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50)
‘그분’ 혹은 ‘그자’로 불리는 흑막.
흑막은 은광고 1학년들을 노리고 있는 모양이다.
‘청소년 수련회 사건은 흑막이 제물 조달을 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나……!’
게임 속 청소년 수련회 사건이 떠올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
통신 장애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수련회장.
화면 너머로 봤던 광경이 아직도 생생했다.
‘여태까지 흑막의 수를 막아 냈으니 그때보다 더 철저하게 대비하겠지.’
주수혁과 안다인, 함근형 선생님을 비롯한 교사들의 활약과 김유리의 폭주까지 겹쳐지니 흑막은 제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물러났었다.
그러나 몇몇 운 없는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고 말았다.
‘제물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학생들의 목숨을 노리는 건 확실해.’
황지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예정을 변경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런 짓을 하면 그자의 노림수가 바뀔 뿐이겠지.”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내가 담담히 말하자 황지호가 나를 가만히 주시했다.
“놀라지 않는군. 이것도 알고 있었나?”
“제물에 관해선 몰랐어.”
“청소년 수련회가 노려진다는 건 알고 있었던 건가.”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도 답해 주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 듯, 황지호는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이 일은 나중에 조용히 의논하도록 하지. 행여 학생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퍼지다가 그자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나는 황지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유리의 폭주 대책에 이어 생각해야 할 게 더 늘었다.
* * *
점심시간.
홍경복은 미술계 동아리 학생들의 포트폴리오를 살피고 있었다.
그가 은광고의 학생들을 민그린처럼 정식으로 제자로 받은 건 아니었지만, 한 학교의 교사로서 이들을 가르칠 예정이었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을 것 같군…….’
민그린을 대하는 젊은이들의 태도에 실망해 한때 속세를 멀리했지만, 그간 허비한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재능 넘치고 건전한 정신을 가진 청년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홍경복, 민그린 두 사제를 열정적으로 따르는 은광고의 미술계 동아리 소속 학생들.
친구를 위해 산골까지 날아온 사관학교의 생도들.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홍경복은 흐뭇해하는 얼굴을 했다.
그때.
“화백님!”
점심시간 내내 도망친 임시 제자를 찾던 한복 차림의 노인, 탁거산이었다.
그는 홍경복을 향해 허겁지겁 뛰어오며 급히 말했다.
“전에 화백님이 손을 자르려 했던 그 개잡놈 말입니다요. 손이 잘렸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말해 보게!”
탁거산이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검경에 지인이 두루 있는 탁거산이 홍경복의 파문된 제자의 수사 상황을 알아본 결과.
그 제자는 재단기를 다루다 손목이 잘린 채로 발견되어 병원에서 처치 후 체포되었다고 한다.
“대체 어쩌다가 그런 사고가…….”
“고놈이 취중에 일을 친 것 같습니다! 당시 혈중알코올농도가 0 .2가 넘어갔다고 합니다요. 거기에 약물 검사에서 양성 반응도 나와서 말입죠…….”
그 정도의 만취 상태에서 운전을 하면 사고를 내지 않아도 면허 취소는 물론이고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 상태에서 약까지 했다면 손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천벌을 받은 겁니다! 그 개잡놈의 손은 잘려도 쌌죠.”
“허어…….”
탁거산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홍경복이 허튼짓을 할 이유도, 그 대상도 사라졌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마냥 기뻐하는 탁거산과 달리 홍경복의 사고는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는 천벌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런 게 있었다면 손이 백 번은 잘리고도 모자랄 놈들이 아직도 떵떵거리고 살 리가 없으니까.
‘……누군가가 사고로 위장해 그놈의 손을 자른 거다. 경찰의 눈을 속이는 게 가능하고, 이 상황을 알고 있는 자들이 벌인 짓이겠지.’
처음 떠오른 건 1학년 0반의 부담임이 된 용족이었다.
‘용족이 나서서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면 가능할 거다. 하나 그들은 후예의 일이 아닌 한 그리 나서지 않을 게야.’
다음 후보로 떠오른 건 황명재단의 이사장이었다.
진족을 뒤에 업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황명 재단.
손목이 잘린 그놈은 황명재단에서도 사고를 친 것 같으니 앙갚음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황명재단이라면 손을 자르겠다고 날뛴 자신의 모습이 기록 기기에 남은 걸 확인할 수도 있었을 거다.
‘신세를 졌군…….’
홍경복은 은휘관 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 *
방과 후.
신문부실의 1학년 부실.
그레이트 탁, 탁거산의 임시 제자, 빵셔틀 VS 숨은 강자, 맹효돈의 대결에 관해 기사를 정리하던 문새론이 냉정하게 말했다.
“이래 갖곤 기삿거리가 안 될 거야. 실드를 칠래야 칠 수 없어. 빵윤섭이 너무 약함!”
문새론이 방윤섭의 전력을 분석한 리포트를 홀로그램으로 띄우며 말했다.
담배를 피우거나 소지하다가 맹효돈에게 걸려서 도망가다 허무하게 잡히는 짧은 영상이 리포트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내 빵셔틀이 약한 줄은 알았지만, 저보다 키가 한참 작은 맹효돈에게 저리 허무하게 털리는 걸 보니 더 약해 보였다.
“맹효돈 씨와 빵셔틀. 둘의 전투력 차이가 너무 큼! 빵윤섭은 어차피 져도 그만이라 생각하는지 그레이트 탁을 피해 도망만 다니고. 얼마나 처절하게 발릴지 짐작도 안 감!”
중학교 때부터 주수혁과 대등하게 맞서고, 파이트 클럽에서 혹독한 실전을 경험해 온 맹효돈.
은광 트레이닝 코스로 조금은 성장했지만, 아직 한참 먼 졸렬한 빵셔틀 방윤섭.
탁 도인의 지도도 제대로 받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했다.
‘이대로 가다간 맹효돈이 너무 쉽게 이겨 버릴 것 같은데.’
열변을 토한 문새론이 나를 보며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수상한 부반장이 도와줬으면 하는데.”
왜 문새론이 나를 붙잡고 이렇게 말하는지 알아챘다.
문새론과 내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그녀는 저 시합이 좀 더 치열했으면 했고, 나는 내심 맹효돈이 탁 도인의 제자가 되었으면 했으니까.
“방윤섭이 의욕을 가지게 좀 도울까.”
“역시 뭘 좀 아네! 부탁함다!”
나는 대화 이력에 빵집 이름이 가득 남아 있는 메시지방을 하나 불러냈다.
[나] 야.
메시지는 기독 처리됐지만, 답변은 바로 오지 않았다,
잠시 후, 아주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방윤섭] ㅗㅗㅗ
이건 무슨 소리지?
세 대 처맞고 싶다는 뜻인가, 빵을 세 개 사 오고 싶다는 뜻인가.
방윤섭이 이 지경이 되도록 기가 꺾이지 않은 게 어떤 의미로는 굉장했다.
‘참자.’
별로 좋은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맹효돈의 성장과 전력 강화를 위해 참기로 했다.
[나] 맹효돈 이기면 약속의 불집게 계약 풀어 줄게.
[방윤섭] 뭐?
[방윤섭] 진짜냐?
[방윤섭] 뻥 치는 거 아님?
메시지는 정신없이 날아왔다.
[나] 못 믿겠으면 문새론을 통해서 기사도 낼게.
이놈이 믿는다고 해도 기사는 나겠지만.
내 어깨너머로 홀로그램을 엿보던 문새론도 눈을 찡긋거리는 게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방윤섭] 구라면 죽는다.
방윤섭 실력으로는 날 못 죽일 텐데.
그렇게 연락을 마치고 홀로그램을 닫자 문새론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좀 볼 만해지겠네! 그럼 홍보와 장소 세팅이나 해 볼까!”
“내가 대관해 뒀어.”
“하하하하! 그날 폭죽이라도 터뜨릴까.”
“오, 황지호님, 돈지랄 해 줄 거야? 콜!”
그 이후로도 신문부원들은 두 사람의 대결을 어떻게 세팅할지 의논했다.
맹효돈을 제외한 우리 반 아이들도 이 이벤트를 기대할 것 같으니 철저하게 준비해야겠다.
“오늘도 대국할 예정이냐?”
“응, 먼저 가도 되는데.”
“보고 갈 거다.”
신문부실을 나온 나와 황지호는 스테일메이트 부실로 이동했다.
황지호 저놈은 뭐 볼 게 있다고 따라오는지 모르겠다.
물론, 체스 공부에 열심인 사월세음과 한이가 보고 가는 건 환영이다.
“기다렸다! 자리에 앉도록!”
대국실에 오늘의 대국 상대인 마진승이 있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 탓에 귀가 따가웠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기운찬 모습을 보니 나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마진승은 체스 초보자 티가 많이 나. 이 정도면 공부가 될 만한 수를 둘 수 있겠어.’
신중하게 수를 받아치는 나와 달리, 대범하게 체스 피스를 움직이는 마진승.
결국, 수가 미숙하고 신중함이 부족한 그와의 대국은 금세 끝나 버렸다.
저번에 스콜라메이트 정도는 아니지만.
“이번엔…… 4수보다 훨씬 많이 뒀으니 성장한 셈인가! 좋아!”
마진승은 아쉬워하면서도 만족해하는 얼굴이었다.
짧게 검토도 전부 마치고 대국실을 나가려 할 때.
“의신아, 잠깐 얘기 좀 할까.”
용제건이 나를 붙잡아 세웠다.
“아, 그럼 저희는 먼저 유리네 집에 가 있을게요.”
“먼저 갈게.”
사월세음과 한이는 눈치껏 사라지려 했지만, 황지호는 그리하지 않았다.
“……흠.”
황지호는 눈을 반짝이며 나와 용제건을 번갈아 봤다.
무슨 대화를 할지 궁금한가 보다.
이놈을 어떻게 쫓아낼까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착한 우리 반 아이들이 해결해 줬다.
“뭐 해, 가자.”
“얼른 가요!”
황지호가 탐탁지 않아 했지만 사월세음과 한이가 양쪽에서 말을 걸며 등을 미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대국실에 용제건과 나, 단둘만 남았을 때.
딱! 파앗!
용제건이 손가락을 튀기자 대국실이 옥색의 공간으로 덮였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한 대화를 하려는 것 같았다.
“준열이가 보낸 메시지는 잘 받았어?”
이건 무슨 소린가.
“아뇨, 받은 적 없는데요.”
“디바이스 코드는 넘겼지만, 아직 메시지는 안 온 거구나.”
또 저 이상한 화법에 걸려들었다.
“어제 적벽괴도의 모습으로 준열이를 만났지? 그 덕분인지 준열이 표정이 많이 좋아졌어. 대국했을 때 봤겠지만, 상태가 별로였잖아? 청룡도 염방열도 축 처진 준열이를 보고 맛이 가려 해서 큰일이었어.”
또 ‘그 단어’가 나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남 말 할 처지가 아닐 텐데. 그 맛이 가려 한 집단엔 용제건도 끼어 있었잖아.’
염준열에게 조금 딱딱하게 대한 게 마음에 걸리는지 용제건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걷던 게 그저께 일이었다.
“아, 준열이가 새로 산 디바이스를 붙잡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던데. 메시지를 작성했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고…… 그래서 안부 인사 정도는 했을 줄 알았는데 메시지를 못 받은 거야? 설마 디바이스 코드를 허위로 알려 준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 디바이스 코드는 진짜였다.
그런데 염준열은 뒤에서 그러고 있었나…….
메시지를 보내도 좋을지 망설이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는 게 낫겠다.
“지금 반응을 보니 디바이스 코드를 준 건 진짜구나. 흔적을 지우는 데에 철두철미하고, 용의주도한 행동을 하는 적벽괴도도 우리 준열이는 예외인가 보네. 우리 준열이에게 그런 건 당연하지만.”
용제건의 화법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고 듣기만 했는데.
이런 반응의 속뜻도 파악해 냈는지 용제건의 추리가 줄줄 이어졌다.
“부담임으로서 관찰한 결과를 말하자면…… 너에겐 사람을 대할 때 뭔가 확고한 ‘기준’이 있어. 그렇지?”
용제건이 말하는 기준.
그 기준에 짐작이 가는 건 있었다.
10년 간 함께해 온 플레이어블 캐릭터.
그 범주 안에 들어가는 이들에게는 다소 물러지는 건 사실이었다.
“나나 우리 준열이는 그 ‘기준’안에 들어가는 것 같은데. 그래서 네 정체가 드러나거나, 드러날 위험이 커져도 무르게 대응하는 거고.”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하실 말씀이 더 없으면 가 보겠습니다. 반 아이들과 약속한 게 있어서요.”
이 화제를 계속 끌고 가는 건 거북해져 말을 돌리려 했지만.
“이 화제는 거북해?”
오히려 속이 정확하게 읽혀 버렸다.
염준열이 기운을 차려서 그런지 용제건은 평소보다 활기차 보였다.
“너의 그 ‘기준’의 정체가 무엇일지 기대돼.”
팟!
내가 등을 돌려 대국실 문앞에 다가가자 공간술이 해제되었다.
나는 용제건의 말에 더 답하지 않고 그대로 김유리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