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51)
금요일 아침.
일찍 기숙사를 나설 때, 성국언으로부터 메시지가 하나 도착한 게 보였다.
[성국언] (기사 링크)
아침부터 웬 기사지?
의아해하면서도 눌러 봤다.
[“혈세가 새고 있다” 경기도 50여 개의 국공립 중학교 공금 횡령 및 회계 비리 적발]
[경기도교육청 “도내 국공립 중학교 전수 감사 시행”]
경기도, 국공립 중학교, 횡령과 비리.
이 단어를 듣자마자 맹효돈이 졸업한 탄래중학교가 떠올랐다.
저번에 내 민원이 묻혀서 성국언에게 부탁했었는데 잘 처리된 것 같았다.
덤으로 탄래중 외에도 다른 곳의 비리도 찾아내다니,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달랐다.
[나] 감사합니다.
[성국언] 국민의 대표로서 당연한 일을 한 거다. 내가 고맙지.
[성국언] 필요할 때 또 연락해라.
메시지방을 나와 현재 성국언에 의해 고발된 학교의 목록을 확인했다.
경기도에 있는 중학교 600여 개 중 공립중학교는 500여 개.
그중 적발된 곳은 50여 개.
그 50개의 학교 이름을 확인하던 나는 희미한 위화감을 느꼈다.
‘발각된 학교의 위치가 전부 탄래중 근처에 있는 것 같아. 성국언의 성격을 고려하면 전국까지는 아니더라도 경기도에 있는 모든 중학교의 회계 자료를 체크해 봤을 텐데…….’
홀로그램에 지도를 띄워 위치를 확인해 보니 더 확실해졌다.
목록에 나온 학교는 탄래중 근방에 있는 중학교들이었다.
‘……우연일까?’
게임 속의 정보와 현재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해 봤지만, 단서가 적어 결론을 내기 어려웠다.
“의신아? 너는 기숙사생이었던 것 같은데.”
“안녕하냐!”
아직 이른 시간이라 한산한 정문 앞.
교문 지도를 하고 있던 선도부 중 두 명, 오혜지와 마진승이 나를 보고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하자 오혜지가 엷게 웃었다.
“수혁이한테서 시후 얘기 들었어.”
오혜지는 키모폴레이아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시후를 감쌌다.
게임 속에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둘은 꽤 친한 것 같았다.
“의신이가 연락 안 했으면 시후가 바보짓을 하다 큰일 날 뻔했다고 들었어. 정말 고마워.”
“아뇨, 전 한 게 없어요. 도시후를 찾아낸 건 함근형 선생님이고 걔 데리고 돌아간 건 장남욱이에요.”
“그대로 학생부장 선생님이 데리고 가면 학교나 집에 연락이 갈 수도 있잖아? 남욱이랑 의신이 아니었으면 시후가 고생했을 거야. 남욱이한테는 정말…… 크게 신세를 졌어.”
오혜지는 고마움과 근심이 어린 눈으로 나한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했다.
뭐라 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시선을 내리다 문득 그녀의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베젤과 러그는 로즈골드로 마감된 가죽 스트랩의 손목시계.
시, 분, 초침을 가리키는 핸즈가 백금이고, 눈금이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게 눈에 띄었다.
‘플레이어로서도 실적을 내고 재벌가의 영애인 오혜지가 고가의 손목시계를 착용하는 건 이상하지 않긴 한데……. 다이얼과 가죽이 샌드핑크색인 게 마음에 걸려.’
얼마 전에 주수혁과 함께 샌드핑크 화형식을 치르지 않았던가.
왜 굳이 이 색이 들어간 손목시계를 한 거지?
“응? 왜 그래?”
“손목시계 디자인이 멋져서요. 브랜드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출처를 캐 보고 싶었지만, 직접 물을 수 없어 최대한 간접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 이거? 그러니까…….”
갑자기 오혜지가 볼을 희미하게 붉히며 말했다.
“느루에서 오더 메이드한 시계라고 들었어. 같은 디자인은 없을 거야.”
다른 곳도 아니고, 느루에서 주문 제작한 하나뿐인 시계라고?
내가 예상하던 시계값에 0이 두 개 더 붙을지도 모르겠다.
‘샌드핑크색 시계를 직접 주문했을 리는 없어. 선물 받은 걸 거야.’
오혜지가 비싼 액세서리에 혹할 만큼 처지가 궁하지도 않고, 극혐하던 샌드핑크색 액세서리를 착용한 걸 보니 선물 보낸 사람이 아주 마음에 드나 보다.
‘이상한 놈에게 걸린 건 아니겠지…….’
저 완벽한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도 눈에 차지 않는 오혜지인데 대체 누가.
더 자세히 조사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때.
“억! 저거 1학년 0반의 그놈 아니야!”
마진승이 목소리를 높였다.
정문 저편에서 큰 키와 어울리지 않게 구석에 붙어 우울한 얼굴로 걸어오는 송대석이 보였다.
‘민그린은 요새 아침 일찍 미술실에 간다고 했었지. 따로 등교하는 데다 아침 내내 볼 수 없으니 우울한가 보구나.’
요새 민그린은 미술계 동아리에서 제공하는 온갖 종류의 화구를 시험해 보느라 바빴다.
다음 주부터는 시험 기간에 돌입해 동아리 활동이 중단되니 시간을 아껴가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어 방해할 수도 없으니 송대석은 더 침울해하는 것 같았다.
“그때 진짜로 등교 안 하고 돌아간 사복 입었던 0반 놈이지!”
마진승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송대석은 경계심을 숨기지 않으며 마진승을 노려보며 답했다.
“그런데요. 왜요.”
“등교하는 거냐?”
송대석은 교복 셔츠 대신 시중에서 파는 티셔츠를 입은 탓에 교복 입은 티가 잘 나지 않았다.
길을 막고 있는 마진승을 노려보며 송대석이 까칠하게 말을 이었다.
“바지는 교복인데요. 교칙은 안 어겼으니까 빨리 비켜…….”
“등교하기로 한 거구나!”
마진승이 송대석을 보며 우렁차게 말했다.
“그래, 학교에 잘 왔다! 무슨 일 있으면 선도부 불러. 학생회보다 우리가 유능하니까!”
마진승은 저번에 사복 차림의 송대석에게 까이고 분해하던 걸 잊어버린 것처럼 친근하게 말했다.
마진승의 그런 태도에 송대석은 금방 독기가 빠져 입을 다물었다.
오혜지가 옆에서 ‘여전히 진승이는 호구 돋네’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가 볼게요. 야, 가자.”
기다리고 있던 송대석도 왔겠다.
나는 두 선도부 선배에게 인사를 하고 송대석을 끌고 갔다.
마진승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하던 송대석은 순순히 따라왔다.
“뭐냐, 너 기숙사생이잖아. 왜 정문 앞에 있는 건데.”
“너한테 줄 게 있어서.”
딱히 수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아닌데 상황과 말 때문인지 송대석이 나를 아주 수상한 것 보듯 바라봤다.
“저번에 애들한테 위성 설명 잘해 줬다고 들었어. 그쪽에 관심이 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뭐.”
“메시지로 보내면 확인 안 할 것 같아서 직접 보여주려고.”
나는 플레이어 협회의 공지란에 뜬 인턴 모집 공고를 보여줬다.
인상을 쓰며 홀로그램을 보던 송대석이 눈을 크게 떴다.
“협회에 있는 플레이어SAT-K의 제어실, 인턴을 하면 직접 볼 수 있을 거야.”
내 옆을 걷고 있던 송대석이 멈춰 섰다.
아마 저도 모르게 발이 멈춘 것 같았다.
“잘 생각해 봐.”
그렇게 말하며 송대석에게 공고 링크를 보내줬다.
멍청한 얼굴로 굳어 선 그를 두고 0반 교실로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 * *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
인적이 드문 산책로에서 디바이스로 뉴스를 보던 중에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의신 학생, 오늘은 학교에 있네요.”
기척 없이 나타난 공청훤 선생님.
그의 선량하고 낭랑한 목소리에 뼈가 있었다.
잠실 야구장 티켓팅, 스승의 날 탄래중 방문, 천단수의 초상우주.
어쩔 수 없었다곤 하지만 학생 수도 얼마 없는 에너미학개론 수업을 너무 자주 빼먹긴 했었다.
나는 유달리 저 수업만 빠지고 있으니 신경 쓰이기도 할 거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찾은 거지.’
평소 자주 가던 장소는 황지호에게 털리는 바람에 새로 위치도 바꿨는데.
막 정교사가 된 공청훤 선생님에게 학생의 디바이스 추적 권한이 있을 리도 없었다.
“가죠.”
“……네.”
앞으로 1학기 수업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에너미학개론 수업은 성실하게 듣기로 다짐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한이를 비롯해 수업을 같이 듣는 아이들은 별말 하지 않았지만, 지은 죄가 많다 보니 양심에 찔렸다.
* * *
방과 후.
2학년 0반 전원의 응원을 업고 온 연극부 에이스 연가람과 대국에서 승리한 뒤에 도착한 김유리의 집.
“의신이가 말리지 않았으면 다른 애도 다 불렀을 텐데요!”
“맞아.”
“부르지 그랬어!”
내가 이기긴 했지만, 응원전에서 밀린 게 분한 듯 사월세음과 다른 아이들이 불만을 표현했다.
학년은 다르지만 같은 0반이라 그런지 묘한 경쟁의식을 품은 것 같았다.
“대국실에 마련된 좌석이 그렇게 많지 않잖아. 자리가 부족할 수도 있었어.”
“자리가 없으면 저는 날고 있으면 되는데요!”
“날지는 못하지만 서 있을 수는 있는데.”
사월세음과 맹효돈의 말에 이어 황지호도 한마디 덧붙였다.
“좁아지면 체육관을 빌리면 되잖아.”
체육관은 대관 허가 받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나?
저놈이 직접 대관한다면 허락이고 뭐고 상관없이 프리패스로 빌리겠지만.
“지호 말이 맞아. 0반 선배들이 했다는 그 형광색의 카드섹션도 직접 보고 싶었어.”
“난 못 가더라도 응원 그림 그려 줄 수 있었는데…….”
“……미안, 다음부터는 부를게.”
김유리와 민그린까지 저렇게 말하니 그냥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반 애들이 보고 싶다는데 보러 와야지.
“다음 대국은 언제죠?”
“당분간은 없는데…….”
“그래도 미리 짜 두자.”
“그러자!”
“……너희들 공부하러 온 거 아니었냐?”
송대석이 그렇게 물었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결국, 저녁을 먹을 때까지 2학년 0반에 대항하는 응원 계획을 구상하며 보내게 되었다.
* * *
국립 현대 한국화 미술관.
폐관 직전의 시각.
“화백님, 안녕하십니까.”
“응? 이게 누구야. 국언이 아닌가!”
국회의원 성국언과 홍경복 화백.
두 사람이 입구에서 마주쳤다.
“서울에 오신 줄 몰랐습니다. 오셨으면 직접 찾아뵈었을 텐데.”
“바쁜 사람이 뭘 찾아와, 허허허.”
홍경복은 친손주를 보는 듯한 눈으로 성국언을 보며 웃었다.
“미술에 취미가 있었나?”
“네, 화백님 그림을 직접 보고 싶어서요.”
“그럼 내가 안내하겠네.”
“하핫, 화백님께 큐레이터 역을 맡기는 건 분에 겹습니다.”
“얼른 오게나. 내 제자와 그린 ‘이무기의 귀천’부터 봐 주게. 요즘 가르치는 애들이 늘어난 바람에 옛 생각이 많이 나서 말이야…….”
성국언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홍경복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척척 걸어갔다.
회랑을 걷는 홍경복의 발걸음은 매우 경쾌하게 들렸다.
마침내 홍경복은 미술관의 최심부에 멈춰 섰다.
그가 멈춰 선 건너편에 강화 유리 안에 담긴 액자가 보였다.
‘이게 그 이무기의 귀천인가…….’
거장과 그 수제자의 합작이라고 하지만, 특별한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성국언은 그런 감상을 숨기며 상위 존재의 가호를 받은 눈에 이능파를 모았다.
파아아…….
성국언은 몇 초간 그림을 훑어본 후, 바로 이능파를 거두었다.
이 눈으로도 그저 단순한 그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눈으로 파악하는 건 무리인가. 화백님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성국언이 그렇게 생각하며 홍경복을 바라봤을 때.
홍경복은 예전에 제자를 잃었을 때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백님?”
홍경복은 성국언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붉으락푸르락 색이 변한 얼굴로 미술관 스태프 명찰을 착용한 이를 향해 말했다.
“관장을 부르게. 경찰도 부르고.”
“무슨 일입니까, 화백님.”
마침 홍경복과 성국언의 미술관 방문 소식을 듣고 직접 와서 인사를 하려던 관장이 바로 나타났다.
관장이 굽신거리기도 전에 홍경복이 크게 성을 냈다.
“자네는 대체 여기 관리를 어떻게 한 건가!”
“화백님, 무슨 일인지요? 관리라니…….”
“어떻게 그 눈으로 관장 자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먼. 허어…….”
노발대발한 홍경복은 유리 벽 너머에 있는 ‘이무기의 귀천’을 가리켰다.
“이건 가짜일세. 이 조잡한 낙서는 나와 내 제자가 그린 ‘이무기의 귀천’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