그렇게 메시지 확인을 마쳤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일찍 나왔네.”
말을 건 것은 사복을 입은 민그린이었다.
그녀의 뒤에는 장승같이 서 있는 인물 하나가 있었다.
“별로 안 기다렸어. 너도 같이 가는 거야?”
송대석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한 번, 사전에 대여해 둔 에어택시를 한 번 번갈아 봤다.
‘예상대로 같이 왔어.’
단체로 가는 거면 모를까, 그 송대석이 나와 민그린이 단둘이서 어딜 가는 걸 두고 봤을 리가 없었다.
“타자.”
“……대석이가 올 걸 예상한 말투네.”
송대석과 민그린이 나란히 앉고, 나는 송대석과 마주 앉게 되었다.
내가 뒤이어 올라탈 때, 송대석이 아주 단호하게 자기 반대편을 가리켰던 탓이다.
송대석이 뻣뻣하게 구니 민그린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여 분위기도 바꿀 겸 택시 내 무인 판매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에어택시 내에서만 한정으로 파는 프레첼인데 먹을래? 홍천까지는 좀 걸릴 거야.”
이전에 미식가 맹효돈과 주수혁이 추천한 허니 시나몬 프레첼을 골라 두 사람에게 하나씩 건네줬다.
목적지로 향하는 에어택시 안,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프레첼을 먹던 송대석이 한마디 했다.
“소문과 다르게 안 수상해 보이는데.”
“뭐?”
“은광고 커뮤니티 종합 게시판에선 1학년 0반, 무명의 초신성은 수상한 웃음을 자주 짓는다고 하던데. 그런데 왜 멀쩡해 보이지? 그린이 앞에서만 얌전한 척 구는 거 아니야? 무슨 의도로 그러는 거야?”
멀쩡해 보인다고 까일 줄은 몰랐다.
“아닌데. 의신이 내 앞에서도 수상하게 자주 웃어!”
“그래?”
“응. 의신이는 수상해.”
“그래…… 다행이다.”
뭐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민그린 앞에서 수상하게 웃는다는 사실이 송대석을 안심시킨 모양이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안심했다면 됐다.
침묵이 이어졌다가 민그린이 간신히 생각해 낸 화제로 아주 잠깐 대화가 이어졌다 다시 끊어지는 어색한 상황이 반복되던 중.
위이잉!
에어택시가 멋대로 공중에서 정차해버렸다.
“어, 아직 사부님이 계신 가리산까지 가려면 조금 더 가야 하는데.”
“여기는 에어택시 운행 불가 구역도 아니야.”
혹시 근방에 이계의 틈이 발생했나 해서 협회의 홈페이지도 확인했지만 아무 문제 없었다.
“저기 뭐가 있어.”
지상, 세 마리의 백마가 에어택시를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