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53)
‘사례를 통한 광림 연구’.
김유리가 선택 과목으로 이 과목을 택했을 때, 말리는 이들이 많았다.
“광림 연구는 1학년한테 추천하기 좀 그런데……. 광림을 다루어 본 경험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 많을 거야.”
수업 첫날, 김유리의 옆자리에 앉은 유상희가 그렇게 말했지만, 김유리는 ‘광림에 관심이 많아서요. 꼭 듣고 싶었어요.’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유상희의 조언대로 수업 내용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김유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들었다.
강의 계획서에 적힌 내용 중, 꼭 듣고 싶었던 파트가 있었으니까.
“오늘의 주제는 ‘상위 존재와 광림’입니다.”
1학기 기말고사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 김유리가 고대하던 순간이 왔다.
“극히 드물게 상위 존재와 인연을 맺고 광림을 개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그 사례를 연구하고자 합니다.”
‘사례를 통한 광림 연구’의 담당 교사이자 1학년 2반 담임이기도 한 노영미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상위 존재의 수만큼 광림의 수가 존재한다면 ‘극히 드물다’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전 세계의 신화, 픽션 속에서 등장하는 신은 적지 않잖아요.”
“세계 인구수는 약 80억, 이중 플레이어인 20%는 약 16억이죠. 그에 비해 상위 존재로 취급될 만한 신격을 가진 존재의 수는 1만이 넘지 않아요.”
모든 상위 존재가 인간에게 한 명씩 광림으로 힘을 빌려준다고 해도 16만 분의 1 .
극히 드물다고 하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인간이나 진족에게 어떠한 힘도 빌려주지 않는 상위 존재도 있죠. 이를 고려하면 상위 존재와 광림으로 연결된 플레이어는 ‘극히 드물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노영미의 반박에 손을 들어 발언한 학생을 비롯한 수강생들이 교실 여기저기에서 필기하는 광경이 보였다.
그녀는 수업을 계속 진행했다.
“이 세상에 ‘유사한 광림은 존재하지만, 동일한 광림은 없다’라는 말이 있죠. 그 말대로 플레이어는 고유한 광림을 타고나지만 상위 존재와 인연을 맺는 순간, 상위 존재의 힘이 그 광림에 섞입니다.”
노영미는 김유리의 옆에 앉아 있던 유상희를 지목하며 말했다.
“치유의 여신 아케아와 계약한 유상희 학생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바람 속성 공격계 광림이 치유 능력을 품은 바람을 발산하는 능력으로 바뀌었죠.”
이후, 유상희의 사례를 필두로 여러 유명 플레이어들의 광림이 소개되었다.
몇몇 사례의 소개가 끝나자, 주제는 심화 연구로 바뀌었다.
“최근 유상희 학생은 상위 존재와 광림에 관한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었죠. 개괄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상희가 ‘복수의 상위 존재와의 인연과 광림에 관한 연구’라는 타이틀의 논문 자료를 전자 칠판 위에 띄웠다.
“저는 작년, 아드라스테이아…… 아니, 네메시스 님께 ‘너에게는 소질이 있다.’라며 계약을 권유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케아 님이 싫어하셔서 정중히 거절하고, 네메시스 님께서 물러나 주시는 덕분에 없던 일이 됐지만요. 이 사건을 계기로 제 고찰 결과를 담은 논문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
치유의 여신 아케아.
지명도가 최상위인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남다른 신격을 지닌 상위 존재의 이름이 동시에 나오자 술렁거렸다.
김유리는 속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상위 존재가 둘…… 둘만으로도 다들 이렇게 동요하는구나.’
졸업하기 전부터 정부, 협회, 민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연구소에서 스카우트가 들어오는 중인 유상희.
그녀의 간결하고 명쾌한 발표가 끝나자 교실 전체에서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노영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유상희 학생의 발표대로입니다. 다수에게 내릴 수 있는 가호와 달리 상위 존재가 광림으로 힘을 빌려줄 수 있는 건 한 명뿐입니다. 그 탓에 한 번 상위 존재와 인연을 맺게 되면, 다른 상위 존재와는 인연을 맺기 어렵습니다. 광림으로 이어질 정도로 가까워진 플레이어에게 다른 존재가 간섭하길 원치 않는 게 당연한 일이겠죠.”
노영미의 말을 경청하던 김유리의 손에 식은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학생 중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한 사람이 광림을 통해 여러 상위 존재의 힘을 빌리는 건 불가능한가요?”
“아뇨, 이론적으로 가능하고 실제 사례도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예외죠. 학생부장 함근형 선생님이 그러합니다.”
김유리는 자신의 담임 선생님, 함근형의 광림을 떠올렸다.
함근형의 광림인 ‘명사수의 시선과 광궁(光弓)’.
명사수로 이름난 상위 존재들의 눈으로 표적을 꿰뚫고, 발동 중 신궁을 소환하는 강력한 광림이었다.
“명사수로 이름난 상위 존재들이 함근형 선생님과 광림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함근형 선생님이 밝힌 바에 따르면 상시 힘을 빌려주는 상위 존재는 둘, 변덕스러운 이가 하나, 또 인연은 맺었지만 침묵하는 중인 이까지. 무려 상위 존재 넷이 함께하는 중이라 합니다.”
그리고 울리는 수업 종.
수업 종이 멎자 노영미는 수업을 마무리했다.
“수업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기말고사 범위는 내일 오전에 각자의 디바이스로 공지하겠습니다.”
기말고사 전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여기저기에서 학생들이 수업 내용에 관해 얘기하는 내용이 들렸다.
“학생부장쌤 상위 존재와 이어져 있는 줄은 알았지만 넷이라고? 진심 쩐다.”
“사실상 네 개의 신궁을 소환하는 능력인 셈이네. 넷 다 명사수로 이름난 상위 존재잖아.”
“보통은 상위 존재 하나와 이어져도 미치기 쉽잖아. 이능파의 압력이나 정보량 때문에……. 함근형 선생님의 정신력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설명 들어 보니 상시로 이어져 있는 건 둘이잖아? 남은 둘은 함근형쌤을 배려해서 거리를 두는 게 아닐까.”
말소리가 들릴 때마다 김유리의 두려움은 점점 커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벌벌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여름과 맞지 않는 긴 소매의 교복 셔츠 아래.
거의 희미해져 사라지는 광림 봉인술식의 존재가 떠올랐다.
‘나 같은 사례는 어디에도 없어! 어쩌면 좋지, 어떡해…….’
처음 광림을 얻은 순간.
상위 존재가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와 그녀와 강제로 인연을 맺었다.
‘함근형 선생님도 넷밖에 안 되다니…….’
김유리는 지금 자신이 광림으로 연결된 상위 존재의 수를 정확히 몰랐다.
열이 넘어간 순간 세는 걸 멈췄으니까.
딩동.
[레나^▽^♡] 수업 끝났어?
[레나^▽^♡] 오늘 장 보러 가는 거 같이 가고 싶어! 레슨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줘! >_<
도착한 건 반 친구의 메시지였다.
반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기분이 안정되었다.
메시지를 받은 것만으로도 김유리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광림의 제어는 정신력과 마음에 달려 있다고 했어. 내가 잘하면 괜찮아. 괜찮을 거야……!’
김유리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답장을 작성했다.
* * *
기말고사 첫째 날이 끝났지만, 아직 시험은 많이 남아 있었다.
김유리의 집에 모인 반 아이 대부분이 지친 얼굴로 텍스트를 노려봤다.
“오늘은 밤새워서 공부할까? 내일 과목은 시험 범위가 좀…….”
“실기 시험도 있으니까 무리하면 안 돼! 두 시에는 강제 소등할 거야.”
사과 모양으로 머리를 모아 묶는 헤어스타일을 한 권레나와 김유리가 파리한 얼굴로 말했다.
평소 포니테일이었던 김유리, 반 묶음이었던 권레나.
머리카락이 긴 편인 두 사람은 기말고사가 임박하자 공부할 때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사과 머리를 했다.
그리고 그 머리를 본 송대석이 망언을 뱉었다.
—상투 같은데.
그 결과 송대석이 두 사람에게 사과한 후에도 민그린이 6시간 동안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세음아. 잠깐 이리 와봐.”
“……나도 세음이한테 볼 일이 있었는데.”
“나도 같은 생각을 했어.”
쉬는 시간.
김유리와 권레나, 한이가 갑자기 사월세음을 불러냈다.
“……왜 그러시죠?”
“여기 앉아 봐.”
“네? 저기…….”
세 사람의 기백에 밀려 사월세음은 전신 거울 앞 의자에 앉았다.
한이보다는 짧지만 귀밑으로 내려온 부스스한 단발이 눈에 띄었다.
요새 머리카락을 제대로 말리지 않은 데다 쉴 때마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바람에 저렇게 된 모양이다.
“오른쪽 머리는 완전히 눌렸어! 회생 불가능이야.”
“어떻게 할까.”
“이 부분을 살짝 땋는 게 어때?”
“머리카락이 가는 편이라 너무 굵게 땋으면 잔머리가 삐쳐 나올지도 몰라.”
“그럼 군데군데 가늘게 땋을까. 난 이쪽부터 할게.”
“난 반대쪽부터 할게!”
“네? 저기…….”
사월세음이 뭐라 하기 전에 한 손에 고무줄을 든 아이들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월세음 머리 곳곳이 땋아지고 실핀이 꽂혀 정돈되었다.
‘남고생이 할 머리는 아닌데…….’
사월세음이 도와 달라는 듯 거울 너머로 나와 황지호, 맹효돈 쪽에 시선을 던졌다.
안타깝게도 맹효돈은 현재 중학교 은사와 통화하며 수학 문제를 푸는 중이었고, 황지호는 처웃을 준비를 하며 지켜볼 뿐이었다.
‘말려야 하나?’
하지만 웃으며 사월세음의 머리를 빗고 있는 김유리를 보니 말릴 수가 없어졌다.
최근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할 테니까.
결국, 모두의 외면 속에서 사월세음은 남고생이 할 머리는 아니었지만, 훨씬 정돈된 스타일로 바뀌었다.
스타일링 작업에 참여한 세 사람은 속이 시원한 얼굴을 했다.
“응. 요새 세음이 머리가 엉망이라 계속 신경 쓰였어!”
“후련하다.”
“자르는 게 나을까요……?”
“아냐, 지금 머리가 잘 어울려! 자르지 마!”
“가끔 우리가 정리해 줄게.”
사월세음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잘 어울린다는 말을 연달아 들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귀가 너무 얇다.
착한 사월세음이 저런 팔랑귀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되었다.
“저기, 야식 다 만들었어.”
부엌 쪽에서 민그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야식 당번은 민그린과 송대석.
메뉴는 아이스크림과 스쿱 쿠키.
둘 다 바닐라에 아몬드와 월넛을 가미한 맛으로, 외견이 매우 흡사했다.
“겉보기에는 아이스크림이랑 쿠키가 분간이 안 가!”
“그린이는 아몬드를 좋아해? 매번 아몬드가 들어가는 것 같은데.”
“어, 내가 아니라 그게 대석이가 좋아하는 건데…….”
그 말에 아이들이 송대석과 민그린을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봤다.
‘왜 안 사귀지?’라는 의문이 담겨 있었지만, 입을 열면 송대석이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들이 눈치껏 모른 척했다.
“아직 남아 있냐.”
“응,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어제 산 간식도 있어.”
“효돈아, 여기 앉아!”
마침 은사와 통화를 마치고 온 맹효돈이 등장해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화제를 바꿨다.
김유리의 옆자리만 비어 있었는데, 맹효돈은 아직도 그녀 바로 옆에 앉는 게 서먹한지 뻘쭘해하다가 조금 떨어져 앉았다.
“지금 수학 공부 중이지? 어때, 잘 돼가?”
“효돈이는 왜 수학 과목을 선택한 거야?”
아이들의 시선이 맹효돈에게 집중됐다.
수능과 관련된 일반 교과 중 수학만을 수강 중인 맹효돈이 이상해 보이긴 했을 거다.
“중학교 때 존경하던 선생님이 수학 교사셨어. 이번 시험 때도 도와주시고 있어.”
맹효돈이 답변할 줄이야.
중간고사 때는 애들한테 밝히지 않았었는데.
맹효돈도 애들에게 마음을 많이 연 것 같았다.
“혹시 저번 스승의 날에 카네이션 사 드린 선생님이야?”
“어…….”
그 답변을 들은 김유리가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저번에 맹효돈이 꽃을 전하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고마움에 대한 표현인 것 같다.
맹효돈의 말을 듣던 권레나가 밝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마음 나도 이해해! 지금 듣고 있는 ‘음악과 이능 연구’ 과목은 이전에 권제인 선배님이 수강하셨다고 하셔서 나도 열심히 하고 싶어졌어.”
권레나는 저번 중간고사보다 열심히 공부를 했고 가채점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학대하던 부모에게 인정을 받겠다는 목표보다는 동경하던 바이올리니스트 권제인에게 가까워진다는 목표가 훨씬 와닿고, 동기 부여도 잘 되는 모양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대화를 듣고 있을 때.
툭.
황지호가 테이블 밑으로 내 무릎을 가볍게 쳤다.
갑자기 이놈이 왜 이러나 해서 봤더니 황지호가 낮게 말했다.
“다른 분신 쪽으로 적호의 보고가 들어왔다.”
“무슨 보고?”
황지호는 불쾌감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강렵이 돌아왔다.”