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47)
[장남욱] 미안, 메시지를 지금 봤어.
유상훈도 확인했는지 장남욱이 보낸 메시지는 바로 기독 표시가 붙었다.
[장남욱] 보고하는 게 늦어서 미안해.
[장남욱] 덕분에 무사히 복귀했어.
무사히 복귀한 거 좋아하네.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나] 의무실에 있었다면서.
[장남욱] 어? 누구한테 들었어? 그냥 검사 차원으로 들른 거야.
[나] 기합받은 거 앎.
[유상훈] 구라ㄴㄴ
인간 병기나 다름없는 플레이어를 군인으로 양성하는 플레이어 군사관학교는 다른 사관학교보다 엄하기로 유명했다.
1학년 생도의 기를 꺾는 본보기로 삼기 위해 기수장에게 기합을 줬으니, 어설프게 했을 리가 없었다.
[장남욱] 내가 시후 외박계를 대리로 작성한 게 걸려서 기합을 받긴 했는데 별거 아니야. 괜찮아.
[유상훈] ㅡㅡ
정확히는 훈육장교에게 헛소리를 하다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렸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유상훈이 날린 이모티콘을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장남욱] 진짜 괜찮아. 지금 의무실에 진짜 상태 안 좋은 애가 있어서 엄살 부리기도 좀 그래.
[나] 상태 안 좋은 애?
[장남욱] 응. 내가 검사받는 사이에 몇 번이나 의무실을 왔다 갔다 했어. 그러다 일일 적정 회복 아이템 사용량이 초과가 되는 바람에 일반적인 방법으로 치료를 받는 중이야.
[유상훈] ?
[장남욱] 애들이랑 대련하다가 그렇게 됐대.
그놈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도시후가 언급했던 그 고자질꾼일 거다.
[장남욱] 앞으로 실기 시험도 남아 있으니까 그거 준비하는 게 아닐까? 다른 애들 말로는 앞으로 걔가 해야 할 대련이 많다더라. 승부욕이 강한 애라고 생각했는데 기말 실기를 앞두고 열심히 하는 것 같아. 이런 애도 있는데 기수장인 내가 엄살이나 꾀병을 부릴 수는 없지.
군사관학교 1학년 생도들이 대련을 통해 그 고자질꾼을 신나게 패 주고 있는 것 같다.
치료하고 다시 불러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번 건은 기수 열외를 당할 만한 일인데…… 장남욱이 기수장으로 있는 한 같은 기수에서 그런 일은 안 일어나겠지.’
그걸 아는 사관학교 놈들도 어디까지나 건전한 대련을 통해 고자질꾼을 패는 걸 거다.
유상훈도 그걸 눈치챘는지 그 이상으로 별말은 하지 않았다.
[장남욱] 보내야 할 메시지가 좀 많아서 다음에 다시 연락할게. 둘 다 진짜 고마웠어. 너희가 없었으면 아직 시후도 못 찾고 혼자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장남욱] 다음에 만날 때는 내가 밥 살게!
[유상훈] ㅇ
[나] 그래.
이번 일은 무사히 수습되긴 했지만 혼자 죽으러 갔다가 겨우 살아난 꼴이 된 장남욱은 혼나야 했다.
비싸고 맛있는 밥을 사게 해서 혼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맛집 리스트를 뒤졌다.
* * *
다음 날, 방과 후.
총동아리회관에 위치한 스테일메이트의 부실.
“대국하러 온 거죠? 어, 오늘은 지호도 왔네요?”
“하하하! 대국하는 걸 알았다면 어제도 관전하러 왔었을 거다.”
“……체스에 관심이 많네. 설마 체스도 잘해?”
한이의 질문에 황지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장난기 어린 얼굴을 보며 한이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놈이 체스도 잘 두는 걸 알아챘나 보다.
“그럼 같이 대국실로 가요! 아, 저기 염준열 선배님이 오고 계시네요.”
대국실에 들어가기 직전, 염준열과 천동하가 등장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사월세음을 본 순간 염준열의 낯빛이 조금 흐려졌다.
작은 변화를 캐치한 용제건이 염준열과 사월세음을 번갈아 보다 천동하에게 물었다.
“준열이 대국 보러 왔어?”
“네. 진승이가 오겠다고 난리를 쳤는데 대국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요. 대신 제가 보고 오기로 했습니다.”
선도부 소속 2학년 학생인 천동하의 기억력은 괴물 같았다.
작년 체스 챔피언이자 천재인 그가 직접 관전하고 와 해설해 준다면 마진승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럼 자리에 앉자.”
염준열이 체스보드 테이블에 앉으라고 권했다.
이때 의문이 하나 생겼다.
‘황지호를 보고도 왜 아무 반응을 안 하는 거지?’
황지호가 호족인 건 알 수 없어도 진족인 건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지금 염준열의 눈에는 황지호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보고 있을게. 파이팅.”
“……응, 그래.”
천동하가 응원의 말을 던져도 영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대국 시작 전, 염준열과 악수를 할 때 위화감은 더 커졌다.
‘저번보다 손이 찬 것 같은데.’
여전히 나보다 체온은 높았지만 염준열의 손이 식어 있었다.
그의 상태가 안 좋으면 대국은 미루는 게 좋지 않을까.
심판을 맡은 용제건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았지만, 염준열이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코인 토스 부탁드립니다.”
용제건은 별로 탐탁지 않아 했지만 결국 친동생처럼 아끼는 후예의 말을 들어줬다.
코인이 던져진 결과.
선수는 염준열, 후수는 나.
무난하게 시실리안 디펜스로 전개된 오프닝을 지나 미들 게임으로 이어졌을 때.
‘……이건 무슨 수지? 의미가 있나?’
좋은 뜻이 아니라 나쁜 의미로 예상하지 못한 수가 나왔다.
‘대체 이걸 어떻게 수습할 생각인 거야……. 나이트와 룩을 동시에 내줬잖아.’
염준열의 악수가 나왔지만, 체스에서 봐줄 생각은 없어 가차 없이 그의 진영을 파고들었다.
점점 백의 기물이 줄어 갈 때.
삣.
염준열이 체스 클락을 누르며 턴을 넘긴 순간.
용제건과 관객들이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하는 게 보였다.
나도 염준열이 둔 수를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염준열이 자살수를 뒀어……!’
체스에서는 금지된 수가 몇 개 존재했다.
바로 자신의 킹이 사로잡히는 수를 두는 자살수.
만약 둘 수 있는 수가 자살수밖에 남지 않았다면 스테일메이트가 되어 게임이 끝나지만, 현재 국면에서는 둘 수 있는 수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살수를 두면 규칙상 반칙패로 처리된다.
‘눈치를 못 챘어……?’
체스는 매너와 예절의 게임이다.
진 쪽이 패배를 시인할 때까지 입을 열 수 없었다.
나는 염준열을 곧게 응시했다.
“……?”
내 시선을 느낀 염준열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나는 눈을 깔아 가만히 그의 킹을 바라봤다.
염준열도 그의 킹을 보고 뒤늦게 얼굴색을 바꿨다.
“……졌습니다.”
염준열이 차갑게 식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용제건이 소리를 차단한 공간을 해제해 주변의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염준열이 대국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온 팬들이 많은지,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많았다.
“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의신이는 체크를 부르지 않았잖아요.”
“이 경기는 조의신의 승리다. 용족의 후예는 반칙패를 당했어.”
“반칙패?”
“마지막으로 그가 옮긴 비숍의 위치를 보면…….”
황지호가 홀로그램을 띄우면서 사월세음과 한이에게 해설을 해 주고 있었다.
용제건이 굳은 얼굴로 다가와 염준열에게 말을 걸었다.
“준열아, 돌아가서 쉬자.”
“네? ……대국이 금방 끝나서 아직 시간이 있잖아요. 의신이만 괜찮다면 한 번 더……!”
파앗! 팟! 팟!
용제건이 공간술을 사용해 대국실에 있는 모든 체스보드를 색이 입혀진 공간으로 덮었다.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이능파가 퍼지고 대국실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용제건이 다시 관객석과 체스 테이블 사이의 소리를 차단한 것 같았다.
“그 상태로? 이런 시합을 하는 건 대국 상대에게도 예의가 아니야.”
“제건이 형…….”
“아직 학교니까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지.”
“……죄송해요.”
용제건도 가끔은 염준열에게 엄격하게 대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염준열이 등을 돌린 순간 말도 안 될 정도로 슬픈 표정을 지었다.
몇 초전에 자신이 했던 말에 염준열이 상처받은 게 아닌가 후회하는 모양이었다.
“미안해, 의신아. 괜찮으면 나중에 다시 날을 잡아서 대국해 줄래?”
“괜찮아요. 다음에 또 둬요.”
“그래, 고마워.”
염준열은 기운 없는 얼굴로 웃고 뒤돌아 갔다.
용제건은 공간술을 해제하며 염준열보다 더 기운 없는 모습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염준열 선배님, 어디 안 좋은 걸까요?”
“흠…….”
사월세음이 걱정스럽게 말하고 황지호는 눈을 반짝이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황지호가 뭔가 캐내려 하기 전에 빨리 화제를 전환해야 할 것 같았다.
“장 봐 달라고 부탁받았어. 쇼핑하고 가자.”
“아, 오늘은 그린이와 대석이도 오죠. 간식도 사 가요!”
“어제 덤으로 받은 사탕 맛있었어. 그거 사자.”
오늘도 응원 온 걸 핑계로 간식은 내가 사기로 했다.
내가 산다는 말에 황지호가 처웃으면서 황명 타워에 입점한 디저트 가게에 가서 비싼 간식들을 집어 댔다.
그래도 맛있는 것만 골라오는 데다 전부 우리 반 아이들이 먹을 예정이니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쇼핑을 마치고 도착한 김유리의 집.
“아, 어서 와!”
김유리가 평소보다 몇 배는 반갑고 기쁘게 맞아 줬다.
거실 분위기는 좀 처져 있었다.
뻘쭘한 얼굴로 앉아 있는 맹효돈.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권레나.
이 풍경에서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민그린이 안 보이는데. 집에 갔나?’
하지만 송대석이 침울한 얼굴로 거실 한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민그린이 있다는 증거다.
그녀가 여기에 없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집에 갈 놈이니까.
주변을 살피다 김유리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러니까…… 대석이랑 그린이가 싸웠어.”
* * *
서서울 호수공원.
영원의 호수 팀 빌딩.
빌딩 입구 쪽에서 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홀로그램에 적힌 대본을 암기하고 동선을 체크했다.
“사전에 전문 각본가를 섭외해야 했어……. 대체 이거 짜는데 얼마나 걸린 거야.”
“해주 아이템을 더 사두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팀 닥터 발연기 너무 심각함. 진심 못 볼 꼴임.”
현재 영원의 호수 팀 빌딩 전체는 세트장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계기가 된 건 팀 마스터 권제인의 발언이었다.
—다음에 레나가 여기에 방문할 때, 침묵맹세의 저주를 해주할 거야.
처음에 어리둥절하던 팀원들은 권레나에게 걸린 두 개의 침묵맹세에 관해 듣고 극히 분노했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재러드 리도 새삼 다시 분노를 느껴 꾀돌이가 감금 중인 권레나의 양부모를 다시 족치러 갈 정도였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해주 아이템을 사용하겠다는 권제인을 막고 회의를 했다.
회의 결과,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연을 가장하여’ 해주 작업을 하기로 했다.
그 방법이 팀원들을 동원한 짜고 치는 연극이었다.
“자, 리허설 시작한다!”
재러드 리의 신호에 따라 팀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감독을 맡은 재러드 리의 성에 차지 않는 바람에 NG와 대본 교체 작업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 리허설은 매우 지지부진했다.
‘내 차례는 아직 멀었구나.’
팀 빌딩 밖에서 입구를 바라보며 이를 지켜보던 권제인이 가만히 호수를 바라봤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 늦은 오후였지만 아직 빛이 남아 있었다.
저물녘, 낮과 밤의 경계.
수면에 비치는 석양의 색을 감상하던 그녀는 이질적인 이능파를 느꼈다.
분명하지 못하고 어렴풋한 흔적이었지만, 그녀는 그 정체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나비의 편린……!’
접족을 떠올리니 권제인은 내장이 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권제인은 호수 위를 박차고 편린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뛰어 팀 빌딩에서 멀어졌을 때.
긴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왜 여기에 있어.”
권제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그녀의 몸에 칼날 같은 기세의 푸른 이능파가 감돌기 시작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잖아? 새도, 쥐도 싫으니까 낮도 밤도 아닌 시간에 온 거야.”
비늘 가루를 감고 있는 접족에게 실체는 없었다.
전력을 다해 공격해도 의미가 없는 상태였다.
권제인은 이성을 되찾고 이능파를 가라앉혔다.
“당신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정보 교환은 호족을 통해서 해.”
“그쪽에는 눈이 많아서.”
“재러드를 보낼게.”
권제인이 등을 돌리고 자리를 뜨기 전, 접족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하나 남은 혈육이 위험해질지도 몰라. 그분이 은광고 1학년 학생 중에서 제물을 선별할 예정인 것 같으니까.”
권제인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방금까지 타오르던 속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레나에 대해서 알고 있어……?’
접족의 선택으로 자신의 가족에게 일어났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분’? ‘제물’?’
권제인의 푸른 눈이 흐리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