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52)
“자, 그럼 지금부터 휴식!”
김유리가 그렇게 말하자 아이들이 기지개를 켜거나 그대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
“이게 무슨 금요일이야, 죽겠다…….”
“금요일은 맞아요. 시험 기간의 금요일일 뿐이죠…….”
저녁을 먹고 시작한 시험 공부.
주말을 앞둔 금요일에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김유리의 공부 철학에 맞춰 매우 빡세게 진행됐다.
“대체 너희들은 공부를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잘하냐.”
홀로그램으로 쪽지 시험 결과 이력을 체크하던 맹효돈이 묻자, 몇몇 아이들이 답했다.
“시험 범위가 넓을 때는 세세한 부분에 너무 신경 쓰면 안 돼. 넓게 보면서 공부하면 돼.”
“수업 내용을 떠올리면서 필기한 내용을 봐.”
“인터넷 강의로도 올라오니까 그거 보면서 공부하면 되는데…….”
“이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있냐.”
성적이 우수한 편에 속하는 김유리, 한이, 민그린, 송대석이 차례로 말했다.
맹효돈이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뭐라는 거야.”
“…….”
한편, 이번에도 시험 공부로 고생 중인 권레나는 시선을 피하며 가만히 있기를 시전했다.
‘권레나는 중간고사보다 일찍 준비하긴 했지만, 바이올린 레슨을 받고 연습도 하느라 힘든가 보네.’
우리 반에서 성적이 낮은 편에 속하는 맹효돈, 권레나, 황지호.
맹효돈과 권레나 사이에는 동지 의식이 생긴 것 같지만, 황지호는 예외였다.
“저 새끼는 계속 40점 맞고 있잖아. 한 끗만 실수하면 낙제잖아. 왜 여유가 넘치는 건데.”
“하하하하! 내가 실수할 리가 없잖아.”
“……실수 안 해서 40점이라고? 저걸 부러워해야 하냐, 말아야 하냐.”
황지호의 말대로 실수를 안 해서 40점이긴 한데.
40점 근처를 왔다갔다 하는 맹효돈은 복잡한 심정인가 보다.
“실수는 안 하더라도 저…… 좀 더 열심히 하면 반평균도 오르고 좋잖아요!”
사월세음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 버렸다.
“반평균…… 그걸 올리고 싶나?”
“네! 오르면 함근형 선생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생각해 보마.”
저놈이 반평균 올린다고 나대면 전부 만점을 받을 텐데.
그딴 짓을 하면 황지호가 주수혁과 안다인과 함께 공동 수석을 먹게 될 거다.
그 꼴은 보기 싫었다.
“그냥 하던 대로 해.”
“하하하하!”
평소대로 밑에서 40점이나 받으라는 내 말이 뭐가 웃긴 건지 황지호가 처웃었다.
“아, 맞다. 야식 준비가 아직 안 됐는데…… 오늘 야식 당번은 지호랑 나야.”
“그랬지. 갈까.”
부엌으로 이동하는 황지호와 김유리를 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저 돌아이가 무슨 짓을 할까 걱정되기도 하고, 요리를 지나치게 잘하니 기대되기도 하는 것 같다.
‘메시지 확인이나 할까.’
야식을 기다리는 사이, 디바이스를 켜 보니 새로 온 메시지가 몇 개 보였다.
[금찬솔] 수상하니까 좋냐?
[왕찬솔] 오늘도 수상했네, 수상했어.
내가 연가람을 이긴 게 분한지 맥락 없는 어그로를 끄는 메시지를 잔뜩 보내 놨다.
[나] 대국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보러 오세요.
[왕찬솔] 싫은데?
[금찬솔] 네 대국은 안 볼 거고, 가람 갑 대국은 보러 갈 건데?
결국 나랑 연가람이 대국을 하면 보러 온다는 뜻 아닌가.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라고 말하자 폭탄 모양의 스탬프가 답변으로 날아왔지만, 무시했다.
그 외에도 메시지가 여럿 도착해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또 다른 0반 선배가 보낸 메시지였다.
[우기환] 범인은 너냐?
이건 또 뭔 소리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다.
‘천단수 산령 사건 때 황지호가 3학년 0반을 털 거라고 했었지. 천단수 근처에 함정을 깔아 놓은 걸 학교 측에 찌른 범인을 잡으려는 건가.’
아니라고 답하면 ‘무슨 범인인 줄 알고 아니라는 건데?’라고 말하며 따지고 들게 뻔히 보였다.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나] 네?
이 짤막한 메시지는 금방 기독 처리가 됐지만, 답이 없었다.
내 생각대로 아무 데나 찔러보던 중이었나 보다.
몇십 초 후 답변이 도착했다.
[우기환] 범인은 밝혀졌다. 우리 반의 강한 담임이었어!
[나]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우기환] 방금 보낸 메시지에 ‘그래, 범인은 나다!’라고 답변이 왔다……. 복수할 거야!
임연화 선생님은 그냥 자신의 눈엔 귀엽게 보이는 또라이들이 장난 중이라고 생각하고 어울려 준 것 같은데.
대충 응원한다고 답변을 보내고 메시지방을 떠났다.
그 후로도 메시지를 몇 개 확인할 때, ‘염준열’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스승이 아닌 후배 조의신 쪽에 보낸 거네.’
메시지는 정중한 사과문으로 시작되어 있었다.
[염준열] 기말고사 끝나면 재대국하지 않을래?
내 제자가 부탁하는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나는 흔쾌히 답변을 작성했다.
[나] 네, 다음에 같이 둬요.
[염준열] 그럼 기말고사 끝나면 보자.
염준열은 마침 디바이스를 확인하고 있었는지 바로 답변을 보냈다.
‘그런데 왜 스승 쪽 회선엔 메시지가 안 오지?’
용제건 말로는 염준열이 나한테 안부 인사를 보낼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던데.
그냥 내가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아주 짧게 인사를 보냈을 때.
[나] 안녕.
[염준열] 스승님.
거의 동시에 메시지가 오고 가는 추돌 사고가 터졌다.
내가 아주 조금 앞서 메시지를 날렸지만, 100분의 1초도 안 되는 차이였을 거다.
[염준열] 스승님 먼저 말씀하세요!
착한 내 제자는 먼저 말을 양보했다.
[나] 시험 삼아 보내 봤어. 안부도 물을 겸. 시험 공부는 안 힘들어?
[염준열] 네,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성적을 내서 스승님의 자랑스러운 제자가 될게요.
좋은 성적이 안 나오더라도 염준열은 내 자랑스러운 제자인데.
의욕이 가득한 메시지를 보니 곧게 뻗은 눈꼬리를 호선으로 바꾸며 웃는 염준열이 떠올랐다.
[나] 너는 무슨 일로 연락하려 한 거야?
[염준열] 스승님께 안부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안부 인사를 하나 보내는데 그렇게 오래 걸렸단 말인가.
염준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염준열] 사실 디바이스 코드를 주신 날 집에 가자마자 연락드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스승님을 귀찮게 하지 않기로 약속한 게 떠올라서요.
[염준열] ……중요한 일이 아니더라도 안부 인사를 드려도 될까요?
염준열의 메시지는 아주 천천히 올라왔다.
내 제자의 고민이 느껴져 바로 허락하기로 했다.
[나] 괜찮아. 네 연락은 안 귀찮아.
[염준열] 그럼 자주 연락드려도 될까요?
[나] 응.
[염준열] 감사합니다!
‘자주’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염준열이 기뻐하니 그냥 아무래도 좋아졌다.
“얘들아, 야식 먹자!”
마침 야식 조리가 끝났는지 테이블 위에 대나무 찜기가 여러 개 놓였다.
오늘 메뉴는 교자, 그중에서도 속이 비칠 정도로 얇고 투명한 피를 가진 운탄교자였다.
“구름을 삼키는 것 같아요!”
“오징어 맛, 새우 맛…… 다 맛있다.”
“이 몸이 직접 만든 건데 당연하지.”
“……분해.”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한구석에서 전화를 받던 민그린이 통화 중인 상태로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네, 사부님. 네? 지금 우리 반 애들 다 있어요. 스터디 모임 중이라서요. 잠시만요.”
“화백님한테서 전화 온 거지?”
“응, 스피커 폰 모드로 해 두고 애들이랑 같이 들으래. 될 수 있으면 대석이 옆에 앉아서 들으라고 하시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송대석이 자신의 옆을 가리키며 젓가락과 앞접시를 세팅했다.
“그린아, 여기 앉아!”
오랜만에 민그린 옆에 앉는 송대석이 기쁨을 감추지 않는 눈으로 후드 모자로 덮인 그녀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웃었다.
“쟤 눈에서 꿀 떨어진다.”
“어떡해……! 근처에 못 앉겠어! 자리 비켜줘야 할 것 같아.”
아이들이 수선을 떠는 사이에 민그린이 송대석의 도움을 받아 디바이스 통화를 스피커 폰 모드로 바꿨다.
‘사부님’이라고 적힌 홀로그램에서 홍경복 화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린아, 진정하고 잘 들어라.]
“네…….”
통화가 시작되자 아이들이 입안에 운탄교자를 하나씩 밀어 넣고 목소리를 죽였다.
[‘이무기의 귀천’이 도난당했다.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파악도 안 되고 있어.]
스르륵.
홍경복의 말이 끝나자 민그린이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그린아!”
옆에 앉아 있던 송대석이 잽싸게 손을 뻗어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이 상황을 대비해 송대석 옆에 앉으라고 한 것 같았다.
민그린은 송대석의 팔을 꼭 움켜쥐고 계속 말을 들었다.
[제보를 받고 뒷거래를 막기 위해 대대적으로 공개 수사할 예정이다. 내일 아침에 전국적으로 보도가 될 거야. 네 쪽으로 오는 인터뷰는 전부 막을 테니 심려 말고.]
“네…….”
[꼭 찾아 주마.]
홍경복 화백은 그 이후로도 민그린을 달래는 말을 하고 통화를 끝냈다.
주변이 시끄러웠던 게 수사에 협력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사부님과 그린 첫 그림이…….”
민그린이 힘없이 중얼거리자 반 아이들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필요하면 말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할게!”
“그래, 연락해.”
“네!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고마워…….”
반 아이들과 이야기할수록 민그린의 표정은 눈에 띄게 점점 풀려 갔다.
옆에서 민그린의 어깨를 감싸 안고 이야기를 듣는 송대석은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이 광경을 지켜봤다.
그녀의 첫 작품이 도난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생각보다 빨리 극복하는 바람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녀가 안정된 모습을 보이자 사고를 정리할 여유가 생겼다.
‘대체 언제, 어떻게 없어졌을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흑막이었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흑막의 손이 미쳤을 것 같지는 않았다.
흑막의 행보를 고려하면, 저게 옛 한국 지부장이 남긴 단서라는 걸 안 순간 그림을 도난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테니까.
‘내가 흑막이라면 가짜인 걸 알아보고, 다시 저 그림을 재현할 수 있는 홍경복과 민그린을 처치했을 거야.’
결론은, 그림 자체에 상당한 가치가 있으니까 누군가 훔쳤다고 생각되었다.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스터디 모임이 해산되기 전, 황지호를 잡고 말했다.
“그 그림을 찾아야 해.”
“‘찾아 줘’가 아니라 ‘찾아야 해’라고? 단순히 급우를 위한 말은 아닌가 보군.”
“그래.”
“갑자기 왜 홍천을 갔나 했는데…….”
황지호는 오랜만에 송대석과 함께 귀가하는 민그린을 보다가 내 쪽을 봤다.
이무기의 귀천에 관해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알았다. 나도 찾아보겠다.”
황지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월요일.
주말 내내 ‘이무기의 귀천’의 도난 사건 뉴스로 떠들썩했지만, 오늘 은광고 학생들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깜짝 놀랐다.
푸른 바이올리니스트 권제인의 은광고 부임.
홍경복 화백과 탁거산 도인에 이은 엄청난 유명 인사의 부임이었다.
“진족과 1 대 1로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류가 은광고에 이렇게 계속 모이다니!”
“솔직히 화백님과 그레이트 탁 할아버지는 우리 세대가 아니라 실감이 안 났는데, 권제인 선배님은 진짜…….”
등굣길에 온통 권제인 얘기뿐이었다.
비록 수업 시수도 상당히 적지만, 그녀가 학생을 가르친다는 말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사실과 함께 여러 파생 사건이 터져 나왔다.
지금 저 멀리 체육복을 입은 교사가 울면서 삼보일배를 하는 장면이 그중 하나였다.
“선생님! 힘내세요! 앞으로 5km만 더 가면 돼요!”
“어쩌다가 그런 글을 써서…….”
“인공눈물 더 가져와!”
종합 게시판에서 ‘교사로 권제인 선배님이 오면 울면서 정문과 총동아리회관 사이를 삼보일배로 이동하겠다’라고 선언한 경솔한 은광고인이 약속을 지킨 모양이다.
‘그 글을 쓴 건 현악부 고문 교사였구나.’
‘현악부 소속’이라는 말만 있고 본인이 학생이라는 말은 없긴 했었다.
인공눈물을 눈에 부어 가며 현악부 고문이 삼보일배를 이어가던 중.
자신 때문에 어떤 멍충이가 저런 짓을 하는 중이라 들은 권제인이 총동아리회관 앞에서 몸소 응원가를 연주하며 기다리자, 감격에 찬 현악부 고문은 나중에는 인공눈물 없이도 눈물을 쏟아 가며 제가 뱉은 말을 지켰다.
“토요일에, 영원의 호수 팀 빌딩에 갔는데, 그러니까, 엄청났어…….”
한편, 지난 토요일 레슨을 받으려 했던 권레나는 넋이 나간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해주가 되어 있었다고 해야 하나, 해주를 하다 보니 정신을 차렸다고 해야 하나…….”
“무슨 말씀이세요?”
“권제인 선배님이 교사로 오셔서 많이 감격했나 봐.”
“……그냥 감격해서 저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들어 보니 권레나가 걸렸던 침묵맹세의 저주의 해주 작업은 무사히 끝난 모양이었다.
그 엄청난 과정이 뭔지 많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결과가 좋으니 됐다.
‘권레나의 해주 건도 무사히 끝났으니까 다른 건도 잘 해결됐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홍경복 화백, 국회의원 성국언, 거기에 호족의 수장까지 나섰지만 좀처럼 꼬리가 잡히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갔다.
주로 반 아이들과 스터디 모임에 참가하고, 가끔 체스를 두고, 여전히 한 손으로도 나를 압도하는 백호군과의 대련도 거듭하다 보니 금세 7월이 되었다.
그렇게 여전히 ‘이무기의 귀천’의 행방은 묘연한 채로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