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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46화 (146/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46)

‘둘 사이에 문제가 있나…….’

게임 속에서는 접점이 없던 염준열과 사월세음.

두 사람의 행적을 되짚어 분석해 봤다.

‘혹시 그건가.’

운명력의 인도에 따라 전통문화 학습실에서 엿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적벽괴도 님이 괜찮다고 하신다면…… 염준열 선배님이 적벽괴도 님이 누구신지 아시게 되면…….

—그래. 꼭 물어볼게.

예의 ‘그 단어’를 사용하며 나를 오그라들게 만든 그 날.

사월세음은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며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러고 보니 사월세음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내가 아는 염준열이라면 나와 만난 날, 바로 이렇게 말했을 거다.

‘스승님! 세음이 기억하시죠? 그 아이가 스승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는데…….’

나를 찾았다고 사월세음에게 알리지 않아도 나에게 물어보는 것 정도는 해야 되지 않나.

굳은 염준열의 얼굴은 그늘져 보였다.

“자, 그럼 심판은 내가 할까.”

그때, 내 뒤로 불쑥 용제건이 등장했다.

체스보드를 두고 마주 앉은 나와 곽경구 사이에 서 있던 염준열은 뒤늦게 그의 등장을 깨닫고 당황했다.

용제건의 기척을 바로 감지하지 못한 건 뭔가 이상했다.

용제건도 그렇게 생각한 듯 염준열을 2초가량 응시하다 말했다.

“준열아, 이능파가 조금 흐트러져 있는데. 양호실에 들러서 활력 징후의 이상 여부를 체크해. 아니면 상희가 지금 교내에 있으니까 아케아를 불러서…….”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상을 느낄 정도로 바이털 사인이 흐트러지지는 않았어요. 그럼 전 앉아서 관전할게요.”

용제건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내키지 않아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과보호를 한두 번 본 게 아닌지 곽경구는 ‘저 용 또 시작이네’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용제건 선생님, 심판 잘 부탁드립니다.”

곽경구가 간접적으로 재촉하자 용제건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코인을 던질까.”

코인을 던져 선수와 후수를 정하는 사이.

염준열은 대국실에 마련된 접이식 의자를 꺼내 앉았다.

위치가 미묘한 게 어쩐지 사월세음과 거리를 두고 앉은 것 같았다.

“대국을 시작해 주십시오.”

용제건의 시합 개시 신호와 동시에 후수인 곽경구가 체스 클락을 눌렀다.

지난 대국과 순서는 역인 상황이었다.

‘……머리가 아파.’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두통은 심해지고 손끝은 점점 식어갔다.

대국실에 앉아 나를 지켜보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아직 현역 시절처럼 두기는 어렵구나.’

멀리 돌아가더라도 내가 두고 싶은 수를 두고,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무너뜨리는 끈질기고 집요한 체스를 둔다고 평가받던 나였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에 시간제한이 걸린 지금, 최고의 수보다는 최선, 최속(最速)의 수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 극복해야 할 게 많네…….’

체스보드를 보며 곽경구가 다음 수를 두는 걸 기다리던 중.

“기권합니다.”

또 곽경구가 기권해 버렸다.

엔드 게임에 접어들긴 했지만, 아직 내가 체크를 부른 것도 아닌데.

저번보다 더 오래 버티긴 했지만.

“의신이가 이겼어요! 축하드려요!”

“축하해.”

“그러면 함께 검토하자.”

곽경구와 악수를 마치자 관객석에 앉아 있던 이들이 몰려왔다.

곧 대국의 검토가 이어졌다.

“경구가 기권한 건 의신이의 킹이 오포지션을 잡은 상황에서 룩이 협공하면 곧 체크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지?”

“아, 킹과 킹 사이에는 일정 거리를 둬야 한다는 특수 규칙이었죠?”

“그래, 오포지션을 잡힌 킹은 길을 내주는 게 규칙이야.”

용제건이 체스 초보자인 사월세음과 한이에게 해설을 마친 후.

그는 곽경구가 둘 수 있었던 수를 몇 개 제시해 주며 아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포기가 빠르구나, 경구야.”

곽경구가 더 아쉬워하는 얼굴을 했다.

홀가분해 하던 것보단 이쪽이 훨씬 나았다.

사월세음과 한이와 함께 인사를 하며 대국실을 나설 때, 수심 어린 얼굴을 한 염준열이 눈에 들어왔다.

1학년생들의 인사를 웃으며 받아 줬지만, 망겜의 화석인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염준열이 코멘트를 전혀 하지 않았어.’

내 제자와 조만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

*    *    *

김유리의 집으로 향하는 길.

관전이라는 형태긴 했지만, 이번에도 내 대국을 응원하러 온 두 사람을 위해 서문 앞 빵집, ‘MITRON’에 들렀다.

내가 산다는 말에 사양했지만, 끈질기게 들이대니 MITRON의 단골손님인 두 사람이 결국 넘어갔다.

“이번 달은 좀 많이 질러서 참으려고 했는데…….”

“자두 맛 젤라토랑 블랙초크베리 트라이플 중에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둘 다 골라서 나눠 먹자.”

“네? 괜찮아요! 저번에 못 먹은 살구 커스터드 타르트가 아직 품절이 안 됐으니까 그거부터 고르세요.”

진열대 앞에서 한이와 사월세음이 사이 좋게 메뉴를 골랐다.

고민하는 두 사람을 위해 둘의 눈길이 닿은 건 전부 지르기로 했다.

다른 아이들 몫도 고른다고 했더니 활기차게 트레이에 각종 디저트를 담아 오기 시작했다.

신난 모습을 보니 아직 저녁도 먹지 않았는데 배가 부르는 것 같았다.

‘역시 돈은 이렇게 써야지.’

우리 반 아이들을 위해 간식을 사는 건 현명한 소비 전략이었다.

마침 지난 주말 SSR급 이계 공략 파티에서 활약한 덕에 포상금을 잔뜩 받아 뒀으니 아주 잘 됐다.

‘저번엔 아침에 서 있었지. 저녁에도 계산을 맡을 때도 있나.’

오늘도 우연인지 MITRON의 파티시에 플레이어가 직접 계산대에 서 있었다.

파티시에는 단골인 사월세음과 한이와는 꽤 친해졌는지 가벼운 잡담도 하고 있었다.

“덤으로 사탕 받았어요! 10개 넘게 있으니까 나중에 나눠 먹어요.”

“난 딸기 크림 맛 먹을래.”

“그럼 전 라임 맛!”

그렇게 평화롭게 대화를 하다 김유리의 집에 도착했을 때.

김유리가 평소보다 문을 늦게 열어주며 농담조로 말을 걸어왔다.

“하하하, 어서 와! 타이밍이 조금 안 좋았어.”

거실 안을 바라보니 가장 먼저 당장이라도 처웃을 기세인 황지호가 눈에 들어왔다.

저 꼴을 보니 불길했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고?

“아, 진짜!”

목소리를 높인 건 송대석이었다.

그는 더러운 기분을 전신으로 표현하며 막 도착한 우리를 노려봤다.

“스터디 모임에도 안 오고 대체 어디를 싸돌아다닌 거야. 이렇게 늦게 올 거면 차라리 오지를 말지. 이 도움이라곤 전혀 안 되는…….”

“대석아!”

“하하하하!”

민그린이 제지하자 송대석은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황지호가 처웃기 시작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송대석은 버럭대는 성질이며 황지호는 돌아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는 우리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 있나요?”

“왜 저래.”

사월세음과 한이가 묻자 권레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린이가 AR 글래스를 벗는 연습을 하려고 했어. 유리네 집에 자주 왔으니까 조금은 익숙해졌을 거고, 대석이를 빼면 아직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네 명이잖아? 네 명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 시험해 보려 했었어.”

홍경복 화백님이 학교에 오신 효과일까.

민그린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다니.

‘송대석이 화난 이유도 알겠다.’

민그린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낯선 놈이 선물한 AR 글래스를 벗을 기회.

그게 날아간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다.

“그런 거면 자리를 비켜 줬을 텐데요!”

“나가 있다 올게.”

“아니, 괜찮아! 이제 저녁 먹으러 집에 갈 생각이었으니까…….”

민그린이 그렇게 말하자 송대석이 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나 보다.

“저녁 먹고 가지…… 재료는 넉넉한데.”

“집에서 기다리니까 안 돼. 우린 간다.”

김유리가 말렸지만, 가족이 기다린다니 더 잡을 수가 없어서 두 사람을 배웅했다.

“……내일은 나도 저녁 준비 도와도 돼?”

민그린이 내일부터는 저녁도 먹고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송대석이 뒤에서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유리는 그 표정에 굴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내일은 그린이랑 대석이가 좋아하는 메뉴로 하자.”

“응……! 그럼 내일 봐.”

“가자.”

민그린이 인사를 마치자 송대석이 거의 끌고 가듯 그녀의 등을 밀며 문밖으로 나갔다.

잠잠해진 현관을 보다 물었다.

"진도 어디까지 나갔어?"

이 말에 남아 있던 아이들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무슨 일 있었나요? 오늘 공부하기로 한 건 공통과목인 플레이어의 전투 이론1이었죠?"

"하하하, 그게 우리가 위성 파트는 엄청 공부했어."

"그 새끼 말 많더라."

어리둥절해하는 우리에게 권레나가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교과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 시험 범위에 ‘위성 정보를 활용한 파티 전략’파트가 있잖아. 그 부분에서 나랑 효돈이가 좀 헤맸는데, 대석이가 갑자기 열변을 토하면서 설명하더라.”

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그런 기특한 짓을 하다니.

‘게임 속 송대석에게는 위성 덕후 기질이 있었지.’

송대석의 장래 희망은 협회 내에서는 3D 부서로 통하는 위성 관리팀이나 위성 개발팀 소속의 연구원이 되는 것.

대영웅 무쇠팔의 손자인데다 뛰어난 이능을 타고났으니 ‘너도 이계 공략 탑 랭커 플레이어가 되어라’라는 압박 때문에 입 밖으로 표현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이번에는 꿈을 이뤘으면 좋겠는데…….’

게임 속에서는 송대석이 죽기 전 회상에서만 간략하게 뜨던 설정 중 하나였었다.

‘협회에 인턴 자리가 없나 알아봐야지.’

송대석이 직접 나설 용기는 없을 테니까 도와주기 위해서는 변화구를 던질 필요가 있을 거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어떤 수를 둬야 할지는 금방 떠올랐다.

*    *    *

기숙사에 돌아가니, 밀려있는 디바이스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이 뒤늦게 내 이계 공략 활약상을 접하고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내용이었다.

[옥토연] 은인아! 너 홍천에서 이계 공략했다면서? 아직 17살인데 SSR급 이계 공략에 나대? 미쳤어? 죽고 싶어? 그런데 잘 싸웠네. 잘했어. 다음에도 잘 싸우고…… 음…… 될 수 있으면 안 싸웠으면 좋겠다!

[옥토연] 그런데 은인아, 주말에 이계 공략 같은 거 갈 시간이 있으면 나랑 야구장 안 갈래? 요새 위성 일 때문에 토윤 언니가……ㅁㅎㅇㄴ로ㅓ;ㅏㅣ

옥토연의 메시지는 여기에서 끊겨 있었다.

메시지 작성 도중에 옥토윤에게 처맞은 모양이었다.

요지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은인인 나를 걱정하고 있고, 야구장에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홍규빈 팀장님한테도 왔네.’

홍규빈은 아직 야근이 없는지, 저녁 먹고 싶으면 불러라, 다음 제갈재걸 잡지 초판을 예약하고 싶다, SSR급 이계 공략 고생했다며 격려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어, 마지막 줄에 뭐가 더 있네.’

스크롤을 당기니 홍규빈이 남긴 메시지가 한 줄 더 보였다.

[홍규빈] 꾀돌이에 주의해라…… 요즘 웃는 게 심상치 않아.

그 꾀돌이는 황지호와도 접촉을 했으니 뒤에서 뭔가 하는 중이긴 할 거다.

홍규빈에게는 대충 고맙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보내고, 신규 메시지를 하나 작성했다.

[나] 권제인 선배님, 안녕하세요.

[나] 지난번에 거절하셨던 은광고의 명예 교사직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

…….

…….

내가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하자, 권제인이 아주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권제인] 그래.

[권제인] 재러드와 상담할게.

영원의 호수의 팀 마스터의 자리에 있는 권제인.

팀 마스터가 교사직을 맡는 건 혼자 결정을 내리기 어려우니 재러드 리와 상담해 볼 생각인 듯했다.

‘재러드도 말리지는 않겠지. 팀 마스터가 갑자기 교직을 맡게 되면 처리할 일이 많을 테니 고생은 하겠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한 건 장남욱과 유상훈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

메시지방에 들어가 보니 장남욱이 메시지를 입력 중이라는 알림 메시지가 작게 떠 있었다.

*    *    *

어둠 속.

빛을 머금은 비늘을 흩뿌리며 수백 마리의 나비가 나비령의 주변을 맴돌았다.

“음…… 이것도 아니고…….”

파삭!

그녀가 하얀 손바닥을 움켜쥐자 나비 형태를 한 이능파 덩어리가 으스러졌다.

그녀는 계속 나비를 터뜨려 갔다.

팟! 파삭!

수십 마리의 나비가 사라지고.

흩어지는 비늘 가루 속에 응축된 정보를 읽던 그녀가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원하는 정보를 얻은 듯 그녀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후후후, 모처럼 좋은 정보를 얻었는데 보는 ‘눈’이 많아서 전하기가 힘드네.”

비늘 가루가 빛을 잃어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그녀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은광구는 가기 힘드니까, 호수 쪽에 가 볼까.”

그녀는 후후후, 하고 다시 웃으며 푸른 눈의 바이올리니스트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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